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외
석상진
민달팽이는 상추를 좋아한다 초록색 똥을 눈다 어린 왕자도 초록색을 좋아했을까 그래서 아껴두었다가 일곱 번째 방문했던 그곳이 지구였을까 비행사 생텍쥐페리 역시 초록색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했을까 풀숲에 숨은 뱀은 아무리 그 이름을 불러도 이도저도 두렵도록 멈칫거리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어느새 남은 초록빛마저 무성하게 짙어가는 이 여름이다
어느 공양간에서 나물에 비벼서 밥을 얻어먹는데 울컥 창밖 구름이 너무 하얬다
투명한 얼음 덮개를 건져 올리려고 졸졸졸 흘러가는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나보다도 먼저 물푸레나무가 발을 헛디뎠다
형상기억합금으로 만든 펜이 있다면 우리는 무슨 첫 글자를 써야 하나
이니셜은 상상력을 자극해
굽이칠수록 아찔하게 흥분돼
구백구십구 개의 퍼즐 조각을 맞췄어도
저기 닿을 수 없는 하수구 틈새로 마지막 그 하나를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 더 중요해
물이 끓을 때 제자리걸음만 하는 거품에는 막상 손을 잘 데이지 않아
손잡이를 움켜쥐려는 순간 버스가 출발하고 말았다
빈 의자를 찾아 앉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창밖을 보았기 때문에
애써 창피하지는 않았다
우체국에서 봉투를 전자저울 위에 올려놓는다
꾹꾹 눌러 쓴 글씨와 하얀 종이가 가리키는 숫자가
덧셈으로 표시된다
여름의 산사에서
그 언제부턴지 대숲과 대청마루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처마 끝에 잠시 소리 없이 매달린 풍경은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지 않다고 내게 말했다
앞마당에 그림자가 짙은 날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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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어
우리는 함께 어항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벽마다 충전된 패널의 두께를 상상했다 산소발생기에서 나온 공기 방울 하나에 개미 한 마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모르는 노래였지만 물속에서는 온몸이 귀가 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음치였기 때문에 그처럼 누군가 내 노래를 대신 불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금붕어가 윙크해주었다 토론을 되풀이하기 싫어서 금붕어의 눈꺼풀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켰다 날개가 손으로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눈꺼풀로 자라났다고 했다 눈을 비비기에는 눈꺼풀이 손보다 낫다고도 했다 북극과 사막을 모두 다녀온 이가 차이점을 말해주었다 북극에서는 무척 졸리지만 깜빡 잠이 들면 안 된다 사막에서는 졸리지가 않아서 괴로웠다고 한다 우리는 통역을 통해서만 대화를 했다 통역을 할 때는 공기 또는 물속의 흔한 소음을 구분해야 한다 각자의 관용구가 가장 어렵다 지난여름 우리는 똑같은 이곳에서 유리 너머로 개미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자기만을 숨긴 공간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금붕어 역시도 제 스스로 문을 닫아걸면 얼마나 숨을 참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 사이는 제법 오래 되었다 서로의 휴대폰 잠금 화면 패턴쯤은 찍어 맞힐 수 있을 만큼은
석상진
경남 밀양 출생으로 2022년 《사이펀》 하반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