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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꾸는 사람들과 여호와이레 원문보기 글쓴이: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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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11. 25(목) |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진해시 웅천 1동) 백일 부락에서 부친 주현성과 모친 조재선 사이에서 네 번째의 아들로 태어나다. |
1906. 3. 10(토) |
웅천 개통학교에 입학 |
1910. 12. 25(일) |
웅천읍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다.(이 때부터 이름을 '기철'로 부르다.) |
1912. |
개통학교 고등 보통과 졸업 |
1913. 봄 |
정주 오산학교 입학 |
1915. 11. 7(일) |
오산교회에서 수세 |
1915. 겨울 |
조만식 선생을 따라 전도 여행을 다니다. |
1916. 3. |
오산학교 7회, 18명과 함께 졸업하다. |
1916. 봄 |
연희전문학교 상과 입학 |
1916. 여름 |
동 중퇴, 유산분쟁 때문에 학업 중단하고 낙향 소일하면서 신간회 오상근을 따라 청년 운동하다. |
1917. 겨울 |
김해 안기영 4째 딸 18세 안갑수와 결혼(이기선 목사 중신, 주례) |
1918. 봄 |
1918년 1월 <윌슨교서> 발표 후 봄에 웅천 청년 운동단 조직, 청소년 회원 50여 명을 매일 저녁 명륜당에 모아놓고 시국 강연, 계몽 강연 등 윤강회를 열다. |
1919 - 1921 |
웅천읍교회 권찰, 집사 피택, 교회 일에 봉사하다. 특히 회계 일을 맡아보다. |
1919. 4. 3(목) |
성내리 만세사건 20인 행동책의 한 사람으로 참가, 구류 1월 |
1919. 10. 25(토) |
장남 영진 출생 |
1920. 9월 초 |
김익두 목사 인도, 마산 문창교회 사경회에 참석 큰 은혜 받음 |
1920. 11. 1(월) |
김익두 목사 인도, 웅천읍교회 사경회에 참석,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하고 감사헌금 5원 바치다. |
1920. 12. 2.(목) |
조선 청년 연합 기성회 委員으로 피선 |
1921. 12. 13(화) |
경남 노회 제12회 노회(웅천기독교회) 목사 후보생 시취 합격 |
1922. 3. |
평양장로회신학교 입학 |
1922. 11. 5(일) |
차남 영만 출생 |
1922. 겨울 |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1925년 9월까지) |
1925. 1. 9(금) |
3남 영묵 출생 |
1925. 12. 22(화) |
평양신학교 19회로 졸업하다(졸업식 때 30명 졸업생 대표로 답사). |
1925. 12. 末 |
목사 안수, 초량교회 시무 |
1926. 1. 10(일) |
동 위임목사 |
1927. 11. 13(일) |
4남 영해 출생 |
1928. 7. |
3남 영묵 병사(4세) |
1928. 1. 3(화) |
제24회 경남 노회 부노회장 피선 |
1928. 7. 3(화) |
제25회 부노회장 역임 |
1929. |
경남 노회에서 주기철 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 결의 |
1930. |
제28회 경남 노회장 피선 |
1930. 3. 5(수) |
장녀 영덕 출생 |
1930. |
제29회 경남 노회 부노회장 역임 |
1930. 6. 22(일) |
초량교회 상여 마련키 위해 특별 헌금하다. |
1931. |
제30회 경남 노회장 |
1931. |
장녀 영덕 병사(2세) |
1931. 6. 28(일) |
초량교회 사임 표명 |
1931. 7. 5(일) |
문창교회 목사 청빙 공동의회 |
1931. 7. 12(일) |
문창교회 목사 청빙 공동의회 |
1931. 7. 15(수) |
목사 청빙 절차에 따른 임시 노회 소집 요구 |
1931. 7. 27(월) |
초량교회 주기철 목사 송별회 개최 |
1931. 7. 하순 |
문창교회 부임 |
1931. 8. 2(일) |
문창교회 주 목사 최초로 당회 열다. |
1931. 12. 13(일) |
안갑수, 조재선, 주영진, 주영해, 그리고 오정모 등 문창교회 교적에 올리기로 당회 가결하다. |
1932. 3. 6(일) |
문창교회 교회 전용 상여 준비 |
1932. 3. 18(금) |
4남 광조 출생 |
1932. |
웃동서 김성철 장로 병사(49세) |
1932. 10. 2(일) |
