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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慕特輯 80년을 1기로 살다간 天上의 彫刻人 韓國彫刻界에 不朽의 業績남긴 頂上의 元老 김남수 / 미술평론가 |
2005년 8월 21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이승을 등지고 타계한 又湖 金泳仲은 한국이 낳은 정상의 조각인으로 아직도 한국미술계의 못다 이룬 숙원사업을 후손들에게 남겨둔 채 한 많은 이승과 작별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의 장례는 많은 미술인들의 애도속에 韓國美術協會葬(장례위원장 하철경)으로 엄숙히 치루어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인근의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그는 2000년 12월호 아트코리아가 특별기획한 평론가가 뽑은 ‘韓國現代美術頂上의 7大巨匠들’(본지 2000년. 12월호 참조)에 金煥基, 朴壽根, 李應魯, 權鎭圭, 徐世鈺, 金興洙와 함께 故 金泳仲선생이 뽑혔으며, 1세기 동안에 한 두명이 거명되는 역사 속의 인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는 추론을 하게 된다. 한 예술가가 유명을 달리하고 역사 속의 인물로 올바른 평가를 받으려면 적어도 백년쯤은 흘러간 뒤 후세의 사가(史家)나 학자, 후손들의 공감과 공명이 있을 때 비로소 역사 속의 인물로 부상하는 지난날의 귀감을 우리는 경험해 왔고, 시니컬한 이야기지만 당대에 유명세를 누렸든 미술가가 타계 후 무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경우가 적지 않는가 하면 전혀 무명작가가 50년이나 100년쯤 후에 미술사가들에 의하여 새롭게 조명되거나 발굴되는 사례를 선진국 등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은 진실과 창작행위는 반듯이 역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는 좋은 교훈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人間 金泳仲의 숨은 美談과 社會還元을 위한 努力 고 김영중선생은 국내 유수한 정상의 원로작가 중에서도 유명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조각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은 물론이요 선후배들의 작품제작에 많은 자문과 카운셀러로서 탁월한 창작력을 발현한 바 있고 이미 작고한 선배들의 유명작품 제작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재능은 천부적인 것으로 이미 미술계의 공인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조각인 고 김영중은 일부 미술인들의 왜곡된 편견과 편집증적(偏執症的)인 자기도착(自己倒錯)과 자가당착(自家撞着) 등에 빠져 많은 곡해와 투기를 하는 등 심한 경우 국내 유명작품을 모두 독차지 한다는 음해와 모함까지 받는 등 웃지 못 할 헤프닝도 적지 않았다. 그가 남긴 유명작품들은 공모전에서 당선작을 못 냈거나 당선작가가 작품의 규모나 제작상의 어려움 등 감당 못해 포기해버린 것 등이 고인의 차지가 됐고, 그것도 관이나 권력기관의 강제지명이나 추천에 의하여 거의 타의로 이루어진 것이며 본인이 공모전의 경합이나, 경쟁 등에 끼어들지 않았던 것은 한 사람의 당선을 위해 아홉 사람의 들러리가 되어 낙선의 수모를 스스로 겪는 것을 피해가자는 것이 신조요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일부 속물적인 인사들은 그를 가리켜 조각가 재벌, 가장 돈을 많이 번 미술인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고인의 재산을 취재기자가 추적을 해본 결과 조형관이 은행에 저당권 설정되어 있고, 그가 거주해온 가옥 한 동을 제외하고는 부동산으로 단 한 평의 땅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재산명세의 전부였다. 그는 천상의 조각인으로 학처럼 맑고 깨끗한 생애를 살다가 유명을 달리해 간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제자와 후진들을 위한 뒷바라지와 지원 등 숱한 일화와 숨은 미담을 남겨두고 세상을 작별해 갔다. 가난한 후진들의 학자금과 작업장의 마련, 숙식의 제공, 심지어는 인생경륜대사인 결혼문제 까지 숙의하여 인연을 맺어주는 등 무명과 익명으로 장학사업이나 사회사업 등 조각으로 얻은 수익금의 상당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의식적인 투자를 했던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신문팔이를 하는 무의탁 소년을 데려와 낮에는 조각을 전수케 하고 밤에는 중고교에서 배우게 하는 등 끝내는 대학까지 진학시켜 대학의 조각교수로, 그리고 국립대학의 예술대학장 까지 역임케 하는 숨은 일화는 고인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취재팀이 밝혀낸 수확이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나 후학들은 연희조형관을 중심으로 뭉쳤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질 높은 연희 조각대학원, 연희 조각사관학교란 이름을 여기에 참여한 그룹의 회원들이 스스로 명명하기도 했다. |
올해로 꼭 8순을 맞은 원로 조각인인 그는 여느 작가보다도 많은 실험과 미학적 체험을 거듭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우리시대의 선견지명과 의식있는 조각인으로 선배들은 물론이요, 후배들의 우상으로 존경과 숭앙을 한 몸에 받아왔다. 고인은 부끄럽지 않는 순결무구한 일생을 살아오면서 타계하기 몇 년 전 색깔이 분명한 자신의 조형세계를 완성해 냈으며 근작에서 보여 주고 있듯이 서서히 그의 조형양식은 표현주의적인 구상성향으로 회귀해 갔다.
