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休旅姿-東海林太郞
作詞 藤田まさと 作曲 長津義司
一
身を一片の 白雲に
委ねて結ぶ 笠の紐
山の深さに 佇めば
心に哀れ 鐘の音
(コーラス)
あそこへゆくのは 誰じゃ
あそこへゆくのは 誰じゃ
一休さん 一休さん
あそこは」行くのは 一休さん
二
諸行無情の 芦の家に
秋風吹けば 一休み
いずれ浮世を 捨てし身の
誘わば行かむ 雲の果て
(コーラス)
独りぽっちて どこへ行く
独りぽっちて どこへ行く
杖ついて 杖ついて
独りぽっちの 一休さん
三
独りうなずく 一休の
思いはいつか 涙雨
杖より細き 旅の身に
またもや聞こゆ 山の鐘
近代 日本의 戰爭 Ⅰ
事件要約
明治政府는 維新으로 近代國家의 體制를 整備한 뒤 海外로 눈을 돌리기 始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對外政策은 旣存에 勢力을 가지고 있던 淸國과 南下政策을 推進하고 있던 러시아의 反撥을 불러왔고 結局 淸日戰爭과 露日戰爭이 勃發하게 되지요 日本은 近代에 일어난 戰爭을 通해 資本主義의 발판을 다졌고 第1次 世界大戰 以後에는 西洋 列强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淸日戰爭
1876年 ‘朝日 修好條約’을 맺어 朝鮮을 開國시킨 日本은 漢陽에 公使館을 設置하고 勢力을 키워나갑니다. 이때 外勢의 侵略에 反撥한 東學敎徒들이 農民運動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全國으로 擴散되며 戰爭의 樣相을 띠게 되자 政府는 淸國에 援軍을 要請합니다 淸國은 反亂을 鎭壓하기 爲해 大軍을 派遣하였고 出兵을 할 때는 서로에게 알리기로 한 天津条約에 띠라 日本도 軍隊를 派兵하게 됩니다 그러나 事態가 鎭靜된 後에도 兩國의 軍隊는 朝鮮에 對한 主導權을 둘러싸고 對立했고 이는 淸日戰爭으로 이어졌습니다. 政府를 攻擊하고 있던 日本의 議會는 開戰과 同時에 서둘러 豫算을 編成했고 각 政黨과 國民들도 維新 後 最初의 對外戰爭에 全幅的인 支持를 보내 戰爭은 短期間에 日本의 勝利로 끝이 납니다
兩國은 下關에서 淸國이 朝鮮에 對한 宗主權을 抛棄하고 遼東半島 等을 日本에 割讓하는 한便 杭州 等의 4個 都市를 開港하고 莫大한 賠償金을 支拂한다는 條件의 條約을 맺고 戰爭을 終結 지었습니다. 淸日戰爭을 通해 日本은 南方과 中國 進出을 爲한 橋頭堡를 마련했으며 巨額의 賠償金으로 産業發展과 軍備 擴充의 資金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遼東半島의 割讓은 滿洲를 노리고 있던 러시아를 刺戟하였고 日本 政府는 러시아를 비롯한 西洋 列强의 壓力에 따라 遼東半島를 返還하게 됩니다. 그 後 日本은 러시아에 對한 敵對感을 바탕으로 軍備 擴充에 拍車를 加합니다
露日戰爭
淸日戰爭에서 淸國이 敗北함에 따라 西洋 列强의 中國 分割競爭은 더욱 加速化되었습니다. 特히 南下政策을 推進하고 있던 러시아는 滿洲의 要地를 占領하고 兵力을 增强시켜 韓半島까지 勢力을 뻗쳐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大陸進出을 노리고 있던 日本과 摩擦을 불러 일으켰고 1904年, 露日戰爭이 勃發하게 되지요
戰爭은 러시아를 牽制하려는 英國의 支持를 얻은 日本에 有利한 樣相을 띠었으나 長期間의 戰爭으로 日本 政府의 財政은 限界에 다다랐고 러시아 亦是 國內의 革命 運動으로 戰爭을 繼續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美國의 루즈벨트大統領이 講和를 周旋하였고 포츠머드에서 條約을 맺는 것으로 戰爭을 終結 지었습니다. 露日戰爭의 結果 日本은 朝鮮에 對한 主導權과 滿洲의 鐵道權 사할린 等의 領土 割讓 沿海州의 漁業權 等을 얻었으나 러시아의拒否로 因해 戰爭 賠償金은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戰爭의 勝利를 祈願하며 增稅와 物價暴騰을 참아왔던 國民들은 이러한 講和 內容에 對해 不滿을 품었고 日比谷公園에서 國民大集會를 열어 公公機關이나 言論社를 襲擊하는 等 暴動을 일으켜 結局 內閣이 総辭退 하는 結果를 낳았습니다.
前後 日本
淸日戰爭에서 獲得한 巨額의 賠償金과 韓國과 滿洲 等의 새로운 海外市場은 戰爭 後 日本의 資本主義 發展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時期에는 重工業, 製鐵業 等과 함께 鑛山, 鐵道産業 等의 基幹産業이 發達했으며 銀行이 擔當하는 役割도 커져 많은 企業이 株式會社의 形態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資本을 가진 大企業이 特定 産業을 獨占하여 三井, 三菱. 住友‘ 安田 等이 本格的인 財閥企業으로 發展하게 되었습니다.
한便, 强制的인 條約을 맺으며 大韓帝國과의 合邦을 꾀하고 있던 日本은 安重根 義士가 伊藤博文를 狙擊한 以後 兩國의 合邦을 서둘러 1910年 8月 ‘韓日合倂條約’을 調印하여 大韓帝國을 植民地化했습니다. 日本은 大韓帝國을 朝鮮으로 改名하고 總督府를 設置하여 初代 總督에 寺内正毅를 任命합니다
朝鮮總督府는 憲兵•警察 制度를 整備하여 韓國의 權利와 自由를 制限하는 한便, 東洋拓植株式會社를 通해 大規模의 土地調査事業을 實施하여 耕地를 빼앗고 헐값에 日本人에게 拂下하는 等 植民地 支配를 本格化하였습니다.
또한 南滿洲에서는 러시아에게서 빼앗은 滿洲의 鐵道 權을 바탕으로 極東 地域에서의 勢力을 急激하게 擴張해 나갔습니다 이렇듯 戰爭과 植民地 經營을 通한 國力上乘 結果 日本은 列强과 맺은 不平等 條約을 차례로 고쳐 나갔고 第1次 世界大戰 以後에는 西洋列强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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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청일, 노일전쟁을 거쳐가면서 우리나라의 국운도 접차 기울기 시작했으니 통탄할 과거사입니다. 근세사로서 잘 정리된 공부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다운 전쟁도 못해보고... 하긴, 정부란 것이 난리(동학농민운동)조차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