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되어 말씀이 임한 이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계시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그 흔했던 수많은 선지자들의 활동이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 200년 간의 포로 귀환의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그 이후 침묵하십니다. 마치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70 식구 얘기가 있은 이후 모세가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성경은 역시 침묵합니다. 그래서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대, 또는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져서 암흑시대라 일컫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도 이 시대에 대해서는 글로 기록된 자료가 가장 빈약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책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는 한 장 차이지만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400년의 역사는 구약을 읽던 우리의 관점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웬지 신약은 구약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어쨌든 구약보다는 좀 수월한 느낌이 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복잡한 역사얘기가 없어서 좋고, 읽으면 그래도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어서 친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신약은 겉으로 그냥 읽어서 얻는 깨달음의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역사적인 배경과 연결해서 읽지 않으면 윤리와 도덕률을 깨닫는 수준 정도의 교훈밖에는 얻기 힘들고, 눈에 안보이게 깔려있는 수많은 신약의 사건들과 예수님의 교훈은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어려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신약의 배경이 되는 정치구조, 사회구조, 영적인 상황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연결된 것이고 흘러온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약에 나타나는 기원 후의 역사, 소위 A.D. 원년이라 불리우는 예수탄생의 역사도 과거에 끈이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끈은 바로 구약 이후 400년 동안 성경이 침묵한 그 기간 동안의 것입니다.
구약은 구약인가보다 하고, 신약은 신약인가보다 하지만, 신·구약 그 사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배울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선지서 부분처럼 바로 이 신 구약 중간 부분도 안개에 싸여있는 동네처럼 늘 뿌연 느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도 우리가 조금 투자해서 공부해 놓으면 신·구약이 뻥 뚫리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이 기간 동안의 역사를 이스라엘이 소장하고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기록, 세계역사들, 또 역사가들이 기록한 책들을 통해서라도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전복따러 갑시다!!)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성경의 주인공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다는 것은 이제 ‘국가’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그 국가를 이루고 있던 제도나 조직도 이젠 옛날 같은 형태로는 재조직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잡혀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유다의 지도층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이전의 국가조직처럼은 못 돼도,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혁혁한 활동을 한 사람이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는 것은 이미 공부했습니다.
이제 중간기 시대를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려놓아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중간기 시대의 사람들이 어디 어디에 흩어져 있는 중인가를 염두에 두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중간기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성경은 유다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기록이 없어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신약에 와 보니 예수님이 자라나신 땅은 북방 이스라엘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땅 북부지역의 한 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을 안하고 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이 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살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약을 공부한 것으로 보면 북방의 10지파들이 살고 있던 땅에는 북이스라엘 사람만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신약에 오니까 북방땅에도 유다지파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는 겁니다. 분명 어느 때부터인지 이 북부 갈릴리쪽에도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바사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나름대로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진 것 같습니다. 에스라서 명단에 나타나는 귀환백성들은 주로 레위지파 중심의 지도급 인물과 예루살렘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인데 이들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북쪽 지역으로도 퍼져나가 정착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거나, 북방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거나, 남방 유다지역을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거나,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팔레스타인 땅 덩어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서 후손이 퍼져나와 계속해서 신약까지 흘러간 것입니다. 또, 팔레스타인 땅, 가까이로는 요단동편 베레아지역(모압), 데가볼리(갈릴리 동북쪽 이방땅),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3개월 간은 베레아지역에서 사역하시는데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눅 13:10).
