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를 보면, '샤론의 꽃 예수',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 등의 곡 가사에서 예수님이 장미나 백합으로 비유되는 예를 발견한다. 신/구교의 수많은 성가곡에서 그런 가사들이 흔히 눈에 띈다. 이성봉 목사의 한 부흥성가에도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린다"라는 가사가 포함돼 있다.
이런 가사 표현들은 다음 성경 구절을 인용 또는 원용한 것이다.
나는 샤론의 들꽃, 골짜기들 아래의 나리꽃.
가시덤불 속 한 송이 나리꽃 같아라, 아가씨들 가운데 내 사랑은!
숲 속의 사과나무 같아라, 젊은이들 가운데 내 사랑하는 님은!
그의 그늘 속이 너무나 즐거워 내가 앉았고, 그의 열매는 내 혀에 달콤하였네.
- 노래들의노래(=구약 아가) 2'1-3에서 (사역)
슐로모(솔로몬)의 노래들의노래(이하 '노래''로 약칭) 2장에 있는 위의 1,2 두 구절은 신/구교에서 전통적으로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의 '은유' 내지 상징으로 사용돼 왔다.
또한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이 그렇게들 해석하고 있다. 존 웨즐리, 찰즈 스펄전 같은 설교가들도 아무런 의혹이나 검토 없이 이 꽃을 곧이곧대로 예수님께 비견하고 있다.
반면, 모든 유대계 학자들이나 다수의 신교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결코 남성, 더 나아가 메시아에 적용하지 않는다! 유대인 학자들의 경우, 단지 예수 크리스토를 메시아로 보지 않아서가 아니다. 문맥상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성경을 깊이 음미/묵상해 봐도, 이런 은유가 매우 부적절하며, 억지스럽고, 심지어 비성경적인 은유임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무리한 은유 전통이 오래 지속돼 왔을까? 쉽게 말하면, 첫 단추를 잘못 낀 탓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이에 대해선 나중 상론하기로 하고, 우선 원문 텍스트 상으로 해당 은유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여성(슐람밑): 나는 샤론의 들꽃, 골짜기들 아래 나리꽃! (1절)
남성연인(목동/슐로모?): 가시덤불 속 한 송이 나리꽃 같아라, 아가씨들 가운데 내 사랑은! (2절)
위 두 구절을 보면, 이 꽃 은유가 첫 화자 자신이나 상대역인 남성 연인에 의해 모두 여성인 슐람밑에게 적용됐다.
세 상황의 꽃들, 즉 1. 샤론의 들꽃(히브리어 '하바첼렡'. 장미보다는 크로커스에 더 가까움), 2. 골짜기 아래의 나리꽃('쇼브샨나' 곧 수선화/백합), 3. (2절의) 가시덤불 속 나리꽃이 모두 한 여성인 슐람밑을 가리키고 있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특히 2절 가시덤불 속 나리꽃은 "..아가씨들 가운데 내 사랑은"이라고 보어를 그려, 더욱 더 이 꽃이 여성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자.. 1절 화자는 2절 화자의 상찬에 대한 화답/답례로서 다시 3절에서 상대인 남성을 사과나무로 은유하여 기리고 있다.
곧..
제1화자: 나는..들꽃, 나리꽃! (1절)
제2화자: 너는 나리꽃! (2절)
제1화자: 그대는 사과나무! (3절)
..로 진행된 것이다.
은유에서 남/여 성(gender)의 의미성은 퍽 강하다.
꽃은 으레 여성으로, 여성은 흔히 꽃으로 은유된다. 그래서 요즘의 '꽃미남'이라는 시쳇말은 현대 남성의 '여성화 현상'을 연상시킨다. 물론 남성이 꽃으로 전혀 비유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꽃은 중성적으로도 쓰인다. 예컨대 무궁화 등 다양한 꽃들이 나라와 정부 등의 문장 문양으로 쓰인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으로서는 남성이셨던 예수님이 여성으로 묘사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남성적인 이미지와 뉘앙스로 나타난다. 그런데 유독, 꽃으로 비유된 이 은유/상징은 여성성이 무리하게 예수님께 적용된 경우다. 어울리지 않는다. 좀체 걸맞지 않다.
반면 위 본문은 텍스트 내용상으로도 이 세 가지 상황의 꽃들이 모두 남성(목동? 슐로모?)이 아니라 여성인 슐람밑에게 은유/적용됐다.
