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에서 뗏목을 타다
황 지 은
자메이카, 이름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카리브해 3번째 큰 섬, 우리나라 제주도 6배 크기인 자메이카는 주민이 흑인이다. 영국령식민지 시절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집단으로 수입하여 노예매매가 성행했던 곳이다. 그들의 후손이 뿌리내린 나라이며 레게음악이 있고 마리화나가 공식 허용된다고 한다. 허술한 치안에 살인비율이 세계 1위이고 범죄와 빈곤으로 개인 혼자 관광은 무리수가 따른다. 다행히 카리브해 에메랄드빛 바다와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서 크루즈배가 자메이카에 정박을 하니 그 곳을 중심으로 관광업이 발전하고 있는 나라라 한다.
우리도 딸네 가족과 함께 크루즈여행 기회가 있었을 때, 그 자메이카에 내렸었다. ‘강물 따라 뗏목타고 열대우림 즐겨보기’ 관광 상품을 미리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다. 다른 크루즈배가 먼저 정박해 있어서 관광객들은 수없이 많았다.
미국이 출항지인 관계로 관광객은 거의 백인이었다. 현지 인솔자와 함께 버스를 타고 산자락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니 뗏목이 출발하는 지점이 있다. 기념품가게가 있었고, 거기서 손자가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우리는 앞서 간 일행의 마지막 끝 순서로 줄을 서게 되었다. 뗏목은 대나무를 통째로 엮어서 길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 의자에 2명이 앉으면 사공이 노를 저어 물길 따라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사공들은 하나같이 다 허름한 차림새에 맨발이었다. 새까만 얼굴, 대비되는 눈 흰자위, 번득거리는 눈동자를 보니 긴장이 절로 되었다. 손바닥 발바닥색만 연한분홍이다. 도시에서 보는 흑인 모습과는 사뭇 분위기부터 달랐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딸은 우리 먼저 뗏목을 타라고 했다. 뗏목은 연이어서 왔고 출발은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인솔자가 목적지로 먼저 가고 없었다.
딸네식구 3명만 달랑 남으니 염려가 되는데 사위가 곧 뒤따라간다면서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리 뒷모습을 신혼부부처럼 사진 찍어주겠다 농담도 하니 남편과 나는 웃고 먼저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강물 따라 경치는 특별함이 없고 밋밋했다. 관광비가 비싸서 기대치를 가졌던 우리는 실망이 컸다. 그래도 낯설어 무섭기까지 했던 흑인사공이 우리 스마트 폰으로 능숙하게 사진 찍고 ‘코리아 삼성 최고’ 엄지 척도 해주고 노래도 부르니 긴장이 좀 풀렸다. 그는 열심히 경치 설명을 해주었다. 영어가 서툰 우리와 몸짓소통 하며 함께 어깨동무 시늉도 했다. 내가 노를 저어도 보며 친숙해질 때쯤에 배가 도착했다. 역시 강은 꽤나 길었다. 우리는 달러로 팁을 주었고, 서로 손 흔들어주며 기분 좋게 내렸다. 그런데 바로 뒤따라 왔어야 할 딸네 가족이 오는 내내 보이지를 않았다. 강물 위쪽을 기린목하며 살펴보았으나 따라오는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현지 인솔자에게 항의를 해도 기다리라 시늉만 할뿐 태연했다. 별 수 없이 먼저 도착한 일행들도 버스출발을 못했다. 나와 남편은 애꿎은 강물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있었다. 족히 한 시간은 되었을 무렵에야 저 멀리 뗏목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와 살펴보니 사위표정은 굳어 있고 딸과 손자는 시무룩했다. 연유가 궁금했으나 일단은 무사하니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일행이 오래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서둘러 올라탔다. 차안에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애초부터 출발지로 사공이 오지도 않았단다. 사위말로는 나쁜 사공을 만났다고 했다. 사공은 자기 차례에 애송이 동양인만 있으니 후한 팁 잘 주는 백인손님을 태울 욕심으로 아예 숨어버렸단다.
딸네가 마지막 손님이고 버스가 출발을 못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야 뒤늦게 사공이 나타났단다. 딸네는 기다리면서 불안했고, 뗏목에 탔어도 계속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공은 관광 설명 한마디 없이 내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공예품 내밀며 비싼 값에 사라고 요구했단다.
사위가 지갑까지 열어 보이며 들어있던 기본 현금을 팁으로 주면서 마무리를 했단다. 사위가 이런 경우는 강탈이며 무례한 옵션을 소개한 크루즈 사무실에 강력히 항의할 것이라 하며 노여워했다. 사위는 자메이카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라며 흥분했다. 걱정하며 애를 태웠던 우리도 당연히 많이 속상했었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았던 크루즈여행에서 자메이카 기억의 일부는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한편 다른 맥락으로 보면 후진국에서 사공이 관광수입의 일부라도 과연 받기는 하는 것일까? 하루에 한번이라도 노를 젓게 되면 다행으로 그들은 팁과 물건 판매만이 유일한 수입은 혹시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크루즈를 즐기는 인심 후한 백인의 달러 위력에 곤궁한 사공은 목숨 줄이 걸려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척박한 삶이 무겁다면 조상을 사고팔며 노예로 부렸다는 이야기는 흘러간 역사일 뿐 현실에서는 부유한 백인이 구세주로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탔던 뗏목의 친절했던 늙은 사공은 집에 부양해야 되는 가족과 애들이 많다고 했다. 그 순간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연필 볼펜이라도 한통 가져왔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항상 좋은 생각은 나중에 떠올라 실천이 어렵게 만든다. ‘사람냄새가 나는 여행을 할 때 여행의 참 묘미가 있다.’ 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메이카에서의 체험은 ‘공정여행을 해야 한다.’ 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여행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그 공포의 자메이카 뗏목 여행 체험까지도 미화되는 추억으로 남는다. 그 기억을 떠올리니 오늘따라 미국의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가 사믓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