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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의 줄기 (사 11:1-5)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왔다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들의 생각과 항상 일치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언제나 우리들의 상식과 일치되는 것들이었는데 막상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들의 머리에 박혀 있던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이 무너져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는 이유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상식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단정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서로 다른 이유는 관심의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세상의 문제에는 하나님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부터 기존의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상식과 전혀 다릅니다. 보통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상식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들의 세상 문제에 관심을 두고 계시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는 와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입장에서의 상식이지 하나님 편에서의 상식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을 위해서 창조되어 졌습니다. 때문에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더러 피조물인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쓰여지는 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신자들은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하면서도 창조주더러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들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거부하게 되고 결국 여전히 자기의 뜻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종은 복종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계시된 참된 하나님의 뜻은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복종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을 굽히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이 말씀을 듣기 때문에 제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세상에서의 삶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앞에 나의 뜻을 굽히겠다는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계획은 세상의 더러운 것은 다 멸하시고 깨끗한 것만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때에 남을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하다는 인정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실 때 깨끗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깨끗한 사람이란 양심 바르고, 뇌물 안받고, 거짓말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보통 이런 사람들을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하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의 모습과 구별돼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 되고 더러운 것이어서 심판을 면할 수 없다면, 마지막 때 남을 자는 세상의 모습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지막 때 남을 자는 어떤 자인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깨끗한 것만 남기신다는 것은, 더러운 것은 다 쓸어버리고 그 중에서 깨끗한 것만을 골라서 남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깨끗한 것은 없습니다. 죄가운데서 모든 것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남겨놓으실만한 깨끗한 것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때 남겨놓으실 깨끗한 것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병든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나무가 뿌리는 성한데 가지가 병이 들었다면 가지만 잘라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뿌리까지 병이 들어서 도저히 고치지 못할 상태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든 나무는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깨끗한 나무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뿌리까지 썩어버린 상태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뿌리째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 깨끗한 나무를 심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뽑힌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한 인물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지막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질 성도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지막때 남을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에 합당한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새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성경에서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서 뭔가 위대한 일을 했다는 기사도 없습니다. 유명한 것으로 치자면 이새보다는 다윗이 더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이새의 줄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싹이 난다는 이야기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면 '이새의 줄기'라는 말보다는 '다윗의 줄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새의 줄기이든, 다윗의 자손이든 이 의미들이 혈통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약속을 따라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새의 줄기라는 것도 이새의 계보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새의 줄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새 당시의 상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새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다윗은 아주 어린아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새나 다윗이나 세상적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하면 생각나는 것이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골리앗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 왕다운 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골리앗 앞에서 꼼짝못하는 사울은 결국 왕다운 왕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골리앗 앞에 다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세상 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불신앙을 드러내십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 때문에 힘을 얻어 가지고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별볼일 없는 다윗을 택하셔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메시야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다스려지고 힘있는 자가 우대 받고, 힘이 없는 자는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이런 세상은 마지막때 뽑히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으면서 세상 방식 그대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고 힘을 원하고 힘을 가지기 위해서 힘썼던 교회 아닌 교회도 다 뽑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아궁이에 던져 넣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뽑힌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나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의 나라입니다.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변변치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나라입니다.
마지막 때 남을 자는 누구입니까?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만 경외하며 살았던 신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과 일치하는 신자입니다. 골리앗 같은 세상의 힘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그 힘의 지배를 받고 산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자는 힘에 굴복치 않고 오직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감으로 세상이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힘이 없음을 한탄하지 마십시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에게는 뭐가 없다고 해서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때 세상을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롭게 심겨질 나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 힘이 약함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힘을 믿고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뽑히고, 날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살았던 사람들이 남은 자로서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메시야 나라 (사 11:6-9)
여러분 가운데 천국에 가기 싫어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세상을 포기하라는 것은 싫지만, 살아서는 세상을 보장받고 죽어서는 천국을 보장받는다면 그것 같이 금상첨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금상첨화와 같은 천국을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애써 부인하려고 할뿐이지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도 그 천국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때로는 착한 일을 하려고 힘쓰기도 합니다. 착한 사람은 죽어서도 좋은데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기 때문에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천국을 대비하기 위해서 나쁜 일은 안하려고 하고,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간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가는 것이지 왜 꼭 예수를 믿어야 천국 가느냐는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별 수 없더라. 거짓말하고, 싸움이나 하고, 예수 안믿는 사람보다 더 악하더라'는 말로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안믿어도 착하게 살면 된다는 논리를 펴는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착하게 산다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천국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 힘으로 천국에 가지 못하고 예수를 믿어야 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은 착한 사람만 사는 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의지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땅에는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물론 그들은 착하다는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양심 바르게 사는 것을 가지고 착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착한 모습은 죄짓기 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죄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는 착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어떤 가능성도 두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천국에 가고 싶다면 '왜 천국에 가고 싶으신 것입니까?' "목사님, 천국은 좋은 곳이니까 가고 싶은 것 아닙니까?" 이런 대답은 안됩니다. 그냥 좋은 곳이니까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살아서는 세상을 보장받고, 죽어서는 천국을 보장받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교회를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교회를 나오는 나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도 뭔가를 기대하고 하게 될 것입니다.
