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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고향을 찾는 시 - 도리천 시조의 소박한 지향
장성진 (창원대학교 국문학과)
1.
시조가 가지는 시로서의 여러 가지 특성 중 하나는 단순명료함 또는 소박함이다.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 점은 고시조가 형성될 때부터 마련된 하나의 유전인자이다. 짧은 형식과 간결한 구조 같은 것도 이와 유관하다. 이렇게 설명해 보면 어떨까? 시라는 것이 우주를 내다보는 창이거나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라고 할 때, 그 창이나 거울의 크기와 거기에 비쳐 보이는 대상의 범위는 반비례한다. 창이 작을수록 얼굴을 가까이 대기 때문에 보이는 범위는 넓어지며, 반대로 창이 클수록 멀찍이서 보기 때문에 보이는 범위는 좁아진다.
시조의 매력도 그러하여, 단순한 제재를 통하여 넓고 깊은 세계를 추구해왔다. 현대시조라고 해서 이러한 기초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턱없이 길어진 형식 속에 할 말을 다하고 보면 “왜 자유시로 쓰지 않고 구차스럽게 몇 가지 제약만 가진 채 시조라고 내세울까?”하는 의혹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누구는 소위 자유시인이니까 자유시만 쓴다든지, 누구는 소위 시조시인이니까 시조만 쓴다든지 하는 고집을 내세우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그들만의 편가름이지 독자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독자들은 어떤 제재나 톤이 자유시로서 또는 시조로서 더 효과적이냐에 관심이 있다. 간명함이 일반적으로 시조에 더 적합하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간명함이 시조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를 시답게 하는 많은 요소 중 이미 장르 관습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져 있고, 묵시적으로 요구되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 명제 곧 시조는 정형시라는 장르적 존재 의의의 일부이다.
도리천은 승려 시인이다. 굳이 자유시와 시조로 나누라고 한다면 시조시인이다. 그런데 시집 또는 문예지에 곁들인 사진을 보거나 약력란을 보는 경우가 아니고는 그에게 ‘승려’라는 한정어는 거의 무의미하다. 그저 시인이다. 그만큼 시 속에서 신분이나 사상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에 관심이 많은 일부 시인들보다 오히려 덜 ‘승려적’이다. 그리고 그의 시는 매우 간명하다. 앞서 시조의 간명성에 대해 다소 길게 말한 이유도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2.
도리천 시조 전반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은 대상 지향이다. 달리 말하여 제재 편향이라고 해도 좋겠다. 시가 제재를 통해서 짜임새도 이루어지고 주제도 설정된다는 점에서 제재가 중요한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제재가 주제를 향해 변용되지 않고 오히려 시가 제재를 보여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여긴다면 문제이다. 특히 시조는 장르적 성격상 서정성을 생명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제재가 시적화자에 의해 재편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지 못한다면 서정성을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제재의 종류뿐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 관계에 유의해 살펴 보아야 한다.
그의 시조를 관류하는 대표적 제재는 고향이다. 그것은 그가 줄곧 <고향 가는 길에서>라는 연작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는 같은 제목의 시를 문예지에 연속적으로 발표하여 후속 시집을 간행할 때는 곧잘 한 작품군으로 별도의 영역을 설정하곤 한다. 가령 최근에 간행된 《일편단시 쌍지매(2009년)》에서 제 6부에 60편을 게재하였으며, 《비비새 연가(2010년)》에서는 제 5부에 40편, 제 6부에 50편을 게재하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고향이라는 것이 집중적으로 설정된 제재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쩍새> 연작시 같은 데서도 고향은 중요한 제재로 나타나 있어서 관심이 유지된다.
