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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江에 비친 달 오직 할 뿐 그냥 할 뿐 분명히 보고 분명히 들어라 “만일 이 문에 들어서거든 일체 생각을 내지 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一切法]은 모든 마음[一切心]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만일 모든 마음이 없다면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인가.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찰나 찰나 오직 행할 뿐으로 날마다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해서 365공안을 성취하고 크게 깨달아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바란다. 높은 하늘은 항상 푸르고 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듯 우리 곁을 떠나 적적성성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1927년 8월 1일, 평남 순천군 순천읍 창리 233번지에서 이영준 청신사 이소저 청신녀 사이에서 4대독자로 부처님법을 전세계 중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홀연히 세상에 나투셨습니다. 숭산스님은 이소저 청신녀가 묘향산을 향해 밤마다 기도를 올리자, 9월초 하얀 학이 흰 소나무에 앉는 꿈을 꾸고 잉태하셨습니다. 속명이 덕인이었던 숭산 행원 대종사는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라디오 시계 등을 고치고 묘한 것을 잘 만들어내 주위로부터 공상가 에디슨이라고 불렸습니다. 1940년 순천공립학교를 졸업한 숭산 행원 대종사는 1941년 평양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셨고, 1945년에는 대동공전에 입학하셨습니다. 대동공전 시절 학생사건의 주모자가 된 숭산 행원 대종사는 묘향산 보현사로 피신을 하셨습니다. 불교와 첫 인연을 맺으신 것입니다. 북한의 사정이 더욱 악화돼 묘향산 보현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숭산 행원 대종사는 남한으로 피신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한에서 역시 남북 대립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목격한 숭산 행원 대종사는 공업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셨습니다. 동대 시절 3·1운동 기념식 날 좌우익 진영 학생들의 다툼을 보고 ‘망국의 징조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놈들이다’라고 판단하고 머리를 깎고 마곡사로 입산하셨습니다. 마곡사에 입산하신 스님은 부용암에서 일본어로 된 불교 책과 사상전집을 독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곡사에서 신소천스님이 쓴 『금강경』을 공부하다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아, 세상은 허망하구나. 불교는 인과법이다.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하고 흐뭇해하셨습니다. 불법의 깊은 묘의를 이해한 숭산 행원스님은 1947년 마곡사에서 발심 출가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늘에 말린 생솔잎만으로 연명하며 100일기도에 들어가셨습니다. 온갖 고행을 감내하고 사경을 넘나들며 정진하던 스님은 99일째 되던 날, 어떤 사람이 걸망을 짊어지고 산길을 올라가는데 앉아 있던 까마귀가 파다닥 날아가는 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확 열림을 느끼셨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아, 진공묘유가 바로 이 자리구나” 하며 오도송을 읊으셨습니다. 圓覺山下非今路 원각산 아래 한 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背囊行客非古人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濯濯履聲貫古今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날과 지금을 꿰었는데 可可烏聲飛上樹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100일기도를 끝낸 스님께서는 당대의 대선지식이셨던 만공스님에게 법을 묻기 위해 만행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만공스님은 이미 열반에 드셨고, 당시 마곡사에 법문을 온 고봉스님을 만나셨습니다. 고봉스님께서는 경허·만공스님 등 한국 선불교의 큰 맥을 이어받은 대선지식이셨습니다. 스님께서 고봉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고봉스님께서 목탁채를 들고 때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후 일어나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고봉스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부처를 보았느냐 집을 보았느냐?”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 “아무것도 안 봐? 그럼 목탁은 왜 가지고 들어왔느냐.” 스님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중에 은사스님이 될 고봉스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을 만난 스님께서는 수덕사 정혜사로 수행처를 옮기셨습니다. 스님은 정혜사에서 춘성스님 일엽스님 금봉스님 전강스님 혜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함께 용맹정진을 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께서는 1949년 1월 25일 미타사에서 고봉스님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고봉스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3 곱하기 3은 9요.” “아니다.” “오늘은 날씨가 맑습니다.” “아니다.” “방바닥이 뜨끈뜨끈합니다.” “아니다.” 선문답을 마친 고봉스님께서 “왜 내가 네 꽃이 피었는데 네 나비노릇을 못하겠느냐”며 눈물을 뚝뚝 흘리시고 기뻐하며 당호와 인가를 내리셨습니다. 고봉스님께서는 스님에게 “덕숭산을 크게 번창시키라. 