왜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동안 천국은 죽어서 가는 좋은 나라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예수를 믿어왔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귀한 나라가 아니라 교회에 다녀준 대가로 가는 나라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왜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한마디로 "천국은 죄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의 대답이 시시하게 들립니까? 목사의 입에서는 뭔가 거창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다 아는 이야기라서 실망했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천국은 죄가 없는 나라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 많은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여러분은 세상사는 것이 쉽고 편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도 세상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고통과 눈물과 어려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눈물과 고통은 돈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식 때문일 수도 있고, 때로는 인간관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고통과 눈물의 세월을 살게된 원인을 항상 세상에 두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닙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은 남의 탓이 아니고 세상 탓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 자신의 탓입니다. 내 탓이라는 얘기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준 고통과 눈물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스스로 안고 살아왔던 세월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 탓인지 아십니까?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든 그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면 고통은 없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걱정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염려 걱정은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욕한다고 합시다. 내가 욕을 먹을 때 그것이 마음에 고통이 되는 것은 '왜 내가 욕을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에게 뭔가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애매하게 욕먹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한다고 해도 내가 나를 보지 않고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고통이 될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남편 때문에 속상하고, 자식 때문에 고통받고, 돈 때문에 친구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눈물과 고통 속에서 살게되는 이유는 그 누구 때문도 아니고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죄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이러한 죄가 없습니다. 천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한몸된 지체를 사랑하며 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눈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가 없는 천국이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제가 저를 포기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며 사는 죄가 너무 커서 그 때문에 고통이 떠나지 않기 때문에 죄가 없는 천국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죄가 없습니다. 경쟁도 없고 시기도 없는 나라입니다. 사람이 경쟁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남이 잘됐을 때 내 마음은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은데, 마음 한구석에는 나보다 더 나아 보이는 상대방을 향해서 시기가 일어나고 질투가 일어나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버려지지 않는 자신이 미워질 때, 바로 그러한 시기 질투가 없는 천국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없는 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두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의 이야기가 실제로 천국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국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천국은 이렇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오기도 했던 이야기입니다.
