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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라시 카즈오
(재)합기회 합기도 이가라시 도장 도장장
고바야시 합기도 연합회 지도부 사범
메이지 대학 체육회 합기도부 감독
도쿄도 하치오지시 합기도 연맹 회장
스웨덴, 핀란드 합기회 사범
중화민국 합기도 추광 훈련 협진회 기술고문
캐나다 캘거리 합기회 사범
오스트레일리아 퍼스아이 합기회 사범
그리스 아테네 황무관 도장 사범
천진정전 가토리신토류 교사
1946년 3월 24일 니이가타에서 출생
1961년 4월 가나가와 현립 츠루미 고교 입학, 유도부에 소속
1964년 4월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 입학, 합기도부에 소속
1973년 1월 합기도 고바야시 도장에 내제자로 입문, 내제자 수행을 하면서 지도
1978년~1979년 스웨덴, 핀란드 양국 합기회의 초청을 받아 두 나라에 머무르며 지도
1984년 2월 가나가와 현 사가미하라 시 하시모토에 <합기도 하시모토 도장>을 개설
2000년 1월 합기도 7단
합기뉴스 2000년 126호(가을호)에서 발췌
스승과 함께, 친구와 함께
인생을 합기도에 걸고
이가라시 카즈오 7단 회견
가나가와 현 사가미하라 시 하시모토에 있는 <합기도 하시모토 도장>
주택가 안에 있는 이 도장에는 날마다 많은 회원이 모여 땀을 흘리고 있다.
이 회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지도하는 것은 이가라시 카즈오 7단.
고바야시 야스오 사범의 제자로서 연찬을 쌓고
현재는 해마다 해외지도를 나가고 있다.
그런 이가라시 사범에게 지금까지의 합기도 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모든 일에 소극적이었던 어린 시절
- 이가라시 선생님은 학생시절부터 고바야시 야스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바야시 도장의 지도원을 하셨는데
원래는 니이가타 출신이시죠.
이가라시 - 네, 니아가타 현 칸바라 군 미카와무라 라는 곳에서 태어나
4살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후쿠시마 현과 경계지역에 가까운 곳이죠.
옆동네인 츠가와는 사이고 시로가 태어난 곳입니다.
제가 태어난 건 1946년 3월입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였죠.
우리집은 아버님이 생명보험회사에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에
어릴 적에는 이사를 자주 다녔습니다.
제가 5살때부터 길어야 2,3년 짧으면 반년 정도만 한 곳에 있기도 했어요.
초등학교 때 3번, 중학교 때도 3번 이사를 해서 그때마다 전학을 다녔지요.
초등학교까지는 니이가타에서 다녔고, 중학교는 홋카이도의 삿포로에서 다녔습니다
눈나라 출신이라 스키를 잘 탈 것 같죠?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죠에츠 시의 다카다에 살았습니다
다카다는 일본에서 스키의 발상지죠.
겨울에 체육시간에는 늘 스키를 신고 산에 올라갔어요.
그 때는 스키를 타려면 스키를 신고서 산 위까지 올라간 다음에 밑으로 타고 내려와야 했지요.
우리 때 신던 스키는 아직 장화스키였기 때문에 그렇게 멋있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어릴 때는 괜찮았지만
자라면서 만날 전학만 다니다 보니 친구도 잘 안 생겼어요.
성격도 소심해지고 낯가림이 심해졌지요.
그래서 중학교 때까지 저는 얌전하고 친구도 별로 없으며 눈에 잘 안 띄는 존재였습니다.
- 무도는 합기도가 아니라 유도를 먼저 시작하셨지요
이가라시 - 요코하마 현립 츠루미 고교에 입학했을 때였지요.
전학을 자주 다닌 덕분에 소심해진 성격을 바꾸고 싶어서 유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진 운동도 별로 안 하고 특히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를 잘 못했어요.
그래서 무도인 유도를 선택한 거지요.
유도는 3년 동안 해서 초단을 땄습니다.
학교 뒤편에 언덕 경사가 심한 현립 미츠이케 공원이 있었는데
훈련 때는 그곳을 달리기도 하고 꽤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저는 체격이 160에 50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시합에는 잘 내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신감이 붙으면서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밝고 적극적으로 바뀌는 등 얻는 것도 있었지요.
유도는 그 나름대로 재미있고 수련도 힘들었지만
합기도 말고 다른 무도를 경험했던 것은 좋았다고 생각해요.
합기도와의 만남
- 대학은 메이지 대학에 들어가셨지요
이가라시 - 네, 1964년 4월에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합기도와 만난 것도 메이지 대학에 들어간 뒤였지요.
나중에 저는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이 아니라
<메이지 대학 합기도부 졸업>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메이지 대학 합기도부는 1955년에 당시 학생이었던 고바야시 선생님이 설립한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저는 합기도 같은 건 알지도 못했어요.
당시엔 아직 별로 인기 없는 무도였죠.
