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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간 잠들어 있던 신과 소통하는 언어>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 그렉 브레이든 지음, 김영사 刊 [첫 번째 비밀_잃어버린 기도] 상상을 초월하는 광휘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그 광휘와 공포를 창조하는 힘이 우리 안에 이미 똬리를 틀고서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_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St. Catherine of Siena(1347~1380) |
‘저기 어딘가에’ 무엇인가 존재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일상의 저편에 우리를 위로하는 신비로운 존재, 어떤 힘이 실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느낀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것을 믿고 기도한다!
‘창조의 그물Web of Creation’에서부터 ‘신의 영Spirit of God’에 이르기까지 다양한이름으로 불리지만, 고대의 전통들은 그것의 실재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도와 달리, 이 기도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감정이라는 침묵의 언어에 기반한다. 이 기도는 기도가 이미 응답을 받은 것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한다. 고대인들은 이런 감정을 통해 우리가 창조의 힘, 곧 ‘신의 영’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대 과학은 ‘신의 영’이 일반적인 에너지 형태와는 다른 에너지장이라는 것을 재발견한 듯하다. ‘신의 영’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어디에서나, 언제나 존재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양자물리학의아버지로 불리는 막스플랑크MaxPlanck는 이에너지장의 존재가 물질세계를 책임지는 위대한 지성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이 힘 뒤에 의식과 지성을 가진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한다.” 그는 “이마음이 바로 모든물질의 매트릭스”라고 결론짓는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이를 통일장UnifiedField등으로 부르며 플랑크의 매트릭스가 사실상 지성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고대인들이 암시했듯 이 에너지장은 인간의 감정에 반응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과학과 종교가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든,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끌어당기게 만들고 우리를 더높은 힘에 이어주는 ‘거대한 자석greatmagnet’같은 힘이, 어떤 에너지장이, 어떤 존재가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문제는 ‘저기 어딘가에’ 무엇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무엇’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언어는 우리 모두의 아주 일반적인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느낌과 감정의 경험이다. 느낌과 감정을 기도의 언어로 사용하기 위한 열쇠는 기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다.
<요한복음>의 초기 번역본 16장 24절에는, 바라는 바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기분에 흠뻑 젖음으로써 기도에 힘을 부여하라는 권면의 말이 있다.
“동기를 숨기지 말고 진솔하게 요청하고, 이미 응답받았다는 기분에 젖어들어라.”
우리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긍정적인 바람에 수반되곤 하는 의심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나그함마디문서Nag Hammadi library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예수는 양극단을 오가는 마음을 극복하는 힘에 대해서 짧게 언급한 다음, 의심을 떨쳐내기만 하면 우리가 “‘산아, 움직여라’라고 외치면 산도 움직일 것”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되고 신비로운 경험이다. 물론 가장 사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기도라는 단어가 영적 수행법이나 의식儀式에서 나타나기도 전에, 그리스도교와 그노시스파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힘과 소통하는 우리의 능력을 묘사하는 데에 친교communion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기도는 경험하는 사람마다 독특한 모습을 띤다.
‘잃어버린’ 기도는 오롯이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기도는 전 세계 95퍼센트의 사람들이 믿는 지성의 힘intelligent force과 소통할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우리가 그 결과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기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특정한 자세나 손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은 채, 기도가 이미 응답받은 것처럼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런 무형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치유, 친구와 가족의 풍요로움, 나라간의 평화를 가져오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포코너스 지방의 키바 유적지 내부에는, 오래전 석조 건물의 벽을 뒤덮었던 진흙 벽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진흙 벽토에는 풍요로운 옥수수 들판 위를 떠도는 비구름과 번개의 모습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다른 벽에는 엘크와 사슴 같은 야생동물이 그려져 있어, 계곡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보여준다. 고대의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을 기록해놓았다. 그들은 경험하고 싶은 것들의 이미지로 주변을 가득 채워놓고 기도를 올린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기도가 이미 응답받았다는 느낌을 불어넣어준다. 고대인들에게 기도는 오감이 총동원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 그것은 곧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에 힘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치유를 간청하는 기도는 질병에 힘을 넘겨주는 일이다. 비가 오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는 가뭄에 힘을 넘겨주는 일이다.
“비가 내릴 때의 느낌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빗방울이 내 몸에 닿는 느낌, 비가 쏟아져서 진창이 된 마을 광장에 맨발로 서 있는 느낌을 느꼈어요. 비가 올 때면 마을의 흙집에서 나는 냄새도 맡았고, 비를 맞으면서 가슴 높이까지 자란 옥수수밭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닐 때의 기분도 즐겼습니다.”
그는 모든 감각을 열어젖혔다. 우리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후각과 시각, 미각, 촉각뿐 아니라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별시키는 생각,느낌,감정의 숨겨진 힘까지 동원한 것이다. 그는 강력한 고대의 언어로 자연에 ‘말을걸고’있었다. 그는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이 어떻게 기도를 완성하는지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창조한것에 대해서보다는 창조에 참여하는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모든 가능성에 경의를 표하고 우리가 선택한 것들을 이 세상으로 불러오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화학물질인 호르몬을 분비해 면역체계를 강화한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때 일어나는 우리 내면의 화학변화는 만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신비한 도관導管을 통해 우리 몸 밖으로 전해져 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양자 효과quantum effect이다.
무엇이든 당신의 인생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라. 무엇이 되었든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요청하지 말고,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껴보라.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기도가 온전히 다 이루어졌을 때의 충족감을 구체적으로 모든 면에서 느껴보라.