너의 법이 세계에 크게 퍼질 것이다”는 말씀을 함께 부촉하셨습니다. 고봉스님의 법어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수덕사 만공스님의 가풍을 전세계로 실천하라는 예언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숭산스님께서는 1952년 12월 3일 육군에 입대하셔서 57년 7월 20일 육군 중위로 전역하셨습니다. 1958년 미타사에서 정진을 끝낸 스님께서는 서울 화계사의 주지를 맡으시고 당시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 총무원장 청담스님, 교무부장 경산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불사를 추진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께서는 1958년부터 64년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종의회를 구성하고 종회의원을 지내셨으며, 총무원 총무부장, 대한불교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비구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의장, 초대감찰부장, 동국학원 재단상무이사 등을 역임하며 불교정화불사와 불교현대화에 적극 앞장서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또한 대한불교신문사를 설립하고 사장과 주필을 맡아 문서포교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3대 목적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 목표를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습니다. 1966년 숭산 행원 대종사는 해외로 눈을 돌리셨습니다. 2차세계대전 때 사망한 일본인 유해 3천 구를 화계사에서 일본으로 돌려보내자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그 감사의 표시로 일본에 한국 사찰을 창건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증여하기로 한 고려사는 불에 타버리고 없어, 도쿄의 신주쿠에 본부를 만들고 재일홍법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재일홍법원은 일본 불교신도들의 외면과 조총련계 신도들의 북송운동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숭산 행원 대종사의 간절한 원력에 의해 하나둘씩 맺힌 인연으로 인해 도쿄 고라켄야구장 근처에 2층짜리 홍법원을 창건할 수 있었습니다. 재일홍법원 개원을 통해 해외포교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숭산 행원 대종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전법의 길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1968년 홍콩으로 건너가셨습니다. 홍콩홍법원을 창건한 스님은 이미 세 번째 해외포교지로 미국을 마음속에 심고 계셨습니다. 1972년 4월 숭산 행원 대종사는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문제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스님은 혼자서 죽비를 탁탁 치고 앉아 계셨습니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미국인들이 죽비를 치면 앉고 죽비를 치면 일어나는 숭산스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미국인들이 오면 손수 밥도 끓여주고, 좌복도 만들어주셨습니다. 필요한 포교기금 마련을 위해 숭산스님께서는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으로 취직을 하셨습니다. 숭산스님은 또 미국 제자들에게 매일 영어를 배웠습니다. 대신 스님께서는 미국 제자들에게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까막눈 벙어리 생활 3년만에 스님께서는 함께 선방생활을 하는 미국인 제자 60여 명과 영어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72년 프로비던스의 재미홍법원 개원은 미국 홍법원 개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차례로 보스턴 대각사, 뉴욕 원각사, 뉴헤이번 무각사, 샌프란시스코 공문선원 등이 개원했고 그 열기는 캐나다 토론토까지 이어졌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은 미국인들은 하버드·예일·보스턴대 출신 등 미국 최고엘리트들이 매우 많았고, 유럽과 동구권 학생들도 있어 나중에 선원을 개원하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외국인 제자들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널리 알려진 현각스님, 미국 LA에 한국식 전통사찰 태고사를 짓고 있는 무량스님, 하버드대 출신 무상스님, 예일대 출신 해량스님, 보스턴대 출신 무심스님 등 수백 명에 이릅니다. 미국과 캐나다 홍법원 개원 이후, 해외포교의 길은 마치 한낮의 태양과 한밤중의 밝은 달이 이 세상을 고루 비추듯 세계로 세계로 넓고 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78년 폴란드, 80년 영국, 81년 스페인, 83년 브라질, 85년 프랑스, 86년 소련, 8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92년 중국, 94년 베트남, 95년 스리랑카 등 동서양을 넘나들며 세상을 한송이 꽃으로 피우기 위해 1년에 지구를 두 바퀴 돌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정진과 포교를 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가 세계 각국에 세운 선원은 30여 개국에 120곳의 선원, 5만여 명의 푸른눈의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10월 16일 오슬로에서 3일간 용맹정진을 마치고 10월 20일 파리로 돌아와 3일간 용맹정진하는 식으로, 구 소련을 중심으로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등의 북유럽, 미국과 캐나다, 영국 서독 스위스 스페인 등 권역별로 나누어 순례포교를 1년 내내 하셨던 것입니다.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인적인 수행력을 발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숭산 행원 대종사는 늘 본분종사의 위의를 지키셨습니다. 