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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벧엘교회 구요셉목사님
‘행위 구원론은 이단인가? 진짜 이단은 따로 있다’란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가끔 가다가 제가 그리스도인들은 행위가 바라야 된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이 행위 구원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위 구원론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섣부른 지식으로 남을 논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다음과 같은 댓글을 보면서 성도님들이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느끼기에 이 부분을 정립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정동수 목사님의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연구 존중하고 공부도 많이 되었습니다만 예수님만 영접하면 구원은 확정된 거라고 말씀하는 부분에서 지금까지도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처음에 저도 감리교단의 교회를 다니면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설교를 들었지만 제가 스스로 성경을 읽어 보면 구원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신앙생활이 갑자기 어려운 느낌을 받았고 의아해졌거든요. 그러다가 몇 년 전 구요셉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구원은 확정된 게 아니라기에 믿음을 지켜야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를 듣다 보면 구원받고 휴거되기 위해서는 행위도 바르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거든요. 이러면 행위구원론에 해당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좀 어지럽네요. 하지만 확실한 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논리는 절대 아니다라는 겁니다. 지난 설교 때 말씀하셨던 지금이 사사기 시대와 같다고 하신 말씀에 많이 동감합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도 구원과 휴거에 관해 의견이 너무 분분하네요."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으로 가톨릭에서 벗어나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까? 그 당시 로마 카톨릭은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 헌금을 하면 지옥에 있던 부모 형제 일가 친척이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있다’로 확정한 것은 아니나 ‘있을 것이다’라는 여지를 두고서 면죄부를 판 것입니다. 이는 헌금을 강요한 행위입니다. 헌금으로 구원받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헌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박이 개신교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데 어떻게 면죄부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느냐고 반박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내세운 것은 면죄부로 구원을 받는 행위를 반박한 것인데 이 행위라는 단어를 잘못 받아들여서 모든 행위로 받아들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헬라적 사고방식, 곧 분석하고 단어 중심 해석이 이런 오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서 믿음은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뜻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 확고부동함, 진리, 성실, 충성입니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쓰는 믿음이란 단어는 보통 마음으로 믿어준다는 뜻, 보통 신의란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시대의 히브리어 믿음이란 단어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신뢰, 성실, 그리고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래 아니면 예수를 부인할래 하더라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뜻임에도 헬라식으로, 단어로 분류하다 보니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을 그렇게 해석해 버린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 위해 바울이 말하는 당시의 믿음이란 용어가 실제로 헬라식 용어가 아닌 히브리식 용어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행위 구원론이란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실제 행위 구원론을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말하는지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면죄부에 헌금을 하는 행위를 부정하기 위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5절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계속 주기도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만큼 주기도문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곧 말씀의 양식을 먹어야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배경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시험을 받습니다. 놀랍게도 구약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했던 사건과 동일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세의 40일 금식 사건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의 그림자입니다. 처음에 모세가 40일 금식을 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이 들었으니, 너는 빨리 내려가서 시험 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라 말씀합니다. 모세는 급히 내려가서 십계명 두 돌을 던져버립니다. 그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가 깨져버렸다는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스스로 깼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너희가, 너는 나의 아내로서 혼인 언약을 맺었건만 너희가 그 언약을 깨버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예레미야서에 말씀하십니다. 다시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다시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아서 내려옵니다. 이를 예레미야서에서는 나와 맺을 새 언약은 너희 마음 판에 새길 것이라 하였습니다. 모세의 40일 금식 이후 백성들에게 닥친 시험처럼 예수님도 40일 금식 후 시험이 왔지만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는 4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시험에 들 수 밖에 없으니,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성령님의 은혜로 시험을 이기고, 이길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는 성령님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 내게 오셔서 이길 수 있게 이끌어달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시험에 들지 않고 이기셨습니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통해 용서해야 시험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행위입니다. 그냥 용서가 안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기도함으로써 형제를, 이웃을,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은 십계명의 언약을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온전케 하러 왔노라 하신 대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6장은 어떻게 기도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너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기도의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교회가 기도의 양만 자꾸 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양은 많은데 방법대로 하지 않다 보니까 헛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계속 말씀드리는 것은 이 주기도문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이해하고 기도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됩니다.
