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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3장 분과학문
3.3. 인식대상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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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인식대상의 구조
3.3.1. 학문의 대상
우리는 이제까지 분과학문의 지식이 구분되는 방식을 여러 가지 특징과 조건들을 지적하면서 검토해 왔다. 분과학문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대상을 가지고 있고, 그 대상에 대한 묘사 · 설명 · 이해라고 하는 일단의 신념체계가 그 분야의 지식을 구성한다. 이제 이런 조건들과 결부해서, 우리는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은 자연현상이고, 사회과학이 다루는 대상은 사회현상이며, 문화과학의 대상은 문화현상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만큼 학문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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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큰 진전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과학에서도 물리학은 물리적 대상을 다루고, 생물학은 생물적인 대상을 탐구한다. 또한 우리는 사회과학에서도 심리학은 심리적인 사실을 다루고, 사회학은 사회적 사실을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식의 해답을 내릴 때, 우리는 단지 논리적인 동어반복이 아니라 그 해답의 기저에 놓여 있는 내막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분과학문의 사실 혹은 대상은 동어반복의 방식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 발견되어 왔다. 독자는 선다형의 문항에서 다음의 ‘사실들’ 가운데 어떤 것이 물리적 사실의 범주에 드는지를 질문받는다면, 해답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중력’ · ‘신진대사’ · ‘지능’ · ‘역할’ · ‘가격’ · ‘정부’ · ‘음계’ · ‘색조’ · ‘삼각형’ 등등이 주어질 때, 대개는 그 중에서 중력이 물리적인 사실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타의 것들도 각각 서로 구분될 수 있는 사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각각 물리학 · 생물학 · 심리학 · 사회학 · 경제학 · 정치학 · 음악학 · 미술학 · 기하학의 탐구대상이라고 말해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과학문적 사실을 해명해 나감에 있어서 우리가 당면해야 하는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연유에서 각각의 분과학문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드러난다. 이를테면, 중력이 물리적 사실이 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독자의 해명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해의 깊이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많은 독자는 “나는 그렇게 들었다”라거나 혹은 “그렇게 배웠다”라는 대답으로 이 문제를 종결지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해답을 내릴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 이 해답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니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어쩐지 그 해답은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의 것을 단지 빌려 온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때 우리는 이미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단지 반복해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동어반복보다는 진전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어떤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숨은 그림찾기에서 자신이 그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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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이미 찾아놓은 것을 단지 사후에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나, 혹은 남이 붙잡아 온 범인을 재확인하는 듯한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말하자면 분과학문적 대상이나 사실에 대한 이런 식의 분별적 해답은 그 사실을 발견하는 학문활동에 직접 참여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만을 따르는 사람들의 해답인 것이다. 이런 반복된 생각은 학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일반 대중이나, 혹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학문적 결과를 전수받는 이류학도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이들은 사실을 구명하는 탐구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분과학문적 사실이나 대상이라고 하는 것들은 항상 쉽게는 규정될 수 없는 모호함과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들은 그에 관한 남들의 연구를 따르는 입장에서는 싱겁고 당연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찾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항상 얼마만큼 오리무중의 어떤 대상인 것이다. 탐구자는 지금의 해답이 어느 정도 명백하더라도 그것에 불만을 품고 더 추궁해 보려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대상은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분과학문적인 사실들을 그것들을 최초로 발견해 나가는 학자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단계로 논의의 수준을 격상시켜 보기로 하자. 그런 입장이 되어 보는 첫 단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실’ 혹은 ‘대상’이라는 것들이 어떤 선행적인 이론이나 해석이 없이 단순히 일상적인 경험과 관찰의 기반 위에서 확인되고 분류될 수 있다는 우리의 거짓되고 안이한 가정을 일단 청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실재가 우리의 사고와는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물론 그 가정 역시 확실하게 검증된 사실은 아니고, 말 그대로 가정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령 우리가 말하는 자연현상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고 또 인간과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법칙과 과정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그것에 대한 해석과는 별개로 “엄연한 사실”로서 존재해 왔다. 분과학문적인 사실들은 단지 우리가 그것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니다. 분과학문들이 그것들의 있음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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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논의하기 이전에도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었고 또한 존재해 있을 것이다. 인식대상은 우리의 인식활동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런 가정들은 우리가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일상적 체험에 비추어 보아도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책임 있게 확인해 나가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의 난점에 봉착한다. 그 실재 혹은 대상이 확인되는 과정에서 그것은 우리의 인식활동과 분리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그 인식대상의 존재성은 우리의 인식활동에 의해서 우리에게 인식된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범위 내에서만 그것들의 실재성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세계의 존재를 그것에 대한 경험 밖에서 규정하거나 생각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불성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속단을 내리는 것은 탐구를 중지시키거나 혹은 거짓에 속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실재와 그것에 관한 경험이나 관념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분과학문의 대상 역시 그 대상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 혹은 그 경험을 토대로 한 이론의 범위를 벗어나서 규정될 수 없다. 이것을 극단으로 몰고 가면, 분과학문의 이론이 그 대상을 규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일반인이 쉽게 말하는 사실들과 학자들이 말하는 사실들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다. 그 내막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두뇌회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자세하게 검토하기 전에 우선 우리는 오래 전에 오우크쇼트가 그의 저서 <경험과 그 양상들(1933)>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말을 당분간 화두로 삼기로 하자.
제반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검토했듯이 경험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다. 그리고 제반 이론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성취한 것들이고, (우리가 그것들을 수락하는 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는 관념들이다. 하나의 이론은 수많은 사실들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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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한꺼번에 뭉쳤을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제반 사실들이다. 제반 이론들은 점차 더욱 분명하게 되고 또 구축됨으로써 제반 사실들이 된다. 한편, 제반 사실들은 그들이 함축하고 있는 바가 더욱 풍부하게 나타날 수 있는 좀더 큰 맥락에서 보여질 수 있을 때 제반 이론이 된다. 한 측면에서 사실인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이론이다(p.43).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추궁해보자. 우리는 실재를 그것을 경험한 범위 내에서 규정한다. 인식대상과 우리의 인식 사이에는 필연코 경험의 매개가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그 실재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차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경험의 망을 통해서 실재와 접촉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인즉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각주 17: 우리는 이 주제를 앞(2.4.)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과 독립된 객관적인 사건들, 우리의 경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대상을 쉽게 상정하는 사람은 비현실적인 제안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각주 18: 학자들이 자신의 전공영역 이외의 사실을 다룰 때 그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이 그것들이 어떤 것이라고 가정해 버린다. 이를 두고 흔히 “先驗的 假定”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가정은 그것이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 만큼 항상 위험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독립된 사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면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실재에 대한 모종의 고뇌에 찬 경험, 진지한 경험, 혹은 책임 있는 경험이 없이 그것이 사실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 어렵게 된다. 그런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 오우크쇼트는 위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는 관념”이라는 매우 적절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나 시인할 수 있듯이 어떤 대상에 대한 경험에는 수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일반인과 학자는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인식적 경험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오우크쇼트는 이 가운데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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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인식을 의식하면서 그 실재가 사실로서 드러나려면, 우리가 하나의 응결력이 있는 관념 혹은 이론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에 대한 문제는 이후의 논의(3.3.2.)에서 다루어지므로 당분간 접어두기로 하더라도, 우선 이 정도의 논의에서나마 분과학문이 말하는 사실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활동과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는 사실까지를 수락하기로 하자. [각주 19: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객관주의자’들을 이런 범주에 넣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것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단지 그 논자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하면, 분과학문적 사실들은 그 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고뇌에 찬 학문적인 체험에 의해서 얻어진 업적으로 보아야 한다. [각주 20: 이런 작업을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
일반인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학자들은 자신의 경험영역 밖의 사실을 가공해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경험 밖의 것을 함부로 말한다면 그것은 학자로서 불성실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학자와 일반인은 그 인식대상에 대한 경험의 심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사실을 초월한 학자의 학문적 사실은 모종의 이론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학문적인 사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론적인 안목을 창안함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이처럼 분과학문적인 사실은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학자들이 고안해낸 이론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복잡한 내막을 공감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 학문적인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 절의 처음에서 예시한 분과학문의 사실에 대한 객관주의적 혹은 방관적 해명에 포함된 무책임성과 문제점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분과학문의 사실들은 분과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그것들에 대한 고뇌에 찬 체험이 누적되면서 아직도 점차 밝혀지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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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그 실재와 학자들의 체험이 얼마나 부합하느냐 하는 문제를 어떤 독자가 제기한다면, 그는 아직 문제의 진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아는 실재는 “실재와 체험 간에 부합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따옴표의 말은 내가 논의를 위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것이지만 그것을 만약 “인지내용과 그 대상으로서의 사실 혹은 실재 간의 일 대 일의 대응관계 혹은 일치”로 해석을 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사실과 이론은 일치될 수 없으며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 부분을 보다 “사실에 부합하게” [각주 21: 여기서 ‘부합’이라는 말은 대상의 구조에 알맞은 내적인 이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에 대한 것은 곧 “대상의 구조성(3.3.2.)”에 대한 논의를 할 때 밝혀질 것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과 이론의 대응관계에 대한 오해는 흔히 자연과학의 예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나가기로 하자. 흔히 이런 생각들을 한다. 과학자들은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사실들을 관찰함으로써 검증할 수 있다. 여기서 만약 그 관찰에 오류가 없다면 그 이론은 객관적으로 검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론이 사실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었다면 그 이론은 타당한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사실에 일치하지 않는 결과를 얻었다면 그 이론은 부정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학문의 대상과 그것에 대한 이론을 논리적으로 분리할 때, 매사의 설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절차가 주로 일반인이 생각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이고, 심지어 과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 조차도 오랫동안 이런 단순한 가정에 의해서 학문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왔다.