국경을 초월하고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참선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포교뿐만 아니라 세계평화 지구보전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특히 1990년 모스크바와 도쿄에서 열린 세계종교 사회과학자들의 세계평화와 지구보전을 위한 세계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세계평화의 지름길에 대한 설법을 하셨습니다. 숭산스님은 또 19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제`2회 세계종교회의에서 달라이라마 등 3천여 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과 미국 불교를 대표하여 불교의 참선이 세계평화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와 모든 종교가 아집을 버리는 것만이 평화의 길임을 설파하셔서 세계 종교지도자들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를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는 고은 시인은 “새로운 자기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에 숭산선사가 세계 각 지역에서 꽃피워낸 한국 불교는 그 신승적 가능성이 무한할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해외포교사나 해외 선 지도자가 아닙니다. 세계와 한국에서 제1조와 제28조 이래의 정법을 펴는 불가결한 정신적 기둥입니다. 숭산영광. 숭산만겁”이라고 노래하셨을 정도입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생전에 세계 4대 생불로, 전세계인들의 영적 스승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재에서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베트남 출신 프랑스 플럼빌리지의 틱낫한, 캄보디아의 종정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는 깊이를 알 수 없고 자취를 남기지 않는 허공처럼 끝없는 수행 포교 정진을 이어가셨습니다. 97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셨을 뿐만 아니라 해외포교 30주년 감사패와 만해포교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숭산 행원스님은 또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화계사에 국제선원, 계룡산에 무상사를 개원하기도 하셨습니다. 해외포교 35년을 맞던 여름날 스님께서는 홀연히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 허무한 세상을 실체의 세계로 실체의 세계를 실상의 세계로 실상의 세계를 실용의 세계로 세세상행 대보살도를 성취하려고 일분 일초도 쉴 사이 없었네 흰 얼굴 검은 얼굴 노란 얼굴들 수많은 눈동자와 하나 되어 푸른 하늘 흰 구름 대우주에 빛나는 사랑과 봉사와 세세상행 보살도를 두손 모아 간직하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이것이 무엇인고 모를 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대우주가 가루가 되어 한 물건도 없이 텅 빈 속에서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이것이 무엇인고 단지 모를 뿐 “악”(할) 뿔난 토끼는 놀라 남쪽을 달아나고 날개 돋힌 돌뱀은 북쪽으로 달아나네 아침해 동쪽 하늘에 빛나고 아름다운 흰 구름 서쪽으로 흘러가네 1, 2, 3, 4, 5, 6, 7…… 35년이 꿈과 같이 흘러갔네 신묘장구대다라니 합장하나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숭산 행원 대종사는 또 2001년에는 백담사 기본선원 조실을 맡아 외국인 납자들뿐만 아니라 한국 납자들을 제접하기도 하셨습니다. 만산의 낙엽들이 모두 본체로 돌아가고 모든 산들이 수천년의 힘줄을 그대로 드러낸 2004년 11월 30일, 숭산 행원 대종사께서는 화계사 주지 성광스님, 대봉스님, 현각스님 등 제자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스승의 임종을 맞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자들이 숭산스님께 물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제자들의 물음에 숭산 행원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萬古光明이요, 靑山流水니라.” 제자들에게 후일구를 남기신 숭산스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왔던 곳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셨습니다. 2004년 11월 30일 오후 5시 20분,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던 숭산당 행원 대종사가 서울 화계사 염화실에서 세수 77세, 법랍 57세로 원적에 드셨습니다. ‘세계일화’를 온몸으로 실천했던 생불(生佛)의 원적에 세상만물이 꽃비를 내리며 화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단지 모를 뿐 “악” 修行 履歷 1927년 평남 순천 출생. 속명 이덕인(李德仁). 1947년 마곡사에서 고봉스님을 은사로 득도. 1949년 수덕사에서 고봉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50년 수덕사에서 하안거 성만 이후 11안거 성취. 1951년 마곡사 강원 대교과 졸업. 1952년 육군 입대. 1957년 육군 중위 전역. 1958년 화계사 주지. 청담스님, 효봉스님, 동산스님, 경산스님 등 당시 비구계의 중추 스님들과 함께 불교정화운동 추진. 대한불교조계종 종의회 구성.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원. 1960년 대한불교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 1961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비구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의장. 초대감찰부장. 법무장관 출신 조병일 장군과 최고회의 위원 박기석 장군과 함께 달마회 창립. 예비역군 출신과 법조인으로 구성된 불교지식인단체.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동국학원재단 인수. 재단상무이사. 대한불교조계종 재무부장. 1964년 동국학원 상무이사 연임. 한국 불교 최초로 인재양성을 위해 종비생제도 실시. 