그런데 이 사람들 말고 또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즉 포로로 잡혀갔거나 일찍이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외국에 흩어져서 계속 거기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도 흩어졌고, 또 우리가 아는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나름대로 살게 됐고, 에스더서에 있는대로 바사(이란)의 수사성에도 유대인 무리들이 살았습니다. 바벨론, 바사의 세력이 지나고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면서 터키 지역(소아시아, 에베소), 유럽(첫 성 빌립보, 데살로니가, 마게도냐, 아테네, 고린도 지역 등),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에도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쪽으로도 흘러가 산 유대인들이 있습니다.(심지어는 일본에도 유대인들이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을 전시해 놓은 사진을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방을 전도할 때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도한 것을 보면, 위에서 설명한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 그럼 이렇게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400년 동안 유다는 어떤 나라에 종살이를 하면서 흘러가게 되는지 그 역사를 자세히 훑어봅시다. 우리의 목적지인 신약시대에 오면 로마가 주인으로 앉아있습니다. 그러면 400년 동안 어떤 나라들이 이 유다의 주인으로 행세했는지 그 역사를 살피면서 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이 유대 공동체는 어떻게 몸살을 하면서 살아남는지 보십시다. 이 공부를 하면서 또한 예수님 시대에 나타나는 헤롯, 분봉왕, 대제사장, 바리새파, 사두개파, 가이사 등등 수많은 시대적 배경들도 간단하게나마 살펴봅시다.
1. 바뀌고 바뀌는 팔레스타인 땅의 패권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70년 간 바벨론에 종살이를 합니다. 그 후 구약이 끝날 때는 바사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바사통치를 받은 총 연수는 약 200년입니다. 그러다가 B.C. 336년 경 그리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를 점령해서 약 30년 간 지배권이 넘어갑니다. 그후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프톨레미가 이집트지역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어 100년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나서 역시 알렉산더의 부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프톨레미와 맞수였음)가 팔레스타인 땅을 프톨레미에게서 빼앗는 바람에 이번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셀주크 왕국)왕조가 약 34년 간 지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유다의 마카비가 B.C. 165년에 셀레우코스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성공합니다. 그후 약 100년간을 유대는 독립국가로 있다가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게 예루살렘을 점령당하므로 그 유명한 로마제국의 수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70년)? 바사(200년)? 헬라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30년)? 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 (100년)? 앗수르 바벨론 통치자 셀레우코스왕조(34년)? 유다가 독립함(100년)? 로마의 점령(B.C. 63년)? 예수탄생(B.C. 4년)
1) 첫째 주인 : 바벨론
바벨론은 70년 동안 유다를 지배합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벨사살)는 혜성처럼 나타난 페르시아 고레스에게 패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근근히 그저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지 특별한 집단이나 공동체 운동도 없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고급 인력들은 나름대로 왕궁에 등극되기도 합니다. 이때 다니엘과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잡혀온 레위인, 제사장을 중심으로 율법이 가르쳐지고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을 통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의식을 고수합니다.
2) 둘째 주인 : 바사 (페르시아)
성경에 나타나는 포로시대의 주인공들은 주로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들을 많이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포로에게 자유령을 내렸던 고레스를 비롯해서 다리오 1세,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1세, 다리오 2세, 아닥사스다 2세를 거쳐 다리오 3세에 이릅니다. 이 왕들 사이에 함께 살았던 유대 지도자들은 다니엘, 스룹바벨, 예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입니다. 그러니까 포로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바사의 영향력 밑에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이 동안에 일어났던 성경의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포로귀환, 성전재건, 성곽재건, 개혁운동 등을 통해 새로운 포로귀환 공동체가 생기는 기간입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인 그들의 생활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페르시아 말기(에스라 후 100년) 즈음부터는 유다는 자체의 화폐를 찍어내고 내국세를 징수하는 정도의 권한이 허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제사장 가문 이름의 인(印)들이 찍힌 항아리 손잡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제사장들이 바사의 총독으로서 행정관 역할도 한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또한 이 때는 이미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대신 그 당시 공용어였던 아람어를 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적 공용어로는 아람어를 썼지만 히브리어도 기독교 초기까지 계속해서 쓰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헬라문화도 주변을 공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페르시아와 헬라는 자주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아직 헬라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이라 해도 이미 문물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인, 군인, 학자 등이 오고 갔고, 헬라의 공예품들과 그릇들이 뵈니게 항구를 거쳐 유다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들이 헬라문화에 접속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3) 셋째 주인 : 그리스 (헬라)