잠시 눈을 돌려 ‘귀향’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인간에게 ‘고향’이란 여러 층위의 은유로서 문학의 가장 일반적 제재에 참여한다. 동아시아 시에서 귀향의 대표적 정전은 중국 남북조 시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도연명에게 시인으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게 하였고, 시대를 이어가면서 수많은 화답시가 줄지어 나오게 했던 귀거래사는 실제로 아주 소박하다. 귀향을 결심하고 금방 실행하는 태도, 고향에 이르는 간단한 노정, 옛집에 도착하여 아이의 손을 잡고 뜰을 살피는 광경, 술동이를 당기고 친척과 마주하는 정겨움, 주변 산천 탐방, 인생의 늙어감에 대한 상념 이런 것들이 순차적으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시조에서 귀향 또는 망향은 하나의 주제 영역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아마 시조의 주요 작자층이 양반 계층이고, 이들의 출향은 거의 관직 생활 과정이기에 고향 생각이 간절하지 않고, 물러났을 때는 전원에 한거하기 때문에 고향을 그리워할 계기가 적었던 데 기인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귀향 또는 망향 주제는 강호가도 내지 한거전원이라는 주제에 포괄되어 버렸다고 하겠다. 굳이 찾는다면 조선 초기 이현보의 <효빈가>와 그를 잇는 몇몇 작품에서 명맥을 볼 수 있다.
귀거래 귀거래 말뿐이요 갈 이 없어
전원이 장무하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효빈(效?)’이라는 아주 겸손한 제목이 붙은 것부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화답한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고시조와는 달리 현대시조에 이르면 구향 또는 망향이라는 주제는 중심권으로 부상되어 큰 의미를 가진다. 이는 근대 이후 산업사회에서의 삶이 공간적 이동을 겪으면서 이루어지고, 신분제의 폐지로 작가가 폭넓은 시민에 편입됨으로써 문학이 현실을 수용한 결과로서 당연하다. 따라서 어느 작가에게서 귀향 또는 망향이라는 주제가 발견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집중성, 거기에 보이는 정신적 지향이 중요하다.
2.1.
도리천 시조의 공간 세계로서의 고향은 특화되지 않은 시골 마을로서 “고향”이라는 용어가 장식 없이 자주 쓰인다. 이 점은 고향을 주제에 따라 상당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하며, 동시에 특정 종교나 사상을 전제한 추상화를 차단한다.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은 호오(好惡), 미추(美醜), 현실과 상상 등 상반된 지향의 공간으로 설정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리적 또는 지형적 상황을 전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추상화를 차단한다는 말은 특히 그가 승려라는 점과 관련된다. 불교적 관념 아래서 고향은 지나치게 확대 해석될 수 있다. 가령 예토에 대한 정토라든지, 현세에 대한 전세 또는 미래세의 우주라든지, 얽매임 없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지레 예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향산에 산새 날면 고향집에 손님 오실까”, “올봄에 꽃이 피면 고향에 가야 하리”, “바위도 고향 바위는 나이 들어 인물 나네”, “어머니가 일궈놓은 산골짜기 봄논에서”, “천하명당 우리 고향 궁터 같은 우리 마을”, “내 고향 작은 마을 태산이 품고 있네”, “산골마을 내 고향은 깊은 산골 산에 있네” 이런 구절은 많은 데서 발췌한 것이 아니다. 그의 최근 시집 《비비새 연가》의 제 5부에 실린 시조 작품 첫째 수에서 일곱째 수까지의 초장을 차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요령이 보이지 않는다. “고향”이라는 말이 앞뒤로 ‘산’, ‘집’, ‘마을’ ‘산골’ 같은 친족 용어들만 달고 있지 무엇으로도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왜 이랬을까? 이 초장만으로 당장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그저 편하게 설정하였거나 모든 이의 모든 고향으로 개방하려는 의도가 지나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차피 정형시의 구조상 중장 이후를 기다려 봐야 할 일이다.
고향산에 산새 날면 고향집에 손님 오실까
쓸쓸한 고향집에 손님 오면 좋을 텐데
산새가 매일 날았어도 새 손님 새 소식은 없었네
앞서 첫 번째로 초장을 예로 든 작품의 전체는 이러하다. 끝내 고향은 구체화하지 않으며, 초장에서 제시한 ‘고향’, ‘새’, ‘손님’이 중장을 거쳐 종장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면서 화자의 정서적 지향 이른바 ‘서정적 거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평면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실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의 시 여러 편에서 고향의 친족 시어들을 더 살펴 보아야 하겠다. (별도 표시를 않은 작품은 모두 <고향가는 길에서> 연작시에서 따왔다.)