본문이 논란의 대상이 된 이유는 천국에도 동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때문입니다. 본문을 상징적인 표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천국에는 동물이 없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고, 실제 천국의 모습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국에도 동물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느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동, 식물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동, 식물은 없이 그냥 부활한 신자들만 있겠습니까? 사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동물이 있든 없든 나중에 천국에 가서 보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싸운다면 결국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편한 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본문이 그것을 언급하고 있으니까 성경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실제 천국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는 동물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이들은 본문을 천국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싸우는 죄악된 세상에 이새의 줄기로 오신 예수님이 일하신 결과로 사람들의 싸우는 성품이 서로 용납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성품으로 달라진 천국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의 달라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온 교회가 미움이 없이 시기도 없이 경쟁도 없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천국에는 동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천국에는 동물이 없다고 합니까?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마지막 심판때를 말하면서, 그때에는 하늘도 땅도 불에 타서 녹아지고 사라진다고 말합니다(벧후 3:10,12, 마 24:29, 히 1:10-12, 12:26). 이렇듯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없어지기 때문에 땅위에 있던 모든 동식물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동물의 부활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은 동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본문도 천국의 실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신자가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예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서 강한 것과 약한 것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본문은 천국의 실제 모습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천국도 동물이 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 65:25의 구절을 그 증거로 말합니다. 사 65:17절에서는 분명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나라의 모습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은 동물도 식물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또 로마서 8::19절을 보면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모든 피조물도 악해졌는데 피조물조차 그 죄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새나라를 창조하시면서 악한 세상을 다 버리시고 새나라를 창조하실 때 모든 동물도 다시 창조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천국도 동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 편한 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르게 봐야 합니다. 본문은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분이 일하신 결과로 이루어지는 나라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힘을 의지하고 힘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서로 싸우는 나라입니다. 힘의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남은 자는 누구입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분의 모습과 같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만 의지하며 산 자들입니다. 그 남은 자가 모인 나라의 모습은 약육강식이 아닙니다. 힘을 드러내지 않고 약자를 누르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는 고통은 누구 탓도 아닙니다. 힘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로 나 자신 탓입니다. 자기를 향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탓입니다. 그 누구도 탓하지 마십시오. 나를 욕하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도 다 내탓임을 아십시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 나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가 살아있는 세상이 싫어지는 것이고 본문과 같이 강자와 약자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천국을 기다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싸움이 있고 경쟁이 있고 시기 질투가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사시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은혜에 감사하며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남은 자를 부르심 (사 11:10-16)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아니면, 즉 성령이 함께 한 자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말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자에게는 계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가 전달되어져도 계시를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올 때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도로 나와야 그 말씀이 비로소 우리에게 계시로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즉 세상에서 잘되고 출세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그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를 잘되게 하는 복주시는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라고 할 때 그 말씀을 이해할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골치 아프고 지루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세상 것을 다 잃어도 천국만은 놓칠 수 없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점검할 것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입니다. 스스로 물으면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을 기호로 삼아서 남은 자들이 각처에서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기호로 삼는다는 것은 신호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이 신호가 되가지고 각처에 흩어져 있던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10:21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은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전에도 남은 자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남은 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0:24절에 보면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장차 앗수르가 애굽같이 너희를 치고 때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미디안 사람을 치듯, 애굽 사람을 치듯 앗수르를 멸하실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서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거민들이 주위의 나라와 먼바다의 섬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망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방 각처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을 모으시는데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그 원수를 갚아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선택하신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지금은 비록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고 그때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지금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존재한다면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사람 아닌 성도들은 뭡니까? 하나님의 선택이 나라 선택과 개인 선택, 이렇게 두가지가 있는 것입니까? 또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알려면 유대인이 회개하나 안하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애굽에게 열번째 재앙으로 장자 죽음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무조건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만이 살아난 것입니다. 제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믿는자들로서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면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던 것도 이스라엘에게는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의 희생이 귀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안다면 자기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린양의 피를 귀하게 여기고 그 피의 은혜만을 감사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삶을 보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 첫열매를 바치라고 하는 것도 단순한 헌물, 또는 십일조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이렇게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의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가나안 땅은 그들을 토해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은 혈통적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좇아 다니는 자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다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로 이 자리에 나오셨다면 우리는 다른데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관심 두고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수없이 말하는데 모두가 나를 잘되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은혜이고 사랑이지 나를 위해 죽으신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는 돈보다도, 자식의 출세보다도, 직장보다도, 사업보다도 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보다, 은혜보다 세상의 풍족함이 더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통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자리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한들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무리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친들 예수님께 돌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같이 이미 그 마음이 세상의 것으로 부요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갈급함이 있을 리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문밖에 세워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사랑이 없이는 한순간도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깊이 아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과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갑니까? 