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詩를 찾아서
고성만(시인)
1. 워크숍에 들어가며
‘현대시의 운율,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2008년 5월24~25일(1박 2일) 공주 계룡산 동학사 계룡산장에서 워크숍이 열렸다.
나는 광주에서 5월 24일 오전 10시에 출발했다. 생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산장 일대를 돌아보는데 고미숙 시인을 만났다. 호남지역 전체 참가자가 모인 것이다. 우리들은 동학사 올라가는 입구에서 동동주와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동학사는 이십여 년 전 왔던 곳이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고, 내 곁에는 이름이 예쁜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와 함께 버스 종점에서 내려 계룡산 동학사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났다. 워커 신은 나의 뒤를 하이힐을 신고 힘겹게 따라오던 그녀의 말에 따르면‘은선폭포’라 불리우는 아담한 볼거리가 있는데, 지금은 가물어서 볼 수 없을 거라 했다. 동학사까지 갔다가 뒤돌아 내려왔다. 그곳에 다시 온 것이다.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나와 그녀 비슷한 연인들이 지나갈 뿐.
창틈으로 통하는 어린 눈동자에서 흰 살이 울었다.
새순을 도려내는 수술실에서
울컥울컥 쏟아내는 핏덩어리
개복숭아나무 그늘이 삼키고
봄마다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소문처럼 흩날렸다.
나무를 타고 놀던 아이들은
습관처럼 개복숭아를 따 한 입 베어 물어보고는
풋, 그늘에 내던졌다.
아, 익어본 적 없는 첫사랑!
- 고미숙의「개복숭아」전문
사라진 폭포, 어디에도 없으나 분명히 있는 그곳. 눈부신 햇살 속으로 흰 깃털을 날리면서 아름다운 물세례를 퍼붓다가 비가 오면 더욱 더 위용을 뽐내는, 그러나 가뭄에는 형편없이 줄어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하다가 마침내 사라져버리는. 시인들은 그런 언어의 맥을 찾아다니는 존재는 아닐까. 나는 그 목마름으로 다시 동학사에 온 것이다.
2. 워크숍(1) - 현대시의 운율에 대하여
현대시, 운율 필요 없는가? - 임보 시인 발제(요약)
5월 24일 저녁 7시부터 염창권 시인의 사회로 진지한 분위기의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임보 시인께서 나직하면서도 울림 있는 목소리로 발제를 시작하셨다.
지금처럼 시가 왕성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한국시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으로 일반 독자들은 시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들끼리의 잔치가 아닌가? 독자들은 외면한다. 감동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를 너무 머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감동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운율에 있다.
[현대시의 운율을 실현하는 방안]
4음보의 전통 율격이나, 소위 7·5조류의 율격을 어떻게 원용할 수 있으며, 새로운 율격 형태를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압운이 빈약한 한국시에 어떻게 압운을 실현시킬 것인가?
외형률에만 의존하지 않고 내재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것인가?
운율은 시를 보다 시 되게 하는 요소이며,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무기다. 감동적인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이라면 운율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의 운율과 창작의 원리- 김완하 시인 특강(요약)
김완하 시인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귀티 나고 멋있는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현대시는 점차로 운율과 리듬을 잃어가고 있다. 난해한 표현과 산문 투로 이어지는 현상이, 독자들과 멀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독자들과 시를 가깝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운율의 중요성과 시 낭송의 중요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만해의 시는 낭송에 대단히 적합하다. 그것은 그의 시가 운율과 리듬의 속성을 충실한 바탕으로 하여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시는 노래다’라는 사실을 만해는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면에서 시적 발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시적으로 구상해 나가는 데에 무엇보다 운율의 원리에 입각해서 시를 전개시켜 갔던 것이다. 이 점은『님의 침묵』의「군말」로 출발해서「독자에게」로 마감되고 있는 점도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이고 운율을 통해서 독자와 밀접하게 만날 수 있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창작방법 역시 비슷하다. 읊조리면서 완벽한 상태에 다다르고 그것을 다듬은 다음 드러낸 흔적이 역력하다. 운율이 살아있어 시와 자아가 동화된 상태를 보인다.