자, 이제는 기도가 응답을 받았을 때 달라지는 당신의 인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어보자. 도움을 요청할 때 느끼는 간절함과 목마름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편안함과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찾고 구하는 기도는 갈망 상태에 머물게 하지만, 이미 받았다는 느낌은 우리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현대 과학에서 에너지장의 존재가 인정됨에 따라 우리는 영적 지혜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언어와 문맥을 갖추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고대인들이 ‘천국heaven’이라고 언급한 곳이 바로 이 에너지장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이곳은 죽을 때 혼이 가는 곳이고, 잠을 잘 때 꿈꾸는 곳이며, 의식의 고향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물건 사이의 공간을 보면서 비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에너지장이 존재한다. 고전적 원자 모델에서 원자핵과 첫 번째 궤도를 도는 전자 사이의 공간을 생각하든, 별과 별 사이 혹은 은하계 사이의 텅 비어 보이는 광대한 거리를 생각하든, 공간의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무 안에, 에너지장이 있다.
고대의 전통에 따르면, 이 에너지장은 세상 만물을 서로 연결할 뿐 아니라 일종의 거울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경험을 비추는 외적인 거울이다. 에너지장은 반짝이면서 맥동하는 살아 있는 실체로서, 온갖 종류의 메커니즘에 피드백을 한다. 에너지장을 통해, 우주 만물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과 생각을 우리의 관계, 일, 건강의 형태로 반영한다. 우리는 그 거울 속에서 우리의 진짜 믿음을, 우리가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진짜 믿음의 속내를 볼 수 있다.
‘신의 마음의 장The Field of God’s Mind’은 정확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외형을 그림으로 그리듯 우리 내부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기도는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티베트의 주지 스님은 말했다. 이는 위대한 아메리카 인디언 스승들의 가르침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전통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마음이 이해하는 언어는 감정이다.
에너지장은 우리의 감정을 특징적으로 삶의 경험에 투영할 뿐이다. 《에세네 평화의 복음The Essene Gospel of Peace》은 이렇게 전한다.
“나의 아이들아, 이 땅과 그 안의 모든 만물은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의 왕국을 비추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느냐?”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가 떨어진 곳에서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우리가 가끔 무의식적으로 일으키는 생각과 느낌, 감정, 믿음은 삶의 청사진이 되는 에너지장에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고대인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언급했다. 이 같은 심오한 지혜에 따르면, 우리의 건강과 평화에 대한 책임은 ‘우연한 사건’과 ‘악운’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변화하는 우주의 일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우주의 미세한 조각이다.”
휠러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의식이 바로 창조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그 끝을 찾을 때, 혹은 양자 세계를 들여다볼 때, 들여다보는 우리의 행위 자체가 우리가 보는 곳에 무엇인가를 가져다놓는다. 무엇인가를 보게 되리라는 인식과 기대감이, 다시 말해 무엇인가 볼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바로 창조 행위이다. 바라보는 동안 무엇을 창조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질이 결정한다.
우리가 소외감과 분노,상처,미움의 렌즈를 통해 우리의 몸과 세상을 바라보면, 양자의 거울은 부정적인 감정을 우리의 가족에게는 불화로, 우리의 몸에는 질병으로, 국가 간에는 전쟁으로 투사한다.
기도가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면, 인생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축복을 스스로 부인하는 행위인 셈이다. 반면에 우리가 일체감과 감사, 지혜, 사랑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이런 긍정적인 감정들은 사랑이 가득하고 서로를 아끼는 가정과 사회로, 국가 간의 협조로 투영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만물의 바탕에는 우리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유연한 본질, 그‘무엇’이 존재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먼저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야 한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가슴으로도 실제로 느낀다면,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
화는 항상 존재하며 어딘가에 실재한다. 건강과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항상 어딘가에 존재하게 마련이다. 즉, 삶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항상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갈고닦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더 큰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린다.
이와 관련한 과학 연구들은, 일련의 사람들이 명상과 기도로 긴장을 풀면 이들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미친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마음속 깊이 어떤 믿음을 품고 있느냐가 외부 세상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질병의 치유, 국가 간의 평화, 일과 인간관계의 성공에서부터 결혼의 실패, 가정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은 우리가 스스로 인생의 경험에 부여한 의미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기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고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지혜는 우리의 상황을 개선하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상과 우리의 몸이 우리의 생각, 느낌, 감정, 믿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대한 중요성을 띤다.
세상이라는 거울이 긍정적이고 생명 친화적이며 지속 가능한 변화의 영상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울에 그럴 만한 비출 거리를 주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모든 창조물을 하나 되게 하는 ‘신의 마음’과 기도의 언어 사이의 미묘하지만 강력한 관계가 있다. 우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우리 입맛에 맞게 바꾸려는 시도가 아니라 감정에 기반한 기도이다. 우리가 유연해지면, 세상은 자연히 개선된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게 된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이런 통찰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기도는 신을 변화시키지 않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신의 마음’이라는 영적 거울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 감정, 믿음을 통해 우리가 되어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되비춘다. 따라서 살아가면서 겉으로 행하는 것보다 행하는 것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미묘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영적 거울을 알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큰도움이 된다. 우리가 영화나 대중매체, 세상에서 목격하는 것들은 우리가 과거에 가정과 공동체에 씨앗을 뿌리고 키워놓은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직면한 상황에서 목격되는 사랑과 연민, 헌신이 발휘된 감동적인 사례들도 단순히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부 사람들의 행위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상처 너머를 바라보는 방법을 발견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최선을 반영한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인식, 그것이 진실이라면, 파괴의 현장이 믿음의 반영인 것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현장 또한 믿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싶어 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원들인 셈이다. 열쇠는 변화의 언어를 깨닫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