이제까지 일반사람들은 자연과학의 경우 이론과 인식대상 간의 일치 혹은 대응성을 검증할 수 있는 최종의 근거가 관찰이라고 믿어 왔다. 그것이 실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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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임이 앞(2.5.3.)에서 길게 논의되었다. 잠깐 재론할 것 같으면, 이론과 인식의 대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관찰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논증하는 주장의 전체 내막은 일견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의 실재성은 우리의 인식활동을 통해서 인식되게 마련이라는 앞서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한 독자라면, 이제 이론과 인식대상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우리가 관찰하는 것과 관찰자로서 우리의 개념이나 이론은 독립될 수 없다는 결론에 수긍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우리가 관찰할 때 우리의 눈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종의 관념과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을 지각한다. 누구든 그런 한계를 알아야만 비로소 분과학문적인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오늘날 심리학적 연구에서 밝혀진 하나의 기본적인 결론은 관찰은 흔히 생각하듯이 피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관찰하거나 지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그것들의 단서들을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과 결부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각주 22: 이에 관한 것은 Bohm(1965)을 참조하시오.] 특수한 관찰도 그것이 이론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한 어떤 통합된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이론에서 관찰적 명제와 이론적 명제를 구분하고, 후자는 전자의 것을 관찰에 의해서 검증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의 이론 속에 있는 관찰적 개념이나 명제의 의미는 이론적인 명제에 포함되어 있는 여타의 명제들에 의해서 규정받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근래에 적어도 과학공동체 내에서는 이런 근거에서 이른바 이론의 객관적인 검증절차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추세이다.
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우리가 말하는 관찰은 이론적 추리의 체계적인 망 속에서 하나의 ‘대상’을 정치시키는 활동이다. 여기서부터 학문적인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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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특수하게는 비교적 대상의 객관성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자연과학의 사실들조차 그 내용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종의 개념이나 이론에 의존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핸슨(N. R. Hanson)은 <관찰과 언명(1971)>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래서 ‘제반사실들’은 하나의 주어진 이론이 하나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부응하는 제반 조건들, 즉 한계조건들에 좌우된다는 견해가 생겨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들은 ‘이론적으로 결정된 것이다’”(p.12).
우리가 단순히 감각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확실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사실에 대한 주장도 이론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정확성과 객관성을 강조해 온 자연과학적 사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실을 유념하면서 다시 자연과학에서 추구하는 대상의 복잡성을 정리해 보자.
엄밀하게 따지면,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자연’은 비록 유형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 이면의 성질은 단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오감적 장비만으로는 감지할 수 있는 사실들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상식적인 생각과 말로 지칭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상식의 안목을 초월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심층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이미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찾고 설명하는 데 오랫동안의 고된 수련과 엄청난 추리를 요구하는 세계이다. 그 오랜 수련과 추리의 산물이 자연과학적 지식이고, 그것에 의해서 포착되는 세계가 곧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과학자들은 일반인과는 달리 자연을 아직도 미궁의 세계로 생각한다.
학문적인 사실 자체의 규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여타의 분과학문에서 말하는 학문적인 사실 혹은 대상도 그 학문에서 택하는 이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잠시 인문 · 사회과학적 대상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그 대상을 우선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 보자. 인문 · 사회과학에서는 우리의 삶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삶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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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자세하게 분리시킬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슈츠의 “다원적 실재”라는 개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이 개념을 따른다면, 우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다수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생활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순간에 관여하고 있는 세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는 이를 변별적으로 상대한다. 예컨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 · 교육이라는 별개의 세계들은 각각 그런 다면적인 특질을 갖도록 선대로부터 고안되었고, 또 우리는 그 각각의 것에 맞게 그 세계에 종사하도록 훈련이나 교육을 받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각 세계를 대할 때마다 의식의 긴장에 있어서 급진적인 수정을 하면서 그때그때 대처해 나간다. 이것들이 우리의 내면적인 수준에서 정의할 수 있는 인문 · 사회과학적 대상인 것이다.
물론 인문 · 사회과학적 대상이라고 하는 것도 객관적인 수준에서 정의할 수 있다. 이 분야에 속한 학문의 대상은 자연과학적 대상과는 다른 객체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각종 예술작품 · 풍속 · 제도 · 기타 문화적 사실 혹은 역사적 사실은 유형성을 가진 물질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자연과학적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될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각주 23: 사회적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는 긴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가장 간명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독자는 Berger & Luckmann의 저서, <실재의 사회적 구성(1967)>을 참조하시오.] 만약 이들에게도 ‘객체’라는 말을 쓴다면 자연과학적 객체와 구분되는 몇 마디의 수식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이른바 ‘문화과학’의 방법론을 제시한 리케르트(1926)는 “지각적 객체”와 “이해적 객체”를 엄밀하게 구분하였다. 문화과학의 대상인 이해적 객체는 “의미로 가득 찬 것으로 우리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객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에 방법론을 다루는 제 5장에서 자세하게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해적 객체”란 주관과 객관의 일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인식의 대상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실이나 대상은 그것을 우리가 삶의 체험으로 재생시킬 수 없는 한 아무 의미도 없는 대상이다. 인문 · 사회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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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바로 그런 현상을 포착하는 개념들을 구성하는 독특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학문적인 체험 혹은 지식과 그 대상세계적 체험 혹은 지식 간의 차이를 상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차이는 ‘자연과학자’와 ‘자연인’의 구분과 같은 원리에 의해서 인식하면 된다.
우리는 자연과학이 자연을 대상화하고 자연에 대하여 관찰과 실험을 가하며, 그 성과를 언표의 형식에 따라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우리는 학문의 대상성과 관련된 사태의 복잡성을 다소나마 이해하는 실마리로 삼아보자. 여기서 언표된 자연과학적 지식은 지각적 대상이 아니라 이제 문화적 객체로서 우리에게 사실적인 설명보다는 이해를 요구하는 대상으로 전환된다. 과학의 전문지에 실린 글의 색깔 · 무게 · 인쇄체 등의 물질성은 이미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삼는 자연과는 다른 어떤 것들이 되어 있다. 이런 대상으로부터의 의미발생은 체험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체험구조가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가 자연과학의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그것을 산출한 저자의 체험을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많은 것은 수학의 형식으로 표현되며, 그것을 그야말로 눈으로 확인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포착할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우리 자신의 인지적인 작동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런 논리적인 조작에 상응하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체험이 없이는 수학의 공식을 이해할 길이 없다. 이렇게 해서 자연과학적 지식은 이제 문화적 대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각주 24: 이런 관점의 전환은 이제까지 과학적 지식의 검증과 관련하여 과학철학자들이 말해왔던 진리의 검증방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론을 요구한다. 우리가 인식론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교육적 인식론은 이 점을 매우 중시한다.]
인문 · 사회과학자는 자연과학 자체를 그들의 인식대상으로 삼아 일반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재와 접촉할 수 있다. 그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인문과학적 대상은 물론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소나마 물질적인 단서를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학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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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대상이 그러하듯이 항상 물질적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분과학문의 대상은 물질적인 존재성을 거의 식별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수학과 논리학은 형식과학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서는 사물적 객체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자연수 1 · 2 · 3”, “오른 편과 왼 편”, “일부와 전부” 등등은 가시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어떤 기준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물질과 같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의 인식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념적인 대상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본질상 그것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활동을 추상화한 것이다. [각주 25: 물론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많은 논의를 거칠 수 있지만, 이 결론에 대한 탁월한 논증은 Piaget(/1970b)의 것을 참조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경험을 “물리적 경험(physical experience)”과 “논리-수학적 경험(logico-mathematical experience)”으로 양분하고 그 경험의 근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는다. “물리적 경험은 사물들에 행위하고 추상에 의해서 그 사물들로부터 속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사물들의 무게를 비교하고 가장 무거운 것이 가장 큰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는 활동을 들 수 있다. 논리-수학적 경험(이것은 조작적 연역이 아직 불가능한 발달단계에서도 불가결한 것이다)도 역시 사물에 행위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들의 속성이 발견되는 추상화 과정은 앞의 경우와 같이 사물의 방향으로 지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물과 관련을 가지게 되는 행위로 지향되어 있다. 예컨대, 일렬로 작은 돌들을 늘어놓고 그것들을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세어 보든 혹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세어 보든 혹은 둥글게 놓고 세어 보든지 간에 동일하다는 점을 아는 경우를 들 수 있다”(p.37-38).]
수나 논리의 의미는 자체적으로 정의된 개념들로부터 체계를 형성할 뿐이다. 이 개념들은 하나의 폐쇄체계가 생기도록 정의되어 있다. 이들의 본질은 언제나 상대적이며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의 단일한 수는 일반적인 체계적 질서 속의 하나의 단일한 장소일 뿐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독특한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의 의미는 그것이 수의 체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런 수학적 도식은 그것들이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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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적용될 경우처럼 대상을 설명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그것들 자체로서 학문적 대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수학이라는 왕국에 들어서자마자 그 대상의 독자성을 점차 뚜렷하게 경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학문의 대상은 분과학문내의 학자들이 고심을 하면서 수년간의 수련 끝에 인지적으로 파악한 실체이다. 그것은 그런 고심에 찬 인지적인 경험을 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실감될 수 없는 어떤 세계이다. 각 분과학문은 그 이질적인 세계들을 분리시켜 인지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지식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그 세계들은 일면 발견과 발명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대상성에 비중을 둔다면 그것들은 ‘발견’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개념 혹은 지식체계에 비중을 둔다면 그것들은 ‘발명’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 그러나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지 혹은 지식체계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 학문적인 활동을 통해서 얻은 어떤 분과학문의 지식을 점유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 대상이 되거나 사실이 된다는 것 혹은 그 사실을 실재로 점유한다는 것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서로 다른 인간사 혹은 이질적인 세계들을 인지적으로 분리시켜 사회과학의 제반 분과학문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사실을 인지적으로 점유한 것이며 사회적 사실 자체를 점유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학문의 세계와 대상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이런 논리에 의해서 우리는 인식대상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이론이라는 극단의 관념론적 입장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각주 26: 바로 이 점이 우리가 Oakeshott를 자주 인용하면서도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부분이다. 이 미묘한 입장의 차이는 다른 맥락에서 후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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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대상의 구조성
우리가 분과학문의 대상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조건은 구조성이다. 전문적인 용어를 쓴다면 이질적인 세계들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체계 혹은 구조란 하나의 전체가 있고 구성요소가 있으며, 그 의미가 내부의 요소와 요소 혹은 요소와 전체의 관계에 의해서 자기 충족적으로 규정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구조 내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요소의 성질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중요성이나 의미를 띠지 않는다. 요소의 의미는 그 상황에 포함된 다른 모든 요소들과 그것이 갖는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구조나 체계에서는 관계가 내용을 이룬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학문적으로 대상 세계를 구성할 때에도 이처럼 구조의 규칙을 따르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구조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 대상에 관해서 구조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을 갖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구조의 성격에 관해서는 후에 제 5장에서 구조주의적인 방법과 관련하여 더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만약 독자가 이미 구조주의적 방법론에 익숙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논의는 쉽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그 방법론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당분간 그 구조를 너무 추상적으로 다루는 일은 피하고자 한다. 대신에 우리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서 편의상 가시적이고 구체적이며 소규모적인 세계의 구성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지각의 분야에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포착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간단한 그림의 예를 들어보자. 우선 그림은 많은 다양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것들을 단순히 합한다고 하여 지각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현명하게도 거의 자동적으로 그것들이 의미 있게 해석될 수 있는 모종의 형태를 찾아낸다. 또한 우리는 현상을 통합하고 전체를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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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하는 요소 간의 연관관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어떤 형태를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지각내용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할 수 없다. 어떤 구체적 실체나 경험들의 완전한 의미는 그것을 부분으로 삼고 있는 구조 안으로 통합되어야만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
이 현상을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시험을 해 보기로 하자. 우선 <그림 3-1>을 보라.