현재까지 조계종의 3대 목적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 확립 실시. 1966년 일본에 홍법원 개원. 2차세계대전 때 사망한 일본인 유해 3천 구 일본으로 송환. 일본에서 사망한 한국인 유해 인도받음. 그공로로 일본 정부에서 신주쿠의 땅을 증여함. 한일외교정상화 후 최초로 한국 사찰 일본에 창건. 군 포교를 위해 군종제도 추진. 청담스님 경산스님과 함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추진. 1969년 세계불교지도자대회 개최(11개국 참가). 홍콩 홍법원 개설. 1972년 미국 홍법원 개설. 1974년 캐나다 토론토 선원 개설. 1978년 폴란드 홍법원 및 8개 선원 개원. 1980년 영국 런던 선원 개원. 1981년 스페인 팔마선원 개원. 1982년 세계평화종교지도자대회 개최. 로드아일랜드 뉴헤이번 젠센터에서 세계 19개국 불교지도자들이 참석. 1983년 브라질 상파울루 선원 개원. 1985년 세계평화문화인대회(WUM)에서 세계평화상 수상. 프랑스 파리선원 개원. 중국 북경불교회 초청 중국 불교 방문 순회법회. 1986년 소련 정신문화협회 초청 불교 포교활동. 1987년 수덕사에서 세계일화대회. 1988년 폴란드 한국 선불교 포교 10주년 기념행사 개최. 198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한국 선지식으로 최초로 포교활동. 1990년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생존과 환경을 위한 국제대회 초청강연. 수덕사에서 2차세계일화대회. 1992년 중국 남화사에서 승려와 일반인 위한 참선 지도. 홍콩 국제선원 개원. 재미 홍법원 개설 20주년 기념대회 개최. 1993년 싱가폴 국제선원 개원. 수덕사에서 3차세계일화대회 개최. 1994년 한국 선지식 최초로 베트남 방문. 1995년 스리랑카, 미얀마 성지순례 및 한국 선불교 포교활동.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1996년 해외포교 30주년 기념대회 개최 1997년 만해포교대상 수상. 대한불교조계종 해외포교 30주년 기념 감사패. 미국 유럽 선 지도차 순방. 2000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1년 대한불교조계종 백담사 기본선원 조실. (사)대륜불교문화연구원 태고학회에서 3증사로 추대(덕암, 서암, 숭산) 2004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화계사 조실.
제목 永訣辭, 宗正 法語, 追悼辭 ▶ 永訣辭 겨울 山川이 空寂을 이루어 宇宙의 實相을 드러내고 落葉은 凋落하여 뿌리로 돌아가는 回歸의 門을 열고 있습니다. 이처럼 自然은 스스로 몸을 비워 還歸本處의 本分消息을 보이고 있습니다. 崇山 큰스님 ! 어느 世界로 出離하셔서 이처럼 寂寞하고 無言의 末后句만 보이십니까. 지금도 生死如如하시고 惺惺하신다면 우리에게 慈悲를 베풀고 웃던 그 主人翁은 어디에 계십니까? 눈앞에 있는 一草一木이 스님의 神靈스런 自性을 벗어나지 않았고 山河大地가 本分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迷惑하여 스님의 本來面目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스님 ! 손가락으로 宇宙를 튕기고 입으로 百億化身을 부르던 生死一如한 大機大用을 한번 보이십시오. 스님이 具足한 本分之上에 佛祖의 얽매임도 凡聖의 分別도 없는데 어찌 生死의 出沒이 있겠습니까. 오늘 스님의 入寂은 法身의 契合이고 生滅이 즐거움이 되는 寂滅의 眞相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큰스님 ! 여기 모인 四部大衆은 平素 世界를 往來하며 衆生을 敎化하셨던 그 主人翁의 慈愛스러웠던 모습을 보지 못해 슬픔에 잠겼습니다. 오고 감이 生死自在의 大機大用일지라도 이처럼 還歸本處하여 말없는 實相만을 보이시니 저희들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스님 ! 스님께서는 일찍이 山門에 들어와 古峰 老和尙에게 得度하여 涅槃에 드실 때까지 雲水家風과 一念精進으로 無生法印을 깨달아 理事無碍한 삶을 사셨고 傳燈의 불꽃을 世界에 밝힌 눈 밝은 善知識이었으며 人類에게 깨달음을 전한 큰 스승이었습니다. 大方無外한 스님의 敎化의 願力은 世界萬邦에 世界一花의 꽃을 피우게 하셨습니다. 우리 宗門에 스님처럼 일찍이 海外布敎에 關心을 가지고 盡力하신 善知識도 없었습니다. 日本에 弘法院을 開設하여 부처님의 法音을 傳하고 다시 美國을 비롯한 世界各國에 敎化의 불꽃을 밝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은 것도 스님의 海外布敎의 願力 때문이었습니다. 큰스님 ! 이제 慈愛스런 眞容과 獅子吼를 어디서 뵙고 들어야 합니까? 이 자리에 參席한 우리와 얼굴이 다른 碧眼衲子들이 스님이 娑婆에 現身하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히 이 땅에 오셔서 迷倫을 救濟하소서.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亦無塵可拂 또한 티끌 묻을 것도 없도다. 若能了達此 만일 이 이치를 깨달았다면 木馬火中笑 목마가 불 가운데서 웃을 것이다. 佛紀 二五四八年 十二月 四日 大韓佛敎曹溪宗 元老會議 議長 宗山 焚香 ▶ 宗正 法語 겨울 朔風이 지나간 자리마다 實相이 드러나고 處處에서 故鄕으로 돌아가는 門이 열리더니 西來의 一句를 남기고 崇山 큰스님이 還歸本處하셨습니다. 生死透脫하여 見聞覺知를 거두었지만 本來面目은 神靈하여 오고 감이 없으며 十方法界에 充滿해 있습니다. 無形無相하여 眞容을 뵈올 수는 없으나 頭頭物物이 感興하고 지나가는 바람이 스님의 本分消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깊고 고요하여 形象은 없지만 宇宙萬物과 더불어 벗을 하고 비록 텅 비었으나 스님의 生死自在한 妙用은 萬象을 通해 나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찾아도 볼 수 없고 떠나도 恒常 우리 곁에 있는 全身脫去한 스님의 面目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山河大地가 이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頭頭物物이 스님의 法身이요, 日月星辰이 스님의 本來面目입니다. 구하려고 하면 蒼龍屈에 빠질 것이요 얻으려고 하면 本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스님의 入寂이 生死透脫입니까, 身命喪失의 허물을 드러낸 것입니까. 生死透脫이라고 한다면 불구덩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요 身命喪失이라면 六道生靈들이 金臺에 오를 것입니다. 이것이 老和尙이 우리에게 傳한 西來의 一句입니다. 大衆은 會.(알겠는가?) 井底紅塵生 高山起波浪 石女生石兒 龜長數寸長 우물 밑에서 붉은 티끌이 일고 높은 산봉우리에서 파도가 치네. 돌계집이 돌아이를 낳고 거북 털이 날로 자라네. 