당대에 대가연했던 인물도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조명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예술가는 얼마든지 많다. 다시 말해 역사속의 위대한 예술가는 당대의 인기나 특정 집단의 인위적인 세몰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작가의 예술과 생애를 집중 탐구하고 조명해 보는 작업은 인간에게 주는 교육적 의미가 크며, 미술문화의 세계화 시대에 살면서 이러한 작가를 발굴해 내는 일은 이 분야에 관련하여 종사하는 학자나 평론가들의 몫인 것이다. 이미 타계한 박수근, 이중섭, 이응로, 허백년, 김환기, 허건. 권진규, 김영중 등을 비롯한 훌륭한 선배 작가들이 예술의 꽃을 피우며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비록 그들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작품과 예술혼은 우리의 뇌리와 가슴속에남아 아직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선배 작가들이 얼마만큼 역사속의 인물로 영원히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훗날 역사가 풀어야 할 과제다. 그 해답은 1세기쯤 후 판명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달의 표지작가로, 그리고 추모특집으로 선정된 조각가 고 김영중은 여느 작가에 못지 않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훌륭한 예술인이다. 조각가이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미술의 창조적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해온 주도적 인물이요, 산 증인인 그의 작품세계와 예술철학 등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집중 조명해 보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다. |
作家의 藝術과 作品世界
한국의 조각계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조각 장르의 한국성 발현이다. 조각은 본시 기법과 재료 등이 서구에서 유입된 것이며 서구적인 발상과 표현양식에서 크게 일탈(逸脫)하지 못하는 숙명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조각의 발상지가 비록 서구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표현의 정신과 양식, 방법론 등에서 그는 얼마든지 한국성의 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온 작가이며 또한 숱한 실험을 통하여 이를 직접 시연하고, 체득을 해온 원로 조각인이다. 사실 조각은 평면회화와는 달리 공간으로 무한이 확대 되거나 비상할 수 있는 입체 조형물이기 때문에 말과 같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조각이 평면 보다 여덟 배나 위대하다는 주장을 펴온 서구의 어느 학자는평면은 조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적이 있다. 사방이나 팔면 혹은 십이 방향이나 이십사면을 통하여 입체적인 감상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재료가 주는 질감의 표출 등에 강점을 두고 있는 예술이란 점에서 난해한 미술의 장르인 것만은 분명하다.
작가 김영중은 한국 미술의 특징을 면(面)의 예술로 보고 있다. 면과 면의 만남이 선(線)을 형성하고 선과 면의 결합에서 한국적인 형상을 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조형의 깊이를 심화 시키면서 집중탐구 해온 정상의 조각인이다. 특히 빛의 조사(照射)를 통하여
음(陰)과 양(陽)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등 동양사상의 일원이기론( 一元二氣論)적 이미지 구성에 실험을 거듭 해온 그는 조각 작품에서의 발색, 채도, 조명기법 까지 도입함으로서 우리나라 입체예술에 새 지평을 연 대표적인 원로조각가다. 특히 대리석이나 화강석 등을 재질로한 양감(量感 )을 양(陽)과 음(陰)으로 면을 조화 시켜 완성해 낸 그의 작품은 조각에서의 한국성의 백미(白眉)를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가령 우리의 색동이나 여인의 옷깃, 여인의 버선목에 나타나는 유연하고 완만한 곡선미는 마치 예리하고 차가운 석질의 조형물속에 살아 숨쉬는 핏줄을 이어 주고 생명을 불어 넣는 듯한 감동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예술은 기교적인 외형 보다는 한국성에 바탕한 예술의 본질적인 정신주의를 실현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예술혼을 불살랐던 조각인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는 구상과 반추상, 추상양식 등 폭 넓은 영역을 깊이 있게 섭렵을 해온 진솔한 조각인이었다. 언젠가는 「한국조각」이라는 호칭이 가능한 작품이 꼭 만들어질 것을 확신을 하며 대형 조형물이나, 환경조각, 기념조각, 실내 조각작품 등에 차별성을 두지 않고 작품 마다 나름대로의 성격과 주제, 예술성의 투영을 주창해온 조각인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단순한 조각을 위한 조각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술이 갖는 구극( 究極)의 목적은 인간주의 실현에 있는 것이며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영원성에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그의 정신적 내면의 세계와 예술양식과 기법 등에 이르기 까지 좀 더 상술을 해보자. 흔히 모뉴먼트를 단순한 기념 조형물로 치부하고 예술성을 무시했던 것이 지난날의 관행이었다. 그러나 예술작품과 같은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을 가진 작가의 지론을 보면 「모뉴먼트」는 나름대로의 표현의 목적이 있으며 설치장소에 따른 조화로운 환경성이 설정되어야 한다. 또한 제작규모에 따른 스케일이 있어야 하며, 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감각이 표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미술사조상의 조형감각적인 시대상이 표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감상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며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이러한 작품의 완성이 작가의 소화능력이나 그 수준에 달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다음에는 조각의 「환경성」 문제다. 가령 녹색 환경에 녹색 조형물을 세웠다고 가정해 보자. 환경에 역행하지 않고 동화된다는점에서 긍정적인 시각이 주어지지만 작가의 상황판단이 미흡할 때 조형물의 특성이 환경에 흡수 되어 시각적인 구분을 상실할 때 오히려 설치 목적에 역효과를 내는 경우를 왕왕히 발견 할 수 있다.