이 그림은 형태를 알기 어려운 검은 면과 흰 면의 세부사항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만약 독자가 어떤 형태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지각적인 세부사항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세부사항을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있는 모종의 형태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럴 때, 어떤 독자는 그 속에서 <그림 3-2>와 같은 전체적인 형태를 발견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이 경우 독자는 <그림 3-1>의 세부사항들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됨을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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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각 부분이 새삼스럽지 않게 어떤 목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의 일부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의미화가 된 이후에는 다른 종류의 지각이 배제된다. 모르기는 해도 독자는 여기서 또 다른 해석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또 하나의 독립적인 인식대상을 발견한 셈이다.
구조는 지각적인 수준에서 보면 일종의 형태를 띤다. 이 때문에 학문적인 인식대상의 구조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본 저서는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그림들을 이용해 왔다. 제 1장에서는 한 그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여인의 경우를 들었고, 제 2장에서는 한 그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토끼와 오리의 경우를 들었다. 이런 지각적 사실들 역시 인식대상의 구조적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준다. 다시 그림의 사례를 상기해 보자. <그림 1-19(p.62)>과 <그림 2-1<p.270)>에서 우리는 각각 두 가지 의미 있는 형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경험하는 또 하나의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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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 현상은 그 두 형태를 하나로 종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 두 가지 형태는 서로 독립된 것으로서 서로가 背景과 前景의 자리를 두고 경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중 하나의 형태를 취하며, 이 때 선택 여부에 따라서 그림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지각적 단서의 의미가 전적으로 달라진다.
우리의 인식대상은 구조성을 띠며, 구조인 이상 그것은 다른 인식대상으로부터 구조적으로 변별되어 독립적으로 이해될 것을 요구한다. 이 말은 인식대상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들 간의 관계, 그리고 전체와 요소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인식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분과학문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상세계는 그것이 경계를 맺고 있는 여타의 세계와 전체적으로 구분된다. 한 곳에 있는 요소가 다른 곳에는 없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두 세계 간의 공통된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질적인 의미를 형성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서로 다른 종류의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한 곳에서 그 세계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하찮고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한 곳에서 보충되는 것이 다른 곳에서는 제거된다. 한 곳에서 “피상적인 것”이 다른 곳에서는 “실재적인 것”으로 보인다. 두 이질적인 세계에서는 같은 자료와 사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다. 이런 구조의 원칙이 각 개별학문이 추구하는 인식대상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조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는 과정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이해해 보기로 하자. 가령 어떤 목수가 의자를 제작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작업은 ‘의자’라고 하는 일종의 구조를 만드는 과정을 요한다. 그가 숙련된 사람이라면 의자의 전체를 의식하고 그것을 이루는 각각의 나뭇조각을 제작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 이를테면 ‘책상’의 구조와는 다른 요소와 관계양상을 갖는다. 책상을 구성하는 나뭇조각은 의자에서는 사용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의자의 입장에서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목수는 의자에서 본질적인 요소를 이루는 나뭇조각을 제작하고 그것들을 조립할 것이다. 이 때 조립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소와 요소 사이의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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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이고 불가분한 관계의 규칙을 따라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럴 때 비로소 의자라고 하는 구조물이 성립될 수 있게 된다. 이 비유 역시 각 분과학문의 이론을 구성할 때 그대로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구조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특정한 활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른바 구조주의적인 방법의 창도자인 소쉬르(1916)는 구조의 특징을 장기게임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졸 · 차 · 포 · 마 등의 장기 말은 그것을 만든 물질적인 자료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 각각의 정체성은 장기라는 게임의 체계 내에서 그들의 차이와 함수관계를 갖는다. 졸은 차 · 포 · 마 등의 다른 말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된 추상적인 형태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장기라는 체계 내에서만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바둑과 체스 놀이는 그 각각의 놀이 규칙에 따라서 수행된다. 이 가운데 가장 참된 놀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여기에서 놀이 전체에 적용될 보편적 규칙을 찾으려 시도하는 것은 각 놀이의 차이와 고유성을 무효화하고 놀이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가지 규칙이 다른 하위구조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
구조에서 “그것을 만든 물질적인 자료나 모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독자는 주로 앞서 구조를 지각적인 특징을 들어 설명했던 일시적인 방편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논의하는 학문의 대상세계의 구조는 보다 추상적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구조는 가시적인 특징을 넘어서서 그 내부의 규칙과 요소 간의 관계와 그들 간의 가능한 조작에서 특징이 드러난다. 똑같은 도구로 된 놀이기구를 써서 게임을 하는 바둑과 오목의 경우가 이 구조의 특징이 갖는 추상성을 대비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는 예가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갑과 을이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대좌하면서 한편에서는 바둑의 규칙에 따라 돌을 놓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목의 규칙에 따라 돌을 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놀이 자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이질적인 구조를 가진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돌의 위치는 바둑과 오목 중 어느 게임의 구조를 택하느냐에 따라 맥락적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된다. 그런데 갑과 을이 그것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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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엄청난 맥락의 혼동이 일어나서 서로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이 구조의 원칙은 서로 다른 분과학문 간의 독립성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 분과학문의 사실을 다른 분과학문의 개념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바둑의 규칙에 의해서 오목을 둘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고 엉뚱한 발상이다.
우리가 자율적인 분과학문으로 인정한 제반 학문은 이처럼 그것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세계의 구조성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 경우에 속한다. 하나의 특징 있는 세계의 정체성은 그 세계 내에 있는 것들이 하나의 조직화된 체계로서 다른 것과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단위의 세계는 내부는 균질적이지만 세계와 세계 사이에는 비균질적인 경계가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분과학문의 학자들은 자체의 인식대상을 그것이 가진 하나의 특성만을 지적해서 그것과 다른 인식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그것의 전체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려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 대상의 독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의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모종의 통합된 체계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분과학문은 한편으로 부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전체를 이루는 지식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을 잘 이해했다면, 한 분과학문에 속한 지식의 일부를 그것이 속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다른 분과학문의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각주 27: 앞(1.2.1.)에서 그 오류를 Oakeshott는 “논점이탈의 오류(ignoratio elenchi)”라는 말로 지적하였음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A라는 세계를 논의하는 가운데 그것과는 다른 세계 B를 삽입시키는 오류인 것이다. 이런 세계구분의 취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물리적 사실을 논하는 곳에서 생물적 사실을 개입시키려고 하고, 문화적 사실을 논하는 곳에서 자연과학적 사실을 개입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학문계에서 가끔 이런 오류를 범하는 집단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 의해서 하권의 제 6장에서 ‘교육학자들’이 흔히 범하고 있는 분과학문적 오류를 조명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교육을 논해야 할 학자들이 철학 · 심리학 · 사회학 · 행정학 등 기존의 다른 학문적 개념을 도입하여 교육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분과학문에서는 맥락의 혼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로 인해서 교육 자체의 의미가 타세계로 환원될 뿐만 아니라, 도입된 기성 학문의 제반대상들 간의 차이도 모호해지는 일대 혼란이 연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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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학문적인 대상이 되는 사실들이 그것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인식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앞(p.513)서 오우크쇼트(1933)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 말은 너무도 압축된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당장 이해하려고 들기보다는 일종의 화두로 삼은 바 있다. 그러나 이제 그 화두를 풀 수 있는 배경적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 편의상 그의 말을 다시 여기에 초대해 보자.
그러나 제반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검토했듯이 경험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다. 그리고 제반 이론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성취한 것들이고, (우리가 그것들을 수락하는 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는 관념들이다. 하나의 이론은 수많은 사실들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한꺼번에 뭉쳤을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제반 사실들이다. 제반 이론들은 점차 더욱 분명하게 되고 또 구축됨으로써 제반 사실들이 된다. 한편, 제반 사실들은 그들이 함축하고 있는 바가 더욱 풍부하게 나타날 수 있는 좀더 큰 맥락에서 보여질 수 있을 때 제반 이론이 된다. 한 측면에서 사실인 것이 다른 측면에서는 이론이다(p.43).