[질의응답]
문) 안정원 시인
- 외래어가 포함된 시가 진정한 한국시인가?
- 단순한 산문시는 시가 아니다. 2차적 심상이 살아 있어야 한다.
- 시는 항상 배고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적 의식을 잃는다.
답) 임보 시인
- 우리시에서는 우리말 위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외래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시인은 우리말의 발전 임무를 달성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배척하게 되면 시작이 어렵다.
- 산문시라 하더라도 시적 표현의 장치(비유 등등)를 갖추어야 한다.
답) 김완하 시인
-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것이 시인의 자세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난해야 한다’ 는 것은 시정신과 마음이 지향해야할 방향을 말한 것 같다. 진정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참조발언) 고창수 시인
- 정형시는‘네트 있는 테니스’이고 자유시는‘네트 없는 테니스’에 비유한 시인이 있었다. 운율은 음식의 양념과 같은 것이다. 양념이 맛있어야 한다.
문) 고성만 시인
- 운율은 타고나는 것인가 노력의 결과인가
답) 임보 시인
- 운율은 노력을 통해서 개발할 수 있다. (음악의 예를 들어) 어떤 노래는 여러 번 많이 듣다보면 저절로 부를 수 있게 된다. 일류는 타고나야하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3. 워크숍(2) - 현대시의 운율에 대하여
나태주 시인 특강(요약)
전날 밤 늦게까지 이어진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의 모꼬지에서 충분히 여흥을 즐긴 시인들은 부지런히 일어나 세면을 하고 아침을 먹고 5월 25일 오전 9시부터 최상호 시인의 사회로 제2 토론회를 시작하였다. 어느새 단정한 옷차림의 나태주 시인이 와 계셨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키가 작고 재미있으셨다.
내가 세상에 한 일 중에 잘한 일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43년 3개월의 교편생활을 끝낸 것이다. 둘째 잘한 것은 시를 쓴 것이다.
이것이 제일 잘한 일인 것 같다. 작년 췌장염에 걸려 수술도 안 되고 약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은 자생력이 뛰어난 존재이다. 내 몸으로 기적이 지나갔다. 열 명이면 열 명이 모두 죽는다고 하였으나 문인들의 위로로 자생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잘한 것은 시골에서 산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공주에 산 것이 잘한 것인데 계룡산은 온갖 귀신이 다 모여 있는 산이다. 어머니 같은 산이다.
만 19세에 한시 번역을 본 것이 시 쓰기에 도움이 되었다. 『산촌엽서』에 그러한 시풍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4행시를 아주 많이 썼다. 중년이후에는‘하이꾸’를 보았는데 아주 대단한 저작이다. 그 사이에서 축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시조’가 가미되었다.
신동엽의「너에게」를 보자.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순 돋듯
허구 많은 自然中
너는 이 근처에 와 살아라
이 시를 연 그대로 읽는 것은 맛이 없는 낭송이다. 읽다가 숨을 멈추고 싶은 데서 멈추는 것이 은율의 묘미이다. 예를 들어 4연에서‘묵은 순터’와‘새순 돋듯’은 한 연으로 묶여있지만 사이에 한 연을 쉬는 것과 같은 여백이 있어야 한다.
시들 중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시가‘국화 옆에서’이다. 볼 수도 없고 안 볼 수도 없다. 미인이 그렇다. 그 여자를 보는 것처럼 오고 갈 데가 없는 시이다. 이 시의 핵심은 3연이다. 이 시에는 인생의 묘미가 담겨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운율은 결국 언어의 본질 문제로 돌아간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질서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의 데뷔작은‘대숲 아래서’이다. 데뷔작이 대표작이라는 것은 슬프지만 시를 쓴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숲 아래서’를 낭송하고 강연을 마치겠다.
[질의응답]
문) 김동호 시인
- 시에서 음악성도 중요하지만‘은유, 상징, 아이러니’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릴케, 발레리’등의 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답) 임보 시인
- 시에서 운율이 최고라는 것은 아니다. 감동성 상실의 이유를 따져볼 때 그 중 운율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다른 요소들은 다음 기회에 논의하면 좋겠다.