사실 바사의 마지막 왕인 다리우스 3세와 그리스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는 같은 시기에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각각 자기 나라에서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패권이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갑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사람입니다. 학문과 문화, 철학에 일찍 눈이 떴던 알렉산더는 온 세상을 헬라화시켜야 한다는 분명한 꿈을 갖고 대단한 열정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갔던 사람이었습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로 페르시아군을 패주시킨 후, 뵈니게, 두로, 이집트가 차례로 그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유다)도 그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의 정복은 동방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바벨론 지역을 공격해서 수사(에스더 궁이 있던 곳)까지 점령했고 멀리 인더스강까지 건넜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병에 걸려 서른 세 살이 채 못되어서 죽었습니다(B.C. 323). 정말 짧고 거창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의 저돌적인 공격은 동방지역에 새로운 획을 그었습니다. 헬라화입니다. 당시로서는 온 세상을 완전히 헬라화하는 바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비록 그는 갔어도 그의 부하들이 이 빼앗은 땅들을 맡아서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 넷째 주인 : 프톨레미 왕조
온 세상을 다 얻다시피 통일천하를 한 알렉산더는 그 어마어마한 땅들을 정복했지만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는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투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두 사람이 가장 큰 권력을 갖게 되는데, 프톨레미와 셀레우코스였습니다. 프톨레미는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셀레우코스는 바벨론 땅을 갖게 됩니다. 이 두 경쟁자는 팔레스타인과 뵈니게를 탐냈는데 결국 프톨레미 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헬라인이 다스리는 이집트’의 속국이 됩니다. 이 왕조는 1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을 다스립니다. 헬라의 속국이었을 때는 팔레스타인에 이렇다 할 중요한 사건이나 자료들이 없는데 반해 이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5) 다섯 번째 주인 : 셀레우코스 왕조
① 선왕들의 호의정책
알렉산더 대왕의 유력한 두 부하가 있었다고 했지요? 한 사람은 앞에서 얘기한 프톨레미 왕조를 이룬 프톨레미 1세이고 또 한 사람은 셀레우코스 1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셀레우코스 왕조도 헬라 사람의 왕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역사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졌지만 그의 부하들이 곧 이어 이집트와 바벨론 두 큰 덩어리 땅들을 차지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원했던 대로 사실은 헬라화가 된 셈입니다.
②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유대교 탄압
안티오쿠스 4세는 B.C. 167년 급기야 유대인 양민들을 급습하여 학살합니다. 그의 부왕이 내렸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유대교의 모든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희생제사를 금지했고, 안식일과 절기 지키는 것을 금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는 명령을 내렸고, 할례를 금지시켰습니다.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이교의 제단들을 도처에 세웠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으며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6) 마카비 혁명
셀레우코스 왕국(앗수르 지역)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와의 전쟁으로 독립을 얻어낸 유다 마카비 혁명의 역사는 앞으로 전개될 신약시대의 정치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신약에 헤롯가문이 등장하게 되는지 그 연고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시대와 관련되어 탄생되는 헤롯 왕조의 가문을 이해해야 신약시대의 정치 판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7) 여섯 번째 주인 : 로마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제국이었던 로마도 처음 B.C. 8세기 경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간 쯤에서 생겨난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도시국가 로마는 점점 힘이 강대해져서 B.C. 270년경에는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이러면서 잡아온 노예들을 검투사로 만들어 즐겼는데 이런 노예들을 특별히 ‘스파르타쿠스’, 즉 ‘검노’라고 불렀습니다.(영화로도 나왔었죠? Gladiator, ‘검투사’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검노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검노들이 뭉쳐서 반란군이 되었고 급기야는 그 수가 10만이나 이르게 됩니다. 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원로원은 폼페이, 크랏수스를 임명했고 이들은 성공리에 검노들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 후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을 더 가입시켜서 원로원을 누르고 그 유명한 ‘3두정치’라는 걸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케자르, 즉 율리어스 시저(가이사)였습니다. 가이사는 이렇게 해서 등장합니다.