위의 인용문에서 전반부(“그러나 … 관념들이다.”)의 의미는 객관주의자들의 무책임성과 관련하여 이미 앞 절의 논의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명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인용문의 나머지 후반부의 의미는 바로 앞서 논의한 대상의 구조성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이 자리에서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분과학문의 대상은 그것에 대한 체험, 더욱 특수하게는 오우크쇼트의 경우, 그것에 대한 관념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관념이 곧 학문계에서 말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우크쇼트는 그 이론이 대상의 수많은 사실들과 대응하는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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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들이 “뭉쳤을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제반 사실”이라는 미묘한 말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이 절에서 다룬 인식대상의 구조성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다. 이제 독자는 분과학문의 대상은 이론에 의해서 파악되며, 대상의 의미는 그 이론의 내적인 정합성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사실을 이 인용문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기왕 오우크쇼트의 말을 인용했고 또 인용문에 ‘이론’이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간략하게 이 자리에서 밝혀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인식대상의 구조성을 말하였다. 그러나 대상과 그것에 대한 학문은 또한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상의 구조와 그것에 대한 학문의 구조를 구분한다. [각주 28: 독자는 이 대목에서 우리의 입장과 Oakeshott의 입장 간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다시 주목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 사실은 물리적 사실과 물리학 · 경제와 경제학 · 예술과 예술학 · 종교와 종교학 · 교육과 교육학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앞서 이 구분되어야 하 세계를 “존재적 점유”와 “존재론적 점유”로 구분하여 부각시키려고도 한 바 있다. 물리적 사실이 되거나 혹은 그것을 가진다는 것과 물리학을 가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을 소유함을 말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분과학문의 학자들은 분과학문의 사실에 대한 이론을 점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론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인식대상에 대한 인지적 체험의 소묘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잘 정립된 분과학문의 이론은 따라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하나의 주제에 의해서 통일되어 있으며, 그러한 주제는 분과학문의 다양한 이론에서 역사적으로 일관성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론에서 쓰이는 개념 · 명제 그리고 법칙 등의 하위요소는 하나의 일반적인 사상이나 주제에 의해 통일된 어떤 명확한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결합된다. 이론에서 추구하는 주제는 분과학문 속의 독립된 요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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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하며, 그 전체는 하나의 주제를 그리고 각 부분은 또한 각각의 주제를 지니게 된다. 이것이 곧 그 분과학문의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단편적인 지식의 요소가 총체적인 구조의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內生的(endogenous) 혹은 外生的(exogenous)이라는 구분이 이루어진다. 내재적(internal) 혹은 외재적(external)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다. 내생적 조건은 그 지식체계 내부에서 의미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지식의 최소 단위는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의 단어 혹은 개념은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단어와 개념과의 관계에서만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개념이란 언제나 상대적이게 마련이다. 다음의 단위는 명제이다. 명제란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개념도 그것이 일부를 구성하는 명제의 맥락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각주 29: Saussure는 말한다. “개념은 순수히 분별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내용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체계내의 다른 용어와의 관계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정의된다.” 가령 ‘붉음’은 ‘푸름’이나 ‘노랑’ 혹은 어떤 다른 색깔이 아닌 것이다.] 또한 한 지식체계의 명제는 오직 다른 명제 혹은 그 명제가 속해 있는 더 큰 단위의 인식체계의 틀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곧 이론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지식의 단편이건 간에 그 지식이 소속한 전체의 지식을 의식해야 하며, 전체의 맥락에서만 그 지식이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진리치 역시 그 맥락과 무관하게 규정될 수 없다. [각주 30: 제 5장에서 방법론을 다룰 때 더 자세한 설명이 있겠지만, 경험론적 인식론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의 명제의 의미나 진리치가 다른 명제와 무관하게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환원주의의 도그마에 불과하다(Quine, 1961, pp.20-46).]
자율적인 분과학문의 이론이나 지식은 그 자체가 구조의 성질을 띨 수밖에 없다. 지식이 구조성을 띤 것이라는 말은 본 저서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하였다. 이론도 지식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보면 된다. 학문이 가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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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 [각주 31: 이것은 학문의 대상세계가 가지고 있는 요소와 구분된다.] 는 개념 · 명제 · 법칙 등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각종의 단어 · 숫자 · 그림 등은 일종의 기호체계이다. 분과별 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하나의 구조적 세계를 인지적으로 분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합성이 결여되는 한 그 대상에 대한 학문적 의미는 생겨날 수 없다. 어떤 연구자이든지 간에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의 어떤 측면을 학문이라는 세계 내에서 전체적으로 체험하고, 그것의 의미를 언어나 다른 기호물에 의해서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적절한 개념 · 법칙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전체적 관념을 구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때 그 요소들 간의 관계를 항상 의식하면서 연구대상의 의미가 출현하도록 이론의 정합성을 항상 유의해야 한다.
지식체계는 전체적인 구조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떤 인식체계이든지 간에 그것은 단지 포착된 현상들에 대한 개별적인 언명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련의 진술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체계로서 서로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체계의 범위가 곧 하나의 학문영역을 이루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의미의 맥락성을 타당한 주장으로 수락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각각의 인식의 요소가 나름대로의 관계에 의해서 잘 짜여진 하나의 자율적인 인식체계라는 가정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인식체계와 어떤 공유점도 갖지 않는다는 가정 또한 수락해야 한다.
지식이란 구조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의 지식체계는 그 내부의 관계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모든 지식은 항상 서로 비교불가능한 것인가? 만약 앞서의 논의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부정적인 해답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여기에는 오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각각의 지식이 그 나름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들끼리의 비교가능성이 있는가는 별도의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것이건 그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들 간에 비교도 가능하다. 그들은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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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하여 우리는 서로 구조가 다른 지식체계는 두 가지 범주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종류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수준의 차이이다. 첫째로, 종류의 차이는 구조의 발생적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앞서 우리는 바둑의 구조와 오목의 구조를 말하였다. 그 두 가지 세계는 놀이라는 범주에서 각각 특징을 가진 비교가능한 세계로서 발생적 뿌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놀이는 서로 다른 생물의 종류처럼 별도의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 둘째, 수준의 차이는 그 발생의 뿌리는 같으나 그 구조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한다. 바둑은 발전하는 세계의 하나이다. 그만큼 바둑 자체의 구조도 수준에 따라 변모한다고 볼 수 있다. 바둑은 그 세계에 입문해서 수련한 급수에 따라 달리 보이고 경험된다. 오목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좌하고 있는 양자 간에 대국이 가능해진다.
지식의 구조의 차이를 종류와 수준의 차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때 어떤 이점이 있는가? 그것은 말할 필요가 없이 지식의 상대주의를 변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다. 우리는 상이한 지식체계를 비교할 때 그들이 종류가 다른 것인가, 혹은 수준이 다른 것인가를 따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2.5.1.)에서 횡적 상대성과 종적 상대성이라는 기준으로 이를 구분해 왔다. 이들은 전혀 다른 상대성이다. 하나는 서로 서로 보완할 수 있는 상대성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상쇄할 수 있는 상대성이다. 전자는 다양한 세계에 대한 각각의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서로 대립된 견해이다. 전자는 서로가 다른 세계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측면 · 맥락 혹은 체계 내에서 옳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옳음의 기준에 의해서 그 해답의 수준을 상대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횡적 상대성은 세계의 다원성이라는 면에서 권장되어야 할 상대성이고, 종적 상대성은 해답의 끊임없는 쇄신과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서로 경합하고 대체되어야 할 상대성이다.
분과학문이 생명을 유지하는 조건은 그들의 지식이 다른 분과학문의 지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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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적인 상대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내부적으로는 지식의 수준을 계속해서 쇄신할 수 있어야 한다. 분과학문은 그 인식대상의 면에서 다른 분과학문과 구분되는 뿌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 말은 분과학문의 지식은 다른 분과학문의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을 경우에만 존립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절차상의 조건이 유효함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으로서 다원적인 세계를 밝힘에 있어 서로 보완할 자격을 갖게 된다. 또한 분과학문은 하나의 독립된 수도계의 하나로서 항상 발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수도계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수도계적인 체험에는 다른 수준의 것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그런 수준의 차이가 있는 지식은 항상 하위의 것이 상위의 것에 환원되는 방식에 의해서 경합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상대성은 미리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고 실제로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입증의 문제이다. 예컨대, 뉴턴의 이론 · 다윈의 이론 · 마르크스의 이론은 횡적인 상대성을 갖는가 혹은 종적인 상대성을 갖는가? 후설 · 스키너 · 뒤르켐 · 야콥슨 · 소쉬르의 경우는 어떤가? 아담 스미스적인 대상을 마키아벨리적인 개념으로 혹은 그 반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 설명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두 가지 모두의 설명을 놓치게 된다. 그러나 만약 두 가지 지식체계가 수준의 면에서 하나의 설명체계를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학문의 경제성 원칙에 위배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환원의 논쟁은 항상 심각한 열정과 반발을 유발한다.
3.3.3. 횡적 상대성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라고도 볼 수 있고 여럿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세계를 대하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을 하나로 체험하면 그것은 하나인 것이고, 여럿으로 체험한다면 그것은 여럿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로 보는 경우에도 그 하나 속에는 다수의 이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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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세계가 들어 있으며, 이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단순히 하나로 보려고 고집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이질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따라서 세계의 분화가 진행되는 다원적인 사회와 문화에서 인식은 자연스럽게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진행하는 경로를 밟아 왔다.
다원주의자들은 하나로 환원되어서는 안 될 세계들이 있다고 믿고 그것들이 각각 그들 나름의 중요성과 관심을 기준으로 독립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원주의자들은 세계들의 모집단들 그리고 세계 자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저서도 다원주의적인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본 저서의 처음부터 분명히 해둔 사항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학문이 다양한 세계 중 하나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학문계라고 하는 하나의 세계 속에도 또 서로 섞여서는 안 될 분과학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분과학문에 대한 논의는 이와 같은 세계의 다원성을 전제로 성립한다. 분과학문은 한마디로 그 다원적인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분할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분과학문은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세계의 저변에는 금방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될 소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모든 학문은 일정한 존재영역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하는 지적인 행위이다. 분과학문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영역을 빠짐없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를 탐구한다. 우리는 앞서 세계가 다종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가정을 하였다. 그 구조가 있고, 학문은 그 나름의 활동을 통해서 대상세계에 대한 인지적 점유권을 확보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세계가 각기 다른 성질과 구조를 가진 하위의 존재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지식확립도 그만큼 다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상세계가 구조로 되어 있고 그것들이 다종의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인식체계 역시 구조의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은 물론 다종의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지각적 대상 · 단순한 의자 · 장기라는 게임의 경우가 구조이듯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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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서로 환원되어서는 안될 무수한 구조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리적 구조 · 화학적 구조 · 생물적 구조 · 수학적 구조 · 심리적 구조 · 사회적 구조 · 언어의 구조 등등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구조의 특성을 가진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세계는 이처럼 구조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체험 역시 많은 경우에 구조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체험이 구조의 특성을 갖지 않는 한 대상의 구조는 우리에게 구조로서 경험되지 않는다.