광선은 필요에 따라 위치의 변경이 가능하고 착색광 등의 조명이나 채도등 발색효과를 연출할 수 있지만 자연광은 계절 따라 바뀌는 조사각도나 빛의 농도와 색깔 등 세심한 관찰이나 연구를 하지 않고서는 작품의 효과적인 생명력을 발현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특히 북향이 정면이면서 그 장소에 세울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경우 결국 자연광선은 동쪽에서 오는 광선 혹은 서쪽에서 조사되는 광선을 정면 중앙의 위치에 까지 유도해 오는 조형방법을 쓰지 않고서는 결국 실패작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특히 태양광선이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을 때 조각작품의 군데군데에 광선이 투과되는 공간을 내어, 면과 선의 요철에 따라 북향 쪽 정면으로 빛을 유도하는 조형능력을 갖지 않고서는 이 작품의 소화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작가 김영중 작품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 한다면 “면(面)과 (面)이 접하는 요령과 상황에 따라 선(線)의 성격이 달라지고, 면의 성격이 달라지고, 표현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다시 말해 그의 예술은 단순화, 환경성에 따른 재료의 선택, 직감으로 얻어지는 조형성의 도출 등 그가 터득한 조형의 원리와 창조적인 아이디어, 깊이 있는 조형사상이 오늘의 김영중 특유의 조형양식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作家의 造形思想
또한 필자가 이 기회에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이 특이하게 고집하고 있는 미철학과 조형사상에 대한 개념설정 문제다. 그는 순수조각이나, 환경조각, 기념조형물, 야외성이나 실내성 등에 차별을 두지 않음은 물론 동일 선상에서 예술품의 등가기준을 두고 평가 해온
사상과 견해를 가지고 있는 조각인이다. 다시 말해 순수와 비순수의 인위적인 구분은 한낮 허구에 불과 하다는 것. 때론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 이른바 비순수라고 하는 장르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때론 순수예술에서 저질작품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작가만의 창조적인 예술성으로서만 가능하며,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작품과 씨름을 하면서 끝없는 방황과 갈등을 해왔다. 기계주의와 인도주의의 분수령을 맴돌면서 숱한 고민도 해보았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왜 존재하는 것인가, 미술인을 위한 미술인가, 인류를 위한 미술인가, 만일 미술인을 위한 미술이라면 새로운 표현양식과 기교를 위한 경쟁장일 뿐, 인류를 위한 예술행위는 아니지 않는가. 그가 추상주의에 탐닉하면서 많은 실험을거듭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다. 철재와 돌과 브론즈와 목제나 시멘트 등 모든 재료를 써 가면서 다양한 예술양식을 철저하게 섭렵을 해보았다. 한국성의 표출을 위해 철제 춘향의 열녀문도 만들어 보았다. 목재로 해바라기의 연작도 해보았다. 중고차를 구입하여 해머로 부수고 구겨서 다시 조형물로 재생하는 작업도 해보았으며 널판지를 각목에 붙여 새끼줄을 이용한 입체적인 콜라주도 시도 해보았다. 조각대를 앞에다 놓고 조각대의 공간속에 들어가 에로틱한 공포의 퍼포먼스 등 기괴한 해프닝도 해보았다. 풍경과 종을 달아 메어 바람에 흔들리면 종소리를 내는 조각작품의 소리를 작품의 주제로 도입해 봤다. 잔디밭에 색칠을 한 철재 조각을 늘어 놓고 바람에 흔들리는 녹색잔디와의 조화를 고층건물에 올라가 조망을
해보는 조형물도 시도해 보았다.60년대 초 한국 최초의 전위그룹인 원형조각회를 창립하여 운영도 해보았다. 이렇듯 그는 구상과 추상세계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들면서 작가만의 세계를 찾기 위해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조형관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다양한 조형양식을 섭렵하고 몸소 체험하면서 나만의 개성을 찾기 위해 설사 시대감각에 역행을 하고 감상자가 공감을 하지 않는 경우일지라도 홀로 서야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정작 작품을 완성해 놓고 사인을 하려 들면, 더군다나 발표전을 눈앞에 두고 마치 남의 조형성을 내 것인 양 모작을 한 것은 아닌가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몹시도 두렵고 부끄러워 몸부림치도록 자학을 했던 때도 있었다. 결국 남이야 어떻게 비웃던 말던가에 소신 있는 나의 조형성과 독자성을 고수하자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양심 있는 원로 작가의 고해성사와 같은 독백이 아닌가. 그가 오늘날 원로작가로서의 미술계는 물론 애호가들의 한결같은 추앙을 받고 있는 것도 창조적인 예술행위를 자신의 생명처럼 중히 여겨온 작가의 조형철학과 예술혼 때문인 것이다.
사실 요즘 현대의 기치를 높인 든 언필증 모더니즘도 너무나 닮아 버린 아류가 판을 치고 있다. 너도 나도 앵무새처럼 부하뇌동하는 행위는 이미 예술로서는 설 자리를 잃어버린 무위한 것이다. 세계의 명화가 고전으로 남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것은 그 영원성과 역사성 때문인 것이다. 그 가치기준은 극명하며, 연륜을 더 할수록 그 효과는 체증현상으로 우리 앞에 어필하는 것이다.
