|
(27)
환상과 갈망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멜리데의 밤
순례길(카미노)이 비록 성 야고보의 길이라 해도 유형의 무기체일 뿐이다.
인간은 영원한 순례자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형체는 없으나 한결같이 추구하는 인간의 영적 세계가 순례자의 길이다.
그러니까 이설과 개조 등 변화무쌍한 순례길이 육체의 길이라면 순례자의 길은 애오
라지 하나뿐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 영혼의 길이다.
그럼에도 나는 성 야고보의 명성에 압도되어 순례길에 집착함으로서 지난 26일 동안
순례자의 길을 수시로 망각했던 것 아닌가.
야고보의 길의 원형을 갈망하고 성역화 하려 함으로서 늙은山나그네의 사모곡이 멀
리 이베리아 반도에도 울려퍼지기 바란다던 순례 초심마저 때때로 실종돼버렸던 것.
그 때문에 이따금 힘겹고 따분했으며 마치 팥소 없는 빵을 먹고 있는 듯 했던 것.
"백두대간에서 짜증이 나면 즉시 중지해야 합니다"
대간 댓재의 지킴이 노식의 말은 순례길에서도 유효한 충고다.
중지하지 못하겠다면 짜증의 원인부터 제거하라는.
2시간여의 폭우 속에서 진행된 순례길 8km야 말로 앞으로 걷게 될 나의 길을 순례길
에서 순례자의 길로 거듭나게 했다.
야고보 길의 환상과 터무니 없는 갈망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린 것.
백두대간 입망치~여원재(메뉴 '백두대간과 아홉정맥' 4, 5번글 참조)의 국내 사건과
대조되는 이베리아 반도의 사건이다.
오'세브레이로의 밤과는 전혀 다른 깨달음과 감동의 밤이라 그랬을까.
멜리데의 밤이 여느 밤보다 빨리 가는 듯 했다.
멜리데는 갈리시아 지방의 지리적 중심지다.
또한, 스페인의 서북부인 아스투리아스 주(Asturias/아스투리아스지방의 유일한 주)
의 주도(州都) 오비에도(Oviedo)에서 오는 '카미노 프리미티보'(Camino Primitivo/
성 야고보 길의 원형)와 현 '카미노 프랑세스'가 합류하는 지점이다.
트리아카스텔라와 사리아 처럼 13c에 알폰소 9세가 세웠으며 인구 5.000명 미만이
었던 마을이 8.000여명으로 급증할 만큼 고속 발전중이란다.
그러나, 단지 수퍼를 다녀왔을 뿐인 마을이다.
관광객들을 유혹할 만큼 유명하다는 풀포요리(pulpo/문어)는 어차피 나와 무관하며
미각과 시각을 즐겁게 하는 어떤 것도 순례자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으니까.
비에 부르터 더욱 말썽을 피우려는 발뒤꿈치를 다독이고 젖은 옷들을 다시 입었다.
대부분의 알베르게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비치되어 있으나 나는 이 기계들을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늘 손빨래를 하고 젖은 옷들은 입고 걸으면서 말린다.
이 기계들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음에도 집에서 익혀오지 않은 것이 약간 후회
되기도 했지만 체온으로 말리는 것은 이미 오래 된 습관이다.
면도기 소리에 문득 생각난 것은 내 수염과 손.발톱이 거의 자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집 떠나기 직전에 모두 다듬은 후 아직 한번도 자르지 않았으니 기적에 다름 아니며
불가사의한 일이다.
내가 묵은 숙소는 새마을을 지나서 옛마을 끝에 있으며 130명을 수용하는 갈리시아
지방정부 운영 대형 알베르게다.
프랑스 길 걷기 27일째인 오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4.5km쯤 남겨둔 몬테 도
고소까지 꼭 갈 것이다.
사실상 마지막 날의 50km 남짓인 이 구간은 750여km를 걸어온 늙은이 몸의 한계를
헤아려 보는 기회도 되겠기에 비장한 각오로 알베르게를 나섰다.
아침 7시 35분에.
15개가 넘는 미니 마을들(멜리데 ~ 살세다)
맨 먼저 마주친 것은 경내에 있는 석비.
1996년 6월 14일에 사망한 올란다(Holandes)인 순례자 Backer를 기리는 돌비다.
국내 대로들을 걸을 때 아침에 상여를 본 날은 늘 많이 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교롭게도 오늘도 그 경우에 해당되는가.