佛紀 二五四八年 十二月 四日 大韓佛敎曹溪宗 宗正 法傳 焚香 ▶ 追悼辭 덕숭산중견효성(德崇山中見曉星)하고 일구흡진오해수(一口吸盡五海水)로다. 구반수처섭흑백(球盤隨處攝黑白)하고 벽안세계진선풍(碧眼世界振禪風)이로다. 덕숭산에서 사마외도의 항복을 받은 뒤 한 입으로 오대양의 바닷물을 다 마시도다. 지구촌 가는 곳마다 흑과 백을 섭수하시고 눈푸른 세계에 선풍을 떨치시도다. 대한불교조계종 원로(元老) 숭산당(崇山堂) 행원(行願) 대종사님이시여! 어제까지 세계를 비추이던 태양이 검게 물들고 식어버렸습니다.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캄캄하고 북두성(北斗星)을 따르던 성신(星辰)들도 빛을 잃고 잠연(潛然)합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고, 만물(萬物)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법칙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며, 무릇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상(形像)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생멸(生滅)의 도리(道理)를 따른다지만 오늘 대선사께서 적멸(寂滅)에 드시니 저희 종도들은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공대선사께서 가르치신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그토록 발원하시던 큰스님께서는 일찍이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본분사(本分師)를 깨달아 그 실상을 여실(如)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것인 줄 모르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대선사님을 영결(永訣)하려 함에 아쉬운 마음이 슬픔의 눈물이 되어 흐르고 또 흐릅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님! 스님께서는 한 생을 해외포교와 한국의 전통선불교(傳統禪佛敎)를 심어오신 선구자(先驅者)이셨습니다. 일본 홍법원(弘法院)을 시작으로 미국, 캐나다, 홍콩, 싱가포르를 비롯하여 저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세계 32개국에 120여 홍법원을 개설하시고 5만여 벽안납자(碧眼衲子)와 제자들을 두셨습니다. “허무한 세상을 실체의 세계로 실체의 세계를 실상의 세계로 실상의 세계를 실용의 세계로 세세상행 대보살도를 성취하려고 일분 일초도 쉴 사이 없었네” 라고 토로하심에서 여실하게 나타나듯이 스님께서는 크나크신 대원력(大願力)의 성취자(成就者)이시며, 대법력(大法力)을 나투신 불보살(佛菩薩)이셨습니다. 불교무지(佛敎無知)의 땅을 찾아다니시며 감로(甘露)의 법문(法文)을 내리시고, 성성(惺惺)한 활구(活句)로써 선문(禪門)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물질만능의 서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번뇌(煩惱)의 불을 끄는 정로(正路)를 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스님을 추앙(推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오나 스님께서는 “나는 한국의 선수행법을 가지고 해외를 다니며 전법을 하는 수행자일 뿐이다”라고 한사코 하심(下心)하셨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님! 돌아보면 스님께서는 일찍이 1927년 평안도 순천에서 태어나시어, 충청도 마곡사(麻谷寺)에서 축발(祝髮)하시고 당대(當代)의 선지식(善知識) 고 봉(高峰) 선사로부터 수법(受法)하시니, 경허(鏡虛) 만공(滿空)으로 이어지는 정통 임제가풍(臨濟家風)의 법맥(法脈)을 계승(繼承)하시었습니다. 22세에 견성(見性) 득력(得力)하시어 고봉 선사로부터 법을 전수(傳受)하셨고, 이후 누더기를 걸치시고 11 하안거(夏安居)를 성만(成滿)하신 후 31세에 효봉, 동산, 청담, 경산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에 매진하셨습니다. 이후 1960년 33세에 지금의 불교신문(佛敎新聞)의 전신(前身) 대한불교신문을 설립(設立)하시어 초대 사장에 취임하시었으며, 1961년에는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하시는 등 대한불교조계종의 오늘이 있기까지 산파(産婆) 역할을 하시었습니다. 또한, 1962년에는 비구(比丘) 대처(帶妻) 통합종단(統合宗團)의 비상종회 초대(初代) 의장에 피선되는 등 혼란기 종단을 일으켜 세우는 선봉장(先鋒將)의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종수교(扶宗樹敎)하시고 전법도생(傳法度生)에 앞장서 오신 그 열정(熱情)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세계적인 선승(禪僧)으로, 생불(生佛)로 존숭(尊崇)받는 법력(法力)의 바탕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스님의 불퇴전(不退轉)의 정진력(精進力)과 화안활어(和顔活語)의 법도로써 전세계인(全世界人)을 제접해 오신 면목(面目)에 저희 후학들뿐 아니라 세계인이 감복(感服)하고 머리 숙여 존경(尊敬)의 예를 표하고 있습니다. 숭산 행원 대선사님! 이제 스님께서는 세계 각국에 선풍(禪風)의 바람을 일으켜 놓으시고 인연(因緣)의 고리를 풀어 오고 감에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시었습니다. 스님께서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드시던 날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또 하나의 커다란 가르침으로 저희들 가슴에 남겨져 있습니다.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로다.” 참으로 선객도담(禪客道談)의 진수(眞髓)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생사거래(生死去來)의 진상(眞相)을 보여주시었습니다. 하오나 스님을 따르던 세계의 불자(佛子)들이 큰스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더 필요하여 목을 놓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림부동초(入林不動草)하고 입수부동파(入水不動波)라. 숲속에 들어가도 풀이 움직이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도 파도가 일지 않도다. 숭산 행원 대선사님! 부디 적멸(寂滅)의 세계에 들었으나 중생을 어여삐 여기사 여여(如如)한 모습을 시현(示現)하사 광도중생(廣度衆生)하옵소서. 삼가 합장하고 향 한 자루 사루옵나이다. 불기 2548년 12월 4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분향