분과학문은 겉으로 보기에 서로 혼동되기 쉽지만 서로 다른 질서 · 법칙 · 내적 통합성을 가진 고유한 소세계들을 내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이론적으로 분할해 냄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이해하는 데 공헌한다. 관련된 학문이 출현하기 전에는 그것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인정될 수 없었다. 한 분과학문이 형성되는 초기에는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인식의 방법도 혼동스러웠다. 그만큼 분과학문은 초창기에는 그 대상을 왜곡시키거나 혼미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차츰 우리는 모호한 단계에서나마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분과학문은 그 이질적인 측면을 그 속성에 맞게 분할시켜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경계와 구조적인 관계양상을 점차 세분된 양태로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의 독립된 대상에 대한 인지적인 구성은 그 난이도에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과 후의 양면에서 볼 때 천지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각주 32: 이 차이를 독자는 앞서 <그림 3-1(p.523)>과 <그림 3-2(p.524)>를 대조하는 경험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오늘날 잘 알려진 각 분과학문을 구성하는 데 역사적으로 공헌한 창도자들 [각주 33: 예컨대, 앞(3.1.)에서 근대학문의 성립과 관련하여 거론된 인물들을 상기해 보시오.] 은 모두 그 분과학문의 사실들을 포착하거나 그것의 의미를 확장하는 데에 있어서 최초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지식을 대하는 일반인이나 독자의 대부분은 그들이 발견한 지적 구조를 이차적으로 전수받은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비교적 쉽게 그 대상을 구분하는 방식을 전수받은 우리들은 최초의 학자들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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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봉착하였고, 그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감상하거나 공감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분과학문의 사실들을 구성하는 데 참여한 학자들이 봉착했던 난점과 그 해결의 과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보는 것이 그들의 활동을 그들이 체험한 바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분과학문은 초기에는 “여기에 또 뭐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주장을 통하여 배태된다. 이전의 다른 분과학문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어떤 사실을 남달리 예리한 눈을 가진 학자가 포착하고, 그가 발견한 것의 독자적인 존재성을 인정받고자 한다. [각주 34: 이 대목에서 독자는 Saussure, Durkheim, Husserl을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이들의 퍼즐게임에서 나뭇잎들 속의 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한 경우에 비유할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의 나무만을 바라본다. 그러나 퍼즐의 해결자는 그 속에 숨겨 있는 얼굴의 형태를 주목하게 되며, 일단 그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게 된다. 이전의 모양이 이제 잎들이 아니라 한 인간의 얼굴이라는 특징으로 일시에 변한다. 일단 얼굴이 지각된 다음에는 늘 그것을 쉽게 다시 뽑아낼 수 있다. 이제 그의 지식과 경험은 그런 지식과 경험이 없는 타인들이 그것을 수용할 경우 그와 동일한 것을 지각하도록 허용하게 된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분과학문의 초기에 그 대상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최초의 창도자의 눈에 나타난다.
그러나 대상의 속성은 언제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지평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견의 하나로 알려진 그 어떤 것도 초기에는 막연하고 다분히 사변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새로운 대상은 그것을 마땅히 지칭할 만한 명칭이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최초의 창도자는 이전의 학문이 다루지 못한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사실을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대상이 아직 자신에게도 막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새롭게 전달할 수 있는 마땅한 언어가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 때문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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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새로운 대상을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전달하는 데 당장 어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창조적인 학자들이 뛰어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고유한 대상은 고유한 것으로 보아야지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새로운 분과학문이 출현할 때마다 그 학문이 기존의 학문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학문의 창도자는 그 대상의 자율성을 포착할 수 있는 내재적인 혹은 본질적인 개념들과 그들 간의 체계를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그 학문의 핵심개념을 구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적인 개념들을 구축한다. 새로운 대상세계로 인식적 관심을 전환시키는 데 필요한 범주와 분류는 무엇인가? 그것의 현실 수용도나 여타의 효과성 여부를 떠나서 그것 자체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장치는 무엇인가?
어떤 독특한 무엇이 그 무엇의 성질로 나타날 수 있는 방식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그렇게 용이한 작업이 아니다. 기존의 친숙한 개념이나 언어를 사용하면 그 대상 자체가 이미 친숙했던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 이 때문에 자율적인 학문을 성립시킨 초기의 단계에서는 거의 항상 모종의 배타적인 방식의 개념화가 필요했다. 새로운 학문적인 사실을 포착한 사람은 그것을 새롭게 부각시킬 수 있는 개념망을 창조적으로 구축해서 그것이 기존의 어떤 다른 사실로 환원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현존하는 사회현상을 이런 방면에서 정리하고 분석한 글룩스만(M. Glucksman, 1974)은 자율적인 학문을 설립하려는 학자의 편에서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불가피한 요망사항인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어떤 학문이건 간에 스스로 자율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연구 영역이 정의되고 그것 자체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 개념들은 은유의 수단으로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된 기존의 학문으로부터 차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조건은 이론가들의 편에서 연구의 각 단계마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높은 수준의 자의식을 유지해야 할 것이 요청됨을 의미한다(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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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대상이 새로운 세계라면 그것을 묘사하는 데 취해야 할 한 가지 금기사항은 그것을 기존학문의 개념을 빌려 포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외래학문의 개념은 외래의 사실을 포착하는 개념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개념은 그 외래학문의 전체체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을 빌린다는 것은 그 외래학문의 전체에 종속되는 위험을 스스로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무엇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은 단계에서 손쉽게 그것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방식의 하나가 그것이 그것 밖의 어떤 인접한 것과 가지고 있는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산되는 외부적인 환경이나 혹은 그것이 생산하는 어떤 외부적인 효과 같은 것이 그것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그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데 일방적인 편견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 무엇과 자체의 속성으로서 관계를 맺을 외부적 세계나 효과는 거의 무한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공유하는 관심이나 연관관계를 갖는 전체성에 대한 보장이 없는 단편적인 지식들이 쌓여서 분과학문이 성립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런 잡동사니를 하나의 학문에 속하는 것으로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적인 울타리에 불과한 것이다. [각주 35: 수박과 사과가 섞여 있는 한 무더기의 과일들을 모아놓고 누군가가 그것이 오이라고 우긴다면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수박 · 사과 · 오이는 동일한 무더기로 분류될 수 없다는 점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하나의 분과학문 내에서 허용되는 주제나 이론구성 사이의 차이는 그것과 다른 분과학문들과의 차이보다 훨씬 적어야 한다. 실제로 이들은 하나의 울타리 내에서 모종의 실질적인 중첩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의 발전과정에서 그 중첩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전조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역사적인 전개과정에서 이런 통합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질적인 것을 동질적인 것으로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해당 학문에 혼동을 일으키고 그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다른 분과학문의 체계로 분리시켜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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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인식대상을 발견한 학자는 우선 그 대상을 전체로서 조감할 수 있는 통합적인 안목을 가지고 그의 이론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개념의 분화와 통합의 과정을 거쳐 조정하고, 이를 통해서 대상의 구조에 부합한 전체의 범위를 대략적으로 밝힌 다음, 그 범위를 경계로 삼아 범위내의 개념과 범위 밖의 것을 분명하게 확정 지워 나가야 한다. 연구가 그 영역의 경계를 확정할 단계에 이르면 연구의 대상을 명확하게 정의한다. 그 경계를 중심으로 대상의 본질적인 측면과 비본질적인 측면, 내재적인 것과 외재적인 것을 구분한다. 인과론적인 학문 혹은 이론의 경우 그것은 이른바 “내생적 변인(endogenous variables)”과 “외생적 변인(exogenous variables)”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학문내의 응결력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서 그런 구분이 가능한 경계들이 타당성을 가질 때, 우리는 전자의 것으로만 구성된 지식을 하나의 자율적인 체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된 각종의 분과학문을 포함해서, 각각은 그 분야에서 분류된 현상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일단의 특수한 개념을 고안하여 왔다. 각각의 전형적인 분과학문은 그들의 내생적 개념들 가운데 어떤 것이 분명한 조건에서 다른 것을 함축하며, 그 함축하는 것이 또 다른 것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서로서로 긴밀한 연관을 맺도록 하면서 일단의 의미와 원리를 창출해낸다. 이런 의미론적인 전환과 주체성의 확립과정에서 준수되어야 할 중요한 원칙은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주변적인 개념들이 그 체계 밖의 다른 학문의 개념과 관련을 맺고 그 내부적인 것으로 동화될 수도 있다. [각주 36: 마치 체외의 오이가 소화과정을 거쳐서 그것이 이제 원래의 오이와는 다른 신체구조의 일부로 동화될 수 있듯이.] 그러나 그것은 우선 내성적 개념이 외래적 개념을 충분히 제압하면서 영토적인 독자성을 견지할 수 있을 만큼 내적인 통합성을 먼저 성취하고 난 다음의 문제이다. 만약 충분한 정도의 개념적인 독자성이 확보되었다면, 내생적인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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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그것의 외부적인 효과의 관계를 규정함에 있어서 전자가 후자를 동화시킬 능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분과학문의 저술에서 그 분석단위와 그에 따른 경계는 대부분 암묵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두부를 자르듯이 구체화되어 있지 않으며, 사실상 그것이 정당화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게다가 학문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그 경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고, 또 흔히 변화해 왔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때그때의 진전상황에 따라 추가 · 병존 · 분화 · 재통합의 과정을 거친다. 혹은 사실상 전혀 정당화할 수 없는 가정이 아무 의심도 없이 관례적으로 전승되고 있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사례도 발견된다.
