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2. 시지동 밀양 박씨와 솔일재(率一齋)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고산(孤山)’이란 지역이 있다. 대구와 경산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층이라면 고산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고산을 잘 모른다. 그들은 ‘시지(時至)’라 해야 알아듣는다. 고산이란 지명은 약 470년 전 퇴계 선생께서 명명하신 ‘고산서당’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하지만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산이란 지명이 사라지고 있다. 1990년대 초 이 지역이 개발될 때 ‘고산’이 아닌 ‘시지’ 지구란 이름으로 개발된 탓이다. 조선 초 이래로 고산을 대표했던 세 성씨 ‘옥산 전씨’, ‘아산 장씨’, ‘밀양 박씨’ 중 지난번 아산 장씨(제51호)에 이어 이번에는 밀양 박씨에 대해 한 번 알아보자.
밀양 박씨 대사헌공파와 귀림 박해
밀양 박씨는 신라 왕족이자 신라·고려·조선에 이어 지금까지도 많은 인재를 배출한 우리나라 명문가 중 하나다. 밀양 박씨에 ‘밀직부원군파→대사헌공파’라는 지파가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산(시지동)을 연고로 하는 지파다. 밀양 박씨 대사헌공파가 고산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조선 초다. 대사헌공파 파조인 귀림(歸林) 박해(朴晐·1347-?)가 이 지역 오랜 토박이 옥산 전씨에 장가를 들면서다. 박해는 고려말 조선 초 인물로 30세 되던 해인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조선 초에는 벼슬이 대사헌까지 올랐다. 이후 정승에까지 하마평이 올랐지만, 돌연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청주 계림촌을 거쳐 시지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이러한 그의 처세를 후손들은 ‘선조께서 조선의 기틀을 닦은 후 미련 없이 은거함으로써,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은혜에 보답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사헌공파 계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박언침(30세)→박언부(37세)→박중미(44세)→박해(45세)
(비조) (득관조) (중조) (현조) (파조)
밀양 박씨 대사헌공파 랜드마크 ‘솔일재(率一齋)’
솔일재는 고산중학교 교문을 기준으로 서쪽 약 80m 지점에 있다. 본래 인근에 있었던 옛 솔일재는 1995년 도시개발로 철거됐고, 1998년 위치를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솔일재를 중건했다. 솔일재 솟을대문은 ‘공경히 재계한다는 의미’의 제경문(齊敬門)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재실로는 상당히 화려한 건축양식을 갖췄다. 제경문 바깥에는 ‘박응성 의병장 4부자 순국기적비’와 ‘귀림 박해 신도비’가 있다. ‘솔일’은 주역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사당을 세워 집안의 정신, 나아가 천하의 인심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솔일재를 연고로 하는 대사헌공파 후손으로는 성종 때 문과급제하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성종으로부터 청풍당(淸風堂)이란 사호(賜號)를 받은 박영손(朴英孫), 조선 후기 가사문학의 거장으로 우리에게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로 알려진 ‘조홍시가’로 유명한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 임진왜란 때 4부자가 함께 순절한 의병장 매헌(梅軒) 박응성(朴應成·1539-1592)과 그의 세 아들 박근(朴瑾)·박장(朴璋)·박환(朴瓛) 등이 있다. 근대 인물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이 솔일재 후손이다. 이중 수성구 욱수동 출신으로 임란 때 순절한 박응성 4부자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박응성 4부자(父子)
솔일재를 연고로 하는 대사헌공파 후손으로는 임진왜란 때 4부자가 함께 전장에서 순절한 의병장 매헌(梅軒) 박응성(朴應成·1539-1592)과 그의 세 아들 박근(朴瑾)·박장(朴璋)·박환(朴瓛)이 있다. 이들 4부자에 대해 경산현읍지(1878)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응성은 대사헌 박해의 6세손이다. 무과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때 자산(子山)에 성을 쌓았다. 송암(松巖) 김면과 함께 창의했다. 여러 번 이겨 한 고을이 오로지 의지했다. 성주 사원진에서 순절했다. 그의 아들 근·장·환 3인도 함께 순절했다. 조정에 알려져 병조 참의에 추증됐다. 임금께서 그의 후손을 물으시고 계자(季子) 무(珷)가 겨우 10세라고 하니 만나보고 격려하며 이름을 선(琁)으로 내렸다. 박선은 15세에 무과에 합격해 비인·해남 현감을 역임했다.
자산성은 수성구 욱수골 안산 정상부에 있는 ‘욱수산성’으로 ‘자양산성’ 혹은 ‘박장군 산성’으로도 불린다. 박응성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아들 박무(朴珷)는 임란 당시 나이가 10세였다. 그래서 형들과는 달리 전투에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 안씨 부인과 함께 욱수골 깊은 산속 동굴에 피신해 생존할 수 있었다. 임란 후 박무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선’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다. 이는 선조가 박응성 4부자 순절에 대한 보고를 받고, 박무를 친히 불러 “종사(宗社)의 충신이요, 나에게 구슬(璿)과 같도다”라며 하사한 이름으로 전한다.
600년 인연 강선계(講先稧)
대구에서 600년 가까이 된 조선 초기 묘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현재 솔일재 북쪽 천을산 기슭에 약 600년 전 조성된 박해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지 않고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솔일재 일대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계라 할 수 있는 ‘강선계’의 탄생지기도 하다. 강선계는 조선 초 혼인 관계로 시지 일대에서 번성한 옥산 전씨, 아산 장씨, 밀양 박씨 세 성씨 문중 연합계다. 세 문중 중에서 터줏대감은 고려시대부터 고산에 세거한 옥산 전씨다. 조선 초에 아산 장씨, 밀양 박씨, 은진 송씨(일찍 대가 끊어졌다)가 옥산 전씨에 장가들면서 이들 성씨가 시지동 일대에 터를 잡았다. 600년 넘게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세 문중은 1923년 공식적으로 ‘강선계’를 결성했다. ‘전·장·박’ 강선계 세 문중은 지금도 매년 강선계(음력 4월 10일)를 개최하고 있으며, 옥산 전씨 전의룡 묘소 벌초와 묘사를 비롯한 세 문중의 묘사도 함께 하고 있다.
에필로그
시지동 지명유래 중에 특별히 흥미로운 지명유래가 있다. 바로 ‘세 집’에서 유래됐다는 ‘세집매기·싯집매기’ 설이다. 옛 자료를 살펴보면 시지(時至)을 시지(時旨)로 표기한 예가 있다. 우리말 어원을 중심으로 하는 향토사에서는 시(時)를 우리말 ‘셋’을 나타내는 ‘시’, 지(旨)는 마을의 줄임말인 ‘말’의 한자표기로 본다. 따라서 시지(時旨)란 표기는 세 집이 마을을 형성했다는 뜻의 ‘세집매기, 싯집매기’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말 흥미로운 해석이다. 시지동에 연원을 둔 밀양 박씨 대사헌공파 후손들은 이후 영천 우항·도천, 경주 봉곡·용장·와지·석계, 울산 송정 등지로 번져나가며 번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