아니면 은혜와 사랑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으로 그 마음이 가득찬 채 부요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요함은 은혜와 사랑이지 결코 세상의 것으로 부요함을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신호가 되가지고 앗수르로 인해서 사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남은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는 것입니다. 앗수르 때문에 주위 여러 나라로 피신한 사람들이 앗수르가 멸망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럴 때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남의 나라에 살면서도 그 나라의 풍족함과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땅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이 주저없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살 때에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던 그 마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그와 같은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에서 남은 자란 어떤 자를 가리킵니까? 비록 앗수르에 의해서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살게 되었지만 언제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은혜의 땅을 소망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오라고 할 때 주저없이 살던 나라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살던 곳에 미련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재미에 빠져서 은혜도 사랑도 다 잊어버린 사람들은 아무리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더 재미있기 때문에 돌아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돌아오라고 할 때 두말없이 기쁨으로 돌아갈 남은 자란 어떤 자이겠습니까?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재미 때문에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가리켜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다운 모습은 간직하지 못한 채 단지 혈통을 가지고 이스라엘 행세를 한 사람들과 같이 성도가 성도다운 모습은 간직하지 못한 채 단지 예배당에 나오고 예배드리고 있다고 해서 성도 행세하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이미 모든 관심은 세상에 있고 돈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아무리 내게로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들은 척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남은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요즘 현대교인들은 바쁘다는 것을 최고의 변명거리로 삼습니다. 바빠서 신앙생활에 소홀한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바쁘고 싶어서 바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입니다.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간직한 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바쁜 것을 애타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들이 없습니다. 이미 돈버는 것이 목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쁜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이 천국에 오라고 하실 때도 바빠서 못가겠다는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쁘기 때문에 성도의 모임에 빠지게 되고, 교회의 여러 일들에 소홀해 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빠져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던 롯의 아내가 무엇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까? 그 좋은 세상을 내버려두고 떠나기가 아쉬웠던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바로 롯의 아내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세상을 떠나기 싫어하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은자, 참된 이스라엘은 비록 몸은 세상을 살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득차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 죄가 싫고 죄가 없는 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이 오신다는 소리가 최고의 기쁨일 것입니다. 언제든지 손털고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세상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힘쓰며 살고 있습니까? 이런 신자가 주님이 오라고 하실 때 주저하지 않고 기뻐하며 주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노래 (사 12:1-6)
사람이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그 일에 서투르기 때문에 남에게 묻고 배워가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아마 이럴 때는 남보다 안다고 해서 나서는 일도 없을 것이고, 언제나 뒤에 물러서서 남이 하는 것을 배우기에 모든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일이 손에 익숙해지고 뭔가 알게 되었을 때는 남에게 묻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보다 연륜이 적은 자는 자연히 무시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이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왔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하게 남들이 하는 것을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남을 무시할리도 없고,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경쟁도 없고, 비교하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주님을 알게 된 즐거움 속에서 순수하게 주님으로 기뻐하면서 교회생활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기존 신앙인들의 잘못된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교회 일이나 여러 가지의 것에 지식이 쌓이면서 자기의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좋아서 예배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의 습관적으로 예배당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스스로 어른 행세를 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으로 간주해 버리면서 교회를 시끄럽게 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과정을 그대로 밟으면서 교회생활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뭔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시는 것도 바로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기뻐하는 순수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같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세월이 갈수록 세상의 방식에 같이 동화되어 버리고 나중에는 순수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신자가 처음에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정말 순수하게 복음만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졸업할 때는 성장에 원대한 꿈을 지니고 졸업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설령 졸업할 때까지 그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고 해도 목회를 하면서 뭔가 현실을 떠나서는 배겨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교회 성장을 위해서 힘쓰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교회가 성장해도 순수함만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적당한 타협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동화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습만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40년을 믿어도 1년을 믿은 듯 신앙생활하자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이나 나중이나 처음의 순수한 그 마음으로 주님을 찾자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내것을 고집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자로서 주님을 찾아 나오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관심을 둘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엉뚱한 것으로 얼굴 붉히는 일이 사라질 것입니다. 40년을 믿었어도 일년을 믿은 듯 모이는 교회라면 분명 사랑이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때 주님께로 돌아온 자의 감사의 노래입니다. 1절에 보면 '그 날'이라고 말하는 데 그 날이란 주님께로 돌아오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특별한 날입니다.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여호와의 진노가 쉬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진노가 그친다는 것입니다. 또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안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날, 즉 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그 날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살아가야 하고, 안위가 없는, 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쉼이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누구나 동일합니다. 죄인의 몸으로서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쉬지 않고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일하고 싶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는, 풍족한 사람을 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하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되기를 원하는 탐욕이 있습니다. 그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인간은 일하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에서는 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노동은 죄의 결과입니다. 노동이 그치고 안식할 수 있는 날은 그 날이 와야 합니다. 그 날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날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날을 바라본다는 것은 쉼이 없고 죄만 있는 세상이 싫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싫어지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그 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비록 쉼이 없는 이 세상에서라도 영원한 안식의 그 날을 소망하며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을 힘들고 피곤하게 살아가면서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가져다주실 영원히 쉬는 날을 미리 기뻐하면서 살았던 자가 그 날에 부르는 감사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리라"고 합니다. 이 감사의 노래를 지금 이 땅에서 미리 부르며 살아가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날에 이르러 하실 일을 그때 가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아는 자로서 지금 이 땅에서 미리 감사하고 찬송하는 자로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생을 세상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날을 아는 자로서 현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고통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그 날에 주어질 영원한 쉼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결과로 보자는 것입니다.