감각의 시계나 작가 끼리 의 경쟁이 곧 작가를 만들어 주고 그 능력을 평가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남이 따를수 없는 심오한 장인의 경지에 도달 했을 때 프로적인 예술가가 탄생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선택한 인간주의는 인간 喜悲哀樂 중 희(喜)와 낙(樂)을 택한 것이며, 홀로와 둘에서 그는 둘을 택한 것이다.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인물에서 군상(群像)이 자주 제작되고 있는 것도 인간에 대한 애정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作家의 肖像 彫刻
그의 작업양식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소재는 「초상조각작품」이다.그는 모델로서의 사진자료에 관계없이 먼저 고인이나 생존자의 살아온 행적이나 업적, 평소의 언행과 생활철학, 취미나 성격, 그리고 해부학적인 골격이나 근육의 발달상황, 생성과 쇠퇴의 변화과정
등 충분한 고증을 거친 뒤 비로서 작가가 작성한 레포트와 사진을 대조하면서 분석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한마디로 비록 차가운 금속성이나 석재의 재질일지라도 영감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초상을 만드는 작업이라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관상가가 많은 임상을 통하여 관상학적 통계를 만들어 내어 그것을 곧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치와도 같다. 이러한 작업방법은 그가 얼굴(寫眞)없는 초상조각을 만들었던 동국대학장학회 설립자 송여사와 고 정주영회장의 선친 초상작품이 그것이며, 그의 유족들로부터 90% 이상 닮았다는 찬사와 확인을 받았다. 이병철씨의 흉상과 좌상을 제작한 바 있는 작가는 얼굴 모습은 70%가 닮고 30%는 피초상자의 철학과 사상이나 인간성이 표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상조각의 제작 방법으로 질감표현을 중요시 하고 있다. 가령 양복을 입었을 때 옷감의 원단 까지 정밀하게 묘사하며 양단과 무명, 모직과 면직 등의 질감 정도는 표출이 되어야 한다고 소신을 폈다. 초상인 인물의 형태도 얼굴에 나타나는 피부의 질감이나 입술, 눈꺼풀, 이마, 볼, 또는 뼈나 연골부위 까지도 정확하게 표출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작만도 독립기념관의 「강인한 한국인상」 세종문화회관의 외벽 부조 ‘飛天像 ' ‘방정환선생' 동상, ‘빙허 현진건동상' 합천댐 준공기념 조형물, 주암댐 준공기념조형물, 망우리의 독립운동조형물, 동아일보사에 세워진 조형물 「기수」, 광주예술회관 광장에 세워진 조형물 「사랑」 초상조각이나 인물작품으로서는 관악구의 「강감찬장군의 기마동상」 광주 「허백년선생 동상」 광주의 「하서 김인후 |
선생 동상」 광주비엔날레 중외공원 진입로에 세워진 무지개다리‘경계를 넘어서' 목포의 기념관에 세워진 ‘남농 허건' 동상, 조경작품으로는 고려대학교의「사색」원파 김기중선생기념관의 설계 및 조경과 동상, 부안 일민 김상만선생기념관의 조경 등 작가가 완성해 낸 조형물의 대부분은 작가 자신의 설계와 조경으로 직접 완성한 것들이다. 작가 김영중은 1926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중엽 유학자로서 성리학의 태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직계손인 그는 서울미대에 진학하여 3년을 수학하고 홍대에 편입하여 조각과를 졸업했다. 한때 모교인 홍대와 서라벌예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 대학 강단에서 후진양성을 위하여 재직한바 있지만. 교육자와 작품활동이 양립 할 수 없다는 괴리감과 양식의 갈등 때문에 전업 작가임을 선언하고 미련 없이 교직을 떠났다. 그는 80년 선출직인 미협이상장직도 취임 8개월 만에 스스로 사표를 낸 관료나 벼슬을 싫어하는 위인이었다. 약력만도 국전에서 단 1회의 큰 수상을 한 후 끝내 출품을 거부한 작가는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추세에 밀려 한국미협이사장, 홍익조각회장, 서울시예술위원,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95-미술의해 조직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동원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한국미술계에 끼친 공로는 일일이 열거 할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으며 그는 조각가로서 뿐만 아니라 미술행정 실무에 밝은 미술 |
계 정상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미술관련 법과 제도 등 의 창안 및 제정과 공포에 이르기 까지 엄청난 일을 해온 우리 미술계의 산증인이다. 또한 해박한 이론과 미술관련 논문의 발표 등 실로 인간의 체력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그는 초인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속물적인 타협이나 시세의 편승을 원천적으로 싫어했던 그는 국내 공공건물에 세워진 대형작품 등 조형물1%설치법을 제도화하는데 기여를 했으며 항상 다른 작가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해한 작품들을 타의에 의하여 떠맡다 시피 하여, 완성해 낸 경우가 많으며 이에 따른 숱한 숨은 일화(逸話)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이론과 실무를 겸전한 훌륭한 스승이요, 선배요,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다. 그는 사재를 털어 가며 각종 연구회와 그룹전의 지원 등 그가 이룩해 낸 엄청난 작업량과 업적에 비해 풍문과는 상반된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고 갔다. 비근한 예를 한, 두 가지만 들어 보면, 80년대 중반 B-35전을 창립하여 5년 동안 해마다 전시회를 열어주는 스폰서가 되었다. 이들 작가들을 35세 미만의 젊은 작가들이었다. 가난 하면서도 가능성이 있는 3,40명의 동서양화가를 전문가의 추천이나 심의를 거쳐 선발이 된 이들 작가들에게 작품 발표의 장을 마련해 준 것이다. 매회 전시 개최비용 천오백만원내지 이천만원이 소요되는 이 초대전은 순수한 사재를 투자한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화가에게 주는 값진 장학금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들 회원 중에는 작품성이 인정되어 지금 인기작가로 활동 중인 화가도 상당수가 있다.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다. 그는 작고하는 팔순을 맞기까지 엄청난 작업량에 비해 자전적인 화집 한권 마련하지 못했으며 동료와 제자, 후학들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모처럼 화집 발간을 하려고 자금을 마련했다. 제작비와 계약금까지 지불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이다. “내 자신이 내 화집을 만들다니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이 자금으로 미술자료실을 하나 마련하면 많은 후학들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그는 즉시 결행을 했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화집 한권 갖고 있지 않지만 5천여권의 미술전문도서와 내외 미술전문잡지, 팜플렛과 슬라이드 및 비디오 등 무려 2만5천여종을 소장하는 훌륭한 미술전문 자료실을 마련하여
많은 미술인들이 이용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국내 미술 관련 개인 도서관으로서는 아직 이만한 규모가 없는 상황 하에서 미술자료 목록만도 4집까지 발행되었던 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른바 전생에 업보가 있어 남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그가 이룩해 낸 업적에 따른 논공행상은 항상 뒷전으로 밀리고 엉뚱한 제삼자가 빛을 내는 웃지못할 난센스도 많다. 그러나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묵묵히 초연하게 살아가는 그의 인간성은 분명 우리시대의 사표(師表)요, 귀감(龜鑑)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가 남긴 많은 업적에 비해 유명하지 않고 무명으로 살아온 그의 행적(行蹟)가운데서 그가 이룩해 놓은 업적 몇가지만을 필자는 그 증거로서 이 칼럼에 남기고져 한다.
