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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충남 서산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윤동주 문학상 수상/ 1996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음(2001)
상화(尙火)시인상 수상(2002년)
현재 우이동동인 성산일출봉 및 다랑쉬오름 시낭송회 인사동 시 낭송회 동인으로 활동
<시집>1955년 산토끼를 시작으로 1978년에 발표한 대표적인 시집 그리운 바다 城山浦 외
2006년 발표한 인사동을 포함하여 30권 발표
<시선집> 詩人과 갈매기(1999)
<시화집>제주, 그리고 오름(시:이생진, 그림:임현자)/2002
<수필집 및 편저>
아름다운 天才들/1962
나는 나의 길로 가련다/1963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1997
걸어다니는 물고기/2000
<공동시집>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2003
서울의 높다란 건물 사이로 고풍 넘치는 궁(宮)이 있어 사람들의 휴식이 되는 것처럼 이생진 시인의 시는 사람들에게 이미 휴식과 같다. 가슴 가득 푸른 바다를 담은 시로서 풍요로움이 밀려들게 하는 시인, 사람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 고독의 섭리에 진지하게 다가간 이생진 시인을 덕수궁에서 만났다.
문학은 하늘이 준 은덕이며 영광이라 말씀하시는, 섬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나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정과 관심을 가지고 쓴 것이라며 '눈물 없이 산 사람은 눈물을 모른다.' 하시니 정작 시인 스스로는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 생각하게 한다.
'문학은 예술이며 예술은 새로워야 하고 아름다움으로 생성되어야 한다. 낡아서도 안되며, 침체하여서도 안되며, 머뭇거려서도 안 된다.' 라고 한비문학 문학상 시상식 축사 중에 하신 격려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여 긴 호흡으로 섬을 돌아 시의 싹을 틔운, 화가가 꿈이었던 시인을 다시 만나는 것은 기대와 설렘이었다.
푸른 줄무늬 남방에 바지, 어깨에 사선으로 맨 가방. 소박하신 모습으로 77세의 연세에도 청년처럼 당당하신 체구여서 건강하신 이유를 여쭙자 담배 않고, 술은 막걸리 한두 잔, 하루 걷기 5~6km. 초등학교 3년 때 담임이 일기 쓰기, 냉수마찰, 뒷산에 가서 야호 하기를 권하였는데 평생 그걸 지킨 것이라며 "모범생이지요. 하찮은 일도 좋은 것이면 오래 계속할 필요가 있어요" 하시며 수줍은 미소를 보이신다. 고향은 서산이며 가족은 아내(74) 딸2, 아들 하나가 있는데 문학성을 물려받은 자제는 없는가 여쭙자 결혼해서 평범하게 생활한단다.
시에 입문하게 된 동기에 관해 서정주 시인은 '8할이 바람'이라 했다면 이생진 선생은 '8할이 가난'이라며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같은 독학이라면 미술은 도화지와 붓과 화구가 있어야 하고. 시는 종이만 있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난하기 때문에 택한 것이 문학 그 중에 시집을 읽고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쓰고 싶고 해서 시작한 것으로 가난이 낳은 산물이 시라고 하셨다.
시를 쓰면서 어려웠던 시기는 "나는 나의 시를 가난의 미학이라고 하지요. 시를 알게 된 16-7세부터 1955년(26세)까지는 가난이 주는 아픔의 시대로 그것을 달래기 위해서 시를 쓴 것인데 그것이 눈물로 엉겼으며 아버지 무덤 앞에서 울기도 여러 번 울었어요." 하신다. 공부는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을 책임져야 하고, 공부하고 싶어도 서울로 못 가고 가까운 바다로 다녔는데 이것은 혹시나 마음이 풀릴까 한 것이며 그래서 '발로 쓴 시'라고, 항상 밝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겉으로 내색할 수 없었던 그 어려움을 바다를 보며 흘려보내고 바다를 품으시고. 그런 연유로 아픔이 담긴 한하운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눈빛이 촉촉하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길/글 한하운>
영향을 받은 작가와 도움을 준 스승으로 한하운· 김현승· 박목월· 조병화· 김삿갓· 고흐 등을 꼽으시며 한하운 : 아픔, 김현승 : 고독, 박목월 : 율, 조병화 : 낭만, 김병연(김삿갓) : 방랑, 고흐 : 열정이라며 그 시인이 가진 전체적인 것을 파악하기까지 많은 읽음이 있고 그 느낌을 자신의 시에 담으려는 이생진 시인의 부단한 노력이 엿보였다.