합기도에 대한 책 같은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합기도를 본 것은
공수도부, 소림사권법부, 합기도부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합동으로 열었던 부활동 소개 자리였습니다.
거기에서 본 합기도 연무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지요.
- 당시에 메이지 대학에서 지도하고 있던 분이 젊은 날의 고바야시 선생님이었던 거군요.
이가라시 - 네, 선생님은 당시 저보다 딱 10살 위였고 팔팔한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젊긴 했어도 이미 그 당시에 그다지 거친 수련은 하지 않았어요.
오래된 제자분들의 얘기를 들으면, 더 젊었을 때는 난폭하고 거칠어서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튼 일요일을 빼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2시간씩 꼬박꼬박 수련하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합기도부 활동에서는 상하관계 같은 것도 상당히 엄격했지요.
- 합기도의 어떤 점에 그렇게 끌리셨나요?
이가라시 - 예를 들어 유도에서는 덩치가 큰 사람에게 체격이 작고 힘이 약한 사람이 이기기는 거의 힘듭니다.
하지만 합기도에는 그런 체력적인 차원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있었지요.
저는 보시다시피 체격이 크지 않습니다. 고바야시 선생님도 그렇지요.
고바야시 선생님뿐 아니라 당시의 합기도 선생 분들은 도헤이 고이치 선생님이나
우에시바 깃쇼마루 선생님도 그랬습니다만 모두 체구가 작았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체구의 사람들이 도복을 입으면 커보입니다.
저와 별다를 것 없는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 당당히 활약하고 있다.
그 점이 저에게는 매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도와 달리 시합이 없다는 것도 저와 잘 맞았습니다.
저에게 합기도는 한 마디로 말하면 <재미있었다>는 거지요.
힘을 내는 법, 기를 다루는 법 같은 것도 흥미 깊었습니다.
유도에는 없는 신비성을 합기도에서 느끼고 빠져들었던 거지요.
당시에는 합기도 본부 도장에 가면 여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해외로 나간 선생님들이 그 당시에는 거의 일본에 계셨던 시기였으니까요.
당시에 메이지 대학의 선배이면서 나중에 합기도를 직업으로 삼으신 분 중에
지금은 독일에서 활약중인 아사이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저보다 4기 위라 제가 입학하면서 졸업을 하셨지요.
- 당시엔 아직 큰 선생님(우에시바 모리헤이 창시자)이 살아계셨지요
이가라시 - 네, 수련할 때 몇 번이나 뵈었습니다.
당시에는 젊은 선생님(깃쇼마루 전 도주)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큰 선생님은 뭐 더 말할 것도 없죠. 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분위기도 뭔가 그런 느낌이셨으니까요.
큰 선생님이 오시면 "그만-"이라는 목소리와 함께 '팡팡' 손뼉 치는 소리로
모두 정좌해서 맞이했습니다.
우리 앞에서 큰 선생님은 내제자 분을 던지거나,
뭔가 어려운 말씀을 하고 돌아가셨어요.
- 큰 선생님에게 던져진 적은 있나요?
이가라시 - 없지요. 정말 아깝습니다만 나중에 이렇게 직업으로 할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아니면 억지로라도 손을 잡고 던져졌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큰 선생님의 기술이 어땠냐고요? 입신던지기랑 비슷한데
우리 때에는 상대를 거의 손도 안 대고 펑~ 날려버리셨어요.평소에 우리를 던져버리는 선생님들이 큰 선생님에게 펑펑 나가떨어지고 있으니까 신기했지요.
- 학생시절 합기도부에서 뭔가 또 기억에 남은 일은 있습니까?
이가라시 - 합숙이 기억에 남지요. 합기도의 엄격함과 재미를 맛보았습니다.
수련의 절반은 근육단련과 달리기뿐이었어요.
사람 수가 많아 그만두게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연무대회요? 대학 연무대회에서는 몇 번 진검을 들고 칼빼앗기를 연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납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도저히 무서워서 못하지요.
젊음이란 참 좋은 것같아요.
또 대학 3학년 때부터 합기도 수련이 끝나면
대학 근처 도장에 다니며 거합도와 장도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유도를 비롯해서 저도 여러 무도를 해온 셈입니다만,
다른 무도를 하면 오히려 합기도의 좋은 점을 알게 돼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바야시 도장의 식객이 되다
- 대학을 나오신 후엔 취직을 하셨지요
이가라시 - 네, 기술관계의 출판사에 들어가 편집일을 했습니다.
시대가 60년대 중반이었기에 경제성장의 파도를 타고 일도 빡세져서
합기도하고도 얼마간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본부에 수련하러 가기도 하고
새해맞이 수련엔 안 빠지고 나갔지요.
취직하고 5년 동안은 저도 오로지 일만 했기 때문에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일만 하느라 바빠서 자기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래선 안되겠다, 아직 젊으니 뭔가 다른 걸 해보자고 생각해서
합기도를 본격적으로 다시 해보자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이제 막 생긴 고바야시 선생님의 도코로자와 도장 오픈식 연회 석상에서
고바야시 선생님에게 짐 싸들고 들어가서 수련하겠다고 청했습니다.