光州비엔날레의 創立
그는 20년전 문화전쟁을 예고했다. 이른바 경제+미술, 과학+미술시대가 열린다고 예언했다. 미술경제와 미술과학이 국가경영을 위한 중요한 전락상품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용어가 미술인은 물론 학계에 까지도 생경한 말로 받아 들여졌고 과연 문화전쟁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립할 수 있는가 라는 시니컬한 반응으로 회자(膾炙)되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심지어 대학생들 까지도 이 용어를 즐겨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3년 작가 김영중은 예향 광주지역에 비엔날레를 창설하겠다는 복안을 측근에게 흘렸다. 물론 필자도 그 계획안을 들은 적이 있으며 즉석에서 공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비엔날레 창립의 계획안이 구체화 되면서 일부 이를 반대하는 여론의 벽에 부딪히고 주사위는 주최 측에 던져졌다. 당시 주최 측의 책임자 강운태 광주시장의 결심여하에 따라 성사 되느냐 아니면 불발하느냐는 기로에 놓이게 됐다. 당시 작가 김영중은 광주 예총 강봉규회장과 러닝메이트가 되어 집요한
설득을 했다. 끝내는 시장이 이 사업계획안을 승인했으며 본격적인 사업이 이루언진 것이다. 당시 필자는 모 미술전문지의 논단에 “강운태시장이야말로 ‘95년 한국이 뽑은 문화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 해야할 용기 있는 공직자'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행사가 하필이면 왜 광주에서 열리느냐, 그 많은 재원은 어디에서 확보 하느냐를 가지고 구설수가 오르내렸다. 그러나 이 첫 행사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성공리에 끝났다.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가 경험해 보지 못한 물경 190만명의 손님을 맞기 위해 60일동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지방 자치시대를 맞아 광주시는 시민들과 함께 짭짤한 관광소득도 올렸다. 물론 시행과정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점이 지적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100년동안의 시행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문제점들에 비하면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며 첫술에 배부를수 있느냐는 말이 되려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질 만큼 멋진 피날레를 장식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편견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 는 시민들을 위해 필자는 한마디 충고의 조언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일 김영중 같은 원로작가가 없었던들 우리나라에 영원히 비엔날레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이렇듯 막대한 재원으로 거국적인 비엔날레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지구촌에 불과 4~5개국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엔날레는 왜 필요한 것인가. 가까운 일본이나 미국, 프랑스, 기타 유럽 선진국들은 국가 수입의 중요한 원천을 문화관광소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른바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관광 문화자원을 통하여 그 나라 수입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한낮설득을 했다. 끝내는 시장이 이 사업계획안을 승인했으며 본격적인 사업이 이루언진 것이다. 당시 필자는 모 미술전문지의 논단에 “강운태시장이야말로 ‘95년 한국이 뽑은 문화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 해야할 용기 있는 공직자'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행사가 하필이면 왜 광주에서 열리느냐, 그 많은 재원은 어디에서 확보 하느냐를 가지고 구설수가 오르내렸다. 그러나 이 첫 행사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성공리에 끝났다.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가 경험해 보지 못한 물경 190만명의 손님을 맞기 위해 60일동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지방 자치시대를 맞아 광주시는 시민들과 함께 짭짤한 관광소득도 올렸다. 물론 시행과정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점이 지적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100년동안의 시행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문제점들에 비하면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며 첫술에 배부를수 있느냐는 말이 되려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질 만큼 멋진 피날레를 장식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편견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 는 시민들을 위해 필자는 한마디 충고의 조언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일 김영중 같은 원로작가가 없었던들 우리나라에 영원히 비엔날레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반문을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이렇듯 막대한 재원으로 거국적인 비엔날레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지구촌에 불과 4~5개국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엔날레는 왜 필요한 것인가. 가까운 일본이나 미국, 프랑스, 기타 유럽 선진국들은 국가 수입의 중요한 원천을 문화관광소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른바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관광 문화자원을 통하여 그 나라 수입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한낮
홍제천 위에 설치된 내부순환로 밑은 양쪽의 산책로가 있으나 갈수기에는 언제나 삭막하기만 하다. 이 음산한 공간을 세계적 문화마당으로 조성한다.