대표시집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인데 동인지 5인(윤강로 신협 이봉신 신용대 이생진)시집 '다섯 사람의 噴水' (1975)에 24편 발표, 1978년 500부 자비출판 현재 30여판. 그것이 다방 대학가 등에서 DJ(이성일)가 낭송하고 다음에 가수 윤설희가 음반을 내서, 서울에서 퍼지기 시작 제주까지 가게 되어서 남제주군에서 명예 군민증, 제주도에서 명예 도민증을 받았다. 그후 "귤 많이 자셔야 제주도가 아름다워진다." 고 제주도를 위해서 요즘도 홍보를 하신단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있었다.
마을에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게 나타난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원고 정리하러 성산포에 갔다가 성산포 수마포 해변과 일출봉과 우도에 매료돼서 밤에도 여관방을 들락날락하다가 얻은 시라 한다. 그 후 시집을 30권을 내도 독자들은 그 시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다며 그밖에도 가파도와 마라도에 관한 시집 ' 먼 섬에 가고 싶다' (1995), 우도에 관한 시집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2000) 등이 나왔는데도 ' 그리운 바다 성산포' 만큼 기억하지 않는 듯 하다 하며 이 시로 인해서 제주도에 있는 좋은 시인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지금도 고향인 서산보다는 제주도에 더 자주 가신단다.
특별히 섬을 좋아하게 된 동기를 여쭈니 부친 사망 후 앞이 막혔기 때문이며 그 속을 풀어내는 것은 시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하시면서 칼붓세의 시 '저 산 넘어'를 떠올리셨다.
저 산너머 멀리 헤매어 가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아, 남들과 얼려 찾아 갔다간
눈물 글썽글썽 되돌아왔네
저 산너머 멀리 저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
- 칼 붓세(1872-1918)-
지금도 막힌 세상이 풀리지 않아 섬은 그런 환경에서 외로운 동반자가 된 것이라며 우리나라 섬 3188, 무인도 2751, 유인도 436 등을 고2 때부터 섬 방랑 1000개 설렵하셨다 하시니 이생진 시인은 고독한 눈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경치가 고독과 섞였고-식물-곤충-사람이 그 고독에 합류했다고 하겠다. 이로 인해 걸어 다니며 글쓰는 습관이 생겼다고 시인은 회고했다.
좋아하는 작품은 이광수'꿈' '원효대사', 심훈의 ' 상록수', 이태준 '단편소설집', 지금은 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 상상력과 관찰력 나무, 개미, 뇌, 여행의 책 등 상상력과 체험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에서는 '그러니 나를 제발 좀 그냥 놔두시오!'이 말이 좋았고, '향수', '콘트라베이스', '비둘기', '깊이에의 강요' 등 소설을 좋아하시며,
주목받을 만한 시인이며 좋아하는 시인으로 "김혜순 시인(독특한 상상력 자신의 몹의 경계를 허물고 싶어하는 그런 상상력), 최영미 시인(1980년대의 현실과 삶에 대한 전면적이며 충격적인 고발과 부정에 시 정신이 집중되는 점). 이승훈 시인 (自由自在): 나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 너, 그리고 '나와 너와 그'에 대한 대화적 탐구, 무엇보다도 자유자재로 시를 쓰는 자유로움, 가볍게 시를 다루며 깊어지는 자동기술법. 최근에는 권혁웅의 '마지막 계보학'(장비). 마경덕의 '신발論'. 고영민의 '악어' 등 젊은 시인들의 시를 꼽으셨다.
요즘 활동은 윤덕구와 2인동인지 '門' 5집(1963) 분수동인(1971-1987) 1971년 보성학교 교사들로만 이뤄진 시동인(윤강로,이봉선,신협,신용대,김준희,이생진). 동인지 17집까지 발행하고 해산하고 우이동 동인(1987-2006현재) 1995-2006년 현재 성산일출봉 및 다랑쉬오름 시낭송회(채바다와 2인) 2000-2006 현재 인사동 시낭송회에서 박희진 시인과 한 달에 한번 한다. 이것은 시를 가지고 봉사하는 의미에서 죽은 골동품 역할을 살아서 하자는 심정으로 도시 한복판을 찾은 것이며 도심에서의 대화시 음악 미술 등의 만남( 2000년부터) 그리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좋아졌다고 하신다.
