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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 중생론의 관점에서 보는 성경읽기의 실전예제2: 사울왕의 회심문제|연속적/순간적 중생론 토론
holyjoy | 조회 319 |추천 0 |2011.12.19. 09:18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32
연속적 중생론의 관점에서 보는 성경읽기의 실전예제2: 사울왕의 회심문제|연속적/순간적 중생론 토론
holyjoy | 조회 319 |추천 0 |2011.12.19. 09:18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32
사울왕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고는 사울에게 일어날 징조들 중에서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삼상10:6)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징조가 사무엘의 예언대로 임하게 됩니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삼상10:9)
여기서 "새사람", "새마음"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일반으로 연속적 중생론에서 "새마음", "새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회심의 표지 7가지 가운데 하나로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울왕은 회심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울왕의 회심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정리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요?
다음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해 봅니다.
1)사울왕은 회심하지 않았다
2)사울왕은 회심했지만 타락해서 결국 자살함으로 끝났지만 구원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3)사울왕은 회심했지만 결국 구원이 취소되었다
4)사울왕의 회심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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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joy 11.12.19. 09:22 연속적 중생론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질문의 의도입니다. 순간적 중생론의 입장에서는 사울왕의 회심문제를 어떻게 평가할런지 궁금해지는군요. ^^ 또 다른 흥미로운 실전예제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신고 정야베스 11.12.19. 11:49 제가 보기에는 <회심에 이르지 아니한 것>처럼 보입니다..다윗에 대한 시기심 이라던지,.그의 생이 자살로 마감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느껴집니다!!~점쟁이를 불러들인 일이라던지,.사무엘이 오기전,.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한것으로 보아서도 그렇게 생각되어 집니다... 신고 진사 11.12.19. 12:23 제가 보기에도 사울왕은 회심에 이르지 아니한 것으로 봅니다. 신고 holyjoy 11.12.19. 14:23 중요한 문제점은, 회심하지도 않았다면 왜 "새사람"이 되었다 하고, "새마음"을 가졌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사울의 경우에서는....^^ 신고 진사 11.12.19. 15:24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새마음"을 주셨고(삼상10:9)라는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을 에스겔서에 나오는 "새마음(겔36:26)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사울이 받았던 마음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의 "새마음"이 아니라 국가 운명을 위한 지혜,통치를위한 신중함,적들과 맞서기 위한 용기 어려움과 실망스러운 일들과 맞서는 용맹함이라는 측면에서의 "다른마음" 이었을 뿐이다. 자기들에게서 선한영을 떠나게 한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악한영의 먹이가 되게 한다. 만약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죄와 사탄이 우리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매튜헨리 Matthew Henry- 신고 ┗ holyjoy 11.12.19. 16:26 매튜 헨리의 주석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런 매튜헨리의 입장에 동의하기 위해서, 과연 삼상10:9에 사용되고 있는 "새"의 히브리원어와 겔36:26의 "새"의 히브리원어상에 차이가 있는가가 확인되어야 합니다. 매튜 헨리의 주석은 요약되어 있는 편이이어서 이 점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새마음"과 회심하지 않은 "새마음"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였는"데도 사울의 "새마음"이 "회심자"의 새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게 "크게 임한" 성령의 역사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런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신고 ┗ holyjoy 11.12.19. 16:28 것 없이 연속적 중생론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지금 질문형태로 이 토론을 이끌어가고 싶습니다^^ 저의 방식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원어분석에는 라마드님이 도와주셔야 할 듯 한데....^^ 신고 ┗ lamad 11.12.19. 23:57 '아헤르'와 '하다쉬'는 보시다시피 원어 음가자체가 다릅니다.^^
전후의 글 안보고 대강 보고여기 답글 단 것입니다.
^^
어제 장례식 원거리 2군데 갔다오고, 또 오늘 볼일 보고오니 머리도 아프고, 현재 파김치가 된 상태입니다.
삼상 10:9 다른 마음--> 레브 아헤르/ 레브(마음 hrart) 아하르(다른 another)
겔36;26 새로운 마음 --->레브 하다쉬/ 레브(마음 hrart) 하다쉬(새로운 new)
근데 저 연속적 중생관에은 제가 찬성하는 것 아닌데요?
