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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바깥에서 또 다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바깥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밤은 참 귀한 밤인가 보군요. 연달아 손님들이 찾아오시니.”
조영이 중얼거리며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어보니 밖에 짙게 깔린 흑암을 등불들이 간신히 어거하고 있는데, 바람만 간간이 불어 서늘함을 느끼게 했다.
조영은 몸을 움츠리며 대문 밖으로 나서다 깜짝 놀랐다. 어림잡아 이십여 기의 무후군들이 말을 탄 채 대문 밖에 멀찍이 정렬해 있는 모습을 넉넉히 식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손에 횃불과 등불 등을 들고 서 있었다. 맨 앞에는 얼굴이 선하게 생긴 삼십여 세의 장수가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장군, 안녕하시오?”
무후군의 장수가 먼저 머리를 숙이며 겸손하게 조영에게 인사했다.
“아, 이게 누굽니까? 무후군의 무유서 장군이 아니시오?”
“그렇습니다.”
무유서는 성품이 온후하고 청렴결백하며 기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민한 사람이었다. 조영도 그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무유서는 조영이 연치가 낮은 약관弱冠의 고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영을 매우 겸허하고 정중하게 대했었다.
“아니, 이 저녁에 웬일입니까? 이렇게 무장하고 군사를 거느린 채 여기까지 오시다니.”
“아, 폐하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여기에 귀한 손님이 가셨다며, 날이 기울고 밤이 깜깜해서 귀빈을 잘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오, 그러셨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군사들과 함께 몸 좀 녹이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들고 가십시오.”
“아닙니다.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근무 중이라 급히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처 마님을 모시러 온 게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유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여기에 계신 고 장군도 모시고 오라고 이르셨습니다. 혹시 다른 어떤 손님이 계신다면 그 분들까지 모셔오라는 폐하의 전갈입니다.”
“오, 그래요? 혹시 무슨 연유인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전혀 모릅니다. 단지 지금 즉시 다들 모셔오라는 명령만 받고 왔을 따름입니다.”
“그럼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겠습니다.”
조영은 의문을 잔뜩 안고 불안한 가슴으로 방안으로 들어와 무유서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실내의 선남선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 때 여미아가 극시아를 흘낏 돌아본 후 입을 열었다.
“공자님, 아무래도 제 마음이 불유쾌하고 뭔가가 수상합니다.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임금이신 구세주 예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밤바람이 마당을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간다.
무유서는 어처 극시아를 자기 말에 오르게 한 후, 세 명의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이루하, 여미아를 대신 태웠다.
맨 앞에서 한 기병이 횃불을 들고 길을 선도하고 그 뒤에서는 무후군 장수 무유서가 친히 말고삐를 잡고 극시아를 인도했으며, 조영과 이해고 역시 말을 타고 그들을 따랐다. 이어서 이루하, 여미아를 태운 말들과 다른 기병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후 그들은 남궁에 도착했다. 자신전으로 가니, 아직 무 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유서가 이해고, 이루하, 여미아, 극시아, 조영을 인솔하고 들어가 무 태후에게 복명한다.
“늦은 저녁에 불러서 미안하오. 거기 편히들 앉게나.”
무 태후는 다섯 사람을 자리에 앉힌 후 물었다.
“다섯 사람은 평소 친분이 깊은가요?”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해고가 대답했다.
무 태후는 조영을 제외한 네 사람에게 조영의 집에 금일 몇 시쯤에 갔었는지 일일이 확인한 후 하문했다.
“그대들은 조영의 집에서 주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가?”
“폐하, 금년 봄에 폐하께서 소인의 조부로부터 고려왕가 전래의 청동단검을 받으셨던 일, 기억하실 것이옵니다.그 단검의 검 집에 새겨진 숫자에 관해 주로 대화를 나누었사옵니다.”
“내 그대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노파심으로 말하는데, 혹시나 다른 불순한 얘기들은 없었겠지?”
“물론이옵니다.”
“요새는 역모를 꾀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지라, 그대들처럼 중화인中華人이 아닌 이인夷人들은 언행에 특별히 조심해야 하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이해고와 고조영이 동시에 대답했다.
무 태후는 표정의 변화 없이 조영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말했다.
“청동단검의 검집에 새겨진 숫자에 대해서는 나도 궁금하네. 그 얘기를 좀 들을 수 없을까?”
“폐하, 단시간에 얘기할 수 없는 긴 사건들이 거기에 얽혀 있사옵니다.”
“나도 긴 얘기를 좋아한다네. 그대들 젊은이들과 함께라면 사흘 밤낮이라도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네. 어떤가? 내가 날을 잡을 테니. 나에게도 좀 들려줄 수 있는가?”
“폐하, 그 이야기를 소인은 잘 모르옵고, 여기 있는 이루하 아가씨의 비자 여미아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듯하옵니다.”