카미노에서는 새벽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무덤, 십자가와 맞닥뜨리며 걷기 부지기수
인데 이 무슨 부질없는 생각인가.
출발하자 마자 멜리데시립묘역을 통과하고 있는데.
카미노는 마을을 벗어나서 산타 마리아 데 멜리데 교회(Iglesia de Santa Maria de
Melide)와 돌기둥 십자가, 카르멘 교회(Iglesia del Carmen)를 지난다.
오크와 솔, 유칼립투스(eucalyptus)등의 숲길이 되어 산 라사로 천(arroyo de San
Lazaro) 징검다리를 건너고 라이도(Raido), 아 페록사(A Peroxa)를 통과해 보엔테
(Boente) 작은 마을의 산티아고 교회(Iglesia de Santiago)로 이어진다.
교회 안에 비치돼 있는 세요를 찍고 나왔을 때 교회 외벽시계는 아침 9시 5분이었다.
1시간 반 동안에 5.7km를 걸었다면 시속4km에 근접하므로 무난한 진도라 하겠으나
일정의 9분의 1에 불과하므로 주마가편이 불가피했다.
내리막 끝에 있는 보엔테 강(rio Boente)을 건너 오르기를 계속해 석회석 불가마가
있었다는 카스타녜다(Castaneda)도 지났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이 트리아카스텔라를 지날 때 산티아고 대성당 건축용 돌
을 자기 체력껏 카스타녜다의 가마터까지 날라왔는데 여기가 그 가마터마을이란다.
중세 때의 일인데 어찌된 까닭인지 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단다.
N-547도로를 가로지르고 목장을 지나고 한적한 포장 숲길을 오르내리다가 이소 강
(rio Iso)을 건너가면 리바디소 도 바익소(Ribadiso do Baixo)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있는 마을이다.
10명 미만의 미니 마을에 62명을 수용하는 지방 정부의 알베르게가 있다.
마을이라 하나 알베르게(순례자)를 겨냥한 3개의 바르를 제외하면 마을은 없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이소 강에는 황토물이 흐르고 있다.
비가 잦은 갈리시아 지방의 강물은 맑을 날이 드물겠다.
카미노 리바디소~ 아르수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길이다.
리바디소에서 지상터널로 N-547도로를 건너도록 함으로서 보행자의 안전을 우선시
하는 듯 하나 곧 그 도로와 함께 아르수아에 진입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도로 양편에 길게 정착한 아르수아(Arzua)는 인구7.000명안팎의 큰 마을이며 7개의
알베르게가 있는 순례자 마을이며 산티아고로 가는 카미노의 마지막 중요 마을이다.
또한, 아르수아는 우유로 만드는 치즈 끼엑소(Quiexo)로 유명한 마을이다.
매년 3월 첫 일요일에 열리는'끼엑소 축제(Fiesta de Quiexo)'라는 페스티발에서는
100.000종 이상의 치즈 제품이 전시, 판매된단다.
마을을 벗어나기 적전에 있는 교구교회인 산티아고 교회(Parroquias de Santiago)
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무어인의 처단자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 상이 있는 20c에 세운 교회다.
카미노는 햇볕을 막아줄 만큼 울창하고 싱싱한 숲길이 되어 아스 바로사스강(rio As
Barrosas)을 건너 라이도(Raido), 코르토베(Cortobe), 페레이리냐(Pereirina)등
연이은 꼬마 마을들을 지난다.
다시 터널통과, 페록사(Peroxa), 타베르나 베야(Taberna Vella), 칼사다(Calzada),
카예(Calle), 보아비스타(Boavista)등을 거치고 언덕을 넘어 N-547도로와 합류하면
도로 따라 길게 분포되어 있는 살세다(Salceda) 마을이다.
멜리데 이후 여기까지 약 25km에 15개가 넘는 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 2개 외에는 모두 미니 마을(hamlet)이다.
갈리시아 지방의 특징인가?
물이 풍부하며 300m~400m지대인데 취락이 형성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들의 순례 여정은 순교길에 버금갔다
<순례자 기예르모 와트(Guillermo Watt)
1993년 8월 25일,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하루 앞두고 69세에 하느님 품에 안기다>
열망하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겨우 29km 남았을 뿐인데.
이 70노인의 사망은 그동안 보아온 어느 사망자 보다 더 애석한 일이다.
해 안에 가야 할 길이 아직 23km나 남아 있는데도 무거운 걸음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라스(Ras)를 지날 때 만난 우리 자동차(기아)에 가라앉은 기분이 전환되는 듯 했다.