유물에 불과한 폐허의 도시 폼페이 시에서만 관광객들이 연간 수십억달러를 뿌리고 간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엄청난 관광자원이 있으며 조상이 물려준 훌륭한 문화유산이 있다. 이러한 문화관광자원은 21세기의 문화전쟁에 대비한 전략상품으로 전환시킨다면 우리는 엄청난 국가경영의 노하우를 개발하는 셈이 된다. 자동차 수십대를 수출하는 소득보다 관광객 한사람을 유치하는 이익이 크다는 사실은 이미 지상에 보도 된 바 있다. 수출상품의 90%이상의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문화관광산업을 비롯한 미술경제, 미술과학의 수출 상품을 개발하는 일은 복지국가로 발돋움하는 절대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文化藝術振興法의 提案과 法制化
69년 미술진흥정책에 따르는 법률제정안을 마련하여 이의 건의에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했으며 동법은 72년 제정되어 정부가 정식으로 공포를 했다. 이법 제정의 취지는 미술은 단순한 감상이나 정서교육의 차원뿐만 아니라 제조+미술=상품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미술진흥책을 도입함으로서 수출 상품에 고부가가치(高附加價値)를 부여하자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고 둘째는 21세기의 문화전쟁에 대비한 준비작업 을 서두르자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다. 다시 말해 기초과학의 진흥 없이 응용과학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듯이 순수미술의 적극적인 진흥을 통하여 응용미술을 수출경영의 노하우로 개발하자는 것이 그 주지(主旨)였다. 물론 미술인의 창작의욕을 고취하는 일정 규모의 대형건물에 미술품 설치의 의무규정이 들어 있는 것도 이 법에 근거하고 있다.
東亞工藝大展
고인은 6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공예대전을 태동케 한 장본인이다. 당시 유신 정권하에서 주체사상과 주체성을 두고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던 상황하에서 언론계와 우리 사회는 갑론을박 등 무성한 이야기가 오고 갔던 시기였다. 그는 조상의 얼과 솜씨가 밴 때 묻은 일상 공예품은 곧 우리의 주체성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동아일보는 전통공예와 현대공예를 구분하여 공모전을 시작했으며 이는 전승공예 작가의 발굴이나 등용문의 효시가 되었다. 특히 민속의 거리인 인사동의 쇼윈도에 호마이커의 제품이 사라지고 목공예나 나전칠기 등이 등장하는 전기를 마련했으며 해외에서 까지도 우리의 전통공예가 높은 평가를 받는 지평이 된 것이다.
東亞美術祭의 創立
동아미술제는 지난 78년 창립전을 가졌다. 당시 전국에 하나밖에 없었던 국전( 公募展 (공모전) )이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등 첨예한 대립 속에 계보와 파벌 정실 등 부패가 극도로 달했고, 서구주의가 팽배했던 잘못된 미술풍토에 참신한 새바람을 불러 이르키고 한국성을 고양함으로서 미술인의 자각과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태동한 것이 바로 이 공모전이었다. 동공모전은 그동안 참신한 시인들을 발굴해 내는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한국성 미술의 뿌리를 내리게 한 시초가 되었다. 공모전은 1부, 2부, 3부등 공모전 사상 최초로 양식별 전문심사제도를 도입, 현재 실시중에 있다. 특히 회화 1부는 전통양식과 기법을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발전, 수용함으로서 한국화의 국제화, 세계화에 기여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학계나 미술평론가들 까지도 한국인이 그리면 한국화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억칙이 통하는 시대였다. 그는 이러한 관련사업의 일환으로 10년 전부터 한국성연구회를 설립 하여 최근 까지도 운영해 왔으며 세미나와 주제발표, 논문집의 발간 등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미술계를 주도했었다.
東亞文化센터의 創立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동아문화센타는 고인이 주최측에 무려 7개월 동안이나 끈질긴 설득을 하여 지난 81년 개원이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상자가 있어야 하는데도 감상자 보다는 예술가가 더 많은 상황 하에서 감상자의 저변확대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모색되었던 것이 문화센타의 설립을 추진했던 이유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개원의 결과는 애호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었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현재는 전국적으로 200개소 이상의 문화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문화 전반에 걸친 상호 견제와 경쟁 등 다양한 양식과 장르가 함께 공존함으로서 문화예술 전반의 발전과 향상을 기할 수 있었으며, 특히 미술을 주축으로 한 의식의 저변확대를 꾀할수 있었던 것은 고인의 큰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동 문화센타의 출범은 취미활동으로서의 아마츄어는 물론 많은 프로를 양성해 내는 기틀이 되었고 중앙문화센타, 한국문화센타의 설립을 비롯한 전국 백화점에 설치되는 등 부설 문화센타는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심지어 정부 산하기관인 도서관, 문화원등에서의 문화예술의 강좌, 각 기업체와 미술대학에서 까지 미술교육원, 평생교육원등을 개원하는 등 문화센터가 우후죽순처럼 기하는 실정을 감안, 이들에게 발표의 장과 기회를 주자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작품의 크기가 30㎝~1m까지로 그 규격을 소형화함으로서 많은 신인들의 실질적인 등용문으로서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木浦, 濟州彫刻公園의 創案, 設立