조영이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무 태후는 여미아를 눈여겨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를 아마 두어 번 보았지? 처음은, 봄에 있었던 무술대회 후의 만찬석에서, 그리고 그 다음은 고려여관 살인 사건 심문 현장에서 보지 않았나?”
\여미아는 무 태후의 예리한 눈과 탁월한 기억력에 속으로 움찔 놀라며 대답했다.
“폐하, 폐하께서 잘 보셨사옵니다.”
“그대는 내가 일찍이 보지 못한 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군. 내가 몹시 샘날 정도야. 사비四妃나 구빈九嬪, 이십칠세부二十七世婦, 팔십일어처八十一御妻를 비롯해 어떤 궁녀 가운데서도 그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보지 못했네.”
여미아가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으나 무 태후는 그녀를 극구 상찬하며 결코 그녀에게 낮은 언사를 쓰지 않았다.
“그대는 이리 좀 가까이 와 보게.”
무태후의 명에 여미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무 태후가 내시에게 명했다.
“저 여인을 휘장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오.”
무 태후와 그녀의 알현인들 사이에는 여느 때처럼 엷은 자색 휘장이 드리워져 양측을 격하고 있었다. 이는 무태후 자신이 여인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실은 자신의 황권에 신비성과 권위를 더하기 위한 조처였다.
내시가 여미아를 인도해 휘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미아가 무 태후의 코앞에 섰다.
무 태후는 여미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여미아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그녀를 바라다본다. 무 태후가 보니 여미아의 눈썹과 눈망울이 맑은 샘물처럼 투명하면서도 깊은 지혜를 담은 듯 그윽하고, 또한 칼날처럼 번득이는 어떤 예리하고 현묘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천하절색, 경국지색이라는 말을 내가 믿지 않았는데, 오늘 그대를 보고 믿게 되었네. 그대의 눈이 한 번 흘기면, 쇠로 된 심장, 구리로 만든 간담이라도 녹을 것 같군.”
무 태후는 여미아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연신 감탄해마지 않다가 한 마디 부언했다.
“잘못 처신하면 한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을 천하의 요물이 될 수 있겠어.”
무 태후는 혼잣말 비슷한 것을 내뱉고, 한참이나 여미아를 훑어보며 무언가를 묵묵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그녀를 제자리로 돌려보낸 후 내시에게 명했다.
“내일 오후 일찍 신정시申正時(오후4시)까지 이 사람들을 모두 내 침전인 장생전으로 모으시오. 이다조 장군의 두 아우 우림군 장수 이기원, 고려여관 관주館主 이기창, 그리고 천남생의 아들 천헌성, 그리고 누구냐, 거 송막도독 이진충의 수하 장수 사비우, 조문홰의 장수 서연까지 오게 하시오.”
총명한 무 태후는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일일이 지적한 다음, 조영 일행을 데려온 무유서에게 별도로 명했다.
“무유서 장군이 일행을 인솔해서 장생전으로 데려오게.”
무 태후는 어처 극시아만을 남겨놓고 모두 귀가시켰다. 내시까지도 곁에서 물러가게 하고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극시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극시아가 다가가자 무 태후가 속삭였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의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이야기해라.”
극시아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태후마마, 송구하옵니다. 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그럼, 실패했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그는 정말로 목석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잘 들어라. 네가 이 일에 성공하기만 하면, 내가 너를 구빈九嬪의 품계 중 하나로 올려주겠다는 약속은 빈말이 아니다.”
구빈은 황제의 후궁들 중 둘째 품계로서, 정이품이다. 극시아는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최하위인 팔십일 명의 어처御妻 속에서도 위상이 가장 낮은 정팔품의 수녀綏女였으니, 그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예우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
“내가 너에게 세 달이라는 시한을 주마. 그 안에 성공한다면,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약속은 무효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마마.”
당시 황제는 스물다섯 살의 예종睿宗 이단李旦이었으나 실권은 무태후가 지니고 있었고, 이단은 유명무실한 임금이었다. 나라 안팎의 모든 정사는 무태후가 직접 처리했으니, 그녀의 아들 이단은 그녀의 추상같은 권력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 무렵 당나라 궁내 여인들의 법도는 그리 바르지 못하고 문란한 경우가 많았다. 조금 훗날의 일이지만, 황후가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는가 하면, 황제의 후궁들과 외간남자의 통정 사건은 외부에 알려질 정도로 쉽게 발생했다.
황제의 후궁 이십칠 세부 가운데, 정삼품의 품계인 첩여婕妤가 있다. 무 태후에게 총애를 받았던 상관완아라는 여인은 중종 때 중종의 후궁으로서 첩여이자 여류시인이었는데, 전술했듯이 그녀는 이 면에서 행실이 좋지 않기로 소문나 있었지만, 나중에 구빈의 직위인 소용昭容으로 승진하기까지 한다.