2.2.
공간과 떨어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가 시간이다. 이것은 문학 작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 그러하다. 여러 학문에서 설명의 편의를 위해 공간과 시간을 분리해서 다루지만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 또는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가령 존재의 총칭으로서 ‘우주’를 상정할 때, 공간의 총체로서 ‘우(宇)’와 시간적 총체로서의 ‘주(宙)’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으로서의 고향은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 의미를 가진다.
도리천 시조의 시간은 몇 가지 뚜렷한 영역을 가진다.
첫째는 유년의 시간이다. 이는 한 인간의 삶으로서는 원초의 시간이다. “나 유년 때 시골에서 쑥 먹고 쑥쑥 자라”, “나 유년에 서당에서 천자문 공부할 때”, “어릴 때 고향에서 늘 보았던 별 하나가”, “일찌기 고향 떠나 타향에 살으면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유년은 ‘나’의 시간이다. 이 유년의 시간에 나는 자라고, 공부하고, 별을 보고, 고향에 있던 시기이다. 행복한 삶 내지 불행이 다가오기 전의 상태이다.
둘째, 전생의 시간이다. 여기서 전생이란 이 세상에 살아 있었을 때의 시간이란 뜻이니, 자연히 지금은 세상을 떠난 존재와 연관된다. 그 주체가 ‘나’라면 전생은 분명히 불교적 윤회관 속에서의 시간이다. ‘그’라고 해도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도리천의 시조에서 전생은 불교적 전생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전생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에게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도 한정적으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화자인 ‘나’에 대해 대상인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전생이란 단지 ‘그’와 ‘나’가 함께 이 세상에 있던 시간이다. 부연하면 나의 유년이자 그의 전생인 셈이다. “저승 간 우리 어머니 저 논을 어찌 잊을까”, “일평생 산머루처럼 맑게 사신 어머니”, “어머니 생전 육성으로 소쩍 울음 들려왔네”, “어머니 임종시에 사자가 왔다더니”, “사후에 혼이 산꽃 되어 산에 가득 피어났네”와 같이 그의 시에 전생이란 시간은 그 주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던 때로 쓰이면서 시간의 주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공간으로서의 고향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하며, 변화도 못 한 채 밋밋한 평면을 이루는 것은 이 시간의 바탕으로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달라지거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시간 변화가 주도하였지 공간으로서의 고향이 주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이끌어가는 행위 곧 “고향 가는 길”이란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찾아가고 있다는 은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2.3.
이처럼 그의 시가 고향이라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의 시간을 찾아가는 여로임을 안다면 그것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 내지 의미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는 앞의 시간을 제시할 때 이미 충분히 내비쳤다. 두 가지 시간 곧 나의 유년과 그의 생전이 실제로는 같은 것이며, ‘그’가 곧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리천 시조의 대상은 어머니로 구체화한다.
앞서 도리천 시조는 대상 지향성이 강하다고 하였다. 대상 지향성이 강할수록 서정성을 획득하는 데 거리가 생긴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 문제를 한꺼번에 이해시켜 주는 점이 바로 그 대상의 자리에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대신하거나 나의 원형이 곧 어머니인 것이다. “향산에 핀 산꽃들은 우리 어머니 혼꽃이네”, “산마을 어머니는 흙에 살다 흙에 묻혔네”, “하늘 가신 우리 어머니 고향에 온 나 알으시고”, “어머니 살으셨던 집 지붕 위에 박꽃 폈네”, “어머니 묘소에 온통 도라지꽃 피어 있네”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제재가 어머니 때문에 자리를 정하고 어머니에게로 귀결된다.
어머니란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은유이자 상징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워낙 여러 시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유형으로 살펴볼 수는 있다.
첫째, 원형으로서의 어머니이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유년의 기억으로 자주 나타나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토끼와 입맞추다 태를 받아 나 낳았네”, “아마도 우리 어머니는 전생에 소쩍새였네(소쩍새 13)” 같은 데서 보이는 토템의 그림자는 나를 지나 어머니 개체를 지나 그 원형에 닿아 있다.