만약 굳이 남성인 예수님에게 식물의 은유를 적용하렸더면 본문상으로도 분명히 남성에게 적용된 3절의 사과나무로 은유됐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왜 사과나무가 아니고 하필 들꽃과 나리꽃인가? 여기서 초기 교부들인 성서주석가들이 초장에 단추를 잘못 끼웠음이 명백해진다.
도대체 왜 초기 주석가들은 이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가장 권위 있는 구약 주석인 독일 카일-델리취 주석에서, 델리취는 이 부분을 전혀 크리스토께 적용하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주석학자 대다수가 주장하듯, 어느 모로 보나 매우 선정적인 이 '노래'가 설령 크리스토와 교회 사이의 사랑과 연합을 풍유한다고 하더라도, 문법적으로나 시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도 이 여성적인 은유는 남성적인 크리스토님께 맞지 않는다.
우리가 구태여 슐로모를 메시아/크리스토의 프로토타잎(선형/先型)으로 설정하려면,
[샤론들꽃/백합=교회]
[사과나무=크리스토님]
으로 설정해야지,
[사과나무=교회]
[샤론들꽃/백합=크리스토님]
으로 설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역(逆)이다!
그래서 첫 단추가 잘못 끼어졌다는 말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꽃으로 비유하신 적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태여 '노래'에서 식물을 크리스토님께 비유한다면, 어느 모로든 3절의 사과나무가 훨씬 더 어울리며 더 적절한 것이다!
이렇건대, 여기서 이 들꽃과 백합이 구태여 신약적으로 누구에겐가 은유로 적용돼야 한다면, 다름 아닌 교회여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은 호세아서 14'5에서..
나는 이스라엘에게 이슬 같으리.
그는 나리꽃(백합) 같이 피어나며
레바논 삼나무처럼 뿌리 내리리."
라고 하셨다. 예호봐(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곧 교회의 그림자인 이스라엘을 나리꽃/백합으로 비유하셨다는 말이다. 예수 크리스토가 아니고.
카톨맄교에서는 흔히 이런 꽃들을 마리아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이 꽃이 크리스토님께 적용될 수 없다! 여성인 마리아의 상징이 동시에 남성인 크리스토의 상징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뭔가 자기혼동/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런 성경해석은 정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초기주석가들, 교부들은 이 부분을 크리스토님께 구태여 적용하려 했을까.
그 한 가지 원인으로서, 일부 초기 주석을 보면, 메시아닠 성구의 하나인 예샤야후(이사야) 11'1의 한 싹/순을 하나의 '꽃봉오리'로 해석한 데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역본들이 '싹'으로 했지, 꽃봉오리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주석가들은 예11'1을 '노래' 2'1,2과 무리하게 연계시키려 한 모양이다. 메시아 아기 탄생을 장미의 개화로 묘사한 천주교/성공회 계열 크리스머스 캐럴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도 한 겨울에 피어난 장미꽃 어쩌고 하면서 무리수에 더욱 무리를 더 해 가며.
주석가들은 예11'1의 잘못된 나름 사역(자역)에 잘못 착안하여 사과나무가 아닌 꽃에 무리하게 메시아를 대입하였다.
문제는 더 나아가 마르틴 루터나 감리교 창설자 웨즐리 등 신교 주석가들도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구교회의 성경 해석 전통을 그냥 받아 들일 뿐더러 오히려 한 수 더 뜨고 있는 모습들이란 역사적 사실.
모든 진리를 낱낱이 중시하는 민감한 성경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아름다운 게 아름답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성경은 '노래' 2'1,2의 샤론의 들꽃('장미'), 골짜기들의 나리꽃(백합)들, 가시덤불 속 나리꽃을 예수 크리스토로 은유하는 것을 어느 곳에서도 전혀 지지해 주지 않는다.
유대 주석가들 모두는 이것을 메시아나 남성이 아니라, 순전히 여성 슐람미 여인의 상징으로 본다.
오직 신/구교의 생각 없는 주석가/해석가들만 남성인 예수 크리스토의 상징으로 본다는 점에서, 모순이며 비성경적이다. 더욱이 구교는 같은 종류의 꽃들을 마리아의 상징으로도 본다는 점에서 곱빼기 식 자체모순을 저지르고 있고, 신교는 다만 구교 전통을 따르고만 있다.
필자의 결론은, 구태여 '노래'들 2'1,2의 내용을 신약에 꼭 적용하려 들겠다면..
여기서의 샤론 들꽃, 나리꽃들은 오히려 여성인 교회의 은유여야 하며..
남성, 곧 크리스토의 이미지는 오히려 2'3의 사과나무에 더 걸맞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책의 이 부분의 본문이 말해 주는 진리다.
그리고 전통이 곧 진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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