- 내제자로군요
이가라시 - 아뇨, 하는 일 없이 밥 얻어 먹는 식객이죠.
5년 동안 일한 덕택에 저축도 할 수 있었고,
놀아도 2년 정도는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어서 고바야시 선생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도코로자와 도장이 생긴 게 1972년 11월입니다만
다음해인 1973년 1월 1일부터 고바야시 선생님 자택이 있는 고다이라 도장에 눌러앉았습니다.
물론 식비와 지도료 등을 선생님께 지불했죠.
요새 내제자 지망생들은 금방 <돈은 얼마나 받을 수 있나요?>라고 묻습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제가 선생님께 지불하는 거죠. 제가 그런 얘기를 하면 <네?>하고 놀랍니다.
얼마동안은 원래 일했던 출판사 쪽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아무 때나 와서 일해도 된다>고 얘기해줘서
낮에 한가할 때는 일을 하고, 저녁 수련 때까지는 돌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제자가 된 1973년에 이소룡 영화가 히트를 쳐서
무도 붐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바야시 선생님도 바빠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에게 <자네 어떡할 텐가, 전문으로 해보지 않겠나?>라고 물으셔서
저도 합기도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전문가가 된다고 해도 이걸로 먹고 살 수 없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침구 학교에 다니기로 했습니다. 3년 다녀서 자격증을 땄지요.
결국 그 자격증을 써먹을 일은 없었습니다만 좋은 공부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급소나 경락 등, 합기도에 통하는 부분이 있지요.
그렇게 지내다가 고바야시 도장이 여기저기 늘어나, 저도 회원들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객생활은 참 재미있었어요. 매일 수련을 마치면 선생님이 먼저 목욕을 하고
그 다음에 제가 목욕을 하고, 선생님과 맥주도 마시고 밥도 먹고 밤 늦게까지 얘기를 했지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고바야시 도장은 숙식제공에 저녁반주도 포함이야"라고 고바야시 선생님이 말씀했었지요.
하지만 고바야시 선생님 사모님께는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이런 식객생활은 결국 결혼하기 직전인 1976년까지 계속됐어요.
유럽에서 지도하다
- 1978년에는 유럽에서 지도하셨지요
이가라시 - 네, 당시 북유럽 아이키도 책임자였던 이치무라 토시카즈 선생님의 요청을 받아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 나라들을 돌았습니다.
북유럽으로 출발하기 전에 고바야시 선생님에게 외국에서 처음 지도할 때 알아야 할 사항을
가르침 받았습니다.
<처음에 마주 앉아 정좌하고 절을 하고 나면, 수련생을 끝에서 끝까지 쭉 훑어볼 것>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된다고요.
그리고 <우선 좌기부터 하라>, <그 다음엔 뒷기술을 할 것> 이런 말씀을 해주셨지요.
실제로 절을 하고 나서, 모여 앉아 있는 수련생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면 마음이 안정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는 고마운 조언이었습니다.
앉아서 절을 할 때는 몰랐습니다만, 막상 모두가 일어서 보면,
그들이 덩치가 커서 뒤에 벽이 안 보입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말지요.
<처음에는 좌기부터>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들 모두 수련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했습니다. 정말 열심이었지요.
합기도와 큰 선생님에 대해서도 모두 잘 공부하고 있었어요.
북유럽 나라들을 몇 군데 돌다가 1년 후에 귀국했습니다.
- 귀국 후에 뭔가 선생 자신에게 변화가 있었나요?
이가라시 - 자신감일까요, 그리고 가르치는 방식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북유럽에서는 못하는 영어로 띄엄띄엄 가르쳤습니다만 말이 안 통하는 만큼 액션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할 때 친절하고 알기 쉽게 가르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바야시 선생님도 대단히 친절히 가르쳐 주시지요.
저는 지금도 1년에 두 번은 북유럽에 나가 지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합기도 덕분
-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합기도 하길 잘했다고 할만한 건 뭐가 있을까요
이가라시 - 합기도를 해서 좋은 점이요.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합기도 덕분입니다.
합기도 전문가가 되자는 결의가 강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흘러흘러 와서 1983년에는 제 도장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고생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 이게 최고로 좋은 점이지요.
지금도 매년 북유럽과 호주, 캐나다 등에 지도하러 갑니다만
이제 나이도 54살이나 먹고 몸이 힘들어져서, 조금 덜 가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독일에 계시던 아사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남들이 불러 줄 때가 좋은 줄 알아>, <싫어하거나 도움이 안 되면 불러주지도 않아>라고요.
또한 해외에 지도하러 가기 때문에 그만큼 노력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에 지도하러 갈 때, 자기한테 아무것도 없으면 불안하지요.
그래서 스스로도 더 수련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와도 더 이상 얻을 게 없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가려고 합니다.
<인터뷰 : 마츠자키 츠카사, 2000년 9월 5일 하시모토 도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