둘째, 세계로서의 어머니이다. 이는 나를 둘러싸고 있어서 생존의 근거지를 마련해 주는 어머니이니, 공간으로서 고향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며, 물론 시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 일궈놓은 산골짜기 봄논에서”, “천상의 우리 어머니 나에게 주신 눈물의 비”, “산새 알 품어주듯이 나 따뜻이 품어주었네” 같은 구절들은 그러한 예이다.
셋째, 염원으로서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나의 염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나를 위해 무엇을 염원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여기서 어머니는 전세의 어머니이면서 남겨둔 사물의 의미로, 지상으로 되살아온 자연의 존재로 형상화된다.
이와 같이 도리천의 시조에서 공간으로서의 고향은 매우 단순하게 나타나면서도 그것이 시간의 변화를 수용하는 바탕으로 자리잡고, 시간은 다시 어머니라는 존재의 구체적 형상과 행동의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공간, 시간, 그 속에서의 주체로 결합되어 한 세계를 이룬다.
3.
그렇다면 도리천 시조의 이러한 시공간과 주체 설정은 하나의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소의 주관과 의미 부여 과정을 수용하면서 몇몇 작품에 대표성을 부여하고 논의를 전개해야겠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어느 누가 우리 어머니 이 산골에 심었을까
일평생 콩팥 심어 가꾸다 콩팥 기증하고 운명했네
이 시에서 ‘이 산골’이라는 공간과 ‘일평생’이라는 시간의 틀 속에서 어머니의 원형성이 웅변적으로 드러난다. 어머니는 누군가에 의해서, 달리 말하면 그 누구라고 정의할 수 없는 근원적 존재에 의해 심어진 씨앗이다. 동시에 콩팥을 심고 가꾼 창조자이다. 그리고 콩팥을 기증함으로써 시간의 단층을 넘어 생존하는 영원한 존재이기도 하다.
좀처럼 기교를 부리지 않는 이 작가가 이 작품에서는 아주 성공적인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콩팥”의 활용이 그것이다. 심어서 가꾼 콩팥과 기증하고 운명한 콩팥은 분명히 서로 다른 콩팥이다. 얼핏 보아 동음의 단어를 이용한 언어유희 같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초장의 콩과 팥은 식물이면서 이미 준엄한 질서의 상관물이다. 종장의 첫 번째 콩팥은 한 사람의 일생에 값하는 소중한 음식 곧 가족의 삶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콩팥은 육신이다. 이 각각의 콩팥이 단순히 소리만 같은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한 가치로 인해 어머니를 원형이자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여기서 어머니는 어디까지 확대 해석될 수 있는 존재일까?
다음 작품을 보자.
산골에서 흙에 살다 흙에 묻힌 어머니는
산골 고향 못 잊어 몸은 고향흙 되었는데
그 혼은 두견새 되어 고향 밤을 새워 우네
공간으로서 ‘산골’, ‘고향’, ‘흙’ 등 친족 어휘가 지나칠 정도로 자주 쓰였고, 시간은 ‘묻힌’의 긴 단위 세월과 ‘밤을 새워’의 짧은 단위 시간이 쓰였다. 이 속에서 어머니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변형되어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흙이 되어 이전 흙에 보태져 세상을 확대시켰으며, 새라는 생명이 되어 모습 뿐 아니라 소리로까지 인간에게 다가왔으니 이 또한 세계의 확대이다. 결국은 비교적 자유로운 변화를 통해 이 우주에 편만한 생명력을 준다는 의미이다. 응신과 생명력은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을까
다시 한 작품을 보자.