6장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면 7장은 너희가 어떻게 행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살아야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됩니다. 6장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지침서고, 7장은 그것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말씀 따라 내 마음을 고쳐 먹겠다는 기도입니다. 7장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은 너희는 잘못된 목자를 삼가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산상수훈을 주신 이유와 목적은, 내가 시험을 이겼으므로 너희도 시험을 이기고,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부터 6절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예수님이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비판하지 말라’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말씀 안에서 기도하다 보면은 누가 보입니까? 옆에 남편 보입니다. 그리고 누가 보입니까? 옆에 같은 교인이 보입니다. 자녀가 보입니다. 우리는 자꾸 옆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뭡니까? 배드로가 말했습니다. 은혜받은 그 순간에도 옆 사람을 생각합니다.(요 21: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런 습관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자꾸 비교하려고 합니다. 비교하다가 범죄하게 됐습니다. 하와가 가장 먼저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보지도 말라고 했다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여기서 범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 속에는 악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옆 사람을 보고 비판하게 돼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특히 말씀 따라 살려고 하고 말씀 따라 기도하면서 나 자신을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려고 하는데도, 자꾸 내가 주님 앞에 더 나아가게 됩니까? 아니면 옆 사람이 자꾸 보입니까? 옆 사람이 보입니다. 옆 사람을 보다 보니 내가 예수를 놓치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 그러다 예수 놓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옆 친구한테 잘해주며, 우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잘 통한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배신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잊어집니까? 안 잊어집니까? 안 잊어집니다. 그 안 잊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는 누구를 놓칩니까? 예수를 놓칩니다. 그래서 특히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일수록 충격이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옆 사람을 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들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포인트는 바로 이들이 외식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점검하라, 예수님은 계속 너와 나의 관계를 살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옆 사람이 잘못됐다고 합니다. 옆 사람을 비판하면 누가 의인되는 것입니까? 내가 의인 됩니다. 주님은 나도 모르게 의인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죄인 되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비판자가 되었다가는 의인되고, 예수의 사랑에서 벗어나니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대접해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5, 6절 말씀이 연결돼서 이해가 됩니까? 쌩뚱맞은 말 같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5장으로 가면 이해가 됩니다.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까지 가고,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들이밀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한 말씀입니까? 부당한 일을 하는 자, 원수, 강압적인 자, 열불이 일어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침략당해서 국가가 없던 시대고, 피지배 국가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겠습니까?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울분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걸 아시니까 미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성도들에게 혹시 이런 것 때문에 구원을 못 받을까 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장 6장 7장은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비판하고 판단하다가는 큰일 난다고 너희 믿음이 떨어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개돼지니,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인권을 짓밟고 남의 재물을 약탈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 것을 강탈하는 자들, 그들은 개돼지라 하십니다. 개돼지를 보고 왜 분노하고 비판하고 판단하여, 너의 거룩한 것을 빼앗기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입니다. 그들 바라보다가 분노하다, 예수 뺏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주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너희 진주를 돼지가 짓밟게 두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돼지는 마음 속에 있는 악입니다. 너희 마음속에 있는 악에게 짓밟혀 구원 못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얘기하신 것입니까? 비판당하는 그 대상자입니까? 나입니까? 여러분들 성도분들 구원 못 받을까 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음속에 분노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그것 때문에, 그걸 통해 구원을 못 받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개돼지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예수를 향한 그 사랑을 뺏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 뺏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대했음에도,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면 신경을 끄라는 것입니다. 신경 끄고 너는 예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상대가 회개하면 감사하지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예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치에 너무 관심을 갖게되면 비판과 판단 때문에 예수를 떠나게 되니 그래서 너무 관심두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부터 12절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저는 계속 헬라식 문법이나 헬라식 성경을 보는 방식이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계속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는 말씀 때문에 저도 어릴 때부터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 봤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못받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이 말씀이 뭔가 싶은데 목사님들은 계속 기도의 양이 적어서 그렇다, 하나님과의 기도줄이 끊어져서 그렇다. 그래서 더 하나님께 간구하고 어디서 끊어졌는지 봐라하며 어떤 목사님은 헌금을 더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별 말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단점 없는 사람 있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말씀 이대로의 뜻이라면 예수님은 준다고 해놓고 하나도 안 주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문장만 끊어서 성경을 보는 것이 헬라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12절이 결론입니다. 결론은 보지 않고 중간만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므로가 있습니다. 곧 내가 구원을 받고자 하면 남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자 하면 너도 남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주기도문과 같습니다. 내가 용서할 때 나도 너를 용서할 것이다. ‘너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곧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인데, 하나님과 나와 맺었지만, 옆 사람과 이웃과 형제와 또 원수에게도 너희는 언약을 지켜야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와 용서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고 남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부터 14절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고자 하여도 들어가지 못한 자가 많다고 쓰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에 들어가려고 해도, 구원을 받으려고 해도 구원받기가 어렵다고 정확히 적혀 있습니다. 왜 자꾸 구원이 쉽다고 이야기합니까?