토요일이라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사람들의 자갈밭이다
그 발 밑엔 지폐가 깔리고 이렇게 부산한 날엔 시를
읽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쓸모 없는
월요일을 택해서 시를 읽는다 시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조심해서 읽는다 시가 상하기보다 사람이 상할까 걱정을 하며 시를 읽는다
골동품은 쓸모 없는 날에도 진열장 안에 서 있지만
쓸모 없는 사람들까지 진열장 밖으로 나와 있으니 사람들끼리 불편하다
그가 만든 '사람'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소리치는데 사람이 꿈속에서 소리치듯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입은 소리가 나올 때 화려하다 그 입에서 조용한 강화도 산모퉁이를 생각한다 아내는 시를 쓰고 그는 '사람'을 흙으로 빚어 서울로 보내고 은행나무는 훌훌 털어 버리고 겨울을 맞는다
이 겨울엔 나도 강화도에 있고 싶다
-『인사동』'창 밖의 산문' (2006)-
그밖에 이생진 시인은 요즘 작업 중인 것은 ' 피카소'에 관한 연작시라 한다. 그 동안 섬에 관한 시를 많이 썼고 나이도 들어 이젠 정리하는 차원에서 시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쓴 것이 황진이에 대한 연작시 '그 사람 내게로 오네'(2003), '김삿갓. 시인아 바람아'(2004)인데 이제 자서전을 쓸까하다가 "나보다 재미있고 보람이 있는 사람을 택하자." 해서 시작한 것이 화가들 중에 빈센트인데 그에 대한 연작시를 쓰다가 요즘 '피카소' 전을 보고는 흥미가 있어 그쪽에 몰두하고 있다며 피카소의 중요한 점은
1) 건강하게 오래 산 점(92세)
2) 재능, 아버지의 지도(아버지가 미술교사)
3)남긴 작품이 많은 점 50000점
4)일찍부터 그림이 팔렸다는 점(경제성)
5)화제가 된 여인들(모델)
무엇보다도 그는 시인들을 좋아했다는 것. 막스 자코브, 아뽈리네르 , 장 콕토 등
그의 그림 한 포기 한 포기에는 이야기가 있고 시가 있고 변화가 있다는 것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흥미로워 그것을 시화(詩化)하는데 몰두하고 있단다.
진이는
혼자 있고 싶었다
어머니의 거문고 소리가
아버지를 그리듯
진이의 거문고에서도
아버지를 그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으나
어머니의 안계眼界에서처럼
선명하진 않았다
진이의 귀에는
집 앞에 멈췄던 상여소리가 더 진하게 들어왔다
세상이 자꾸 슬퍼지면서
거문고에서도 슬픈 소리가 커졌다
-고독의 깊이/ 황진이·18-
여섯 살
대궐 같은 사대부 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관군이 들이닥쳐
문간마다 창을 들이대고 쫓아내기에
영문도 모르고 종복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
낯선 집으로 달아나던 그 날부터
화순 동복 정씨 집 사랑방까지
50 평생을 집 없이 떠돌았네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는데
어찌하여 평생 집 없이 떠돌았나
짚신에 죽장 들고 천 리 길 돌아 다니니
바람처럼 구름처럼 닿은 곳이 내 집일세'
-바람아 구름아-김삿갓-
지금도 섬에 가시는지 여쭈니 전에 다닌 섬 중에서 시를 쓰기에 좋았던 섬을 다시 찾는 정도이며 그 섬은 만재도, 우이도 등이라며 "만재도는 목포에서 가거도를 지나면 만재도인데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어부 윤씨가 살아요. 그곳은 시가 되지요. 우이도는 목포에서 도초도를 거쳐가는 섬인데 가면서 경관도 좋지만 우이도 모래밭이 인상적이고 그곳 주민들 특히 민박집 주인에게 정이 들었어요." 하고 말씀하신다.그런 섬에서 아주 살 생각은 없으신가 여쭈니 그것도 좋지만 시를 쓴다는 일은 시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독서가 필요하니까 도시의 서점도 섬처럼 그리워지고 그림을 보고 싶고 또 섬을 그리는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싶어서 인사동에서 시낭송 하는 모임을 갖는 이유라고 하신다.
