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1700원, 짬뽕 1800원, 비빔냉면 2700원.
처음 봤다. 정말 쌌다. 서울시내 한복판에 '1700원짜리 짜장면 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서울역에서 남영동으로 가는 길 위의 간판 없는 한 식당. 4일 낮 12시, 이 식당은 붐볐다. 허기진 사람들의 전투적 젓가락질.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 다른 소리는 생략된 채, 유난히 짜장면 젓가락질 소리가 크게 귓전을 울렸다.
오늘 소개할 무명씨 이야기 네 번째 주인공은 다섯 명의 서울역 청년노숙인이다. 태헌(30) 씨, 민수(28) 씨, 국력(28) 씨, 동현(29) 씨, 상철(39) 씨. 모두 2030 청년세대다. 이들은 왜 거리에서 노숙하게 됐을까.
이름 없는 식당에서 1700원짜리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운 우리들은 지하철 4호선 서울역 12번 출구를 통해 길 건너편 '거리상담소-아웃리치'까지 걸어갔다. 뒷모습은 모두 평범한 청년 그대로였다. 말투나 손놀림, 장난치는 모습은 여느 2030대 청년과 다를 바 없었다. 긴 발톱에 슬리퍼를 끌고 있던 상철씨를 빼면 나머지는 언뜻 보기에 노숙청년들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짜장면집에서 처음 봤을 때, 기자는 그들이 '다시서기센터' 활동가들인 줄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긴 노숙의 터널
얼마 전 <서울신문>이 청년노숙이 늘고 있다는 보도를 하긴 했지만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웹에 담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은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옮겨보려고 한다.
상철 씨는 경기도 파주가 고향이다. 어머니가 새아버지와 살림을 차린 뒤로 집을 나왔다. 그게 8살 때였다. 그 뒤로 31년째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99년엔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결혼도 했다. 2000년 아들 녀석도 얻었다. 그러나 상철 씨는 '한탕' 때문에 경마와 노름에서 손을 떼기 어려웠다. 이대로 살다간 가족이 파산할 것 같아 모든 빚을 떠안고 상철 씨가 집을 나섰다. 카드빚 4500만 원. 놀음만 하지 않게 된다면 금새 갚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쉽지 않다. 포커에 손을 댄 게 비운의 출발이었다고 그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태헌 씨는 1년 전부터 서울역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태헌 씨는 노숙하기 전에 주로 일용직 잡부로 일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이라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가 태헌 씨 몫으로 나오는 정부보조금을 중간에서 가져가버려 일하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다. 최근엔 건강도 많이 안 좋아져 일하기 어렵다. 좀체 말이 없는 태헌 씨는 사람들이 노숙한다고 해서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만 했다.
민수 씨는 작년 8월부터 노숙을 하게 됐다. 전남 벌교가 고향인 민수 씨의 사연은 기구하다. 아내와 함께 안산에 살다 가정불화로 집을 나섰다. 인천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면서 걷다보니 서울 역삼동까지 걷게 됐단다. 하루 종일 걷다보니 너무 피곤해 잠시 벤치에 누워 잠을 잤는데, 그게 노숙의 시작이 됐다.
"일어나보니 지갑만 누가 쏙 빼갔어요. 돈 한 푼 없는 개털이 됐고, 너무 막막했어요. 신분증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급하게 어디 일할 곳도 마련하기 어려웠어요. 12일간 거의 굶고 지냈는데, 어떤 아저씨가 '다시서기 센터'를 알려줬어요. 그 뒤로 좀 살게 됐지요."
그는 일이 잘 안 풀려 여행 삼아 거리로 나섰다가 노숙인이 된 경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거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 이렇게 우습게 시작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다. 누구나 우연히 상황에 몰려 우발적으로 노숙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국력 씨는 2002년 사기사건에 연루돼 교도소에 다녀왔다. 출소 뒤 다시 시작하려고 채비했지만 주변 친구들로부터 돈을 떼이는 일을 연거푸 겪었다. 다시는, 친구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성남에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온 첫날, 피곤에 겨워 용산역 의자에 앉아 잠깐 졸았는데 지갑을 홀랑 잃어버렸다.
몇십만 원의 돈이 있었는데 모두 날아갔다. 신분증도 잃어버려 아득 그 자체였다고 했다. 신분증이 없으니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고, 결국 영등포 등지를 전전하다 이렇게 됐다며 멋쩍게 웃었다.