이것은 분과학문이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그 대상의 의미를 조정해 나가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기왕 우리가 대상의 구조와 지식의 구조에 관한 논의를 마쳤으니까 그 조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제 대상의 구조란 그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망을 통해서 포착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았다. 분과학문의 지식을 구조의 차이로 인정해야 할 이유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어느 정도 이해되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가 말하는 분과학문은 하위세계의 포괄적인 범위와 그것을 그 내부의 독특한 요인들과 상호연관시켜 설명하는 일단의 지식체계의 확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부분들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구조에서, 어떤 한 부분에 대해서 다른 부분(들)이 맥락의 구실을 해준다. 이 때문에 그 대상의 범위를 지정하지 않은 구조는 거의 무의미한 개념이 된다.
학문들의 진술체계는 모두가 일련의 이론들로 구성된 체계나 모형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 분야들을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오직 그 모형을 구성하는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포괄성의 정도와 그 전체의 단위와 관련된다. 학문을 분류함에 있어서도 그 차이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학문의 구조” · “자연과학의 구조” 그리고 “물리학의 구조”라는 말이 있을 때, 그것들은 전체성의 범위에 있어서 엄청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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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있는 상이한 구조들이다. “분자의 구조”와 “원자의 구조”가 판이하듯이, 이들 역시 전체의 범위에 있어서 분석단위가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분과학문이라고 할 때, 원칙적으로 그들은 언제나 그 전체론적인 분석의 과정을 거쳐서 타당성을 검토받아야 한다.
분과학문은 적어도 분과학문의 인식대상을 총괄하는 문제의식이나 지식의 구조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관심이나 주제의 단위이다. 그 단위가 크면 포괄영역도 크고, 그에 따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도 다르게 규정된다. 여기서 구조의 전체에 주목할 때, 그것이 대상을 말하는 것이냐 혹은 그 대상을 포착하는 이론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구분할 필요도 있다. 가령, 자연계에서 거시적인 고전물리학의 관심사였던 우주는 ‘극대체계(macro-system)’인 데 비해, 그 후 등장한 미시물리학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원자는 ‘극소체계(micro-system)’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대상은 공간 면에서의 크고 작음 그리고 시간 면에서의 길고 짧음이라는 특성에 의해서 분석되는 요소도 달리 규정할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은 그 중간의 어떤 자율적인 세계를 단위로 학문의 체계를 구성해 나갈 수도 있다. 여기서 이런 분류는 그 학문의 규모와 깊이와는 무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갖는 단위에 불과하고 학문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별도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과 원자를 연구하는 물리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규모가 크고 깊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대상의 물리적인 규모보다는 각 분야의 학자들의 업적과 관련하여 별개의 사항으로 평가될 성질의 것이다.
분과학문의 영역 가운데 통상 가장 넓은 포괄범위로서 ‘자연과학’ · ‘사회과학’ · ‘인문과학’이 있다. 우리가 이들 분야들을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때 우리는 그런 명칭의 대상이 갖는 모종의 독립된 세계와 그것의 구조성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세계는 하나라는 가정이 있을 수 있고, 그 가정에 따른다면 이들 사이에는 어떤 원칙적인 단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이들을 한 울타리로 묶는 전체적인 의미의 거대 지식체계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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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명실상부한 “학문의 구조”를 얻게 되는 날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 때는 지금처럼 ‘자연과학’과 같은 비교적 그 포괄범위가 넓은 분과학문의 논의조차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소규모의 전체성을 가진 분과학문의 구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자연과학 · 사회과학 · 인문과학이라는 포괄적이고 범위가 넓은 지식체계가 흔히 거론되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보면 다만 명분에 그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하는 지식의 구조를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 하위의 범위로 규정한 각 분과학문에서도 지식의 포괄성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하위이론들이 있다. 그런 세부적인 하위영역이 불가피할 때, 우리는 그들을 분과학문의 전체적인 지식체계라기보다는 더 세분된 전공, 혹은 좀더 특수한 지적인 의미영역으로 국한시킨다. 만약 세분된 지식이 지나치게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 그 범위를 확보하고자 한다면, 역시 그 범위 내에서 구성요인들을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지식의 체계성을 의식하지 않고 단지 부분 부분의 지식을 합산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의 자율적인 지식체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여 현존하는 분과학문을 점검할 때, 아직도 그 경계가 모호한 사례가 허다하다. 자연과학의 경우를 들어보자. 우리는 최초에 ‘자연’이라는 말에서 어떤 공통성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분명해지는 것은 그것이 하나로 해석되기보다는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이질성을 가진 복수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은 아직까지 그 하위 분과학문을 총괄하는 넓은 의미의 지식의 요소와 총체적인 구조를 가진 것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최소한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등의 구분이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 분류되는 자연과학의 분과학문은 많은 경우 오랫동안 서로 다른 것으로 보였던 것들을 통합하는 새로운 질서를 하나씩 하나씩 발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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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학문체계의 변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전문 분야를 형성했다. 예를 들어 19세기를 통해서 자리 잡은 물리학 분야는 그간 수학의 일부로 생각되어 온 역학 · 靜力學 · 기하 광학 등의 지식을 비롯해서, 자연철학의 일부를 이루어온 여러 주제들, 그리고 빛 · 열 · 전기 · 자기 · 소리 · 기체 등에 관한 여러 갈래의 경험적 · 실험적 지식들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그 당시의 자연관이 아직 피상적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오관을 통하여 얻는 감각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감각적인 사실들이 개별적으로 탐구되다가 이들이 같은 현상의 다른 측면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이 때는 이러한 방법으로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그간 수학이라는 하나의 분야를 이룬다고 생각되어 온 내용들 중 많은 부분이 물리학 · 천문학 등으로 나뉘어 갔다. 화학분야도 자연철학 · 연금술 · 의학 · 약학 · 금속학 · 생산기술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이 새로운 화학 이론체계를 바탕으로 모여 정리된 것이다. 역시 19세기 동안 자리 잡은 생물학분야도 자연철학 · 자연사 등에 포함되었던 내용들 이외에 생리학 · 해부학 · 약물학 · 식물학 · 동물학 등에서 별개로 다루어지던 여러 주제들이 모여서 생물현상을 다루는 하나의 과학분야를 이룬 것이다.
이런 사정은 ‘사회과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일반인은 물론 학문계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는 개념이지만, 이것이 단일한 문제의식이나 개념체계를 가지고 있는가에는 아직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분야에서 산출되는 지식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을 수 있는 “사회과학의 구조”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이 현 단계로서 부정적인 것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말하여 “하나의 사회과학(a social science)”이 아니라, “사회에 관한 제 과학(social sciences)”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법률학 · 정치학 · 경제학 그리고 경우에 따라 역사학 등의 이질적이고 복수적인 분과학문의 집합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이라는 범위의 포괄적인 분과학문은 그 내면의 실정에 비해 지나치게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는 평을 모면하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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렵다.
오늘날의 세분된 분과학문이 더 세분될지 혹은 더 포괄적인 구조로 통합될지는 지금으로서 단정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가 접하는 학문의 세분화된 양상은 그것을 하나로 볼 수 있는 통합적 안목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르긴 해도 그 저변에는 이와 같은 개개의 분과학문으로 분리시킬 수 없는 모종의 거창한 전체성이 있고, 그 안에 각각의 것이 통합될 수 있다는 갈망도 있을 수 있다. 서로 동떨어지고 분리된 지식보다는 그들을 하나로 묶는 통합적인 지식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을 만족시켜 주는 하나의 지식이 현 단계에서 실제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실현시키려는 논의는 그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 중의 하나는 이른바 지식의 환원가능성에 대한 논의이다. 전문적으로 말한다면, 이론적인 환원이란 한 이론의 기본가정 · 법칙 및 개념을 다른 이론의 것들로 대치함을 뜻한다. 환원의 문제는 적어도 T1과 T2라는 그 나름으로 독립된 설명체계를 가정하고, 그들 중 가령 T1이 아무런 정보상의 손실이 없이 T2로 ‘흡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때 일어난다. 만약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이득은 학문의 경제성이다. 우리는 적은 개념으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의 설명체계가 두 가지의 설명체계를 대신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더욱 간결하게 세계에 대한 설명이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횡적 상대성의 지위를 향유해 왔던 분과학문 간에 환원의 문제가 가끔 제기되기도 한다. 이제까지 서로 계열을 달리하며 횡적인 독립성을 인정받던 두 개의 개별적인 분과학문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으로 환원될 가능성은 없는가? 이를테면 생물학은 물리학으로, 심리학을 신경생리학으로, 사회학을 심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식의 희망적인 견해가 심심찮게 표명되기도 한다. 한편, 그런 견해는 이른바 ‘出現(emergence)’의 현상을 들어 반박되기도 한다. 점차 조직수준이 고급으로 증가하는 물질은 단순한 조직을 가진 물질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은 물리학과 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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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개인이 모여 이룬 사회는 그 개인 모두의 개별적인 성향과는 다른 출현적 현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사회학은 심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대개 이런 식의 논박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러나 분과학문 간의 환원은 가능성으로 제시될 뿐, 역사상 실제로 그런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학문 전체로 볼 때 학문의 경제성이라는 이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원되는 분과학문의 입장에서는 그 학문이 더 이상 존속될 이유를 잃게 되는 셈이다. 이것은 환원되는 학문공동체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또한 만약에 증명되지 않은 근거로 환원이 주장되고 수락된다면 우리는 그만큼 환원당하는 이론체계가 가진 정보를 부당하게 잃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과학철학자인 라이안(A. Ryan, 1973)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사태의 진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뉴턴의 기계론의 성과와 그에 따른 원자주의는 오랫동안 물질의 운동을 다루는 과학으로부터 모든 과학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야망의 상징이 되어 왔다. 이런 비유법에 의해서 사회학을 심리학으로, 심리학을 생리학으로 각각 환원시키고 종국에는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으로 완전하게 환원시키는 길을 닦아 보겠다는 야심이 자주 있었다. 그런 프로그램의 적절성은 과학철학에서 피비린내 나는 쟁점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논의에서 한 가지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환원되는’ 과학에 속하는 용어들이 그것을 ‘환원하는’ 것으로 제안된 과학의 용어와 논리적인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환원의 과정은 연역적인 방식으로 직접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 환원이 연역으로 동화될 수 있는 정도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우리의 관심이 아니며,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유의 읽기를 통해서 확실해진 사실은 ‘환원된’ 과학이 단지 그들이 환원되는 과학의 일부나 혹은 특수한 경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따라서 자연과학의 범위를 확장한 경험적 사실의 결과이며, 철학적으로 단순히 등기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는 아닐 것이다. 화학은 화학자들이 어떤 종류의 화학적 현상은 물리적인 설명의 범주에 든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물리학의 한 분과영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회학은 설사 사회생활이 우리들과 유사한 유기체의 행동가능성에 의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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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이 많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단지 생리학의 일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p.3).
