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블라디보스톡의 추억
(26) 블라디보스톡대학교 내에 교육원을 열다
수산대학을 며칠 오가며 설득했지만 전혀 진척이 안 되어 이런 사실을 총영사에게 보고하니 그러면 블라디보스톡 대학에 알아보자고 하였다. 전부터 총장 부총장 등과는 친밀하게 지내 서로 편의를 주고받는다며 얼마 전 부총장이 어려운 일 있으면 부탁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바로 부탁하는 게 너무 약삭빠른 것 같아 주저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어쩔 수 없다며 부총장한테 전화를 하니 부총장이 바로 달려왔다.
이야기를 들은 부총장은 선뜻 독립건물에 원하는 만큼의 교실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 대학의 입장에서는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이었는데 총영사가 먼저 제의를 하니 퍽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당시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택하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모든 것이 부족하고 힘든 상황이라 선진국으로 생각되는 한국과의 친선관계는 그들로서는 간절히 원하는 바였다. 당장 불라디보스톡 대학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 대학과의 연관을 주선해 달라고까지 하였다.
우리는 정문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건물의 교실 3개를 사용하기로 하고 바로 답사를 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걸 근 1달이나 수산대학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한 게 억울했다. 나는 임시 사무실을 영사관 빈방에다 설치하고 교육부와 연락은 영사관 식구들이 쉬는 토요일 일요일 날 나와서 일을 추진했다.
교육부와 모스크바 대사관의 류춘근 교육관에게 진척사항을 보고하고 필요한 경비를 청구하였다. 3월 초 신임 원장으로 국제교육진흥원에 근무하는 한문수 연구사가 내정되었다고 알려왔다. 이미 일본에서 교육원장을 역임한 바 있어 일의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아 반가웠고 또 같은 일가라 반가웠다. 루스카야 아파트에서의 생활도 3개월이 되어가다 보니 자리를 잡아갔다. 식사는 휴일에 온통 중국 사람들과 중국 물건으로 가득 찬 시장에서 식재료 등을 구입해서 해결했고 출퇴근은 집 앞에서 시내로 바로 연결되는 트로이 버스를 이용했다.
몇 달을 트로이 버스로 다니다 보니 역 이름을 다 욀 정도가 되었다. 점심과 저녁은 보통 시내에서 영사관 식구들과도 하기도 했으나 주로 니나 씨와 한국식당에서 해결하고 가끔 북한이 운영하는 모란봉 식당에서 북한식 한식을 맛보기도 했다. 또 시간 있는 날이면 시내와 맞닿아 있는 바닷가를 산책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드카를 들고나가 1달러면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삶은 게를 사서 안주 삼어 마시기도 했다.
이렇게 큰 게를 1달러에 살 수 있다니. 그것도 삶은 게를.....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였다. 일을 하면 할수록 니나 씨의 일에 임하는 자세와 문재 해결 능력이 정말 탁월했다. 덕분에 개원 관련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사할린 교육원 개설하는데 하도 서러움을 많이 당해서 불라디보스콕 교육원은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리가 끝나자 책걸상은 물론 냉장고 컴퓨터 프린터까지 점부 한국제로 구입했다. 사할린교육원 개원하고 1년이 지나다 보니 러시아 사회도 많이 변한 대다가 블라디보스토크는 큰 도시이다 보니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한국 상품도 많이 들어와 있었고 재래시장은 조잡하기는 했지만 중국 물건들로 넘쳐 낳고 특히 식재료는 80~90%가 중국재였다. 중국이 워낙 가깝다 보니 어딜 가나 중국사람이 넘쳐 낳고 툭히 시장은 더했다. 중국 사람들 중 조선족도 많아 물건 사기가 수월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 약 3.000여 명의 북한 근로자들이 나와 있어서 어디에서나 웬만한 공사장에서는 북한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옷차림이 남루하고 추운 겨울에도 장화 차림으로 다니는 게 안 되어 보였지만 그건 우리의 생각이었다. 가끔 어떻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근로자로 나온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3월 10알 경 한문수 신임 원장이 가족과 함께 부임을 했고 의논 결과 개원 일자를 3월 24일 정하고 준비를 했다.. 1개월로 계획했던 교육원 개원이 3개월이나 되자 교육원이나 아들 민규가 빨리 오라고 성화였다.