달이 되고 싶다셨던 어머니는 달이 되고
달맞이꽃 되고 싶었던 난 아직 꽃이 못 되었네
오늘밤 어머닌 달로 떴지만 난 몸채로 달을 보네
달이나 달맞이꽃 같은 소재를 통해 향토적 분위기는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 공간은 간접적으로만 드러난다. 시간 역시 어머니의 변신을 통해 생전과 사후를 내보이지만 아주 은미하게 제시되었다. 그만큼 어머니와 달, 나와 꽃 그리고 이 두 그룹의 관계가 확대되어 있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도 탄탄하여 완결미가 잘 보인다. 초장에서 유년의 시간 (어머니로 보면 생전의 시간)에 가졌던 꿈은 세계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중장에서도 역시 유년에 꿈을 가졌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공간은 닫혀있다. 종장에서 이 둘이 함께 존재하지만 합일을 이루지는 못하는 상황을 그렸다. 우주적 공간에서 달이란 지상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의 표준이자 꿈이다. 밝으면서도 불변하는 존재이다. 매일 조금씩 모양이 달라지지만 영원토록 추호도 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어둠 속으로 빛을 쏟아내지만 그 밝기가 감소하지 않는다. 하나이면서 모든 강에 그 모습을 비추고, 늘 서쪽으로 가면서도 동쪽에서 다시 돋아 그 자리에 있다. 그런 달이 어머니이다. 이에 비해 지상의 존재인 나는 달맞이꽃이 되고 싶었다. 달을 기다려서 피고, 피면 달이 떠오르는 꽃, 그리하여 마침내 달에게로 가서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가 되고 싶은 꿈, 그것은 달을 어머니라 부름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아직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 달맞이꽃이 되지 못했다. 몸채로 달을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가지 못하고, 달도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한다. 그래서 어머니도 차마 영원히 서방으로 가지 못하고 매일 달로 뜨고 있다. 이 달과 달맞이꽃은 무엇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까?
4.
위의 세 작품에서 제기한 설의를 묶어서 검토해 보면 좋겠다. 그 확대되는 자리에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불교적 사유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작품에서 본 어머니상은 내어줌으로써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이다. 곡식인 콩팥을 심어서 자식을 먹이고 육신의 콩팥을 내어주어 남을 살리는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이자 사람의 어머니, 한걸음 나아가면 중생의 어머니 곧 관세음보살이다. 이 보살은 불교적 지식에 근거하여 설명되는 여러 종류의 관세음이나 그 응신이 아니라도 좋다. 원효의 말씀처럼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자기 마음 속의 생각을 담아 한숨 삼아 내뱉는 “관세음보살!”이면 된다. 불교와 무관한 사람이 다가가는 불교적 세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 작품에서 보이는 변화도 의미가 있다. 육신은 죽어서 흙이 되고 혼은 날아가 두견새가 되었다는 표현은 역시 자식으로서의 화자를 포함한 사람을 위한 내어주기이다. 사람의 죽음을 두고 영육의 분리로, 또 그것이 땅과 하늘로 돌아간다는 해석은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농토로 생성되고 두견새로 환생하여 인간의 육신과 혼을 일깨운다는 생각은 훨씬 불교적이다. 사신공양이라고 하면 견강부회일까?
셋째 작품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하늘의 달을 받은 달맞이꽃이 되어 달을 따라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간다. 유년에 나에게 절대자였던 어머니, 달맞이꽃에게 절대자인 달, 성장한 나에게 또 다른 절대자인 그 무엇,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무엇’의 자리에 종교적 대상이 올 만하다. 그런데 그 절대자와 나는 서로 바라보기만 하면서 결합이 이루어지기를 서로 간절히 염원한다. 이 염원의 확대는 보살 이미지로 간다.
도리천의 시조는 워낙 간결하고 단순한 제재와 구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세계를 지나쳐 보기 쉽다. 더구나 유사한 작품을 양산하기 때문에 개별 작품에 오래 주의를 기울이기도 어렵다. 이러한 장치와 창작 방식은 작가가 의도하고 계획할 문제이며, 그 효과 또한 개인이 판단할 문제이다. 다만 그 속에서 꼼꼼하게 대표작을 가려내고 깊이 있게 읽는 노력은 독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은밀하게 갈무려 둔 불교적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평론- 고향을 찾는 시-도리천 시조의 소박한 지향/ 장성진|작성자 지엔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