제목 弔辭, 숭산 큰스님을 추모하며 ▶ 弔辭 숭산 대종사님! 落葉은 歸根하고 山色은 寂寥하니 삼라만상은 그대로 眞如의 本體를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이 도리를 바로 알면 理事에 구애되지 않고 生死에서 自在를 얻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문득 대종사의 涅槃 消息을 접하니 그 寂滅의 境地는 너무 깊고 고요해서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마음으로도 商量할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제부터는 慈悲의 목소리로 깨우쳐주고 顯正의 손으로 이끌어주시던 眞容을 뵈올 수 없으니 日月은 失色하고 天地는 驚動하고 蒼生은 悲嘆의 강물에 빠졌습니다. 숭산 대종사님! 대종사께서는 일찍이 덕숭산에서 고봉 대화상을 스승으로 축발한 이래 일생 동안 理事無碍한 機用으로 縱橫無盡하며 破邪顯正과 正法宣揚의 깃발을 揭揚한 종문의 大善知識이었습니다. 종단의 風規가 문란하던 때에는 百尺竿頭에서 한발 더 내딛는 용맹으로 淨化의 맑은 샘물이 흐르게 했으니 그 功德은 法界를 덮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達磨大師가 동쪽으로 佛祖心印을 안고 오셨듯이 世界一華의 正法眼藏을 들고 서쪽으로 가셔서 風餐露宿을 마다 않으며 四海衆生에게 지혜광명을 밝혀주셨으니 金毛獅子와 같은 분이 바로 大宗師였습니다. 숭산 대종사님! 지금 저희들은 큰스님 앞에 追慕의 法香을 사르며 숙연한 마음으로 무엇이 참다운 佛子의 길인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행과 교화에 獻身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無言之敎로 일러주고 계십니다. 저희들은 그 莫重泰山한 가르침을 胸中에 새기며 큰스님께서 踏破한 발자국을 따라갈 것을 誓願하고자 합니다. 숭산 대종사님! 時會大衆은 마지막으로 큰스님 모신 喪輿 위에 꽃 한 송이 올립니다. 하오니 부디 큰스님께서는 大寂三昧 속에서 槨示雙趺하사 천둥 벼락 같은 진실한 聲前一句를 한 마디만 더 들려주소서. 合掌으로 청하나이다. 佛紀 二五四八年 十二月 四日 大韓佛敎曹溪宗 中央宗會 議長 法燈 焚香 ▶ 弔辭 저녁 노을은 푸르른 산 정상에 걸리고 겨울 까마귀 하얀 구름 사이로 날아가며 신선하고 아름다운 찬 기운이 만발한 산천에 비 지나간 나무 끝에 새 소리만 들리더니, 덕숭(德崇)의 한 노옹(老翁) 어젯밤 적막(寂寞) 속으로 홀연히 빛을 감추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님! 오늘 이것이 석가(釋迦)가 가섭에게 전(傳)한 염화미소의 도리입니까? 근·현대 불교의 대종장(大宗匠)이며, 수행과 포교의 귀감(龜鑑)이신 숭산 행원 큰스님! 스님께서는 일찍이 우리 종문(宗門)에 귀의(歸依)하여 원적(圓寂)에 드실 때까지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저버리지 않았고, 고불고조(古佛古祖)의 혜명(慧命)을 전승(傳承)하여 이 땅에 선풍(禪風)을 드날린 대선장(大禪匠)이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비록 산에 들어가지 않아도 성불(成佛)의 문을 열고 생사(生死)를 떠난 도리를 보였고, 곳곳에 이 조사가풍(祖師家風)의 세계화를 위해서 저 벽안(碧眼)의 외국인에게 남다른 관심(關心)과 원력(願力)을 가지고, 때로는 사막에서 또 추운 빙산 위에서 선(禪) 포교에 심혈(心血)을 기울였습니다. 숭산 행원 대종사님! 오늘 스님께서 적멸(寂滅)을 보이심은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는 원래 없는 일이지만, 흐르는 물은 오열하고 종소리는 온종일 애도합니다. 누구보다도 천진무구(天眞無垢)한 도인(道人)이셨고 꾸밈없이 소탈하시어 큰 선지식(善知識)이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셨으니 스님 앞에서는 빈부귀천 남녀노소가 모두 평등하였습니다. 스님의 지혜와 자비가 지금도 구족(具足)하시며 언제나 맑고 부드러운 법향(法香)이 인천(人天)에 가득합니다. 그러니 뉘 아니 스님을 애도하지 않겠습니까? 덕숭산인 행원 큰스님! 눈앞에 있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스님의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자성(自性)을 벗어나지 않았고,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본분(本分)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구족한 천진스런 자성은 본래부터 이루어져, 오고 감이 없고 생몰(生沒)이 없습니다. 그리고 법신(法身)은 증감(增減)이 없고,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뚜렷이 밝고 자유스러웠던 스님의 본분 진면목(眞面目)을 한번 보이십시오. 덕숭의 계곡과 산은 화장연화이며 쉴 줄 모르는 냇물은 비로의 법문입니다. 숭산 큰스님! 산하대지일목일초(山河大地一木一草)가 스님의 일구(一句)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自從泥牛鬪入海 直至如今無消息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간 뒤로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구나! 숭산 행원 대종사시여! 이제 예토(穢土)의 수고로운 연(緣)을 거두시고 대적삼매(大寂三昧) 속에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의 법락(法樂)을 여유로이 누리소서. 불기 2548년 12월 4일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선원 대표 인각 분향 ▶ 대통령 조의 메시지 숭산당 행원 대종사의 원적을 애도합니다. 숭산 큰스님께서는 치열한 자기 수행으로 선불교의 법맥을 잇고, 불교계의 화합과 개혁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또한 세계 32개국에 120여 개 선방을 열어 한국 불교를 알리는 데 앞장서 오셨습니다. 벽안의 제자들이 한국 불교를 배우며 수행에 정진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된 것도 큰스님의 공적입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가르침과 ‘세계는 한송이 꽃’이라는 말씀은 인류의 화합과 세계 평화를 이뤄가는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숭산 큰스님의 원적을 거듭 애도하며, 세계 지성을 일깨우신 높은 공덕을 기립니다. 2004년 12월 4일 대통령 ▶ 弔辭 은하수 따라 밝게 비치던 숭산 큰스님께서 영원의 열반에 드시니, 지구촌이 애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도들과 더불어 전세계의 불자들이 숨을 고이 접어 향(香)을 사르고 있습니다. 