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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이 한족일까요? 아래의 기록을 보면 전부 푸른 눈의 달단 몽고족 같습니다. 홍건적 1차 4만(10만?), 2차 20(30만?)만이 대륙 남쪽지방에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알타이산에 있는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온다. 도저히 말도 안되죠.
러시아 고지도와 미국 beers.j.b. and company 사에 기표된 캄발리크(대도=북경)와 카라코룸(심양)등을 보건데, 심양이 카라코룸이라면(육오재집-영조) ,수많은 연행록이라는 것도 전부 대륙조선을 숨기는 사기 창작물이 아닐까합니다.
지도상으로 의주에서 조금만 가면 북경이지 않습니까.
미산집에 .연도(燕都)는 천하의 북쪽에 자리한 옛날 변방의 요새로 큰 사막의 접경에 있는 고을이라 일컬어지던 곳인데, 사람들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풍속이 드물고, 그 지역엔 숭산(嵩山)과 낙양(洛陽)의 승경도 없어 다만 궁실과 성시로 그 부유하고 화려함을 과시한다. 우리나라와 땅이 가장 가까워서 다만 작은 강 하나를 떨어졌을 뿐으로, 사신의 수레가 조석(朝夕)으로 왕복하니 유람의 장엄함과 이별의 괴로움이야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고구려.백제.신라가 오월연제지역등에 존재했고(약천집.임하필기.고운집.연암집.해동역사등) ,그 영토를 이어 받은 고려가 어떤 특정 이유도 없이 한반도로 쫒겨났다는 것은 설명이 안되고, 대륙남부에서 발생한 홍건적이 원나라 군사에 쫒겨 압록강(알타이산)을 건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홍건적의 난은 한반도로 고려를 축소 조작하다 보니 대륙조선사와 꼬이게 된 것 아닐까요.
홍건적 2차 침입때 원의 대도가 습격받고, 고려를 침입한 20만대군을 물리친 후 전리품중에 원의 천자옥쇄 2개가 있었고 ,그것을 원나라에 돌려준 기록이 있죠. 더욱이 2차 침입때 주원수 또는 왕원수는(주원장 추정 인물) 이성계장군에게 목 베임을 당한 것으로 나오죠. 손문이 농민군을 모집하면서 주원장의 얼굴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반청복명을 기치로 걸고 신해혁명을 이뤄냈습니다.
고려와 명의 전쟁에서 고려에 붙잡혀 자살한 명의 복진장군에게 동사강목에서는 上(명 황제)이 낙랑공을 봉작합니다. 용재총화에 조반이 명 황제를 탈탈의 군중에서 보았다는 말을 합니다. 청장관전서에 유기 와 주이준도 원나라 대도 궁전에서 기황후를 보고 시를 씁니다. 기황후는 명태조의 비가 되어 영락제를 낳습니다. 마황후는 불임이었다 기록되어있습니다.
목은 이색 경사입조.윤이.이초의 사건.철령위 설치등도 명태조와 원순제에게 동시에 같은 사건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진광 이란 잡지에서 일본열도에 고려촌.고려왕비석이 존재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병존한 기록도 많고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 경도 상(京都上),,,,,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顓)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本朝洪武二年,高麗國王王顓表賀卽位。詔許自爲聲敎,賜以龜紐金印。】
이 시기에 즉위한 임금은 명태조쁀입니다. 명태조가 누구인가? 왜 고구려는 빼고 말하는가?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동환봉사 > 동환봉사 > 올리려던 16조의 상소[擬上十六條疏] > 최종정보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設如前朝之季。倭船雲集於下三道。畿,黃之境。蒙古紅巾。蜂午於兩界之地。
봉기[蜂起] 뜻이 맞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떼 지어 세차게 들고일어남
兩界: 고려와 조선 시대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평안도 지방인 서계(西界)와 함경도 지방인 동계(東界)를 아울러 이르는 말.
유방집(遺芳集) 독립운동가 82인의 열전 / 열전 2 최익현전〔崔益鉉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원 세조(元世祖)를 꺾어 버렸으니 여덟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이에 대항하였다.
잡지명 삼천리 제13권 제4호 발행일 1941년 04월 01일
意志는 조금 틀리나 蒙古族은 支那에 들어 오잖었다고 그래서 그 영향은 맞지를 않으나 다른 民族이 다 영향을 받었다.