구원은 어렵습니다. 좁은 문입니다. 그럼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이기도 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정리하면, 5장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여 마음속으로 죄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그리고 세상에 빛과 소금 된 삶을 살아라 그리고 5장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기도하며 늘 너희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7장 말씀은 이웃을 보고 판단하고 비판하다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살도록 노력합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말은 문제가 있어도 너무 많습니다. 성경으로 보면 틀린 말입니다. 또한 좁은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 따라갑시다. 사도바울의 말씀이 맞다고 하면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며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큰일 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가 행위 구원론자인가요? 말씀을 보니 예수님이 행위 구원론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단인 것인가요?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여주여 한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예수님의 뜻대로 어떻게 행하면 구원받는가지 나와있습니다. 5장에서 십계명 언약을 정확히 설명해 주셨고, 6장은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하며,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기도할 때 내가 다 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좋은 것을 주시는데 좋은 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를 얻어야,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너희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다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반드시 구원받읍시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듯이, 예수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신 말씀으로, 이 말씀을 명심하면 너희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행위 구원론이라고 말하는 비판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 믿읍시다.
로마서 1장 17절에 말씀하였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바울은 어떤 의미로 한 것인지 보겠습니다. 바울 서신은 히브리식 사고방식으로 쓴 편지입니다. 분석적 방법으로 쓴 논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구약시대의 제사, 제례의식을 얘기할 때도 있고, 어떤 경우는 가르침이라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래서 법이란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법이 아니라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는 율법은 십계명 언약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어떤 때는 율법을 십계명의 언약을 가리켜 말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이 율법이 바로 구약에 있는 제사법이나 구약에 있는 그런 형식적인 것들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한단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는 분석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당시의 사회관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니 율법을 하나의 틀 속에 집어넣어 버린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절부터 8절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으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는 헬라식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용어를 히브리식 사고방식으로 살펴야합니다. 진짜 믿는다는 것은 끝까지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시인했다면 끝까지 시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남을 판단하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 정죄를 받는다고 하십니다. 즉 남을 판단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행한 행위로 심판은 받되 구원을 받는다고 헬라식 논법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학문처럼 따지다보면 엉터리가 됩니다. 내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바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 또한 남이 내게 어떤 잘못을 했어도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까?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그들이 개 돼지 같은 놈인 건 나도 안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신경쓰지 말고 나 예수께 집중하라, 너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뺏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이 회개한 마음입니다. 입술로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미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6절 ‘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십니다. 바울이 믿음을 말하면서 행한대로 보응하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도 행위구원론자입니까? 그래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변치않는다는 것이 믿음이고, 회개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 말씀 따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응하십니까? 7절 말씀처럼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하십니다. 영생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참고 선을 행하고 영생을 구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신 말씀처럼, 구원을 구하고 예수를 찾는 것, 늘 마음속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당을 짓고 진리를 쫓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이런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 이렇게 회개하지 않은 마음으로 분해서 못 살고, 억울해서 못 살고, 짜증 나서 못 살고, 이렇게 마음이 우울하고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라면 예수께로 돌이켜야합니다. 예수께 모든 짐들을 맡겨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님이 바꾸어 주십니다. 내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라, 너희에게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바울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똑 같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부터 22절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바울이 뭘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말했던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위입니까? 율법의 행위입니까? 왜 율법은 빼고 행위만 말하는지, 행위가 아닌 율법 행위입니다. 행위 구원이라 판단하는 사람들이 율법이란 말 빼고 행위만 따와서 주장을 합니다. 말씀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의 행위, 곧 믿음의 증거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의 과정 중에서 무조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가 죽은, 예수님의 한편 강도는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회개하지만 자꾸 죄를 짓게 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전부 다 잘했으면 하나님이 괜히 바울에게 병을 주었겠습니까? 왜 병을 주셨겠습니까? 너무 자기가 의롭고 잘 나가니까 믿음을 잘 지키니까 하나님이 높아질까 봐, 마음속으로 죄를 지을까 봐 바울에게 병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늘 그렇게 죄를 짓지만 예수께 나아오고 나를 주께 맡기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말씀 따라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예수 안에 거해야 구원받습니다. 구원받고 안 받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걸 깨닫고 예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 나오면 너희의 그 나오는 믿음으로 내가 너희를 살리겠다는 것이 성경의 전체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니 구원받았다는 고백에 절대 구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놓치게 됩니다. 죄를 짓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포인트는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30절부터 31절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이 폐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온전해졌습니다. 