조각전시회는 있으나 조각작품의 매매가 전무했던 82년 한국 최초로 목포의 유달산에 조각공원을 조성하여 개원을 했다. 시민들이 부담없이 조각작품을 관람할 수 있고 책임없이 비평할 수 있는 기회는 물론이요, 조각작품과 친숙해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함으로서 작품 관람의 저변확대에 기여를 했다. 그는 나이가 먹으면 원로작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면 작품 값이 오르는 등 불합리한 미술풍토 속에서 비록 나이가 적고 경력이 없는 무명작가의 작품일지라도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만으로 공정한 평가를 받을수 있는 바람직한 미술풍토의 조성이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하였고, 끝내는 작품위주의 알찬 전업작가를 양성해 내는데 기폭제를 마련한 것이다. 이어 그는 아시아권에서는 최대규모(13만평)인 제주조각공원(제주조각공원)을 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시민들의 정서순화와 야외에 설치된 산교육의 장으로서 시발점이 된 것이며, 전국 도처에 조각공원이 조성되는 붐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서울시 대형건물 앞에는 환경미화를 위한 조각작품이 설치되었고 급기야에는 올림픽 조각공원을 탄생케 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마디로 국민 대다수가 이젠 조각작품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美術館法의 制定
국립현대미술관의 1년간 작품구입 예산으로 외국의 명화 단 한 점도 사들일 수 없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 미술시장은 상업성으로 흘러가고 작품의 판로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 하에서 사설미술관의 설립을 촉진하여 많은 작품을 수장케 함으로서 부담 없는 작품 관람은 물론 사회 전반의 미의식을 고취케 하는 것이 첫째 목적 이었으며 둘째는 미술인들이 작품제작에 상과 열을 다 함으로서 책임 있는 작품을 제작하고 그 정신적 자세를 고양함으로서 일반인의 구매력을 촉진시키자는 것이 미술관법을 제정토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
文化部의 昇格
지난 90년대 초 작가 김영중과 한국화가 민경갑(예술원회원)교수는 정부 당국에 문화부의 서열 승격을 건의 했다. 당시 교육부는 서열이 5위였고 문화부는 15위(?)로 거의 말석이었다. 이러한 건의안을 제출 하게 된 배경은 21세기 문화전쟁에 대비한 미술경제의 위상을 높이고 그때가 되면 사실상 문화예술 분야의 역할이 국가경제에 큰 몫을 할 것이라는 기대와 선견지명에서였다. 당시 까지만 해도 문화부는 서열에서 최하위였으며, 타 부처에 비해 푸대접을 받아 온 게 사실이다. 한마디로 정부당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과소평가나 무관심을 지적한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선진국의 경우 문화성이 상위권에 있음은 물론 대통령이 문화예술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직접 이를 컨트롤한다던지, 지난번 한국에 방문 했던 미테랑 대통령이 조각가등, 미술인을 대동하고 친선 외교 등을 폈던 일은 문화예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서열이 5위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어디 까지나 2세들을 위한 피교육자의 문제요, 문화예술은 그 나라 지성의 엘리트 집단이며, 산업의 발달이나 국력의 신장이 이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수가 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이를 6위로 까지 승격시키는 일부 직제변경도 단행했지만 아직도 미흡하며, 복지국가건설을 위한 엄청난 노하우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의 육성과 보호를 위한 과감한 투자와 미술인의 창작기금의 지원 등이 요청되며 이러한 일련의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 정부당국의 과감한 정책의 변화와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彫刻作品의 ‘ 重當' 計算法의 創案, 施行
지난 76년 미협을 통과하여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조각작품의 크기 계산법은 당시 관청이나 회사 또는 기업체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기준을 재료와 수량에다가 물가 요율표를 곱셈하고 각 공정과정의 인건비를 산출하여 일반 건설업계의 견적서로 작성이 된 후 제출된 서류의 심의가 끝나면 건설공사 계약방식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는 예술품을 놓고 건축자재 구입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관행을 폐지하고 제도적으로 회화등 다른 예술분야와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예술인으로서의 대우를 받기 위해 중당계산법( 重 (중) 當 (당) 計算法 (계산법) )을 창안해 낸 것이다. 투입된 자재 또는 재료에 구애됨이 없이 작품 크기를 중당으로 계산하여 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을 제도적으로 확립 한 것이다. 물론 중당가격의 기준은 작가의 수준과 예술성, 투입된 재료의 내용을 감안하여 작가가 정한 금액이 구매자와 합의가 이루어질 때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 법은 작가로서의 대우와 권익신장에 실직적인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外來語, 우리말辭典 編纂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외래어로 된 미술용어가 무려 1천6백 내지 2천개의 용어가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되어 왔다. 고인은 1년 6개월 동안의 연구과정을 거쳐 그 가운데 6백 단어가 우리말로 고쳐져, 문화부 어문과의 심의를 필하여, 통과되었다.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머지 1천여개의 단어는 고유명사나, 학술적인 용어, 또는 색채명 등 극히 신중을 요하는 어려움 때문에 2차 사업으로 미룬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었다. 가령 색채명을 우리말로 바꿀 경우 빨강과 노랑의 혼합비율과 색의 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이 붙혀져야 하는데 이의 혼란을 막기 위해 마치 가문의 학렬 자만 보아도 시족의 몇 대 손등 가계를 알 수 있듯이 이 학렬 방식을 택하면 적어도 5백 단어 이상의 색의 명사가 탄생될 수 있다고 고인은 주장하고 있다.