동광 제36호 1932년 08월 01일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高麗族의 유적 그런데 이 寶山의 전설로써 于今에 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방은 북으로 산을 끼고 남으로 열리어 小河가 흐르고 잇어 實로 沃野千里이나 이 땅이 金遼시대에 벌서 高麗族의 손으로 개척되어 당시에는 극히 융성한 바 잇엇다 한다. 지금에도 高麗 城跡이 3개소 鼎足의 형으로 존재하엿든 터전이 남어잇다. 듣는 말에는 元朝가 일어나매 高麗族은 맛츰내 戰敗되어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이 되어 그곳에 잇든 3城主는 자기들의 소유물인 金銀財寶가 그대로 敵手에 들어갈 것을 참을 수 없어 세 城主는 서로 의논하고 비밀히 각각 자기들의 보화를 한데 뭉치어 이 小山에다가 깊이 매장하여 버렷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6월 25일 > 최종정보
나라의 관문인 평안도를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번(藩)이로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3년 정묘 > 3월 22일 > 최종정보
신(臣)이 태극 달자(太極㺚子)들의 소식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여기에 온 사자(使子)가 말하기를, 「섬서(陝西)와 산서(山西)는 원래 우리 땅이므로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기(武器)를 가지고 일을 해내겠다.」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황제가 진실로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 하지만, 만약 호인(胡人)의 만산(漫散)이 동쪽으로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쪽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는 까닭으로 반드시 남쪽으로 우리에게로 도망할 것인데 방비하지 않아도 좋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다. 내가 들으니 옛날 거란(契丹)의 홍군(紅軍)이 있었을 때 본래 우리 나라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그 화를 입었다. 만약 이것을 도모한다면 옳은 일이며, 반드시 곡해(曲解)하여 의심할 것도 없다. 또 내가 정성으로 사대하는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무비(武備)는 나라의 상사(常事)이니 마땅히 무신(武臣)을 외방에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35권 > 동현사략 > 최종정보 공은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경오년(1330, 충숙왕17) 송천봉(宋天鳳)의 방(榜)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계사년에 동지공거로 이색(李穡) 등을 뽑았다. 갑오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되었으며, 신축년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모두들 피하려고 하였으나, 공만은 선왕(先王)이 터 닦아 전해 준 것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왕에게 스스로 거느리고 백성과 같이 죽음으로 지키자고 권하였다. 조금 뒤에 서병(西兵 홍건적(紅巾賊)을 가리킨다.)이 패하자 드디어 종사(宗社)를 받들어 남쪽 복주(福州)로 옮기고, 제장(諸將)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게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서울을 수복하였는데, 승리로 이끈 방략은 거개 공이 지시한 것이었다.
중종 25년 경인(1530) 1월 19일(경술)
25-01-19[01] 석강에서 유보ㆍ신공제 등과 금년 봄의 구황 대책에 대해서 논의하다
고려(高麗) 때 거란[契丹]이 침구하자 공민왕(恭愍王)이 끝내 남쪽으로 피란(避亂)한 일이 있었고, 【거란의 침구는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뢴 것은 틀림없이 잘못 기억한 탓일 것이다.】당 명황(唐明王)은 몸소 태평을 이룩했지만 끝내 촉(蜀)으로 파천(播遷)하는 화(禍)를 당했고, 덕종(德宗) 때는 당나라의 국운이 쇠미한 데는 이르지 않았지만 봉천(奉天)의 난(亂)이 있었으니, 천운(天運)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때의 태평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금의 사정으로 살펴보면 변방의 흔단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평안도의 군졸(軍卒)이 야인(野人)을 몰아낼 때와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에 모두 죽었습니다. 이곳은 방어(防禦)가 긴급한 곳이라서 과거에는 4번(番)으로 나누어 번서게 했었습니다만, 지금은 3번으로 나누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안주(安州)는 중요한 관방(關防)으로서 수(隋)나라의 백만대군이 살수(薩水)에 발붙일 수 없었던 것은 이곳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살수는 바로 안주 지역에 있습니다.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9월 25일 甲辰 2번째기사 1769년 청 건륭(乾隆) 34년
청천강을 준설하고 남당성을 쌓고 돌아온 전 평안 병사 구선행을 소견하다