세상은 쉼이 없습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신자는 그 날을 더욱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쉼이 없도록 하는 죄에서 멀어지고자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그 날에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기뻐하면서 찬송하면서 주님께로 돌아갈 남은 자인 것입니다.
피곤하지 않는 삶을 사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쉼이 없는 세상을 싫어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쉼이 있는 나라, 여호와의 안위가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바쁘고, 힘들고, 피곤하게 살아가시면서 바쁜 것도 없고, 피곤도 없는, 죄가 없는 그 나라를 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쁘게 하시고 피곤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안식이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편안하면 그 나라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순수하게 주님만 사랑하면서 그 날을 기뻐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모이는 교회 되기 바랍니다.
바벨론 심판 (사 13:6-16)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잊어서는 안될 부분은 세상의 멸망입니다. 세상의 멸망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다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멸망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신자는 인생의 전체를 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심이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자가 살아남느냐가 관심거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마지막때 심판받을 자가 누구이고 살아남을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 도구로 사용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벨론을 다시 심판해 버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바로 오늘의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와 동일합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죄는 변하지 않고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죄를 알면 사단이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먼저 11절을 보면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바벨론이라는 한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의 죄가 곧 온 세상의 죄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을 들어서 세상의 죄와 심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죄를 말합니까? 11절은 바벨론의 교만과 오만과 거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만, 오만, 거만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표현을 이렇게 각각 사용하는 것은 바벨론의 죄가 어떤 것임을 강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 1:1절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이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를 말하는데 이것은 각각 다른 세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악인이 곧 죄인이고 죄인이 곧 오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만을 얼마나 비중 있게 말씀하시느냐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만은 곧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만이나 교만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상식과 시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세상이 생각하는 교만과 다릅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과 겸손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이해해 버리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지막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이 교만 때문이라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겸손은 잘난 척 안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많이 배웠다고 거들먹 거리지 않고 권세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교만과 겸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교만을 알기 위해서 예전에 설교했던 다니엘서를 다시 보겠습니다. 단 4:30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발전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힘과 능력에 대해서 감탄을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드리면서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실제로 그것을 겪으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늘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계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자기 뜻대로 행하셔서 바벨론이 부강하게 되었는데 자신은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되어진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교만하게 행하는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위에서 자기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힘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교만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모두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세상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지만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합니다. 이런 신자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바벨론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이 평소에 사랑했던 것을 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방해가 되었던 것을 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마지막 때를 사는 신자가 할 일을 그것을 부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자가 바로 마지막때 사는 자입니다.