‘주일학교 교사’, ‘기숙사’, ‘사무실’ 건축문제 제직회에서 논의하다. |
1932. 10. 9(일) |
건축 기성회 조직 |
1932. 11. 7(금) |
건축 기성회 창립 회장 이순필 장로 취임 |
1933. 5. 10(수) |
큰 처형 병사(44세) |
1933. 5. 16(화) |
부인 안갑수 급사(34세) |
1933. 5. 19(금) |
안갑수 무학산 공동묘지에 안장 |
1933. 7. 3(월) |
노회장 주기철 목사 노회 결의를 거쳐 신 진리파 10명을 처벌하다. |
1933. 7. |
박형룡 박사 초청 1주일 간 노회 주최 수양회 가지다(신 진리파 문제를 놓고). |
1934. 4. 1(일) |
오정모 집사 와병 입원 |
1934. 8. 상순 |
부친 주현성 장로 별세(향년 81세) |
1934. 9. |
‘죽음의 준비’ 설교 |
1934. 9. 하순 |
평신 연구과 2개월 수학 |
1935. 2. |
종교시보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 기고 |
1935. |
주 목사 처남 사망(35세) |
1935. 11. |
오정모 집사와 재혼 |
1935. 12. 19(목) |
평신교내 사경회 강사로 마지막 날 ‘一死覺悟’ 설교하다. |
1935. 12. 20(금) |
평신 사경회 후 박형룡 교수와 학우회 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 촬영 |
1935. 12. 22(일) |
문창교회 현용택, 박영애를 7계 사건으로 치리 |
1935. 12. 22(일) |
교육관(주일학교 교사) 건축 설계도 작성키 위해 김준식 마산에 처음으로 오다.(동 건물은 주 목사가 마산을 떠난 후 착공하야 1937년 8월 8일<일> 거기서 제직회를 처음으로 연 것을 보면 그 무렵에 완공된 것이 분명하다.) |
1936. 2. 23(일) |
현 장로, 박 장로, 양기둥 장로 자녀 7계 사건 후유증으로 시무 사임하다. |
1936. 3월 한 달 |
일본 순회 전도 강연차 도일(3월 25일 경도에서 노진현 전도사 등과 기념 촬영) |
1936. 4월 |
산정현교회 임시 당회장 박형룡 목사로부터 청빙 의사 타진 편지 받다. |
1936. |
주 목사 장모, 안 부인 별세(향년 75세) |
1936. 7. 1(수) |
주 목사 내외 평양 가서 수요 설교하고 오정모 집사 기도하다. |
1936. 7. 하순 |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
1937. 3. 7(일) |
산정현교회당 신축을 위해 설교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취한다.’ 이날 헌금 약속이 4만 원에 이르다. |
1937. 9. 5(일) |
신축 산정현예배당 입당예배 드리다. |
1938. 2. 8(화) |
오후 2시 산정현 신축예배당 헌당예배 직전에 평신학교 장홍련이 김일선 노회장 기념식수 뽑은 사건으로 주 목사와 학생 10여 명이 연루되어 검속되다(27일 간). |
1938. 3. 6(일) |
장홍련 사건으로 주 목사 평양경찰서에서 27일 만에 석방되다. |
1938. 6. 하순 |
주기철, 이유택, 김화식과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하다. |
1938. 6. 30(목) |
일본기독교회 의장 富田滿 목사 산정현교회 1층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주기철 목사와 상호 토론 격전, 새벽 4시까지 가다. |
1938. 7월 |
제27회 총회 대비 검속되어 1개월 있다가 |
1938. 8월 |
의성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의성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인계되어 가다(6개월). |
1939. 2. 1(수) |
주 목사 조건부 석방되어 김정오 장로 대구 서문로 정안당 약국 집에서 3일 간 머물다. |
1939. 2. 4(토) |
주기철 목사 의성농우회 사건으로 7개월 간 옥고 드디어 석방, 대구에서 평양으로 주일 새벽에 돌아오다. |
1939. 8월 |
제28회 총회 전에 제3차 검속, 최후로 주 목사와 산정현교회 굴복시키기 위해 집행하다(9개월). |
1939. 10. 21(토) |