학문의 발전 가운데 한 가지 두드러진 측면은 이제까지 검토해 온 바대로 그 범위가 횡적으로 꾸준하게 세분 · 확장되어 온 사실이다. 만약 서로 판별되어야 할 대상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자율적인 가해성을 요구하는 세계가 있다면, 그것을 서로 혼동되지 않게 분할해내는 것이 분과학문의 역할이고 기능이다. 지금까지 분과학문은 그 일을 해왔고, 앞서 라이안의 지적처럼 그들 사이에 환원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환원의 가능성에 관한 사항은 논쟁에 그칠 것이 아니라 입증을 요청한다. 그것이 입증될 수 없는 한, 우리는 각각의 학문이 독자적으로 드러낸 세계를 당분간이나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현 단계에서 우리는 생활의 저변에 서로 환원되어서는 안 될 세계들이 있고, 그들 각각에 대한 우리의 경험 역시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각각의 구조에서 어떤 인식대상의 의미를 구성할 때, 그 대상의 개별적인 요소들을 독립적으로 지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경험양상은 실재의 일부이기보다는 제한된 관점에서나마 전체에 대한 경험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는 그 전체와의 관련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경험의 양상은 의미상으로 독립적인 것이다. 이런 개별적인 구조적 체험을 “경험의 제 양상(modes of experience)”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오우크쇼트(1933)는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경험의 양상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들 경험의 양상들 가운에 어떤 두 가지의 것도 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관념의 개별적인 추상세계는 경험 전체의 한 가지 특수한 조직으로서 여타의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서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관념의 세계의 어떠한 한 가지로부터 다른 것으로 논점을 통과해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점을 통과해 나갈 경우 우리는 혼미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시도에는 논점이탈의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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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ignoratio elenchi)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시도는 우리가 범하는 오류 가운데 가장 미묘하고 방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상호 무관하고 독립되어 있는 것들을 유관한 것으로 혼동하는 오류를 낳는다(pp.75-76).
한 가지 경험의 양상에서 유관한 것이 다른 경험의 양상에서는 무관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 경험의 양상을 다른 경험의 양상에 비추어 설명하려는 것은 논점이탈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오우크쇼트 자신은 이처럼 서로 다른 경험의 양상 간의 환원이 무의미함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른바 “역사적 경험” · “과학적 경험” · “실제적 경험”의 세 가지 다른 양상의 경험을 구분해내었다. 이들은 체험구조상 전혀 다르고 독립적인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의 양상들 가운데 어떤 것도, 어떤 의미에서건, 다른 것에 기초를 두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해서 도출되거나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예컨대, 역사적인 경험양상에 비추어 과학적 경험양상을 설명하려는 것은 오류이다. 여기서 오우크쇼트가 예증한 세계는 설명을 위한 방편일 뿐, 그는 우리가 분리해낼 수 있는 경험의 수는 “이론적으로 거의 한계가 있을 수 없다”(p.75)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 생활의 저변에는 임의로 선택해서 경험할 수 있는 독립된 세계가 많고, 분과학문은 그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각주 37: 우리는 앞(2.3.2.)에서 학문적 체험과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세계내의 체험을 구분하였다. 앞서 환원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넓은 의미의 환원은 비학문적인 세계에 대한 체험을 학문적인 체험으로 환원시키는 오류이다. 가령, 윤리의 세계를 단지 윤리학의 세계로 혹은 예술의 세계를 미학의 세계로 대치하려는 것이 이런 오류에 속한다.]
3.3.4. 종적 상대성
분과학문의 발전은 한 측면에서는 횡적 경계의 확장이며, 다른 한 측면에서는 종적인 수준의 향상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후자가 사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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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적으로 볼 때 더욱 흥미있는 학문의 발전양상인 것이다. 이 두 가지 발전 양상은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분과학문이 횡적인 확대과정에서 자율적인 지위를 향유하게 되는 조건의 하나는 그것이 종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횡적인 확대는 종적인 수준의 발전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분과학문의 장래는 영구히 보장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자율적인 학문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으려면, 종적인 발전의 매력을 잃지 않도록 매순간 분투해야 한다. 학문을 생물로 비유할 수 있는 것도 그 성장의 조건 때문이다. 지식은 추상적으로 말할 때 유능한 탐구의 결과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탐구는 그 결과가 지양되고 새로운 지식을 잉태할 수 있을 때만 지속될 수 있다. 한때 화려하게 분과학문의 지위를 향유하다가 성장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도중에서 사멸한 학문도 역사에서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다. [각주 38: 그 예가 점성학(astrology)이다. 점성학은 세계의 운행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무수한 학자들에게 큰 매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별들을 보고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늘날 미신으로 여긴다.]
종적인 발전의 축으로 볼 때 분과학문이란 지식의 계승이 아니라, 공통된 관심의 계승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 될지도 모른다. 한 분과학문 내에서 지식이 계승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동일한 지식체계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문과 같은 인간의 실천 영역을 두고, 그 안에서 어떤 고정되거나 변치 않는 지식을 가정한다는 것은 헛된 기대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은 지식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 변화는 새로운 것의 추가와 같은 비교적 단순한 것에서부터 지식체계 전체의 동요와 변형까지를 포함한다. 후자의 경우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전체적인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 어떤 것이 계속적인 관계를 보장하는가?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많은 경우 모종의 공통된 관심, 그리고 이에 따른 개념의 전승과 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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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현상, X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 여기에 어떤 해답이 주어지고, 그 해답을 부정하거나 쇄신하는 또 다른 개선된 해답이 제시된다. 각 분과학문의 학문공동체에서는 구성원간에 하나하나의 문제에 있어서 종래의 학설을 검토하고 비판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전개한다는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이전의 지식과 이후의 지식이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더라도 앞 사람의 도달점이 뒷사람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X라는 현상을 계속적으로 해명하는 공통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해답을 개선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대개 후행자는 선행자의 업적에 주목하면서 그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결국 분과학문이 추구하는 고유한 대상과 방법의 특수성이 점차로 심화된 양태로 드러나는 경로를 밟는다.
우리는 한편으로 X라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활동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주관적 구성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경험을 하며, 그 경험을 기초로 그것에 대한 이론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학문을 함에 있어서 실제로 대상세계의 양태가 어떠한지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전문적인 자질과 수준 높은 이론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앞서 검토하였다. 그 X는 오직 장기간의 수련된 안목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경험은 오직 우리가 이전에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애초의 개념을 의미 있게 다른 것으로 쇄신할 수 있을 때에만 보장된다. 만약 인식내용이 그대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로써 경험의 수준이라는 하나의 축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학문적인 대상은 결코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입체적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지식의 종적 상대성이란 바로 그런 입체성을 만드는 학문의 다른 차원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분과학문의 대상이 구조의 형태를 띤다고 가정했다. 그것이 구조가 아니라면 독립된 것으로 간주할 이유가 없다. 그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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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역시 구조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분과학문의 지식은 어느 경우나 그 이전의 지식의 구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당장 미칠 수 있는 대상세계에 불과하며, 우리가 장차 도달할 수 있는 대상세계는 아직 아니다. 여기에 개선의 여지가 있으며, 차선의 구조가 늘 출현한다. 이들은 같은 사실을 기술하지만, 그 같은 것은 이미 서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모순과 대립이 불가피하며, 그 중 어떤 것이 선택된다. 발전하는 분과학문은 이처럼 좌절과 창조를 통한 끊임없는 쇄신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분과학문마다 그들 나름의 지식의 피라미드(혹은 ‘길’)를 쌓아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각 분야의 지식이 단지 평면적으로 정연하게 누적되어 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가 생겨난다. 앞에서 우리가 검토한 바대로 학문적인 대상은 항상 전체의 이론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대상은 그 이론의 깊이와 수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학문의 활동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진행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그 대상 역시 현재로서 포괄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에 일부 밝혀졌고, 지금 밝혀지고 있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밝혀질 어떤 것이다. 여기에는 단지 양적인 누적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가 수반된다. 즉, 한때는 그런 것으로 보였으나 알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이전에 이루어졌던 인식에 대한 전체적인 부정과 쇄신이 이루어진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적 발전은, 누차 이 저서에서 강조했듯이, 누적적인 방식으로 일어난 적이 없다. 물론 하나의 대상에 대한 전체의 구성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발전은 누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누적적인 것이 한동안 이루어지다가 그 후에 이전에 있는 지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새로운 이론이 나와서 이전의 지식을 대체하는 방식의 혁명이 늘 일어났다. 여기서는 약한 체계와 강한 체계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지식이 발전되는 과정에서 이전의 것이 이후의 것에 비해서 파괴 혹은 부정되거나 흡수 혹은 통합된 경우는 많다. 이 경우는 분과학문 간의 싸움이 아니라 분과학문내의 내분에 해당한다. 이런 환원의 현상은 한 분과학문의 내부적인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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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것은 유기체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비유될 수 있다. 이를테면, 올챙이와 개구리는 전적으로 구조가 다르지만 동종의 다른 수준이다. 이들은 동일한 유전자群으로 되어 있으며 생활사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에 어느 한 개체가 이 두 가지 형태를 함께 표현할 수는 없다. 만약 올챙이가 개구리의 변태 이전의 모습인 것을 우리가 모른다면, 이 둘은 서로 다른 종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그 발생적 환원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종의 차이가 아니라 수준의 차이임을 알려준다.