후크마의 글을 거의 본 상태입니다. 벌코프의 글도 회심까지 더 봐야할 할 겁니다.
결국에는 회심까지 봐야 답이 나오지 않겠어요 신고 ┗ holyjoy 11.12.19. 22:20 그렇습니다. 더욱 중요한 질문은, 아헤르와 하다쉬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라고 둘 다 번역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새로움"이라는 우리 한글이 갖는 이중적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는 질문이 되어야 나름대로 깔끔한 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의 "새로움"에 대한 원어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곤하시겠지만 푸욱 쉬셨다가 라마드님의 도움으로 이 문제에 깔끔한 답을 얻어내었으면 합니다. ^^ 감사감사^^ 신고 ┗ lamad 11.12.20. 00:03
이 번주는 제가 공부하는 헬라어 히브리어 부분을 멈추고 중생에 관련한 책만 볼 것입니다.
물론 벌코프나 후크마가 주장한 부분도 원문도 모두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니 후크마의 글자체가 중생을 다룸에 있어서많은 부분이 원어를 해석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더군요.
신고 ┗ holyjoy 11.12.20. 08:06 이 주간이 정말로 복된 주간이 될 것입니다. 성탄주간이기도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연속적 중생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잉태되고 출생되기를 기원합니다^^ 신고 진사 11.12.19. 17:05 사울의 "새마음"이 "회심자"의 새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게 "크게 임한" 성령의 역사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윗이 고백했던 표현이 생각 됩니다. "내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구약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외부적으로 임할 때 꼭 그 임하심이 회심을 위한것이 아닐때도 있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 제가 잘못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칼빈 선진도 그렇게 본것이 있었는데 지금 외부라서 자료를 못 올리겠네요.. 신고 ┗ holyjoy 11.12.19. 18:53 옳게 보셨습니다. 발람선지자가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려고 하였을 때 그의 마음과 입술을 바꾸어서 축복을 선포하게 하신 분도 성령닝이시지요. 그런 역사를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람은 발람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이런 예도 있으니, 사울에게 성령이 크게 임하였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는 변화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있겠군요. 하지만 보다 확실한 근거는, 언어학적 근거라고 여겨집니다. "새"라는 단어의 원어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난 뒤에, 참으로 회심한 자와 거짓으로 회심한 자의 구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함께 연구 신고 ┗ holyjoy 11.12.19. 18:53 해가는 진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신고 ┗ lamad 11.12.20. 00:09 진사님, 어떤 글은 사울왕에게 준 다른 마음을 지도자가 되는 마음을 주셨다라고 주석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컨디션때문에 전후 글 보지 못하고 답글 답니다^^
너그럽게 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신고 likeagle 11.12.19. 23:42 사울왕은 회심하지 않은자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가 아닌가요..?(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것처럼..)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해설서에서도 사울왕은 가롯유다와 같은 외식자로 언급되더군요.. 저는 중생케하는 성령님의 사역과 그 밖의 일반사역은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마드님의 도움으로 원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게 된다면 더욱 풍성한 이해가 될거 같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신고 ┗ holyjoy 11.12.20. 08:08 이런 전통적인 견해가 무시 혹은 와해되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심과 중생에 대한 이해가 천박해지기 때문이라고 보시지 않습니까? 천박해진 이해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천박해졌다고들 비평들은 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천박해진 중생론을 바로 "순간적 중생론"이라고 이름을 붙이니, 이상하게들 반발이 심하군요. 묘한 현상입니다. 신고 바보새 11.12.20. 09:45 하나님은 그의 마음 을 바꾸시고 9절의 '주다'와 삿7:13의 '엎드러뜨리다'는 히브리 말에서 같은 동사를 쓰는데, 그 본 뜻은 '뒤엎다'라는 뜻입니다. 묘합니다. 마치 오늘날 신사도 운동권에서 말하는 임파테이션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후문맥인 11-13절의 선지자는 통상적인 이스라엘의 선지자 무리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서 멸시받는 무리에 사울이 끼어든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들의 아비나 누구냐? 하구 묻는 것은 이런 뉘앙스를 잘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예언은 통상적인 이스라엘 선지자의 예언과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음악과 몸기술을 통해서 무아경에 드는 모습 신고 ┗ 바보새 11.12.20. 09:49 을 하고 있습니다. 신고 바보새 11.12.20. 09:59 박윤선 주석은 이 부분은 제 견해와 반대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한 견해를 소개하는데, 오히려 헬츠벌크의 이 견해가 본문의 내용과 더 합치 하지 않는가 합니다. 인용해보면,