동현 씨는 부모님께 기대 살다 집을 나서게 됐다고 했다. 용돈이 부족해 신용대출을 받아 돈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졌다고 했다. 갚을 능력도 없는 처지에 이자가 이자를 낳으면서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났고 결국 감당할 수 없어 길을 나섰다고 했다.
"무서워서 도망친 거예요. 신용대출업자들은 정말 무서웠어요. 아마도 부모님은 저 때문에 고생하시겠지만 겁이 나 견딜 수 없었어요. 집으로 가면 기꺼이 받아주실 분들이고, 제가 가출해서 무척이나 가슴아파하실 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선 제 고민이 끝나기 전까지는 집으로 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31년 노숙의 달인, 상철씨 이야기
동현 씨의 말이 끝나기 전에 상철 씨가 끼어들었다. 31년 노숙생활에 할 말도 많았다. 전두환 정권부터 노숙을 시작했다고 말했으니, 상철 씨야말로 '노숙의 달인'인 셈이다.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혼자서는 너무 힘들어요. 장인장모가 도와주긴 했지만 부모나 주변의 도움 없이, 공부까지 짧은 저로서는 정말 세상살이가 너무 어려웠어요. 노숙을 천직으로 여기면서 살게 된 것도 그냥 이게 편하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많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포기하게 되거든요. 이 바닥이 누군들 좋겠습니까. 쪽방이라도 얻어 살 수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살고 있지요."
상철 씨의 학력은 초등학교 2학년 중퇴다. 축구를 해보려고 좀 더 다녔지만 4학년까지 다닌 게 고작이다. 공부가 짧아 군대도 면제됐다. 사실상 거리에서 모든 걸 해결했기 때문에 사회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상철 씨는 최근 공부재미에 푹 빠졌다. 독서도 열심히 한다.
'인문학 강좌'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았는데, 요즘엔 공부를 하다보니 왜 살아야 하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생각하게 됐단다. 가끔 떠오르는 '도박의 잔영'만 없다면, 이 '노름병'만 없어진다면, 자신도 일반사람처럼 살게 될 거라고 자부했다.
국력 씨도 학력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14살 때부터 구두공장, 섬유공장 등에서 일했고, 최근까지는 중국집에서 배달사원으로 일했다. 틈틈이 열쇠 만드는 기술도 배웠고, 중국집에서 일할 때는 창업을 꿈꾸며 음식 만드는 일도 배웠다. 그렇지만 일을 얻을 때는 번번이 학력 때문에 미끄러져야 하는 슬픔을 겪었다.
"제가 중학교 중퇴했어요. 하다못해 신문배달을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사실 고등학교 나왔다고 해서 저보다 신문배달 잘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래도 보급소에서는 고졸자를 원해요. 사회적 불구지요. 우리나라는 학벌을 너무 중시하는 사회여서 저처럼 못 배운 사람들이 일자리 잡기 참 어려워요."
민수 씨는 "노숙인도 다 같이 이 땅에서 숨 쉬고 사는 사람들인데 차별받을 때는 울컥하게 된다"고 말했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에서 소개 받은 일터에서도 차별 당하기 일쑤여서 곧 싸우고 나올 때가 많다고 했다.
"누군들 노숙하고 싶어 하겠어요? 그런데 모여서 수근거려요. 저 사람, 서울역에서 노숙하다 왔대, 조심해. 이런 말을 귀동냥으로 듣다보면 무진장 기분 나쁘거든요."
의식주만 확실히 해결된다면 일자리도 쉽게 얻을 수 있고, 돈도 잘 모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민수 씨는 말했다. 현재로서는 의식주 해결이 쉽지 않지만, 이것만 누군가 도와준다면 곧 자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민수 씨가 지금까지 일하면서 받았던 최고의 월급은 98만 원. 중국집에서 일했던 국력 씨는 230만 원까지 받아봤다. 지금도 다시 일터로 나가면 180만 원까지는 받을 수 있지만, 관절염과 허리디스크 때문에 팍팍 일할 수 없는 처지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일을 겪어 그런지 건강이 썩 좋은 편이 아닌 게다.
다섯 청년의 얘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답답해졌다. 조그만 언덕이라도 비빌 데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현실적 차이를 절감했다. 빈곤의 대물림도 뼈저리게 느껴졌다. 사회가 이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결국 벼랑으로 내미는 게 아닐까 생각됐다.
19200원. 점심값을 지불하고서야 서른아홉 인생 처음으로 홀로 사는 삶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 가슴으로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