돌아온 자의 노래 (사 14:1-11)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것에 붙들려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것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 예수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힘없고 가난하고 나약한 것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이 자기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살아가는 소위 갑부가 있고, 돈이 없어서 쩔쩔매면서 하나님에게 돈좀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 갑부는 신자를 바라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아마 하나님도 별 것 아니다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저렇게 약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갑부의 눈에는 하나님이 겨우 돈이나 몇 푼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신자도 믿음도 시시한 것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난주에 얘기했던 바벨론의 교만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게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이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기도하는 것들을 보니까 모두가 자기들에게 얼마든지 있는 것들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이 겨우 그런 것이라면 나는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쪽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그릇의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있고,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판단하는 역할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고 '나도 가져 봤으면' '나도 저렇게 돼봤으면'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군침을 흘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신자 스스로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우습게 보고 싶다고 해서 우습게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별 것 아니고, 우습게 보여지게 되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됩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 천하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것,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것은 자연히 우습게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주 주고도 살 수 없고 세상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세상 것에 대해서 부러움을 가지겠습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 아니겠습니까? 영생을 어디에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영생의 가치를 알고 또 영생에 나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과연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면서 살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세상의 것은 썩어지고 마지막 때 불에 타서 다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신자가 그 말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도리어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을 알고 영생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자연히 희미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그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구했을 때 진주를 자기의 소유로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소유를 다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재산보다도 진주가 더 가치가 나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장사꾼에게는 자기의 재산보다도 진주가 귀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전재산을 없앨 만큼 진주가 귀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사꾼은 진주를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구원을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가치 있는 것이라면 왜 여러분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가치 없는 세상 것 때문에 고민하고 한탄하고 한숨으로 지내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렇다면 결국 영생은 세상것 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외의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제아무리 누가 돈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는커녕 우습게 여겨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신자는 세상의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할 것이고, 이것을 가지고 겸손이라고 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없이도 내힘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목적을 세워두고 그 목적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결과로 얻어진 모든 열매들을 마지막 때 다 부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바벨론의 심판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3장, 14장은 이러한 교만을 드러낸 바벨론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하나님은 야곱을 긍휼이 여기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이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드러내며 교만한 족속은 다 멸해버리시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야곱 족속만큼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야곱 족속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의 자리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존재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쫓겨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에 더 가치를 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심판 당할 때 누가 살아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겸손히 살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긍휼이 여기심입니다. 다같이 심판에 들어가야 할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느냐를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다면 그 사람은 교만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긍휼 하심 때문에 주어졌음을 아는 자가 어떻게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가 곧 은혜를 알고 긍휼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너희는 잃어버린 바 된 경험이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찾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는 자기를 찾으신 하나님의 은혜에만 감사하지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을 비유함)보다는 잃어버린 바 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죄인 하나를 찾으신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지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신자가 어떨 때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한 선한 종교 행위를 떠올릴 때입니다.
자신이 뭔가 열심히 한 종교 행위에 의를 두게 될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의가 드러나지 죄인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신자가 뭔가 했다는 것들이 죄인 됨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은혜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우습게 보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3-11절까지는 돌아온 자가 부르는 노래인데, 그 노래는 힘을 자랑한 바벨론을 조롱하는 노래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향해서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우습게 보면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계명성 (사 14:12-20)
지난 시간에 신자는 세상을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이것은 신자인 우리가 얼마만큼 세상에서 신자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신자가 세상을 우습게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살아간다면 과연 무엇을 통해서 신자만이 보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우습게 보겠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습게 보여지는 것이지 내가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떨 때 세상이 우습게 보여집니까? 세상이 가지지 못하는 귀한 것을 소유했을 때입니다. 결국 세상을 우습게 볼 수 있는 것은 영생의 가치를 발견한 자들에게서만 자연히 보여질 수 있는 신자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가치를 발견한 신자들이 세상을 어느 정도 우습게 보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돌아온 자가 바벨론을 향하여 지어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3-20절까지가 바로 바벨론을 조롱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를 가만히 보면 한마디로 '잘난척 하더니 꼴좋다'는 식의 내용입니다. 돈있고, 힘있고, 세상에서 높다고 위세부리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살더니 지금 네 꼴이 뭐냐는 식입니다.
바벨론이 어느 정도까지 비참하게 되었습니까? 11절에 보면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라고 합니다. 또 15절을 보면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이 마지막에 당할 모습입니다.
바벨론이 왜 이렇게 된다고 했습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이 그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자기의 수중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벨론을 배우면서, 그리고 바벨론의 마지막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천국 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계명성이라는 것은 새벽별을 의미하는데 새벽에 아주 빛나는 별을 가리킵니다. 즉 계명성의 의미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아주 부러워하고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나고 주목을 받을 만한, 한마디로 세상적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성이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높은 자같이 교만하고 하나님도 무시하고 힘을 자랑하더니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비참하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그런 의미의 말입니다. 교만하고 잘난 척하고 자기 힘을 내세운 자는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잘난 인간 되어봐야 그것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목사님, 신자는 다 가난해야 하고 출세하면 안됩니까?" 물론 아닙니다. 신자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높은 지위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의 것으로 허세를 부리거나, 힘을 가지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신자라면 돈이 있어도 없는 자로 살아갈 것이고, 높은 지위에 앉아 있어도 낮은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보다 돈이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가 더 힘들고 힘없는 사람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겸손하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겸손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즉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구원을 아는 신자라면 항상 긍휼을 노래하고 긍휼을 내세웁니다. '하나님 나같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 때문에 천국가는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신자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은혜를 확인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은혜를 고백하고 긍휼을 노래하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라면 틀림없이 겸손만 보여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불쌍한 사람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입니다. 죄인을 말하는데 죄인이 안보이고, 긍휼을 말하는데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잘났고 모두가 신앙이 좋은 사람만 몰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왜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는 것같이 죄인이 예수님을 찾게 되어 있는데 죄인도 아니면서 예수님은 왜 찾는 것입니까?