사울도 선지자들중에 있느냐(11절 끝). 헬츠벌크(H.W.Hertzberg)는 이 말이 예언자들을 업신여기는 어투로 잘못 깨닫고 말하기를, "합리적 인물이고 지위 있는 시민인 그가 치우친 무리 속에 있음이이 웬 일인가?" 하는 말이라고 하였다(I & II Samuel, A Commentary, 1964, p.86). 그러나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언자들의 무리를 치우친 사람들로 보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신고 ┗ 바보새 11.12.20. 10:04 여기서 사울이 "예언"(* )하였다는 말씀은, 그가 자의식(自意識)없이 발언하였
다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는데(고전 14:3), 사울의 예언도 초자연
이면서도 정상적인 심리로 말한 것이었다. 이 때에 예언한 사람들이 황홀하게 되어 말
하였다고 할 수 없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언하는 사울을 보고 놀란 이유는, 그가 사
무엘이 세운 선지 학교에 속하였던 일이 없었는데도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신고 ┗ 바보새 11.12.20. 10:08 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사울이 또 예언을 하는 19:20-24의 예언과 일치를 이루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박윤선 주석은 이부분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인용해보면,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
웠었더라(24절 상반). 여기 "그가 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그
는 심지어"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의 영감 받은 정도가 그 때에 옷을 벗기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곧,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그대로 드러낼 정
도로 강한 영적 감동을 받은 것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Schneider). "그 옷을 벗고"
란 말 신고 ┗ 바보새 11.12.20. 10:09 도 역시 같은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말에 대하
여 드라이버(S.R.Driver)도 해석하기를, "웃옷 없이 다만 피부에 접한 내의만 입은 것
을 의미한다"고 하였다(Without the upper garment, anmd wearing only long linen
tunic, which was worn next the skin.-Notes on The Hebrew Text of The Book of
samuel, 1972, p.160).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한 자는 정상적이고 광적(狂的)이 아니니
나체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리 만무하다. "누웠었더라"란 말은 떨어졌다는
뜻이니, 낮아진 모습, 혹은 겸손히 부복(俯伏)해 앉은 모습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
로 이 말은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왕위를 내세우지 않고 신고 ┗ 바보새 11.12.20. 10:09 겸손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
사한 것이다.
스크루데(J.C. Schroeder)는 이 때에 사울의 사신들과 사울 자신이 예언하였다는 것
은 그들이 입신(入神)하여 광신주의에 빠진 것을 가리킨다는 의미로 말한다(The
Interpreter's Bible II. 1953, p.988: 류 형기 편, 성서 주해 I. 1974, p.695). 그러
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진정한 구약 예언 운동의 성격을 오해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
들이 받은 영감은 광신주의와 반대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에도 자주의
식(自主意識)을 가지고 있었다. 바빙크(H. Bavinck)은 말하기를, "선지자는 계시를 받으
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자기 마음의 생각을 밝혀 분별하 신고 ┗ 바보새 11.12.20. 10:22 고 있었다"고 한다
(Zij een tegenstelling maken tusschn wat God hun goopen baard heeft en hetgeen
er opkomt uit eigen hart, Num. 16;18, 24:13, 1 Kon 13:33, Neh. 6:8, ps. 41:6, 7.
-Gereformeerde Dogmatiek, I. 1967, p.359). 이 점에 있어서 삼삼 10:2-7 에 대한 해
석을 참조하라.'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신고 ┗ 바보새 11.12.20. 10:13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견해는 자연스런 성경읽기라기 보다 난해한 구절을 성경의 바른 진리에 근거한 해석을 위해서 변증적 성격을 가지고 주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변증의 과정에서 상당한 튀들림이 발생하는 것이죠
오히려 사울이 받은 다른 마음이 통상적인 예언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 매우 수월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말이죠. 게다가 마지막 바빙크의 인용은 사실상 본문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고 봅니다.
