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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주일]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
대강절은 대림절 또는 강림절이라고도 합니다. 대림절은 성탄 전 4주간을 예수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 절기입니다. 507년 투르 공의회에서 대강절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때는 성탄 전 40일간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9세기부터는 성탄 전 4주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어떤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까요?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학업의 짐, 생업의 짐, 가정의 짐, 신앙의 짐, 건강의 짐, 가난의 짐, 인간관계의 짐, 무지의 짐, 무능의 짐, 사역의 짐, 죄와 사망의 짐 등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모두 져주시는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눈앞이 캄캄한 상황을 만납니다. 해결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요즈음은 아이들까지 절망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불과 4십년 전보다 세상이 얼마나 살기가 좋아졌습니까? 모든 것이 불편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지금은 세계적으로 앞선 편리한 문명과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잘 낙심하고 모든 것을 잘 포기합니다.
이것은 환경과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라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든 이유는 예수님을 떠나서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리 편한 세상이 되어도 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세상의 멍에를 메려고 하면 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가볍고 편안하게 됩니다.
세상의 멍에는 쉽고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겁고 수고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는 반대로 무겁고 수고로워 보이지만 쉽고 가볍습니다. 톨스토이는 15세 이전 어린 시절은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이후로는 방황했습니다. 기독교를 포기하고 삶의 자유를 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55세에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자신을 속박하고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벗겨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 힘든 것처럼 보여도 착실하게 신앙생활하면 오히려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주일 성수의 짐, 십일조와 헌금의 짐, 예배의 짐, 봉사의 짐, 선교와 전도의 짐이 힘들어 보여도 결국은 이 짐은 행복과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줍니다.
KFC 아시죠? 그 앞에 세워둔 하얀 신사복 차림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들고 서있는 할아버지 모습의 인형을 보셨지요? 관심을 끌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인물입니다. 커넬 할랜드 샌더스(Colonel Harland Sanders) 할아버지입니다. 그는 수많은 역경과 실패를 거듭하는 바람에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60세 되던 해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러 갔는데 한 정신병이 든 여성이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는지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예수님 없이 살았는데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정신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다시 치킨 사업을 시작해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사업은 맡겨놓고 전도하러 다닙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떠나 살면 짐이 가볍고 잘 살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살면 사업을 실패해도 나이가 많아도 조건과 환경이 좋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바꾸어주시고 잘 되게 해주십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짐을 지고 태어납니다. 죄의 짐, 수고와 고통의 짐, 죽음과 질병의 짐, 생활고의 짐, 인간관계의 짐, 마음속의 짐 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이 짐을 벗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싶지 않습니다. 약을 개발하면 또 다른 신종 질병이 등장합니다. 장수하려고 해도 운동하고 보약을 먹어도 죽습니다. 잘 살다가도 생활이 어렵게 됩니다. 상처받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납니다. 스트레스는 점점 더 늘어나서 더 우울해지고 더 자살도 많이 합니다. 각종 중독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거나 벗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갈수록 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황성주 박사는 암 환자를 볼 때 공통점이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한을 품고 있는 경우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응어리가 있으면 암, 쌓인 화가 있으면 암이 됩니다. 화를 속으로 싹이고 참는 내성적인 성격은 보통사람보다 4배나 더 암에 잘 걸린다고 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외향적인 성격은 심장병에 잘 걸린다고 했습니다. 이래저래 해결책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해결책은 예수님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시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 짐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예수님께 내어 맡기면 해결 받습니다. 짐이 벗겨집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예수님께 짐을 맡기면 예수님께서 짐을 벗겨주시고 해결해주십니다.
쌀 포대를 메고 가다가 무거우면 내려놓으면 됩니다. 책가방이 무거우면 벗으면 됩니다. 몸이 무거우면 살을 빼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살이 짐은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나요? 그보다 더 큰 죄의 짐은? 사망의 짐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 짐을 지고 태어납니다. 갓난아기도 이미 이런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고통을 받고 수고하고 죽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이 죄와 사망과 생활고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무슨 짐을 말할까요? ‘수고하다’는 말은 ‘피곤하다’ ‘지치다’ ‘애쓰다’ ‘녹초가 되도록 수고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민거리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배우면 배운대로 못 배우면 못 배운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여러 가지 짐에 눌려 삽니다. 겉으론 멀쩡해보여도 속으론 마음 아픈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나폴레옹이 마지막 유배지에서 탄식했습니다. “바닷물은 사람들의 눈물이요 바람은 사람들의 한숨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짐은 누구나 지고 삽니다.