시인작가들에게 " 詩業이란 평생 공부하며 나를 만들고 또 만들어지는 나를 만나는 작업이자 수양이며 자기만의 종교 같은 것을 언어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외로운 작업이니 그것을 천직으로 삼고 고맙게 여기길 바란다. 남을 탓할 게 아니라 나를 탓하며 공부하고, 나를 키우고 만드는데 성실해야 한다. 명예나 인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하며 즐기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삶의 맛을 음미하며 살아가기에 진짜 삶의 맛을 알고 사는 사람이다. 좋은 시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알게 된다. 이게 누구의 시일까 독자가 궁금히 여기는 것도 멋있다. 이것도 시라고 쓰느냐는 소리보다 김삿갓은 자기 시 옆에 이름을 쓴 일도 없고 낙관을 찍는 일도 없었다. 그것이 진짜 시인이다. 지금은 그리고 남들이 세 끼를 먹어가며 할 수 있는 일을 시인은 두 끼로도 만족하고 때에 따라서는 굶어가면서도 허공의 달이 아름답다고 시를 쓸 수 있는 자세가 시인의 (눈물이 시가 되는)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하겠지만 따지고 싸워 봐야 시는 없고 주먹만 나오는 것이니 그저 굶는 것이 뱃속 편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남을 탓하지 말고 끙끙거려가며 끝까지 해보고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 일은 이것 이외는 없다고 생각하면 함께 살만한 것이다." 라며 당부하셨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한비문학 3월호 재미있는 시평 '설교하는 바다'에서 신광철작가는 '평생 섬을 사랑한 시인이 있었지요. 그 시인이 이생진이란 시인입니다. 벌써 칠순을 넘어선 나이지요. 삶 또한 자신의 시어만큼이나 간결하고 깔끔하게 연륜에 물들었지요. 몸가짐도, 말투도, 차림도 군살 하나 없는 분이랍니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숨기지 못하는 것들이 있더군요. 마음을 숨기려 해도 얼굴에 행동에 슬쩍 묻혀지는 것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살지요. 섬을 사랑한 시인의 시는 바다냄새가 나지요. 바다와 섬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어울렁 더울렁의 섬 마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바다가 찰랑찰랑 넘치고 있지요.' 하였다.
상혼에 물들지 않았고 진정한 시인으로서, 선비처럼 대쪽같은 곧은 면면의 소박하며, 자신을 낮추지만 스스로는 완벽해지려는 높은 정신력과 의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오신 세월이 성실, 근면하여 연세를 가늠하기 어렵고 오히려 젊은 시인의 나태한 생활이 부끄럽다. 고매한 성품으로 많은 시인들에게,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생진 시인의 이름에 빛이 난다.
외롭고, 그립고 가난한 것이 고통이 아니라 승화로서 시가 되니 오래도록 시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읽혀지고 남는 것이다. 김삿갓 시인의 이름이 시에 쓰이지 않았어도 그 이름이 오래인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저 많은 섬을 다니며 세월이 가니 시인의 존재가 존경이 된다는 귀결을 보여주신다.
외딴 섬을 혼자 걸어본 사람만이 섬에 발붙이며, 고독을 알고 고독을 알면서 시를 시작했다는 그러나 그것이 시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있어 시가 된다고 시인은 말씀하신다. 서정주 시인이 '8할이 바람'이라 했다면 시인 이생진 선생님은 '8할이 가난'이라 하신다. 배부른 문학으로 어찌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씀이다. 익숙한 것에만 집착하고 수줍음 많아 무겁고 어둡고 진지하지 못한 필자의 눈에 시인의 가난이 최적의 환경이 아니지만 따뜻하고 뜨거운 가슴이 있어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 시인으로서의 길 그러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다시 한번 되새기는 날이다.
피커소전을 하는 서울 시립미술관 앞에서 필자 이생진 시인
77세의 나이 60을 버리고 17세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이제 할 일이 많으시다 하시며 빠른 걸음 옮기신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는 '피카소'전이 한창이다. 자서전을 쓰기 보다 화가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다 하시며 미술관으로 서점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생진 선생님의 아름다운 피카소 연작시가 기다려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Life is short, Art is long)'라는 말이 있다. 詩人 이생진 선생의 詩 아마도 그러리라. 삶이 그러하셨으므로. 인사하는데 태양 빛이 찬란하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 같은 이생진 선생님 오래 오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