측천무후의 치세 직후인 중종 때에 상관완아를 비롯한 황제의 후궁들은 대다수가 궁궐 밖에 사적인 저택을 건축하고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자신의 사교장이나 은밀한 관직거래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자치통감>.
궁내 여인들의 이런 문란한 풍기는 사실, 무 태후가 심었다고 해도 과히 빗나간 말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정치적 수완을 좋게 평가하는 엉뚱한 사가들도 있지만, 그녀가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짓들을 수없이 많이 저지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무 태후는 어찌해서 후궁 극시아와 조영 사이에 불륜을 맺으려 획책했을까? 극시아는 그 이유를 뻔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불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조영을 협박하고 위협해 조영을 자신의 남총男寵으로 삼기 위해서일 터다. 극시아는 겉으로 무 태후를 몹시 존경하는 척하며 공손했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맘껏 욕하고 있었다.
‘이 늙은 여우야.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나를 이용해 먹고 나는 죽인 후, 조영은 자기 남총으로 삼으려 하는 거지? 아까, 네 눈초리를 보니 조영에게 아주 홀딱 반했더구나. 으이구, 나이 값이나 해라. 꼬리 아홉 달린 이 구미호 할망구야!’
무 태후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 걸핏하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도륙했다. 무 태후의 치세는 피의 잔치 시대다. 극시아의 예측이 결코 서투르거나 비현실적인 게 아니었다.
그 때 무 태후의 음성이 극시아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너를 믿는다. 지금부터 너에게 하시라도 궁 밖에 출입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네 지혜를 다해라. 알겠느냐?”
“네, 폐하, 반드시 성공해 은혜에 보답하겠사옵니다.”
무 태후는 극시아를 더욱 가까이 오게 해서, 품속에서 비단에 싼 선물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네었다.
“넌, 내일 모일 때 내가 자리 안배를 잘 할 터이니, 어떤 수를 쓰더라도 고조영의 마음을 사로잡고 혼백을 빼앗아라. 알겠느냐?”
참으로 힘겹고 무거운 명이었다.
극시아는 무 태후에게 인사한 후 자신전을 나오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 늙은 여우에게 약속한대로, 난 반드시 그 일을 해낼 것이다. 하지만 완수한 그 날은, 내가 조영과 함께 멀리 고려로 달아난 후일 것이다.’
무 태후가 조영을 그녀의 치마폭에 넣고자 이토록 집념을 불태운 일은 어설픈 남녀애정의 시각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만, 사실 거기에는 정치적 속셈이 더욱 깊이 깔려있었다고 우리가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당나라 이씨 황가의 정권을 찬탈하려고 자신의 계획을 하나하나 진행시키고 있던 무 태후는, 자기 친족인 무씨들을 요직에 두루 앉히는 한편, 온갖 구실을 붙여 황실의 종친들인 이씨들을 관직에서 밀어내고 귀양 보내거나 죽였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역시 역모사건과 그녀 신변의 안전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씨 황가와 그들의 일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씨 황가의 끄나풀일지도 모를 중화 귀족의 젊은이들보다, 당나라에 귀순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당나라에 어느 정도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타국의 기백있는 무사들을, 자기 치마폭 속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나아가, 나중에는 그들을 적당히 키운 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으로 골칫거리 주변 나라들을 제어하는데도 그들을 십이분 활용하는 것이, 천하의 여걸 무 태후의 원대한 심려였는지도 모른다.
당에 귀순한 이방의 인물들 가운데 단연 두드러지게 활약한 이가, 백제의 명장 흑치상지와 고려의 말갈계 장수 이다조, 고려 연개소문의 손자 연헌성 등이다. 이들이 대당大唐을 위해 다른 외족들을 방어하는데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던가.
무 태후 자신의 정권이 연연세세 반석 위에 서기 위해서는 중화 내부의 안정뿐만 아니라, 동이북적 서융남만 등 외족에 대한 방어가 필수적이었으니, 그녀가 그것까지 염두에 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해고나 사비우, 고조영, 연헌성, 중화인이 된 이기원 등은 모두 동북방 민족 출신의 젊은이들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측천여황(무태후)의 주周나라 치세(690-705)에 이들 중 일부가 당나라(주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그들에 의해 사실상 당나라가 심대한 타격과 유린을 당하게 되고 북방의 거란, 동북방 고려(대진발해) 등의 운명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무 태후가 수단방법을 다해 이들을 포섭하려 한 것은, 그녀의 선견지명에 기인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니면, 그녀가 호랑이를 키워 산으로 내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해고와 사비우는 벌써 포섭 당했으나, 오로지 골칫덩이 고조영만은 무 태후의 자력磁力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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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3. 15.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