이상 본란은 고 우호 김영중 선생의 추모특집으로서 본지 9월호 표지작가로 선정하여 상보를 내보냈다. 고인을 잘못 이해한 미술계나 관련인사, 혹은 세상을 풍문만 듣고 함부로 사람을 재단하는 것은 자칫 자기 자신의 일생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역지사지로 세상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끝으로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며 이만 붓을 줄인다
그가 한국미술계에 끼친 공로는 일일이 열거 할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으며 그는 조각가로서 뿐만 아니라 미술행정 실무에 밝은 미술계 정상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미술관련 법과 제도 등 의 창안 및 제정과 공포에 이르기 까지 엄청난 일을 해온 우리 미술계의 산증인이다. 또한 해박한 이론과 미술관련 논문의 발표 등 실로 인간의 체력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그는 초인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속물적인 타협이나 시세의 편승을 원천적으로 싫어했던 그는 국내 공공건물에 세워진 대형작품 등 조형물1%설치법을 제도화하는데 기여를 했으며 항상 다른 작가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해한 작품들을 타의에 의하여 떠맡다 시피 하여, 완성해 낸 경우가 많으며 이에 따른 숱한 숨은 일화(逸話)도 전해지고 있다.
金 泳 仲
1926年 3月 15日生
1982年 3月 大統領表彰 受賞
1988年 12月 서울特別市 文化賞 受賞
1991年 11月 韓國文化藝術團體總聯合會 藝術文化賞 受賞
1994年 10月 大韓民國 文化勳章 受賞
1995年 11月 錦湖藝術賞 受賞
1998年 10月 弘益大學校 總同窓會 '자랑스런 弘益人賞' 受賞
1963年 12月 原型彫刻會 創立 第1~第3回 展覽會 開催(1963年 新聞會館, 1965年 YMCA, 1969 德壽宮 野外展)
1970年 12月 韓國現代彫刻展 出品(新世界 畵廊)
1972年 6月 1973年度 브라질 쌍파울로 비엔날레 出品
1973年 12月 韓國現代彫刻大展 出品(國立現代美術館 主催)
1975年 10月 第1回 全國彫刻家招待展 出品(韓國文藝振興院 主催)
1979年 10月 第1回 韓國畵廊協會 美術大展 出品(湖巖아트홀)
1982年 10月 重鎭彫刻家 13人展 出品(選畵廊 主催)
1984年 4月 '84-87現代美術招待展 出品(國立現代美術館)
1984年 6月 具象彫刻 10人展 出品(現代畵廊)
1985년~現在 彫刻招待展 出品(서울 新聞社 主催, 서울갤러리)
1985年~現在 韓國現代彫刻家協會 招待展 出品(서울갤러리)
1985年 10月 現代美術 40年展 出品(國立現代美術館)
1985年~現在 '85-88 서울美術大展 出品(서울特別市 主催)
1986年 8月 韓國現代美術의 어제와 오늘展 出品(國立現代美術館)
1988年 6月 重鎭彫刻 8人展(現代畵廊)
1988~1992年 韓國現代美術展(國立現代美術館)
1988年 9月 現代美術館 開館紀念 彫刻招待展(무역센타內 現代百貨店)
1988年 11月 詩가있는 그림展 出品(서림畵廊)
1988年 11月 오늘의 具象彫刻 25人展 出品(現代美術館)
1994年 2月 音樂과 舞蹈 美術展 出品(藝術의 殿堂)
1994年 10月 元老彫刻家 3人 招待展 出品(大邱 민갤러리)
1996年 8月 '96 오늘의 美術大展 出品(서울 市立美術館)
1996年 12月 서울 國際美術祭 出品(貿易센타)
1997年 6月 韓國美術의 地平을 열면서(갤러리 宇德)
1998年 10月 MANIF4 '98 서울국제아트페어展 出品(藝術의 殿堂, SBS서울방송)
1999年 5月 캐릭터 메시지展(DJ조각품) 出品(갤러리 宇德)
1999年 10月 단원미술제 '99 안산전 出品
1999年 11月 MANIF 서울국제 아트페어 韓國美術代表作家展 出品(藝術의 殿堂, SBS 서울방송, MANIF조직위)
1977年 8月 '飛天'(화강석) 世宗文化會館 所藏
1981年 6月 '希望'(청동) 光州 어린이大公園 所藏
1989年 12月 '포옹'(화강석) 모란 美術館 所藏
1990年 5月 '해바라기 가족'(청동) 國立現代美術館 所藏
1992年 7月 '사랑'(화강석+오석) 光州文化藝術會館 所藏
1992年 8月 '故鄕'(화강석+오석) 光州高速터미널 所藏
1992年 12月 '藝術+行爲+跳躍'(화강석+오석) 光州文藝會館 所藏
1993年 8月 高麗大學校 仁村紀念館 象徵 石像 造形作品 制作
1994年 7月 '일하는 사람들'(화강석) 서울特別市 施設管理工團 所藏
1995年 3月 '하늘나라 사람들'(화강석) 린나이코리아(株) 所藏
1997年 12月 '삶의 멋'(화강석) 敎保生命 所藏
1998年 6月 '平和行進曲'(청동) 國立現代美術館 所藏
1998年 12月 '사랑'(화강석) 高麗大學校 醫科大學 附屬 安山病院 所藏
1986年 8月 '强靭한 韓國人像'(화강석) 獨立紀念館 所藏
1995年 9月 '境界를 넘어' 光州비엔날레 所藏
2000年 10月 '人道主義와 機械主義'(주철) 國立現代美術館 所藏
1956年 3月 弘益大學校 美術學部 彫刻科 卒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