전 평안 병사 구선행(具善行)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구선행이 청천강(淸川江)을 준설(浚渫)했으며 남당성(南塘城)을 쌓고 돌아왔는데, 임금이 불러서 물으니 구선행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국초(國初)에 서변(西邊)을 모두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은 거란[契丹]이 아침에 쳐들어왔다가 저녁에 물러가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 쌓기가 쉽고 또한 허물기 어려웠기 때문에 흙으로 쌓고 돌로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신도 또한 흙으로 쌓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흙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성을 쌓은 장교(將校)들을 논상(論賞)하도록 명하였다.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월 15일 辛酉 8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평안도 절도사 이장곤이 변방 수비에 대해 포괄적으로 건의 요청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이 치계(馳啓)한 비변 사의(備邊事宜)026) 에,
"신이 삼가 내리신 유서(諭書)를 보건대, ‘산동(山東)027) 에 사단이 생겼으니 창졸의 변란을 미리 염려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중국[中原]이 편안치 못하여 산동에 도적이 일어났으나, 산동은 우리 국경과 거리가 매우 가까우므로 창졸의 변을 조석에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 말엽에 거란[契丹]과 홍군(紅軍)028) 의 변 때도 먼저 소식을 통하고 미리 온다는 소문을 놓지 않았으므로 편안하게 여겨 경계하지 않은 것이 마치 오늘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뭇 도적이 졸지에 들이닥치자 창황 망조(蒼皇罔措)하여, 조련하지 않은 군사와 완비하지 못한 군기(軍器)로 엄청난 기세의 도적을 당하게 되어, 적의 칼날이 지향하는 곳에 새가 달아나고 짐승이 도망치듯 하여 마침내 예측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중원에 사변이 있으면 우리 나라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 듣건대 ‘산동의 온 지역이 도적이 되었으므로 대병(大兵)이 사방에서 친다.’고 하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극도로 궁박(窮迫)해질수록 도적은 반드시 구름이 몰리고 물길이 터지듯이 우리의 지경으로 뛰어들기를 거란과 홍군의 난폭한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로운 성(城)의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죽기로 날뛰는 도적의 돌격(突擊)하는 칼날을 당해내겠습니까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甲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특진관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왜노를 거절하기로 이미 조정 의논이 정해졌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을 계달해 보겠습니다. 왜노들이 오가면 한갓 각 고을들만 폐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해량(渡海糧)264) 및 상품[商物] 무역이 한량 없어 참으로 크게 손해가 되니, 이번의 미미한 사단이 생긴 기회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는 합니다. 다만 제왕(帝王)의 사람 대우하는 도리는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천자는 제후에 대해 한 차례 조회하지 않느면 작위를 낮추고 두 차례 조회하지 않으면 영토를 깎고 세 차례 조회하지 않은 다음에야 육사(六師)265) 를 출동하는 법입니다. 또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보더라도 초범(初犯)·재범·삼범이 각각 율(律)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인(倭人)들은 본시 교화(敎化) 밖의 사람으로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한 차례 변방을 침범했는데 어찌 경솔하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이번에 엄중한 말로 서계(書啓)를 만들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책망하기를 ‘네가 능히 적왜(賊倭)들을 모조리 베어 죄를 자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하되,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 다음에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에 거절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전조(前朝)266) 의 일로 보더라도 왜구들이 교동(喬桐)에까지 들어 왔었고, 강화(江華)와 운봉(雲峰)에서의 싸움 때는 성무(聖武)하신 태조(太祖)가 계신 데다 또한 이두란(李豆蘭)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기발도(阿只拔都)와 같은 천하의 기이한 무재(武才)로도 패전(敗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었다면 위태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방비가 전조에 비하여 비록 조금 든든한 듯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흉년 들고 군졸이 고단하여 빈약한 데다가 더욱이 변방 고을들은 성(城)이 없는 데가 또한 많으므로 완전하게 든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성종실록 216권, 성종 19년 5월 27일 庚寅 2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 방어의 중요성에 대해 상서하다