이 땅에 와있는 우리 제품들은(자동차, 냉장고 불문) 늘 나를 고무시키고 있다.
그러나 앞 사망자비에서 2km도 채되지 않는 곳, 산티아고를 27km도 못남긴 브레아
(Brea)에서 또 한 사람 사망 순례자의 비와 마주쳤다.
<보행 순례자 마리아노 산체스-코비사 카로(Mariano Sanchez.Covisa Carro)
1993년 9월 24일 여기에서 사망하다>
1993년 8월과 9월 한달 사이에, 겨우 2km 어간에서, 오매불망으로 그리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목전에 두고 둘이나 사망했다.
겨울이 아니었으며 여름철이라 해도 하늘을 가리는 울창한 숲 지역이므로 추위 또는
더위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과 18년 전의 일이다.
강산을 두번이나 바꿔놓을 세월이며 순례자들을 위한 외적 환경은 오늘날에 비해서
열악했겠지만 내적 정서는 오히려 더 중세에 가까웠으며 순수했을 것이다.
숫적으로는 폭발적 증가 현상인 이즈음과 달리 순례자 수는 적지만 그 때의 그들은
오늘의 순례자들처럼 영악한 것을 지혜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고난은 물론 죽음까지도 '그 분'의 섭리로 믿고 묵묵히 감수하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신앙을 순례자의 금과옥조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 또는 전염병에 걸렸다 해도 걸음을 멈추지 않아 변을 당했을 것이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용서의 문'은 체력의 한계에 봉착하거나 지병 또는 전염
병으로 고생하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계속한 그들의 순례 여정은 순교길에 버금갔다.
참으로 우직한 순례자들이었다.
오늘날의 변질된 날라리 순례자, 사이비 순례자들과는 격은 물론 본질이 다른 순도
100%의 순례자들이었다.
내가 사망한 순례자들의 십자가와 비(碑) 앞에서 엄숙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억수를 맞으면서도 고마운 하늘
브레아에서는 두 길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아무리 갈 길이 멀다 해도 숲길을 두고
도로를 따라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유칼립투스 숲속 오솔길을 걷고 산타 이레네 언덕(alto)을 넘고 터널을 지나서 산타
이레네(Santa Irene) 마을에 도착했다.
앞 뒤 아무 데도 한국인은 띄지 않고 오후에는 간혹 만나던 외국인도 끊기고 어쩌다
자전거 팀이 스치고 갈 뿐이었다.
진행하는 길가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스탬프를 찍어주던 직원은 방명록에 적힌 내 나이에 기겁하며 몬테 도 고소까지 갈
계획을 수정하라고 권했다.
마침 들어온 스페인 중년남도 직원편을 들며 생 장에서 며칠째냐고 물어왔다.
27일이라는 대답에 그는 두 엄지를 치켜 올리며 조금 전의 자기 주장을 번복했다.
능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오후 3시를 막 넘은 때였으므로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루아(Rua)를 지나 숲속의 걸음을 다그치는 중인데 맞은 편에서 오던 두 스페인녀가
내게 길을 물어왔다.
길을 묻고 대답할 정도는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내 대답에 그네는 밀 그랴샤스를 연발하며 갔으니까.
외국어 연마의 왕도는 미쳐야 한다는 것.
카미노에서도 Mp3의 스페인어 회화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귀에 익히고 다니는 것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니까.
길고 긴 유칼립투스 숲길이 끝나고 시야가 확보되나 싶었을 때 돌연 벽력과 함께 먹
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1시간쯤 이른 시각인 것이 다를 뿐 어제 오후가 재연되는 중이었다.
판초와 우산을 꺼내고 배낭을 단속한 후 빗속을 걸을 때는 초저녁처럼 껌껌했다.
살짝 비켜 있는 오 페드로우소/아르카 도 피노(O Pedrouzo/Arca do Pino)에 들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다시 유칼립투스 숲과 농로를 걸어 산 안톤(San Anton), 아메날(Amenal)을 지났고
시마데빌라(Cimadevila)를 거쳐 오르는 길은 이미 세찬 물길이었다.
어제에 이어 샌들의 편의성이 입증되는 중이었으나 머리 위에서 번쩍대는 벼락과
우레는 오르막인데도 스틱을 짚지 못랄 만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감전의 공포로 인해 금속부분을 피해 손잡이 천을 잡고 끌고 가게 할 만큼.