교회가 타락해 가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죄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희미하고 속죄에 대해서 무관심 하는 교회가 교회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죄인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모두 음부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 세상에서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이 음부의 밑바닥인 사람들이 뭐 그리 부럽습니까?
여러분, 그래도 세상에서 잘나 보이는 사람들이 부럽습니까? 잘난 자식을 둔 부모가 부럽습니까? 마지막을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 교만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항상 교만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교만이 일어날 형편과 조건이 되지 못하니까 일어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형편과 조건이 충족되면 교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붙들린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비록 교만이 안보인다고 해도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계명성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마지막은 지옥의 맨 밑바닥입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세상의 것이 없다면 그것으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만약 여러분에게 인간이 자랑하고 내세우고 잘난척할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 겸손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란 차라리 세상 것이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적절하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겸손한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계명성같이 우러러 보이는 자리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가 교만해지는 자리이고, 멸망의 자리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불쌍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겸손한 자리에서 날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십자가를 붙드는 지혜 있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복이 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경영 (사 14:24-31)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무슨 상을 수상할 때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는 말입니다. 지금 상을 받으면서 기뻐하는 것은 자기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자기 영광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세상 영광을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해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뭔가 잘됐을 때 세상 사람들에게 '저 집은 예수를 잘 믿더니 복받았다'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제아무리 돈을 벌어서 재벌이 되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출세하고 성공을 해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득이 되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인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데 득이 되기는커녕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인데 그런 분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관심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지 세상 것이 아닙니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일하고 신학교가서 목사되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을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예배를 드리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라는 의식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하게 보이고 장엄하게 느껴지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기 때문에 예배의식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이 자리에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만 이 자리에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자리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요 5:40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또 42절에 보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설교를 듣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것은 내가 진심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는지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그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짜가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하게 방지하시는 분입니다. 진짜만 천국에 들여보내십니다. 그 진짜가 무엇입니까? 세상 마지막 때 남은 자입니다. 세상이 다 멸망당할 때 마지막으로 살아남는자,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바로 진짜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짜와 가짜를 가르시는데 그 일을 이 세상에부터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을 향한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일은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십니다. 24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무엇인가 생각하신 것이 있고 계획하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 일을 고집스럽게 이루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집스럽게 이루고야 마시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면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즉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앗수르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앗수르, 바벨론, 블레셋 등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를 심판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26절을 보면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일을 단지 앗수르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온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온세계를 향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앗수르를 심판해서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게 해주시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사 10:27절을 보면 이것과 같은 말이 나오는데 20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앗수르를 치는 이유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어깨에서 짐을 벗게 해주신다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진짜 이스라엘로 여기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 이것이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목표입니다. 10:23에 보면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1:1,2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없어집니다. 세상에서 힘있는 자들, 힘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하고, 교세를 자랑하던 교단, 교회도 다 사라지고, 웅장함을 자랑하던 예배당도 다 불타 없어지고 뭐가 새롭게 존재합니까?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들어갑니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 단장한 신부를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는 사람은 신부, 즉 하나님의 백성, 즉 세상 마지막 때 여호와의 긍휼로 부름을 입은 남은 자들이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남은 자를 모으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남은 자만 남기기 위해서 다른 것을 다 쳐버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진짜는 남겨두고 가짜는 다 치시는 일을 하나님은 분명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만 남긴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이 하나님의 일에 함께하는 것인데 그 일은 복음만 드러내고 증거해서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다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는 항상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남은 자를 모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다면 교회는 항상 남은 자가 누구인가가 드러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을 아는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번성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새하늘 새땅에 들어가는 인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남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압의 심판 (사 15:1-9)
