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이순신 장군을 생각한다.
보스로부터 버림받고,
상사로부터 미움받고,
동료나 아랫사람은 내몸처럼 아끼고
한번 식구가 되면 목숨을 같이 하는 조직원을 만들어내고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깨드리는 강한 자신감과 정신력을 가진 이순신장군을 생각한다.
panic bird..........
"그는 병든 몸으로도 강한 적과 맞서 죽음을 무릎쓰고 싸웠다. 그런데 그가 싸워야할 상대는 적군인 일본군뿐만 아니었다. 국왕인 선조와도 싸워야 했고, 동인으로 몰아 끊임없이 모함하는 서인의 대신들과도 싸워야 했고, 선배랍시고 시기하고 모략하는 원균과도 싸워야 했다. 그는 노모를 먼저 보내고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낸 인간적 아픔과도 맞서 싸워야 했다"
1. 대장부의 길
- 이순신은 이정과 초계 변씨부인 사이에서 4형제중 3째로 인종 1년(1545년)에 태어남
- 유성룡은 이순신보다 3살 위로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근처에서 이순신과 같이 자람.
- 이순신과 율곡 이이는 한집안이고, 율곡이 나이는 9세 위였지만 이순신이 아저씨..
- 이순신이 하위직을 전전하며 고초를 겪을때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율곡이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한번 만나자고 했을때 "율곡과 나는 집안간이니 못 만날것도 없지만 그가 판서로 있는 동안은 만나지 않는 것이 옳으리라"라고 말했다.
- 이순신의 증조부 이거는 암행어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성품이 매우 강직하여 절대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연산군이 세자시절에 너무 엄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조광조와 같이 개혁파에 연루되어 기묘사화때 억울한 죽임을 당했따.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평생토록 벼슬살이를 외면한채 무명의 평범한 선비로 지낸 까닭도 자신의 아버지 이백록의 억울한 죽음때문이었다.
- 연산군 12년(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일소하고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조광조를 비롯한 대신들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펴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8개월만에 병으로 죽었다. 인종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11살의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문정왕후는 섭정 8년을 포함하여 20년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명종 14년(1559년)부터 명종 17년까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강원도를 넘나들며 눈부시게 활약한 이가 바로 임꺽정이다.
당시 일본의 사정
- 100년 내전을 마치고 오다 노부나가의 심복장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1590년 통일
- 포르투갈로부터 1543년 조총을 받아들임
당시 명나라의 사정
- 1368년 명나라 주원장은 원제국을 몽골초원으로 쫒아내고 이후 200년간 평화. 당파간 권력투쟁, 관료들의 부패, 환관의 발호 등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기강이 문란해짐
- 일본이 정명가도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이러한 사정때문에 아무런 대처를 못함.
충남 아산에서 청년기를 보낸 이순신
- 20세의 이순신은 보성군수 방진의 딸 방씨와 결혼
2. 북풍
- 이순신이 무과준비를 한 것은 혼인한 뒤부터다. 이순신의 학문이 경지에 들어서고 글재주가 뛰어나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
- 보성군수 방진은 활을 잘쏘는 무인이었고, 당시 노략질이 심해 무과를 권유함.
- 선조는 명종 7년 중종의 일곱번째 서자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 이순신보다 7살 아래
- 선조의 즉위는 조선왕조사상 첫번째 직계가 아닌 방계가 왕위를 이음. 적통이 아닌 방계출신의 선조는 시기심이 많고 변덕이 심하고 고집이 강한 인물. 뿐만아니라 성품이 모질고 도량이 좁아서 재위기간 내내 신하들을 의심하여 내쫒고 죽이기까지 함.
- 선조 9년(1576년) 이순신의 나이 32세에 무과에 급제. 28명중 12등
- 순신이 2월에 급제하고 그해 12월에 함경도 압록강 상류에 배치됨. 인사청탁을 하지 않아 늦게 배치.
- 이순신의 첫 부임지는 최악의 유배지로 소문난 곳.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나라에서 써준다면 마땅히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것이요, 써주지 않는다면 시골로 내려가서 밭을 갈며 살면 될것이 아닌가?"
"아래에 있는 사람을 순서를 바꾸어 올리면 당연히 승진해야할 사람이 못 올라가게 되므로 이 일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나라의 법도는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벼슬길에 처음 나온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집에 기대어 출세를 도모하겠는가?"
- 강직한 이순신은 모함에 걸려 38세에 발포만호 재임 18개월만에 파면!!
003. 남풍
- 파면 4개월만에 종 4품에서 8품직으로 일을 시작함.
"나와 율곡은 집안간이니 못 만날 것도 없지만, 그가 판서로 있는 한 만나는 것이 옳지 못하다"
- 순신이 39세에 부친상. 이순신이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조정에서는 그를 빨리 기용하기 위해서 사람을 두세번이나 보내서 언제 탈상을 하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이는 이무렵 이순신의 이름과 사람됨이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선조 21년 1588년 이순신은 정읍현감에 임명. 왕조시대에는 관리가 너무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다니면 남솔이라고 하여 파면의 사유가 되었다. 조카까지 24명의 식솔을 거느리게 된 이순신
"내가 차라리 남솔의 허물을 쓰고 벼슬이 떨어지더라도 이 의지할 곳 없는 조카들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 14개월전 전라좌수사 발령
-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발령받음.
004. 전라좌수사
- 남해안 방어의 중책을 맡은 이순신은 다가올 전쟁을 예견하고 방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순신과 서산대사와 같이 장차 전쟁이 있을 것을 내다본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 율곡이 살아있을때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도 서산대사가 사명대사를 시켜 율곡에게 전하도록 한 말이었다.
005. 임진왜란
-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유성룡의 징비록 " 왜군 선단이 바다를 뒤엎으며 항진해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형세가 매우 큰데 놀라서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전선 100여척과 화포, 군기 등을 바다에 버렸다"
첫댓글 오래간만에 카페에 들러 그냥가려니 미안한 맘이 앞서 몇자 적습니다 참으로 좋은글 이네요 잘 읽고갑니다... (전주에서 차병철이가...)
반갑습니다. 언제 한번 뵙고 술한잔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