그러나 억수를 쏟아붓고 공포를 안겨주는 하늘인데도 한편으로는 고맙기만 했다.
프랑스 길은 비가 잦기로 소문나 있으며 우기인 봄철인데도 비에 흠뻑 젖기는 악명
높은 갈리시아 지방 4일중 2일을 포함해 총 27일중 4일에 불과했으니까.
나흘간 맞은 비도 하루에 2시간 남짓 뿐이었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나는 전국의 적잖은 이웃들에게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로 각이되어 있다.
오죽했으면 가뭄이 심할 때는 나를 초청하면 된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이베리아 반도가 예외일 리 없다 해서, 9일 동안 줄곧 빗길을 걸었다는 어느 외국인
순례자의 고생담을 상기하며 비에 대한 대비를 가장 철저히 했다.
그럼에도 800km프랑스 길 이후에는 1.200km 이상을 걷는 40여일 동안에 비에 젖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50km 기록을 수립하다(50km per day)
카미노는 2km쯤을 에둘러 산티아고 공항을 향해 내려가고, 활주로 끝에서 활주로를
따라 진행해 공항을 벗어나며 산 파이오(San Paio) 작은 마을을 통과한다.
빗속을 뚫고 솟아오르는 여객기가 눈에서 사라지고 비에 젖은 구름을 흔드는 굉음이
잠시 향수를 불러오는 듯 했다.
레온을 지날 때도 그랬듯이 특히 비내리는 날의 비행기와 열차는 나그네를 심란하게
하기 일쑤다.
오르내리는 숲길을 지나 라바코야(Labacolla) 마을에 도착할 무렵에 비가 그쳤다.
놀랍게도 어제처럼 2시간의 광란이었다.
라바코야는 지금은 산티아고 공항마을로 더 알려졌으며 순례자보다 일반 여행자와
관광객에게 맞춰진 마을이란다.
그러나 12c에 프랑스인 수도사 에메릭 피고(Aymeric Picaud)가 쓴 순례자 가이드
코덱스 칼릭스티누스(Codex Calixtinus)는 라바코야를 '라바멘툴라'(Lavamentula)
라 했는데 이는 '은밀한 곳을 씻는다'는 뜻이란다.
그는 '잔돌투성이'라는 뜻의 'lavacolla'를 '생식기를 씻는다'는 뜻인 'lava colea'로
잘못 이해했다는 것.
아무튼 중세의 순례자들에게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입성하기 전에 여기 라바
코야 강에서 자신의 온몸을 씻는 관습이 있었단다.
현대와 달리 샤워시설이 없던 당시에는 씻지 못한채 장거리를 오래 걸어왔기 때문에
마지막 강인 이 강물에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같은 현실적 이유 외에도 성 야고보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정결
하게 한다는 의식이었을 수도.
베나발 교회(Iglesia de Venaval/Parroquial) 앞에서 한 중년남이 말을 걸어왔다.
영국산(産)이라는 이 사람은 라바코야 강까지 내려가는 잠시 동안에 알고 싶은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내게는 물을 기회를 주지 않고 자기 물음만 계속했다.
체력이 대답할 기운도 없을 만큼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늙은이 사정은 모르쇠 하고.
자력으로 걷는다기 보다 관성에 의해 걸어지고 있는 내게는 비야마이오르(Villamai
or) 완만한 고갯길이 프랑스 길에서 최고의 된비알이었다.
내가 지쳐보였는지 자전거 순례자들이 '아니모'(힘내세요)를 외치며 지나갔다.
누군가 이정표에 낙서한 작은 글씨 ANIMO가 이 때만은 큰 격려로 다가왔다.
돌기둥 이정표에 1자리수로 나타난지 오래인 듯 한데도 고소산은 어데 있는가.
달리는 차를 세우고 물었을 때 운(un/1)km라 했다가 도스(dos/2)km라고 고쳐 대답
한지도 꽤 되었건만.
갈리시아 TV방송국, 널따란 캠핑장, 산 마르코스(San Marcos)를 지나 마침내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에 올라섰다.
77살 늙은이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50km 장거리 기록을 수립하는 순간이었다.
멜리데를 떠난지 12시간 25분 만인 2011년 4월 30일(토요일) 오후 8시에.
잠시도 앉아보지 않았으며 시간을 아끼느라 걸으면서 빵(점심)을 먹었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라지만 내게 그럴 기회가 다시 오겠는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