식장은 블라디보스토크 대학 강당을 빌려하기로 하고 진행은 나와 니나 씨가 맡기로 했다. 교육원 현판과 태극기는 교육부 과장이 오는 편에 가져오기로 했다. 3월 23일 개원 하루 전. 교육부에서는 담당과장과 연구사가 왔고 모스크바 대사관에서는 류춘근 교육관이 참석차 비행기로 왔다. 3월 24일 준비한 데로 강당에서 총영사와 영사관 식구들,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와 블라 디보스 툭 대학 총장이 참석해 축하 및 축사를 해주었다. 저녁에는 시내 한인식당을 빌려 축하 파티도 가졌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었는데 이렇게 성황리에 잘 마무리한 게 무척이나 뿌듯하고 기뻤다. 그리고 니나씨 같은 능력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성공리에 끝낼 수 있었던 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교육원 개원 후 니나씨는 자연스럽게 교육원의 비서로 채용되었고 그 후에도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때마다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인연은 니나씨의 딸이 한국으로 시집오는 계기도 만들어져 2.000년대 들어와서 한국에서도 자주 만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니나씨의 딸 알료나는 불라디보스톡 의대를 다니다 한국 연수차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인과 결혼 후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게 다 니나 씨가 교육원에 근무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일이라고 나를 만날 때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개원식이 끝나고 다음 날 사할린에서 구할 수가 없어 중고 책걸상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내 책걸상과 성 선생 책걸상을 교채 할 한국재 새 책걸상을 구입해 가지고 사할린으로 돌아왔다. 한 달 잡고 간 것이 3달이나 걸리다 보니 교육원 일과 하루가 멀다 하고 언제 돌아오느냐고 보채던 아들일이 걱정이 됐지만 성공리에 개원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러웠다.. 교육원일은 어는 정도 자리가 잡혔기 때문에 걱정이 덜 되었는데 억센 주인 할머니와 같이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아들일이 더 걱정이 됐다.
블라디보스톡은 그 후에도 1년에 몇 번씩 공무 차 갔고 그럴 때마다 니나씨의 신세를 졌다. 러시아사람들의 국내 여행은 좀 특이해서 어느 지역을 여행하면 호텔이나 여관등에 유숙 하는 게 아니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지인한테 부탁해 개인이 살다 잠시 여행간 사람 네 집에 머무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아마 공산주의 70년동안 이동의 자유기 제약되어서 일반적인 호텔이나 여관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특히 1995년 여름에는 일본 교토에서 열리는 일본 러시아 지역 교육원장 회의에 참석하러 가고 오는 길에 들렸고 1996년에는 하바롭스크 교육원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면서 제대로 된 불라디보스톡 관광도 하고 불라디보스톡역에서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하바롭스크까지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6년 2월에는 아들 민규의 귀국에 따른 수속 절차를 받기 위하여 잠시 들렀고 마지막으로 간 것이 1997년 11월 말 경 임무 마치고 귀국 인사차 영사관에 들린 것이 교육원장으로서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첫댓글 수산대학에서, 원하고 있는 블라디보스독 대학으로 바꾸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아랫 사람은 윗 사람에게 불평 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여 윗사람을 칭찬 받게 하여야 합니다
한원장님 덕분에 열심히 하는 니나씨, 딸 모두 잘 되었습니다
참 어려운 교육원 일 잘 하셨습니다 ..
정말 니나씨 같은 사람을 만나 생전 처음간 불라디보스톡 같은
타국에서 교육원을 쉽게 개원 할수있었던것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타국에;서의 어려운일을 겁 안내고 자신감을
갖고 달려들어 할수 있었던 자신감 용기 이모두가 지금생각하나
ROTC 임관후 4년의 최전방 군대 생활이 있었기 떄문에 가능했던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고생은 했지만 4년의 군생활이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ROTC 장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자부심,자신감,자존감을 갖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