종적인 다양성은 횡적인 다양성과는 달리 수준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전의 지식체계가 이후의 것으로 흡수되거나 부인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오히려 재고정리의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비교적 발전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자연과학의 경우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분야에서는 다양한 지식체계가 경합에 참여하여 그 중에 강자가 약자를 흡수하거나 변형시키거나 대체시키고 있다. 이 경우 그들은 자연과학이라는 범주 내에 포함된다. 따라서 분과학문의 체계는 그 발생의 연속성에 주목하여 규정할 수 있다. 지식의 구조라는 면에서 서로 판이하지만 그것이 발생적으로 같은 계열에 있을 때, 그들은 같은 현상을 다루고 있는 같은 학문의 계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학문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지식의 발전과정에서 최첨단의 것이 당대의 왕위를 차지하게 됨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과거의 것이 되어 간다. 이전의 이론은 각각 그들 나름의 수준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고 예언해 주지만, 이후에 그것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이론이 출현함으로써 그 이론의 한 부분이 되어 더욱 간결한 체계로 흡수된다. 학문의 발전은 이에 덧붙여 이전의 이론이 가진 그릇된 가정이나 전제를 지적함으로써 이전의 이론이 더 이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도록 한다. 말하자면 이 경우는 단지 설명의 폭을 넓히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설명의 혁명을 동반한다. 이와 같은 지식의 혁명적인 대치는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언제나 그 분야의 전체적인 발전으로 이어져 축복을 받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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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전의 역사에서 위계의 순서에 정연한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물리학의 경우를 들어보자. 앞서 물리학은 최초에는 빛 · 열 · 전기 · 자기 · 소리 · 기체 등 어떤 가시적인 특징을 따라 서로 상이한 분과를 형성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공통된 현상의 다른 측면으로 밝혀지면서 이전의 것이 이후의 것으로 점차 대체되고 통합된다. 예컨대, 전기는 17세기 초에 길버트(W. Gilbert)에 의해서 자기와 다르다는 것이 발표되어 전기학과 자기학은 서로 양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의 앙페르(A. Marie Ampere)에 의하여 전류의 자기작용이 발견되고, 영국의 패러데이(M. Faraday)가 자계의 변화가 기전력을 발생시킨다는 전자유도의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전기와 자성은 연결되었다. 맥스웰(C. Maxwell)은 그들을 빛과 통합시켜 한 단계를 더 발전시켰다. 아인슈타인(A. Einstein)은 시간과 공간 · 에너지와 질량 그리고 태양을 지나 온 빛의 행로와 탄환의 비행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이와 같은 유사성들에 다른 하나의 유사성을 추가하려고 노력하였다. 브로노브스키(Bronowski, 1965)는 그 과정이 제대로 되었다면, 맥스웰의 공식들과 그 자신의 중력기하학을 통합시키는 단일한 상상적인 질서를 수립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pp.15-16).
물리학에서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치된 것은 혁명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로 고전물리학의 발전은 이런 방식의 환원을 잘 입증하고 있다. 고전물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초기에 케플러의 천체운동설과 갈릴레이의 자유낙체법칙은 뉴턴의 중력이론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뉴턴의 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후자는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태양계 밖에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이 새로운 물리학도 그 후 원자나 분자의 운동을 다루게 되면서 고전 물리학의 한계가 드러나자, 이제까지의 역학이론을 고전역학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지식체계와 구분을 짓게 된다. 이 단계에서 열역학이 확률역학으로 흡수되었다. 각각의 지식은 그 나름의 수준에서 진리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여기서는 어느 지식체계가 더 높고 낮은 수준의 것이냐를 판별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고, 이 문제가 어떤 절차에 의해서건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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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난 후에는 그 흡수가 불가피한 선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기술은 사태의 진상을 너무 축약시킨 것이다. 각 분야는 결과적으로 어떤 범위의 공분모적인 문제영역을 갖지만, 그것이 반드시 잘 정리된 형식적인 절차를 따라서 계승되고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개별학문의 역사를 다루는 개론서는 어떤 무질서한 여러 가지 시도를 사후에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분야에서는 한동안 종적인 상대성의 우열이 판가름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극단의 경우 학자의 수만큼 서로 다른 이견이 제시되면서 모종의 재구성과 정돈의 단계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정치학에 있어서도 국가의 본질규정 및 정의와 더불어 정치학의 대상인 ‘정치현상’의 의미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논쟁의 여지는 항상 남아 있다. 가장 전통적인 학문분야에서도 개념화와 이론들은 계속해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고, 어떤 사실적인 결론조차도 때에 따라 변전한다.
간혹 어떤 시기에 분과학문의 성격 · 내용 · 방법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새로운 분과학문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 분야 내에서 다른 세분화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같은 현상으로 보았으나 차츰 그 실재가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가 하면, 애초에는 다른 현상인 것으로 탐구되었다가 결국 같은 현상의 다른 측면인 것으로 밝혀져서 서로 그 관심영역을 통합시킨 경우도 있다. 경우에 따라 새로운 분야가 하나의 혼합종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이 점을 유념할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분과학문의 경계도 앞으로 어떻게 재편성될지 현 단계에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시차를 두고 발전된 양쪽의 언술내용들은 그것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피상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그 후에 출현한 제 3의 새로운 이론체계 내에서의 그들의 의미를 따져보면 실제로 같지가 않다. 그러니까 분과학문의 대상도 수시로 바뀌어지는 셈이다. 따라서 학문적인 대상은 우리가 아는 것이자 또한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라는 뜻도 된다. 학문사를 통하여 볼 때, 이런 변증법적인 운동에 의하여 새롭고도 진정한 대상이 끊임없이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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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궁극적인 대상을 계속 해명해 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이것의 속성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타당할 것이다. 대상에 관한 내용의 문제는 개별적인 학문계에서 그때그때 방편에 의존해서 규정해 나갈 문제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동일한 분과학문은 동일한 개념을 좀더 나은 이론적인 맥락 속에 정치시키는 양태로 이루어진다. 학문의 재편성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포함된 개념은 전체구조의 맥락에 비추어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가령, 물리학에서의 ‘중력’, 생물학에서의 ‘유전’, 기하학에서의 ‘평행선’, 심리학에서의 ‘성격’, 사회학에서의 ‘계층’, 경제학에서의 ‘수요’ 등이 그 분과학문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이들은 분명히 그것이 소속한 학문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맥락 자체도 다소간의 유동적인 변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경우 변화 이전과 이후의 맥락적인 의미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따라서 어떤 분야의 개념도 똑같은 의미가 계속 유지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렇게 달라지는 것을 포함하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짐으로써 학문의 연속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분과학문이 가지고 있는 ‘명칭’ 역시 이런 유예를 담보로 지속된다.
우리는 앞서 분과학문을 단지 현재 이루어진 결과를 놓고 이해하는 방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임을 지적했다. 분과학문은 역사적 진화의 산물이다. 어떤 분과학문이건 중심문제는 선험적으로 단번에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발달에 따라 변화하고 재정립된다. 그것들은 애초부터 어떤 합의된 개념체계와 전략의 연계가 없이 국지적으로 탐색된 산발적인 활동의 결집된 형태이다. 연구영역은 먼저 나온 학자의 업적을 뒤에 나오는 학자가 이어받아 점차 정련시키는 과정에서 확정되어 간다. 말하자면 이들 분과학문은 공통된 관심영역을 서로 릴레이 하는 방식으로 연구해 나가며,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범하도록 되어 있다. 그만큼 분과학문적인 사실은 적어도 인식의 수준에서 유동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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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구성요소들이 끊임없이 재조직되는 과정이 반드시 그 분야의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문의 진보를 위해서 실패는 성공만큼 중요하다. 또한 우수한 학자들은 남의 실패작에서도 새로운 발견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라는 차원이 예리하게 부각되면서 모종의 발전방향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혼동과 무질서 속에는 또한 그것을 정리하는 모종의 표준적인 개념과 방법이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내적인 결속이 이루어진다. 모든 논쟁은 고심하는 방식으로 심각하게 검토된다. 보고는 보고자의 웅변이나 피상적인 그럼직함에 호소해서 얼렁뚱땅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논쟁은 일화적인 것이나 우연히 얻어진 증거로써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런 가운데 각 분야의 학자들은 어느 정도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 믿을 만한 것과 미완료적이고 의문스러운 것을 골라내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흐름이 있는 모종의 전통을 갖게 된다. 예컨대, 수학자는 공리에 의한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학자는 문헌의 일차성을 거론하며, 실험적인 자연과학자는 관찰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며, 유관한 것인가를 규정하는 데 참여한다. 이런 문제가 제 5장에서 다루어질 방법론의 주제이다.
어떻게 지식이 형성되며, 그들 간의 우열은 어떻게 판정되는가? 여기에는 다양한 학설이 있고, 그들은 각각 일면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질구질한 문제를 떠나 우리가 만약 각 분과학문의 역사를 무질서하게 진열된 이론들의 진열장으로서가 아니라, 비연속적인 과정을 동시에 포함하는 일종의 자기발전적인 변형으로 간주한다면 특수한 문제의식에 의해 매개된 변증법적인 발전이 그 속에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경우 그 이론들은 우리가 말하는 종적 상대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의 종적 차원은 학문계에서 “진리의 탐구”라는 어휘를 실감나게 한다. 우리는 처음에 X를 x1으로 규정하고 다음에 새로운 경험을 토대로 그것을 x2라고 재규정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X에 대해서 x3, x4, ..., xn이라는 다른 수준의 경험을 계속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을 쇄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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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개선하는 가치평가기준이 학문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체험은 대상과의 궁극적인 만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의 점진적인 접근에 의해서 가능하다. 말하자면 진리는 대상에 대한 이전의 경험과 지금의 경험이 이중적으로 조명됨으로써 유래한다. 이전의 것이 허상화되고 새로운 것이 실재화된다. 이 경우 우리는 전자가 허상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진리가 오직 대상에서 유래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전의 경험과 이후의 경험 간의 발생적 대비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교육적 인식론”을 통해서 기존의 인식론을 보완하려는 하나의 총괄적 관점이다. 학문은 발전하는 세계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이 생산해내는 지식은 서로 모순될 정도로 지양의 형태를 남긴다. 그것은 변증법의 논리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순의 지양이라는 관점보다는 거기에 교육의 과정을 개입시켜 보고자 한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학문을 포함하는 모든 수도계의 종적인 상대성을 매개하고 화해시키고 검증하는 과정이다. 이런 해결방식은 하권 제 7장에서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제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