바울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폐해진 것이 아니고 굳게 세워졌습니다. 율법은 십계명 언약입니다. 율법이란 똑같은 단어를 쓰지만 뜻이 틀립니다. 이것을 분별해서 알아야 헷갈리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정확히 바울이 말했던 행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헷갈린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니까 구약에 있는 것들, 십계명이 폐지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보니 율법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 굳게 세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이 율법의 행위가 뭔지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부터 21절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1절에서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십계명 언약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용어는 가르침, 구약의 십계명, 구약의 제사법 등의 의미가 있으므로 맥락을 통해 그 뜻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4장을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부터 12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너희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합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절기와 제사법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해졌기 때문에 폐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기와 제사법이 율법의 행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절부터 6절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또한 바울은 할례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못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로 인하여 이런 율법의 행위는 폐해졌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였고, 굳게 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언약이 온전하여진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의 소망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것입니다. 즉 율법의 행위, 곧 구약에 있던 제사법이나 할례 같은 형식적인 것들은 폐해졌고 이제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제사나 할례가 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의 그림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사라졌고 실체가 나타나셨다 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1절부터 15절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지금 바울은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받는 행위나 날과 절기를 지키는 행위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십자가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받은 자유는 십자가의 은혜로 받은 것인데, 바로 죄로부터, 멸망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았는데, 그 자유로 무엇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까?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므로 할렐루야! 나는 마음껏 생활하고 이 자유를 누리겠다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는 나쁜 놈입니다. 또한 나는 구원받았고, 저 이방인은 나쁜 놈이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낮은 자 되어라. 우리 낮은 자로 섬깁시다. 온 율법 온 계명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따라 우리도 사랑하고 용서합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미워하고 싸우고 다투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구원받지 못한다고 정확히 적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18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과 육체는 서로 싸웁니다. 네 마음속에 있는 악은 너를 자꾸 육체로 인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성령을 통해 네 마음 속의 악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 따라 기도해야 되고, 그리고 그 기도한 대로 행하여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나니’ 성령은 육체와 서로 대적하여 싸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라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에서 나를 건져낼까 내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악이 나와서 분내고 미워하고 다투려 하고 한마디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기도로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악이 나오니 내 속의 악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데 누가 감히 자기가 선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너희 속에 있는 육체의 것과 싸우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것은 죄를 짓는 걸 좋아하니 성령을 통하여 싸우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부터 23절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법은 사랑과 그 다음에 희락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근심이 있습니까?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 근심을 가져갈 줄 믿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삶속에서, 근심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화평도, 오래 참음도, 자비도, 그리고 늘 의롭게, 좋게 생각하는 양선, 그리고 주님께 충성하는 것, 온유와 절제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부터 26절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바울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진짜 믿는다면 너희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라. 그리고 그대로 행하여 살아라. 이것이 믿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입니까?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행위 구원론이란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고백에 구원이 있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헬라식 용법입니다. 로마서를 봤더니 바울은 믿는다면 너희가 율법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정말 너희가 진짜 회개한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즉 죄짓기를 원하는 마음과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 선언하는 것입니다. 정은 인간적인 정입니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해 줬는데 당신은 나를 미워합니까? 너무 힘듭니다. 나는 잘해주는데, 상대는 내 욕을 하고 다닙니다. 이럴 때 분이 납니다. 안 나는게 이상합니다. 이게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정은 영어로 어펙션(affection:애착)이고, 욕심은 러스트(lust:색욕, 욕망)로 돼 있습니다. 우리가 애착을 갖는 것들 때문에 까딱 잘못하면 지옥갑니다. 남편, 자식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여, 형제를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지만 그들 때문에 내가 분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나의 욕심과 욕망대로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욕심대로 기도하면 큰일 납니다. 멸망 당합니다. 예수님 뜻대로 기도합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지 맙시다. 말씀 안에 거하며 진짜 믿음대로 삽시다. 진짜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십자가로만 구원받으며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 이웃을 사랑하며 용서하며 사는 것,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잃지 맙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예수님 만납시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성경 말씀에 나와 있는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의 뜻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짜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함께 말씀으로 배웠습니다. 이 말씀 명심하여 사는 우리 되게 아버지 이끌어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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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