숭산 큰스님이시여! 80억 항하(恒河)의 모래 수와 같은 우리 중생을 남겨두고, 영원의 열반에 드시니 그리 평안하신지요. 그 유창하게 열어주신 영어 법문은 전세계에 한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을 여법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선지식으로 추앙되셨어도, 저희들은 제대로 한번 모시지도 못하였는데, 어찌 저희들 곁을 자꾸 떠나시려 하옵니까? 달마대사께서 동쪽으로 오셨듯이, 숭산 큰스님은 지구 동쪽으로 전법의 길을 떠나 매일같이 전세계를 돌며, 세계일화(世界一花)를 피웠습니다. 그 꽃길은 하버드에서 화계사로 이어졌습니다. 그 꽃길을 큰스님께서 즈려밟고 가시어야 하옵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숭산 큰스님. 스님께서 걸어오신 길가에 다섯 송이 푸른 연꽃을 마련해 바치옵기를 청하옵는데, 어디를 그렇게 가시는지요. 이제는 지구촌 집집마다 스님을 그리워하며 전단향을 피워놓았습니다. 저희들의 슬픔은 하늘에 닿지만, 그 원적의 행장을 순순히 따르겠습니다. 상두머리 정히 숙여 극락왕생하심을 발원합니다. 불기 2548년 12월 4일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회장 백창기 분향 ▶ 弔辭 존경하는 숭산당 행원 대종사님! 대종사님께서 갑작스럽게 원적에 드셨다는 부음에 황망하고 슬픈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출가하신 이래 만공스님의 ‘온 세상은 한송이 꽃’이라는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불교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며, 세계 32개국에 120여 개의 홍법원을 개설하신 큰 스승이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일제의 압제가 극심한 시대에 이 땅에 오셔서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습니다. 이후 한결같이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헌신해 오시면서 지구촌의 존경받는 영적 스승으로 숭앙받으시면서도 큰스님께서는 “서양인들의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는 겸양의 말씀을 늘 해오셨습니다. 가없는 큰스님의 법덕과 거룩한 행장을 어찌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큰스님께서 남기신 “다 걱정하지 말아라”는 말씀은 우리 사부대중들이 희망과 자신감을 갖고 화합하여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라는 가르침으로 알고 있습니다. 숭산 큰스님, 부디 대해탈, 대자유를 누리시고 우리 중생에게 광명으로 다시 오소서! 불기 2548년 12월 4일 문화관광부장관 정동채 분향 ▶ 숭산 큰스님을 추모하며(1) 친애하는 여러분께, 숭산 행원 대선사님과 뜻을 함께해 온 모든 분들께 애도와 기원을 전합니다. 젊은 시절 숭산 행원 대선사님께서는 전세계에 정치적·문화적 혁신을 일으켰고, 이후 미국의 케임브리지 선원을 비롯, 100개국 이상에 선원을 설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대선사님께서는 수많은 이들의 삶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평정을 심어주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제 아들 존(John)도 대선사님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존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고, 저희 가족 모두는 그의 삶의 질을 끊임없이 향상시켜 준 대선사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존은 자신의 가족에게 아낌없고 헌신적인 사랑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와 일을 하면서도 숭산 대선사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존의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와 제 아내 테레사(Teresa)는 숭산 대선사님께서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숭산 대선사님께서 떠나신 이 어려운 시기에도 여러분들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시길 기원합니다. 비록 대선사님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무수히 많은 분들이 대선사님께서 남기신 가르침과 정신적 유산을 통해 고무받아 더 나은 삶을 꾸려 나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대선사님의 스승님이신 고봉 선사님께서 대선사님께 법을 전하며 “우리는 500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셨듯,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이 말을 빌어 다시 한번 저의 애도를 표합니다. 마음을 모아, 2004년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 상원의원 존 케리 ▶ 숭산 큰스님을 추모하며(2) 한국 불교와 정신에 눈뜨게 해준, 나의 또 다른 아버지나 다름없는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숭산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15년 전인 198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미국 하버드대 샌더스 시어터(Sanders Theater, 하버드대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서였습니다. 강의실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강사의 얼굴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통통하고 키 작은 동양인이 삭발한 머리에 낡은 회색 옷을 걸치고 문법도 잘 맞지 않는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불(生佛)이라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강의에 빨려들었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스님은 내가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도 접하지 못했던 간단명료하고 생생한 지혜들을 쏟아내셨습니다. 