문) 안정원 시인
- 유치환 시인의 유고시집, 신동엽 시인의 시 등을 보듯이 세상을 벗어난 순수시가 있는가?
답) 나태주 시인
- 어느 것 하나만 옳다는 식의 독선적 태도의 위험성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일부 시인에게 상을 몰아주기 또한 천박한 저널리즘이다. 같이 가는 세태가 되어야한다.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하여‘김구용 시인’을 소개한다. 꼭 찾아보시기 바란다.
문) 박은우 시인
- 시는 내재율과 외형률의 조화가 필요한 것 같은데 요즘엔 시적 표현이 모호하고 난해한 시들이 많다. 소위‘신춘문예 당선 시’들이 외면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난해한 시들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시기 바란다.
답) 나태주 시인
- 난해성의 예는 옛날이나 지금이 존재한다. 릴케의‘말테의 수기’를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없다. 결론은‘내가 모르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4. 워크숍에서 나오며
『사단법인 우리시진흥회』는 그간 시의 위의(威儀)를 지키고 한국시의 정체성을 수립하여 시로부터 멀어져간 독자들과의 간극을 좁히고자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 일환으로 지난해‘한국시의 감동성 회복에 관하여’란 주제로 첫 번째 워크숍을 개최한바 있다. 이에 그 두 번째 기획으로‘현대시의 운율,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의 2차 워크숍이 개최되었는데 성황리에 끝났다. 모두들 흡족한 표정이다.
대미는 김동호 시인 시집『오현금』발간 축하식이었다. 이무원 시인께서 어디서 구했는지 넝쿨장미 창포 등으로 만든‘들꽃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과연 시인답다! 김동호 시인의 소감 발표가 있었고 최석우 시인이 어렵게 구해온 꽃다발 증정이 이어졌다.
점심 때 맛있는 한정식 점심식사와 동동주가 곁들여진 식당으로 이동했다. 나는 부여에 사는 최석우 시인 옆에 앉아 이십여 년 전 첫사랑의 여자 이야기를 부지런히 늘어놓았는데 김동호 시인 축하 꽃다발 문제로 밥맛 조차 잃었는지 통 기운이 없었다. 한참 이야기꽃이 막 피려 하니 헤어질 시간이다. 다들 사진을 찍느라 난리다. 나도 나태주 시인 김영은 시인등과 사진을 찍었다. 서울, 남양주, 분당, 안산, 청주, 일산, 수지, 공주, 대전, 익산, 양산 등등 갈 길이 멀고 바쁠 텐데도 이런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을 보니 우리시회 회원들은‘낭만쟁이’들이 틀림없다.
행사를 준비하느라 애쓰신‘(사)우리시진흥회 사무국장’임동윤 시인등 주최 측의 노고를 기억하고 싶고, 1박 2일 동안 한 가족처럼 정다웠던 이름들을 다시 한 번 거론해 보고 싶다.
(존칭 생략) 고미숙, 고성만, 고창수, 권혁수, 김경하, 김금용, 김동호, 김두환, 김 란, 김명원, 김상현, 김영은, 김완하, 김정화, 김지숙, 나병춘, 나태주, 남유정, 박강남, 박 근, 박남권, 박소영, 박영원, 박은우, 박일애, 박정순, 서지
석, 성은주, 송문헌, 안정원, 양태의, 염창권, 원탁희, 윤석주, 윤소천, 윤은경, 윤준경, 이규흥, 이무원, 이 섬, 이재숙, 이택경, 임계순, 임동윤, 임 보, 최상호, 최석우, 최종호, 하덕희, 현승엽, 홍예영, 홍해영, 황정산 (이상 53명)
협찬 : 김경하, 김두환, 김정화, 박 근, 박해림, 이택경, 황근남, (주)진로 대전지점.
고성만 시인
전북 부안 출생. 1998년『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올해 처음 본 나비』가 있음.
kobupoe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