대저 의주(義州)는 본래 요(遼)나라의 포주(抱州)인데, 고려 예종조(睿宗朝)에 금(金)나라 군사가 침공(侵攻)하여 요(遼)나라의 개주(開州)를 취(取)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자,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내원(來遠)·포주(抱州) 두 성(城)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귀부(歸付)하였다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도망하였으므로, 예종이 포주를 고쳐서 의주(義州)로 만들고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현종조(顯宗朝)에는 거란(契丹)이 교량[橋]을 만들고 그 교량을 끼고 동서(東西)로 성(城)을 만들었으며, 문종(文宗)조(朝)에는 거란이 포주성(抱州城) 동쪽 들에 궁구문(弓口門)을 설립하고 문밖에다 우정(郵亭)을 설치하였으며, 또 확장(搉場)560) 을 설치하였는데, 문종이 그것을 근심하여 혁파(革罷)하도록 청하였으나 거란의 임금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군대와 소손녕(蕭遜寧)의 군대, 삼별초(三別抄)·유관(劉關)의 군대가 모두 의주(義州)로부터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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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7월 22일 양력 1번째기사 1903년 대한 광무(光武) 7년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이 만주(滿洲)를 침략한 것이 물론 하루아침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권력을 수립하고 세력을 늘리는 행위가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데, 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 곳은 바로 우리나라의 서북쪽 연변 지대입니다. 서북쪽 연변 지대는 부여(扶餘), 예맥(濊貊), 발해(渤海), 거란(契丹), 말갈(靺鞨), 여진(女眞), 몽고(蒙古), 합단(哈丹) 야인(野人)들이 대대로 변경의 우환 거리를 만들면서 우리의 강토를 침략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북쪽으로는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서쪽으로는 사군(四郡)을 설치하여 긴 강을 천연적인 해자(垓字)로 만들어 남북의 한계를 갈라놓으시고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여 요해처를 지키는 데에 무엇이든지 다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청(淸) 나라의 세조(世祖)가 성경(盛京)에서 일어난 후부터는 국경을 정해놓고 각기 서로 지켰으므로 변방이 편안하고 진과 보들이 조용하여 200여 년 동안이나 변방이 무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삼엄하던 변방의 방비가 조금씩 해이해져 진과 보를 버려두었으니, 실로 변방의 방어가 극도로 허술하게 된 것입니다.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6년 경술 > 8월 30일 > 최종정보
영조 6년 경술(1730) 8월 30일(병인) 맑음
06-08-30[24] 덕유당에서 대신과 비국 당상이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에 좌의정 이집 등이 입시하여 성상의 체후 등을 묻고 옥당의 신하를 절도의 외직에 보임한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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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시대 때 홍건적(紅巾賊)과 묘청(妙淸)이 모두 서쪽 방면에서 일어났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이괄(李适)의 역변도 서쪽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쪽 지방의 토질이 매우 좋지 않아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지 못하고 오직 이리저리 떠도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수사록 권2 / 유상수필(遊賞隨筆) 【상(上)】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
[○1리쯤도 채 못가서 배로 중강(中江)을 건넜다. 호인(胡人) 무리 수십 명이 있는데 용모가 심히 흉악하고 추하였고 모두 다 붉은 모자〔紅兜〕에 제수(蹄袖) 차림이었으며, 입에는 담뱃대를 물고 강가에서 혹 걸터앉아 있거나 서 있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서로 말을 하는데 재재거리는〔啁啾〕 말소리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를 못하였으니, 곧 변방에 수자리 사는〔戍邊〕 갑군(甲軍)이었다. 울타리를 엮어 기장이나 차조를 심어 먹고 입에 풀칠은 한다고 한다. 마두배(馬頭輩)와 악수하며 안부를 묻고는 갔다.
별건곤 제20호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잡지명 | 별건곤 제20호 |
발행일 | 1929년 04월 01일 |
기사제목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
필자 | 申湜 |
기사형태 | 문예기타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申湜
지금으로 571년전 -高麗 恭愍王 6년 冬 10월!
歐洲天地까지 威嚴을 뜰치던 蒙古의 成吉思汗이 세상을 버린지도 二百餘年 北方의 一胡族으로 父祖의 뒤를 이어 中原一幅을 긔어코 席捲號令하던 나라의 忽必烈이 죽은 지도 역시 二百年! 一盛一衰는 天理의 循環일넌지, 그러케 천하를 威壓하던 元나라의 세력이 일시에 頓挫하야 威令이 서지 못하게 되매, 全國이 混亂하고 群雄이 蜂起하는 중에 紅頭賊關先生 破頭潘等이 北方에서 이러나게 되니 兵勢가 大振하는지라 翌年 春二月에 천하에 檄文을 돌니되 倡義擧兵에 中原을 恢復한다 自稱하고 그해 8월에 賊兵 3천 여명이 鴨綠江을 건너와서 剽掠하다가 갓스나<14> 都指揮使 金元鳳이 숨기고 上報를 올니지 안이하야 朝廷에서는 아지도 못하고 지낫스니 엇잿던 녜나 이제나 太平乾坤의 시대 일이엇다.