그 후 가이사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북이탈리 지역) 지방에 쳐들어가서 엄청난 숫자의 부족들을 평정합니다.
폼페이 장군 역시 여러 지역에 출정(出征)해서 나라들을 합병합니다. 그는 특별히 동방으로 진출해서 터키 지역과 수리아 등지를 정복합니다. B.C. 64 년에 다메섹을 점령한 후 수리아 주(州)를 만들더니 1년 후에는 그 아래로 눈을 돌려 유다를 정복합니다. 이 찬스를 놓치지 않은 에돔 총독이었던 안티파터는 폼페이를 도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일조를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전쟁으로 1만 2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혁명으로 시작된 유다의 독립이 약 100년 후 다시 로마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즉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이 사건을 시작으로 로마 통치시대를 연 것입니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 2세는 항복을 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합니다. 이로 인해 힐카누스는 더 이상 왕으로서가 아니고 “대제사장”으로서 유다를 다스리게 됩니다. 폼페이가 그렇게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안티파터(안티파스의 아들, 대헤롯의 아버지)는 “집정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지역을 다스리게 해 주었습니다. 이 때로부터 마카비 수하에 있었던 헤롯 가문은 공공연히 유다지역의 정치가로 등단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로 간 헤롯은 대단한 로비활동을 합니다. 만약 자기를 유대의 왕이 되게 해 주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로마 원로원은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합니다. 지금 쫓겨온 신세인데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입니다. 현재 유다 땅은 유대인 안티고누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은 헤롯 가문을 ‘에돔의 종놈들’이라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가 헤롯을 정식 ‘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어도 다시 뺏어라. 뺏을 때 도와주지!” 그런 뜻이겠지요. 헤롯은 다시 싸워서 이 땅을 얻어야 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 계열의 마지막 통치자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성을 빼앗습니다. 이 때 헤롯을 도와준 사람이 안토니우스였습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대단한 충성을 맹세했겠죠? 이렇게 해서 헤롯은 명실공히 “유대의 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B.C. 37년의 일입니다. 이 때부터 에돔사람 헤롯가문은 “유대의 왕”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B.C. 37년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B.C. 4년까지 유대를 통치합니다. 대헤롯은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부지역(수리아, 터어키 등 지중해 동쪽 내륙)을 장악했던 안토니우스는 그만 이집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이라는 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과 해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므로 명실공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대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 황제입니다. 이때에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하는 바람에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내려갔습니다(눅 2:1).
이렇게 황제 명칭을 최초로 가진 사람이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숭고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나중에 받음)였지만 ‘가이사’라는 이름이 통상 ‘로마황제’를 상징하는 칭호로 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이사’ 하면, 황제를 가리킵니다.
2. 신약에 등장하는 주요 직책들
q 헤롯왕? 분봉왕? 총독? 산헤드린 공의회?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엣센파?…
1) 헤롯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나타났던 대헤롯(Herod Great, B.C. 37∼4)도 헤롯왕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30세 어간에 있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 4∼A.D. 39:대헤롯의 아들, 아켈라오 동생, B.C. 78년에 사망한 최초의 에돔 왕 안티파스와 이름은 같지만 4대째 내려온 때임)도 헤롯왕이라고 지칭합니다.