사울이 옷을 벗고 드러누은 것은 자연스럽게 읽는다면 그는 무아경에서 예언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리고 박윤선 목사님이 반박하는 여러 견해들이 오히려 더 자연스런 성경읽기에 가깝고 신고 ┗ 바보새 11.12.20. 10:21 벌거벗은을 의미하는 '아롬'은 말그대로 벌거벗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용례는 16회 나오는데(창 2:25, 삼상 19:24, 욥 1:21, 욥 22:6-7, 욥 26:6, 전 5:15, 사 20:3-4, 호 2:3, 암 2:16, 미 1:8 등), 가장 대표적인 용례가 창 2:25의 아담과 하와의 용례입니다.
이런 본문을 난해하다는 이유로 사실상 뒤틀고 있는 셈인데, 연속적 중생의 관점에서 사울의 중생 여부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본문을 뒤틀지 않고 매우 심플하게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신고 바보새 11.12.20. 10:27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사울에게 다른 마음을 주시고 그가 예언한 부분은 성경이 제공하는 통상적 예언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봐야하며, 이는 앞서 홀리죠이님이 이미 언급하신대로, 발람이란 거짓 선지자에게 임하였던 예언과 유사한 성격의 것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합니다.
게다가 마 13장의 비유들을 보면, 그들 각각의 밖에 다른 것이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말씀이 뿌려지고 더러는 기쁨으로 받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말씀을 기쁨으로 받거나 예언을 하는 것이 참 믿음의 표지가 되지 못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선지자 노릇(마 7장)을 하는 자들에 신고 ┗ 바보새 11.12.20. 10:33 대한 책망에서도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사울의 선지자 행은 참 선지자였다기 보다 선지자 노릇이었다 정의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래서 제 결론은 4) 사울은 회심하지 않았다 입니다. 신고 ┗ 진사 11.12.20. 10:46 회심하지 않았다는 1)번 아닌가요? ...^^ 신고 ┗ 바보새 11.12.20. 10:52 아~~ 진사님 쏘리... 이건 순전히 착각에 문제입니다. ^^ 1)번입니다. 신고 좁은길을걸으며 11.12.20. 16:31 그런데요 바보새님,
삼상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이 본문의 진술대로라면, 이 날 그의 초자연적 체험은 최초의 왕위에 세워지는 사람(하나님의 뜻에 의해)에게 부어진 것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지 않나요? 제비뽑기를 통해서 뽑힌 것도, 또 그에게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징조들이 다 임했다라고 하면 말이죠. 앞서 라마드님의 원어 번역대로 여기서의 "새"가 new가 아니라 another라면 뒷 부분(그날 그징조도 다 응하니라)의 의미가 앞부분과 많이 갈리는 듯 하거든요.. 신고 ┗ 바보새 11.12.20. 17:30 이게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는 전체 문맥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근심이기도 했습니다. 실지로 이스라엘은 다른 여러 열방과 달리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시편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의 핵심적 주제 가운데 한 가지가 의의 왕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백성의 왕의 요구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인 것이지요.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겠다는 백성의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은 섭리적으로 허락하신 왕이 사울입니다. 그리고 이 왕은 실패의 상징입니다. 이에 비해 다윗 신고 ┗ 바보새 11.12.20. 17:31 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자이신 의의 왕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무엘서의 전반적 문맥을 고려한다면, 전체를 해석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만. 신고 ┗ 좁은길을걸으며 11.12.20. 17:34 그렇군요... 성경의 시선이 왕정 제도 자체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이나 다윗은 예외적인 인물로... 잘 배웠습니다~ 신고 ┗ 진사 11.12.20. 17:44 저도 한가지 첨부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실 경우 어떠한 일이 있을 것인지 세세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왕을 구했었지요..^^ 신고 ┗ 좁은길을걸으며 11.12.20. 17:52 네네 그랬지요.. 신고 정야베스 11.12.20. 20:38 바보새님의 댓글에서,.이스라엘은 왕이 필요치 않았으나(하나님께서 원치 않음),.그들의 요구를 들으사,.사울이라는 왕을 세웠다는것에 공감됩니다..아브라함 에게는 이스마엘 이라는 아들을 주어,.우리의 요구들 들으셨지요!!~이처럼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시고,.이삭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군요!!~인간들의 요구도 들어주시지만,.결국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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