평양경찰서는 장로, 집사 18명을 호출하고 다음 사항을 지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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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교회위원(제직)은 매주 1회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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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설교 기타 교회 사무는 제직들만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인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말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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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금일 오후 3시까지 회답할 것 |
1939. 10. 22(일) |
위의 ②항은 채택되었으나 신사참배 문제는 제직회원 27인이 모인 가운데 부결되다. |
1939. 10. 22(일) |
조만식, 오윤선, 김봉순 등 3장로 사임하다. |
1939. 10. 23(월) |
어제 주일 낮예배 방계성 장로 설교 시비, 교회 폐쇄 위협하다. |
1939. 10. 25(수) |
방 장로 수요예배 설교가 문제되어 검속되다. 300명 교인의 통성기도로 부근 일대가 울음바다 되다. |
1939. 10. 29(일) |
평양경찰서는 오전 9시 조만식, 오윤선, 김동원 등 9명을 소환했으나 이들이 불응, 11시 예배 후 다시 오윤선 자택에서 모이도록 고등계 주임이 통보, 그러나 5명만 참석, 시미즈와 고등계 주임은 후임 목사가 결정될 때까지 기타 사무를 당회에서 맡아보도록 지시, 이에 불응하자 3·4시간 절충 거듭, 아무 성과 없이 해산하다. |
1939. 11. 2(목) |
오윤선, 유계준 등 4·5명의 장로를 불러 교회 목사 경질토록 권고, 완화책을 쓰다. |
1939. 11. 4(토) |
내일 주일은 오윤선 장로가 인도하기로 당회에서 결정, 그러나 주일 아침 부인 신도 3·4인이 오 장로를 방문, 예배 인도하지 않도록 요청하다 예배시간 40분 지연 후 오 장로가 인도하자 장내는 긴장이 갑자기 감돌다. |
1939. 12. 19(화) |
오후 1시 남문밖교회에서 임시 노회를 열고 평양경찰서 신임 고등계 주임 마쯔모드(松本) 평양·대동·선교 3서의 고등계 형사대와 특히 이 문제에 관계가 깊은 전평서 고등계 주임이고 현 平原서장 淸水川 경부가 임석, 삼엄한 경계 가운데 노회장 최지화 목사로부터 신사참배 전후 경과를 듣고 평서에 유치 중인 주 목사를 면회하여 권고했으나 이에 끝까지 불응했다는 보고를 마친 후 주 목사를 사면시키고 신사참배할 교역자를 산정현교회에 임명하기로 결의하다. |
1940. 3. 24(부활주일) |
오전 11시 9명의 노회 전권 위원이 산정현교회에 와서 임시 당회장을 세우려고 했으나 예배 5분 전에 양재연 집사 등단하여 찬송가를 계속 불러 예배를 못 보게 하니 경찰과 성도들 사이에 요소가 크게 일어나 이날 13명의 제직과 교우들이 연행되어 갔고, 9명의 전권 위원 명의로 <금번 형편에 의하여 당분간 산정현교회를 접함을 금지함>이라고 써 붙여 교회 문을 폐쇄하다. |
1940. 4. 20(토) |
주 목사 가석방되다. |
1940. 4. 22(월) |
채정민 목사댁에서 최봉석, 안이숙, 한상동 등 9명이 주기철 내외분을 위로하고 앞으로의 문제 등 협의하다. |
1940. 6. 초 |
주 목사 평양경찰서에 제5차 마지막 구속되다. |
1940. 2월 이후 |
웅천 고향에서 셋째 형 주기정 창시 개명을 신고하였는데 문중에서 결의한 대로 新安 주씨 新자와 熊川의 川자를 따서 <新川>으로 하다. |
1940. 11. |
안이숙 평양경찰서 유치장 생활 1년 동안 주 목사와 수화로써 대화를 하다. |
1941. 8. 25(월) |
소위 교회 복구 음모 가담자 전원 평양형무소로 송치되어 2년 8개월 형무소살이 하다. |
1942. 새해 초 |
주 목사 첫 재판 받으러 다른 옥중 성도들과 함께 용수를 덮어쓰고 재판소에 가다. |
1942. 가을 |
사모 오정모 집사 광조와 함께 형무소 송치 후 처음으로 면회가 허락되어 가다. 이때 新川으로 창씨 개명이 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되다. |
1944. 4. 13(목) |
주 목사 몸이 극도로 쇠약 병감으로 옮기다. |
1944. 4. 21(금) |
오정모 마지막 면회 최후의 유언을 하다. |
1944. 4. 25(화) |
평양 돌박산(대성산)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
1947. 1. 27(월) |
오전 7시, 부인 오정모 집사 유방암으로 병사, 돌박산 주 목사 묘지 곁에 나란히 묻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