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舊韓末) 일본의 위치를 살펴보면..
1.
조선(朝鮮)이 대륙에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볼 때, 그렇다면 1910년 조선을 합병하고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서 미국(米國)과 결사항전했던 일본(日本)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대륙에 존재했던 거대한 조선의 강역을 규정하고 지명을 복원하는 데 있어서, 사서(史書)를 통해 고증(考證)한다는 것은 대략적인 면은 가능할지 모르나 구체적인 부분은 절대불가한 상황임이 틀림없다. 이로 인해 강역을 고증하는데 두리뭉실한 해석에 멈출 수밖에 없었고 후학들은 이후 항상 역사적 갈증에 몰말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대륙에서 이주한 분들의 증언(證言)이고 이것이 바로 대륙의 조선(朝鮮)을 고증해가는 길라잡이가 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대륙조선의 많은 근거들과 기록들은 당카페의 회원이신 모선생(某先生)에 힘 입은바가 지대하다.
조선이주수인초(朝鮮移住手引草), 1926년의 반도이주, 한양(漢陽)과 부산(釜山),마산(馬山) 등등의 위치, 조선(朝鮮)과 명청(明淸)의 강역구분, 상해(上海)와 중경(重慶)의 위치, 나가사키가 항주만(杭州灣)에 있었다는 사실 등 그리고 일본의 위치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등이 모두 모선생(某先生)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사항들이다.
일부 인사들이 마치 자신이 발견하고 알아낸것처럼 너스레를 떨고 있기도 하나, 명확히 이 변조된 역사의 줄기와 대강을 밝혀낸 분은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의 회원이신 모선생(某先生)이 분명하다.
2.
구한말(舊韓末) 일본의 강역과 관련하여, 모선생(某先生)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이 대륙에서 반도로 강제이주할 당시의 강역과 관련하여, 현 열도(列島)와 한반도(韓半島), 대륙 동남부, 그리고 현 대만(臺灣)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강역이었다고 고증(考證)하고 있다.
중요논점은 바로 명치유신(明治維新)이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의 개항요구와 더불어 1854년의 미일화친조약 이후 1858년 구미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이른바 현재의 역사통설이다.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였을 당시의 일본의 중심부는 명확히 현 필리핀이었다. 페리에 의해 일본이 개항되면서 일본의 중심세력은 현 대만(臺灣)으로 이동해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고 1867년에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달성하면서 많은 근대적 개혁을 시행하게 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전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일본은 현 베트남을 정벌해 죠슈(장주-長州)藩을 세우고 임진왜란 이후 1658년부터 베트남의 동경(東京)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조선도공들의 도자기(陶瓷器)를 수출하는 일본의 중요거점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들 도자기들은 페르시아, 유럽시장을 상대로 많은 제품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1868년 일어난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명치정부는 지금의 홋카이도(하이-蝦夷)를 일본의 강역으로 편입하게 되고,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있었던 1876년에 현 한반도(韓半島)를 또한 병합하게 된다.
즉, 일본의 근세역사를 분석하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왜 일어났고, 또한 그 발생지역이 어디였는가를 명확히 가름하지 못하면 엉뚱한 역사왜곡이 일어나게 될 뿐이다. 명치유신은 정확히 현 대만(臺灣)의 타이페이 즉 동경(東京)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강역은 구한말 1900년에 태어나 반도로 강제이주하고 연희전문을 나오신 모선생(某先生)의 집안분 증언에 의해 밝혀진 내막이다. 또한 한양(漢陽)의 위치 또한 그분의 증언이 있었기에 기타 사서(史書)와 서양인 기록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濟州島) 또한 구한말(舊韓末) 장강(長江)의 동정호(洞庭湖) 아래 막부산(幕阜山)이었음을 증언했고, 이는 서양인의 기록을 통해 명확히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교열되고 위조된 많은 사서(史書)를 참고하여 찾으니 한양이 장강변에 있다느니, 서안(西安)이라느니, 현 만주의 요녕성(遼寧省)이라느니 하는 장광설이 나오게 되었고, 제주도(濟州島) 또한 현 해남도 라는등, 스리랑카 라는 등 실로 실소(失笑)를 금치못할 망언(妄言)들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이제는 정확히 알고 더 이상 황당한 추측성 말들에 현혹되어서는 안되겠다.