대헤롯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서 알다시피 소위 헤롯가문을 유다에 튼튼히 ‘왕’으로 자리매김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약 30년 이상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마치 남방 유다를 쳐들어온 애굽과 바벨론이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세워놓고 떠났던 것과 똑같은 그런 식으로 된 왕이지요. 식민 백성은 유대인이요, 꼭뚝각시 왕은 에돔사람이요, 실권자는 로마인 셈입니다. 그는 B.C.3 7∼4년까지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건축도 시작했고, 여러 도시들을 세워 나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어떻게 해서 얻은 “유대인의 왕” 자리인데, 자기 말고 누군가 “유대인의 왕”이 난다니, 이 대단한 헤롯이 가만 있을 리가 없지요. 유아들을 다 살해하라는 명령까지 냈는데 그만 자기가 죽어버립니다. B.C. 4년 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B.C. 4년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일찍인 B.C. 5년 겨울로 잡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이 대헤롯의 죽음이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계산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참 흥미롭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유대인의 왕” 대헤롯이 죽는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인(30세)으로서 활동하시는 때는 더 이상 이 대헤롯 왕 때가 아닙니다. 그의 아들들이 다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여럿이었다는 겁니다.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입니다. 누구 한 사람을 지명해서 왕을 잇게 했으면 우리도 안 복잡할텐데, 대헤롯은 아들 셋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고 유언을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데 그 쪼그만 땅을 또 조각조각 나눠 따로 다스리게 해 놨으니 우린 여간 골치 아픈게 아닙니다.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요단 동편)을 줍니다. 빌립에게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을 물려줍니다. 그리고 아켈라오에게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메(에돔지역)의 통치권을 줍니다. 아켈라오에게 반을 주었고 나머지를 두 아들에게 준 셈입니다. 이렇게 나눠진 땅을 다스리던 왕들을 가리켜서 ‘분봉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헤롯이 유언했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인가를 받아서 되는 것인데 ‘분봉왕’ethnarch는 ‘왕 king’(대헤롯 같은)보다는 낮은 지위입니다. 한국말로는 똑같은 분봉왕이지만 ‘분봉왕 ethnarch’는 ‘분봉왕 tetrarch’보다 높은 지위로 불리던 명칭입니다. 아켈라오에게는 ethnarch를, 빌립에게는 tetrarch라는 명칭으로 허락합니다.
아켈라오는 마태복음 2장 22절에서 한 번 성경에 언급됩니다. 이집트에 피난갔던 예수님의 가족이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리로 올라가 살게 된 경위를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대헤롯이겠다는 생각이 나야합니다.)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유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에돔지역을 분할받습니다. 유대지역은 아켈라오 영역이었습니다.
빌립이 다스리던 갈릴리 북동부 지역은 주로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가 세운 도시였습니다. 이것 역시 로마황제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이미 ‘가이사랴’라는 도시(건축광 아버지 대헤롯이 세웠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로마에 재판 받으러 가기 전에 2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곳)가 지중해 연안 해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와 구분하기 위해 자기이름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북쪽의 헐몬산 자락에 있는 휴양도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기도 하신 그 곳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중에 나오는 헤롯왕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세 번 있습니다. 그는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은 아님, 다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왕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질책합니다. 결국은 이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세례요한의 참수 이후 예수님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죽었던 요한이 살아난 것 아닌가 싶어서 매우 초조해 하기도 한 사람입니다(눅 9:7). 그리고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 헤롯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도 아버지를 닮아 건축광이었습니다. 갈릴리에 디베랴라는 도시도 건설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나타났던 헤롯가문들은 그 후 사도 바울이 선교하는 동안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다른 헤롯왕들이 나타나지요. 이 때 나타나는 헤롯왕가의 이름이 바로 아그립바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아켈라오나 빌립, 안티파스 같은 분봉왕들의 자식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버지 대헤롯의 형, 그러니까 그들의 삼촌들 가운데 파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의 혈통을 타고 내려온 다른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결국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왕(행 12장)입니다. 처음으로 아그립바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 후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올라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됩니다. A.D. 55년경에 이르면 갈릴리와 데가볼리,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며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A.D. 100년 경까지 다스립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것 아시지요? 이미 1, 2, 3차 선교여행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에 헌금 전달하러 갔다가 체포된 얘기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로마서 편지를 이미 다 쓴 시점이지요.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해서 일단 가이사랴 감옥에 억류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유대총독 관저가 있었다)에 있는 동안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있었던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빌라도 다음에 나타난 총독이겠구나 생각이 나시죠?)