거란契丹해단, 奚丹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추정되는 거란은 모용연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이 우문·해·거란으로 분리된 4세기 전반부터 사서에 등장한다. 이들은 필요할 때는 서로 잠정 동맹을 맺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은 당의 기미지배로 바뀌었다. 628년 거란 8부의 수령들이 모두 부족을 이끌고 내속해왔다. 당은 이들을 10주로 나눈 후 마회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8부를 통할케 했으며, 730년까지 대하씨가 도독의 지위를 독점했다.
이후 10세기초에 이르는 동안 거란군장의 지위는 요련씨로 넘어갔고, 그들 중 일부는 그 지위를 강화시켜 나갔다. 야율아보기는 종래 8부족 연합체를 붕괴시켰으며, 자신의 군사력·경제력을 바탕으로 907년 카간에 즉위하였고,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를 건국했다구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1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명밖에 되지 않은 대참패였다.
이와 같은 참패는 강동6주를 제압하지 못하고 너무 성급히 진군한 데 있었고, 크게 노한 거란의 성종이 꾸짖는 데서도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손실과 민생고는 결코 고려가 입었던 그것에 못지 않았다.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지 않았던 이 전쟁은 양국간에 화해분위기를 무르익게 하여, 1019년 8월부터 사절이 왕래했으며,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거란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이로써 거란이 요구했던 강동6주의 환부와 국왕의 친조는 자연 백지화되어 거란이 멸망하는 1125년까지 약 1백년간 양국간에는 평화적인 국교가 유지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에서 제3차 침입 후 양국의 국교가 회복될 때까지 36년간의 싸움에서 거란에 사로잡힌 고려 전쟁포로도 적지 않아 동몽골인 지금의 열하성으로 옮겨져 집단생활을 하였다.
거란의 행정구역인 고주삼한현(高州三韓縣)은 바로 이들로써 구성된 현이었다. 한편, 고려에 사로잡힌 거란 병사들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천례계급(賤隷階級)에 편제되어 집단거주를 하면서 기구(器具)·복식의 제조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도록 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되세요^^
홍재전서 제24권 / 제문(祭文) 6
충장공(忠壯公) 최효일(崔孝一)에게 시호를 내리는 날 치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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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붉은 투구에 / 漢人紅兜
몽고홍건적,=漢人홍건적 ? ? ? 漢人의 정체가 몽고인일까요??
홍두는 위를 두꺼운 진홍색 융사(絨絲)로 만든 청나라 벼슬아치의 모자를 이른다.
즉, 여진족도 홍두를 !! 대체로 붉은 두건을 쓰는 것은 서북방 오랑캐들이 사용했다는...
고로 漢人의 정체도 서북계열의 오랑캐이지 않을까
추정해봅니다.
#. 벽로전집 권1연파(蓮坡) 김진수(金進洙) 저, 이관(怡觀) 황종현(黃鍾顯) 평 / 시○연경잡영(燕京雜詠)
푸른 눈 붉은 투구〔碧眼紅兜〕
#북원록 제5권 / 1761년(영조37, 신사)
7일(정축) 맑다
북경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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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衣冠)과 문물이 빛나 가히 칭찬할 만한데 나라의 크고 작음을 어찌 반드시 논하십니까? 붉은 쓰개〔紅兜〕와 검은 버선〔黑袜〕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붉은 쓰개는 서방 중들의 제도니, ...........
맞습니다. 수자리 사는 군인 모자가 그랬군요. 아울러 파두반.관사성등은 북방에서 일어난 홍건적 군대네요. 태종대왕.중종대왕은 거란이 공민왕때 침입한 것으로 나오네요. 거란의 홍군이 홍건적이라는데요.고전번역원도 뒤죽박죽이라. 이방원이 아버지나 할아버지한테 들었겠죠. .대륙고려를 뛰어 넘어 어떻게 대도.상도를 친다는 게 가능한지 이해를 가질 안해서 질문한겁니다.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많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
가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