제가 성경을 말하다 보면 목사들과 부딪히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정직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많은 갈등과 당황함 속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주위를 돌아다 볼 때 자기와 같이 성경을 말하는 자가 드물고 거의 모두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흘러 내려오던 그 방식 그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오히려 정직하게 복음만 말한다고 하는 자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을 때 혹시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라면 듣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는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지금 시대에 보여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아니 훨씬 그 이전에 선지자시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복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면 왜 정직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데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사람은 관심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십자가에 있고, 영생에 있고, 영원한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십자가가 아닐 때에는 필연코 그리스도의 말이 아닌 것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면 거부합니다. 관심이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 거부합니다. 물론 단순히 십자가를 말하면 듣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포기하고, 자기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십자가를 말하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인데 어떻게 세상 것을 포기하는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부흥을 원하시는데 교회 부흥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과는 다른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는데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의 복을 받는다는 거짓된 약속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요 6:29)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충성된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에다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첨가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고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말한다고 하는데 성경과 다른 복음이 나오는 것은 관심이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관심을 두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고 계셨다면 말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가 말하는 대로 '나를 잘 믿으라 그러면 복을 주겠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과 회개만을 외치셨습니다. 세상 것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염려하고 구하는 것은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부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9:23).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마 7:13-1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이런 말씀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다른 말이 나옵니까? 다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을 하면서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거짓된 것입니까? 성경이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는 자가 거짓을 말하는 거짓선지자임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주시는데 왜 기도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칩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간다고 하셨는데 교회에서는 교회 봉사하고 십일조 하면 만 배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은 관심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영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기 때문에 영생에 대해서 말을 해도,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해도 그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 때문에 세상이 듣지도 않는 말을 해야 합니까? 그 길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렇게 힘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리 말하든 저리 말하든 그리스도라는 말만 들어가면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저 자신부터도 말을 바꾸겠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교회만 나오고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 천국 간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이 절대 같지 않습니다. 이것 하나 때문에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지막이 다르기 때문에 말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우리의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경전이 아닙니다. 소위 경전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도덕을 말하고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한다면 굳이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복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오히려 구원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성경은 망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남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는 채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재미없고 무의미하고 부담 가는 책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세상의 복에 성경을 연관지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언제나 우리의 구원과 연관지어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비록 옛날 모압이란 나라에 대한 심판의 경고이지만 모압 한 나라의 심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계시해 주는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압의 심판을 보면서 '아하, 모압이 저래서 심판을 받는구나'를 찾아서 우리는 모압의 길로 가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이러한 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심판 받고,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들이 심판 받았던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벨론의 심판도 들었고, 앗수르의 심판도 들었고, 블레셋의 심판도 들었습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교만 때문입니다. 나라의 부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힘을 제일로 여기는 교만이 심판의 원인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심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되는 것을 의지하면 망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앗수르나 블레셋도 다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 나라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는 것과 모압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이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5절에 보면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라는 말이나 16:11절의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라고 하는 말을 보면 이사야는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이방 나라의 심판과 다른 점입니다.
이 이유를 알려면 모압이란 나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알면 됩니다. 모압이란 나라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해야 할 인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로 인해서 구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롯의 두 딸이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롯에게 술을 먹이고 같이 동침해서 낳은 아이가 하나는 모압의 조상이 죄었고, 또 한 아이는 암몬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압과 이스라엘은 전혀 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모압은 서로 형제처럼 잘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서 전쟁을 합니다. 호르마란 곳에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 이기고 아모리를 이기고 바산을 이깁니다. 그리고 2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는데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거민을 하나하나 물리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이 자기들도 치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모압의 죄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대로 모압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아브라함 때문에 존재하게 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모압은 항상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나라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난 족속이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선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발락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족속임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됩니다.
모압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왜 저주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축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축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들이 저주 안에 거하게 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신 23:3-5절을 보면 모압의 심판의 이유는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이 심판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심판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은혜를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도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세상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도록 꼬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산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것을 손에 쥐어줘서 스스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은혜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세상에 눈을 돌릴 때 자연히 복음은 거부하게 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언제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영접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