이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2세가 가이사랴로 방문오는데 이때 바울이 그들 앞에서 간증을 합니다. 그 유명한 바울의 개인 구원 간증이 이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한 간증입니다(행25∼26장). 아그립바2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행 26:28, 32)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2) 총독
보통 전쟁을 해서 나라를 빼앗으면 그 나라를 다스리기는 다스려야 하니까 누군가 통치자를 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통상 정복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통치자(king, ethnarch, tetrarch)로 새로 세운 다음에, 그 사람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배울 때 애굽의 바로느고가 백성들이 세운 여호아하스는 잡아가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던 것 기억나시지요? 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여호야긴은 잡아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세웠던 것 생각나시지요? 그것처럼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만들어 놓고 원격조정하는 것이 보통 하는 식민정책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세울 왕이 없을 때는 본국에서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 사람을 총독이라고 불렀습니다. 포로시대 때 느헤미야는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빌라도 총독이라고 말합니다.
3) 산헤드린공의회
황제나, 헤롯가문이나, 총독이나 그런 정복자들은 순수 유대인 공동체에서 볼 때는 적들입니다. 힘이 없어 당하고 있는 것이지 힘만 있다면 들고 일어나서 독립하고 싶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바로 이 순수 유대인 공동체 속에는 나름대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겁니다.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공의회’라는 말이 시사해 주듯이 이것은 ‘의회’를 가리킵니다.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기관’입니다. 황제나, 헤롯이나, 총독같은 외부세력 말고, 유대공동체 속에서는 가장 높은 소위 ‘정치기관’이 바로 이 의회였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파 사람 등 유대 사회의 지도자급의 사람들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인 주권은 비록 로마나 헤롯왕이 갖고 있었으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 그리고 행정적 기능까지 갖고, 어느 선 까지는 자치적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요 18:31)”라고 한 말에 나타난 법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예외는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를 범했을 때입니다. 물론 모든 법은 율법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공의회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우리는 이 공의회를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주 먼 옛날 모세시대 때 모세를 돕는 백부장, 오십부장 등이 있었지요? 그 사람들을 장로라고 불러왔습니다(신 27:1). 이들은 그 후 여호수아나 사사시대를 지나오면서도 계속해서 백성들의 대표로 유대사회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장로들’, ‘귀인들’, ‘방백들’이라는 이름으로 있어오다가 신약에서는 ‘산헤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4) 대제사장
산헤드린이 유대인 자치세력으로서 최고의 기관인데 반해 한 개인으로서도 또 대장(?)이 있는 겁니다. 이 대장은 누구였을까요? 이 유대인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에 과거 에스라 이래로 대제사장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위치라고 볼 수 있는 직책이라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종교당파(신학적 배경)로 말하자면 사두개파였습니다. 이렇게 외형적 전통으로 볼 때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대제사장이요,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지, 사실은 로마나 헤롯이나 총독에 붙어서 자기의 권력을 즐기며 백성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착취하는 세력으로 쉽게 타락하곤 했습니다. 잘하는 대제사장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라는 직함이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라는 것을 안 정복자들은 아예 이 대제사장까지도 자기네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을 임명해 버리면 쉽다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계열의 레위인이 대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데 눈이 밝은 사람들은 돈을 갖다주고 이 ‘대제사장권’을 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 안나스같은 사람입니다. 물론 유대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남은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숨어있는 참 이스라엘, 경건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는 나다나엘, 시므온, 안나, 요셉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대제사장이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영적지도자로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로마나 헤롯 가문과 결탁해서 그게 그거인 셈이 된 형국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전에서 제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장사까지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백성들을 대신해서 속죄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5) 서기관, 율법사, 랍비
팔레스타인 땅 본국에 사는 유대인들은 어쨌거나 이런 성전에라도 출입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온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율법을 배우고 유대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 모이게 된 장소를 가리켜 회당이라고 부릅니다. 외국 땅에서 유대정신을 잇게 하는 집회장소인 셈이지요. 이 회당은 후에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수없이 많이 세워져 교육기관이 되었고, 그 후로 바울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세워집니다. 회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가르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교육을 한 것입니다. 회당은 이방 땅에서뿐만 아니라 고국에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도 세워졌습니다. 사실 이 운동은 원래 제사장 겸 학사였던 에스라가 했던 일입니다.