나는 당시 불교에서 진리를 구하고 있었는데 숭산스님의 강의는 내 운명을 180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승려가 되어 한국 불교를 포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큰스님은 1, 2년 전부터 편찮으셨습니다. 입적하시기 며칠 전에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습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들 말에 부랴부랴 병원에서 화계사로 모셨습니다. 큰스님의 미국인 첫 제자 대봉스님(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과 내가 앰뷸런스에 함께 탔습니다. 큰스님의 얼굴은 너무 평온했습니다. 피부는 아기처럼 고와 주변에 빛을 뿌릴 정도였습니다. 고른 숨을 내쉬는 스님의 이마에 정중하게 키스했습니다. 내 입술에 닿는 스님의 피부가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천사의 것 같았습니다. 맘속 깊이 스승께 보내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날 오후 4시 화계사. 주지 스님을 비롯해 가까운 제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대광(미국 프로비던스 선원장), 오광(유고슬라비아 스님), 현문(폴란드 스님)과 한국 스님들까지 모두 여덟 명이 무릎 꿇고 둘러앉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스님의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몸에 의지하지 말라. 우리 모두 모르는 곳에서 왔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오직 모를 뿐이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긴 잠을 주무시듯 돌아가셨습니다. 큰스님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희생으로 푸른 눈의 우리들을 가르치시느라 건강도 챙기시지 못하셨습니다. 이제 한국의 정신문화는 숭산 큰스님이라는 용광로에 녹아 미국에서, 세계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위대한 가르침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알리는 일만이 큰스님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불교와 정신에 눈뜨게 해준, 나의 또 다른 아버지나 다름없는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_ 현각(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장) ▶ 숭산 큰스님을 추모하며(3) 근세 조선 선종(禪宗)의 종맥(宗脈)을 따지자면 경허·만공의 거맥(巨脈)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에 우리 귀에 익숙한 고승 대부분이 이 경허·만공맥의 문하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만공 문하 고봉의 수제자로 숭산 행원이라는 인물이 있다. 내가 다녔던 한국신학대학 뒤켠 물 건너 수유리 우이 기슭에 있는 화계사의 큰스님으로서 참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숭산스님을 하버드 다닐 때 케임브리지 어느 허름한 미국집 안방에서 만났다. 내가 숭산스님을 만나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할 정도였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들 대강(代講)을 하고 있을 때 학생 중에 한국 불교 전공을 지망하는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그 학생 이름은 베키였는데, 하버드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대학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 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절대적이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 번 ‘쑹싼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 ‘쑹싼쓰님’이란 분이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딱 정해진 날만 케임브리지 젠센터(하버드대와 MIT 사이에 숭산스님이 세운 절)에 오셔서 달마토크(Dharma talk, 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까 그때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키 말에 따르면 ‘쑹싼쓰님’ 달마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 학생 수백 명이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적(邪敎的)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에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디일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무적 김용옥도 이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이겨 캠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 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임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 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동사·주부·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시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피울 새 없이 빨려들어 갔던 것이다. 그의 콩글리시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 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 도올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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