대륙에서 살다 오신분의 증언을 토대로 사서(史書)와 서양인 기록을 통해 명확히 검증된 일들에 대해 아직도 그 지명이동의 역사적 사안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했거나 부족한 까닭임이 틀림없는 일이다.
3.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일본의 중앙정부가 현 필리핀의 생거터전에서 현 대만(臺灣)으로 옮겨온 것이 1853년 이후의 일이다.
일본이 필리핀 지역에 생거(生居)했기에 사서(史書)의 기록은 일본이 들입(入)자나 사람인(人)자와 같이 생겼다고 기록한 것임을 알수 있고, 이때 일본은 향료(香料)를 찾아 나선 서양의 네델란드나 포르투칼과 교역하면서 주변의 향료제도들에 대한 이권을 선점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일부의 연구자들이 일본의 강역이라고 기록함에 따라 현재와 같이 일본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것처럼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확히 일본의 중앙정부는 필리핀에 존재했으며, 이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필리핀과 베트남 그리고 대륙 동남부의 막대한 군사(軍事)를 동원해 조선(朝鮮)을 침략했고, 이에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일본의 침략군 수를 일백만이라 기록했음을 우리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조선(朝鮮)과의 싸움이었기에 7년을 싸워도 정복하지 못한 것이고, 일백만의 방대한 군사였기에 또한 조선과의 싸움에서 버틸수 있었던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 일이다.
역사연구는 명확한 줄기와 대강을 세워야 할 일이다.
조선이 대륙에 존재했다는 명확한 줄기와 그 대륙의 강역을 통해 역사적 대강을 잡아 분석해 내고 핵심을 추려 올곧은 우리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 한다.
이를 통해 중구난방으로 확대된 조선사(朝鮮史)의 오류를 극복하고 우리 스스로 절제된 모습으로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재단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우리의 연구가 온전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4.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1.08.10. 송계(松溪)1.
첫댓글 모선생님의 증언자료(녹취록)가 있으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로나 종식이후 모임이 있을때 나오시면 뵙고 물어보실수 있을 것입니다.
@송계 감사합니다. 증언자료를 보관해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한 사람만 자료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예기치 않은 문제(분실)가 발생할 수 있어요. 카페에서 공유를 해버리면 절대 세상에서 사라질 위험이 없죠. 여러 사람이 보관하고 있을 테니깐요.
제너럴 셔먼호 기사에서 조선 서해안 전체가 매년 중국인 특히 광동인들의 약탈과 강도질의 활동무대라는 점과 셔먼호에 열 명의 광동인이 승선해있다는 점으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충분히 수긍되네요.지도를 보니. 특히 청이 명과 전쟁시 항상 남조를 명으로 호칭하고 있어서 그럼 북조는 무엇일지? 그리고 승정원 일기 영조편에서 조선의 호서지방에서 눈만 돌려도 대만이 보인다는 등 이상한 소릴 하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되네요. 자칭 명조 유신 정금이가 숙종편에 조선의 호서지방을 공격하러 온다는 기사도 충분히 나올만한 기사이구요. 특히 표류민중 복건성.절강성 사람이 많은 것도 이해되네요.북조 자체가 조선의 강역이네요.
고맙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그 어마무시한 흑선이 나타난 곳이 열도가 아닌 필리핀, 혹은 대만이었군요.
대만의 여러 민속 행사에 왜(why, 이어원도 궁금합니다만) 왜색이 남아있는지, 베트남에 왜 통킹만이 있는 것인지...
귀중한 내용 감사합니다! ^^
그렇습니다. 대만총통 이등휘가 왜 자기가 일본인이라 하고 신사참배를 시행했는지.. 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특히 베트남. 대만의 친일의식이 강한지...역사를 알고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면 우리의 나아갈 바가 명확히 나타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송계 아, 그런 거였군요. 유툽을 보다가 베트남이 상당히 친일적이라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조금은 막혔던부분이 뚫렸네요,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