에스라 이후 중간기를 지나오면서부터는 어떻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율법을 쉽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해석하고 쉽게 풀어주는 서기관, 율법교사, 지혜교사, 랍비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즈음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설교를 하십니다.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풀어 해석해 주어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었습니다. 과거 모세 시절에 기록된 모세오경을 포로시대 후기에는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해석’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2Km다’, ‘정결케 하는 규례로 손을 씻을 때는 팔꿈치까지 씻는다’ 등등 율법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일들을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이 한 것입니다. 또 공적인 자료들을 기록하고 필사했던 사람들(왕하 12:10)이 있었듯이 서기관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법률가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산헤드린의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또 신학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6) 바리새파(The Pharisees)
이들은 그들 스스로를 거룩하게 생각하며 의식상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별했습니다.
정결 예식과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그룹들은 엉터리라는 것을 백성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조세프스 기록에 의하면 제사장가문을 욕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으로 보다 종교적인 면에서 더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니고데모,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도 있었던 점으로 보아 진지하게 율법을 연구하며 구약을 계승하려는 그룹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구약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들을 통해 명맥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정통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핵심세력이 이들입니다. 사두개파가 A.D. 70년, 또 한번의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에 비하면 바리새파야말로 유대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사두개파(The Sadducess)
‘사두개파’는 유대교 안에서 제사장적 귀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종파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지주들입니다.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독’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사독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고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에 대제사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직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카비 혁명을 전후로 해서 제사장 제도가 재정비되고 재조직될 때 사두개파가 하나의 당파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며 경쟁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8) 열심당(The Zealots)
열심당은 영어의 음역을 따라 ‘셀롯인 시몬’(눅 6:15)이라 표기된 것과 같이 ‘셀롯당’이라고도 합니다. 이 당파는 종교적 당파가 아닙니다. 열성적 민족주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마카비’ 활동에 그 기원을 둡니다. 그런데 요세푸스같은 역사가는 이들을 ‘강도들’, ‘산적’으로 불렀습니다. 맹렬한 반로마주의자면서 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기득권 세력자들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토라(모세율법)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9) 엣센파(The Esseness)
이밖에도 쿰란 공동체로 불리우는 ‘엣센파’가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 공동체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문서들의 발견으로 이 시대의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들이 백성들과 접하는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이들은 광야에 은둔하는 수도사적 성격을 가진 단체였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 엣센 공동체에 관계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기도 합니다. 종교 공동체로서 극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로 거주했던 동굴 속에서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사해사본’입니다. 이 사본은 구약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로 공헌을 합니다.
▒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행정구역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로마시대의 유대 지리는 매우매우 간단합니다.
구약시대처럼 열두 지파 땅들을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세 도만 알면 됩니다. 북쪽으로 갈릴리도, 중간에 사마리아도, 아래에 유대도, 이렇게 머리에 그려놓고 신약에 많이 등장하는 성읍들만 좀 공부하면 됩니다.앞으로 신약성경을 읽을 때 거리감각을 가지고 읽으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하면 어느 정도 여행길인가를 감 잡으면 좋습니다. 적어도 사흘길입니다. 주로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갈릴리도의 가버나움 사역과 유대도의 예루살렘성에서의 사건이 많으므로 이 정도 지역쯤은 늘 머리에 설정해 놓고 있으면 재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사람들의 땅으로 알려진 위의 세 도 말고도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그 근처의 이방 도들이 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이방이지만 그래도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섞여 살았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요단 동편으로 알려진 지역인 베레아도, 갈릴리 호수 동남쪽의 이방인들의 땅 데가볼리도, 갈릴리 지방 북쪽의 두로와 시돈(베니게 지역)지역 등이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