인생의 수고로운 짐, 인생의 무거운 짐은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습니다.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대신 수능시험 쳐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일류대 장학생이니까 대신 시험쳐줄게.” 안 됩니다. 대리 시험은 부정입니다. 가난을 대신 져주고 고통을 대신 져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몸살 한 번 걸리면 꼼짝 못합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더욱 더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무덤 위에 덮인 한 줌의 흙도 자기 손으로 치우지 못하는데 어떻게 대신해줄 수 있나?”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색다른 짐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을 평생 믿고 교회에 평생 다녀야 하는 짐입니다. 그런데 이 짐은 결코 무겁거나 녹초가 되도록 수고로운 짐이 아닙니다. 가볍고 행복하고 기쁜 짐입니다. 이 짐은 질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오라고 하셨나요? “다”라는 말은 ‘모두’ ‘누구나’ ‘누구든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너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안 된다. 너는 너무 죄가 악해서 안 되겠다. 부담스러운 사람은 안 된다. 죄 있는 사람은 안 된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안 된다.”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렇게 자신 있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할 수 있겠어요?
모 보험회사의 광고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안고 오케이” 그래서 이 회사는 매출이 평소보다 굉장히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짜 무조건 오케이일까요? 보험 안 들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묻지도 않으시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무조건 “오케이” 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오케이’의 예수님, ‘예스’의 예수님, ‘아멘’의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18~19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질병의 문제 “너는 암이 걸렸으니까 안 된다. 가거라. 감기 걸린 사람은 오케이. 무릎 다친 사람도 오케이 그러나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은 안 된다. 가거라.” 죽음의 문제 “이미 죽었잖아 안 된다. 가거라.” 가난의 문제 “그렇게도 찢어지게 못사느냐? 저리가라.” 신분의 문제 “천한 사람은 안 된다. 내 앞에 얼씬 거리지 마라.” 능력의 문제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느냐? 능력이 없잖아? 회사 취직도 못하고 좋은 학교에 입학도 못해군. 썩 물러가라.” 성격의 문제 “성질 하나 고약하네. 원한을 품고 있네. 자넨 안 되겠어.” 고통의 문제 “눈물 찔끔찔끔 흘리는 사람은 정말 싫거든. 좀 방긋방긋 웃어야지. 항상 우거지상을 짓고 있네. 내 마음까지 우울해지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예수님은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올만한 사람만 내게로 오라. 받아줄만한 사람만 내게로 오라.” 아닙니다. 누구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지요? 짐을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짐, 생활고의 짐, 사망의 짐, 고통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비천의 짐, 마음의 짐, 가정과 생업과 국가 위기의 짐 등을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책임져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오케이’ ‘예스’ ‘아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받아주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짐을 친히 져주시니 너희는 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쉬다’라는 말은 ‘안식하다’ ‘그치다’ ‘평온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믿고 성경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책임져주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녹초가 되도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짐을 처리해주시고 벗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내 모든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길 바랍니다. “예수님, 내 몸의 질병을 모두 맡깁니다. 사역도 맡깁니다. 가정도 맡깁니다. 학업도 맡깁니다. 무지와 무능도 맡깁니다. 마음의 고통도 맡깁니다. 생업도 맡깁니다. 국가 위기도 맡깁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예수님께서 짐을 져주십니다. 해결해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맡길 때 우리는 쉼을 누리게 됩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건강하게 됩니다. 기쁘고 신나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돌보고 있다. 내가 다 맡아서 한다. 그러니 너는 내 안에서 쉬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나 혼자 지고서 끙끙 앓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 모든 짐을 예수님께서 친히 져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우리의 짐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첫댓글 나를 만져 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