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부르는 마지막 포효 /봉림 유무근
대중가요 ‘테스형’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생각 나는 사람이 있다. 기필코 인기 가수로 뜨기 위해 인생을 끊임없이 처절할 만치 피나는 연습을 거듭한다. 장소 불문 아주 작은 공연이라도 혼을 담아 열창하는 망팔(望八)의 ‘작은 나훈아’라고 직접 작명한 ‘소~나’(小羅) 지역 가수다.
우리 한국 가요계에는 원조 가수의 창법을 익히고 그와 닮으려 노력하는 모창 가수들이 지역마다 적지 않다. 한강 나훈아, 팔공산 나훈아, 용두산 나훈아…. 전국에 백 명은 족히 넘을 만큼 많고, 저마다 작은 무대에서 나름대로 인기도 누린다.
원조 가수와 창법이 흡사해 눈을 감고 들으면 진짜 나훈아가 왔나! 싶을 정도의 지역 가수가 있다.
故 트위스트 김을 연상케 하는 날렵한 체구와 외모가 초면인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기(氣)가 넘쳐흐르는 청명한 음성은 그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소~나였다.
그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엄격했던 군인 아버지의 ‘남자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상습 구타로 겪은 어릴 적 상처는 오랜 세월 대인기피증이라는 트라우마로 남았고, 명문고를 나오고도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서울 세운상가에서 종합 카메라점을 운영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그러나 마음은 늘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 가 있었다. 전국 나훈아 콘서트장마다 불나방처럼 따라다니느라 정작 가게를 비우는 날이 많았고, IMF라는 큰 파도를 넘지 못해 부도와 가정의 해체라는 비극을 맞았다.
지금은 동료 가수의 묘목 농원에서 시급을 받으며 고된 막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간다. 이틀 일하면 하루는 앓아누워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4대 보험이 되는 번듯한 직장을 알선해 주겠다는 지인들의 호의도 마다한다. 나이를 잊는 채 오로지 ‘중앙 무대’ 작은 소~나로 인정 받고야 말겠다는 집념 하나 때문이다.
삶 주변에, 평생 가수의 꿈을 품고 화려한 대형 무대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황혼을 맞이하는 무명 향토 가수가 어디 소~나 선생뿐이겠는가. 이름 석 자 번듯한 앨범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지방의 자그마한 행사장에서 관객 몇몇 박수에 위안을 얻는 수많은 ‘얼굴 없는 가수들’이 우리 곁에 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헛된 꿈을 좇는 고집스러운 노년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대는 단순히 돈을 벌거나 이름값을 올리는 공간이 아니다. 서러웠던 지난 세월의 애환을 토해내고, 마침내 숨겨둔 진짜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생명의 터전이다.
비록 화려한 조명도, 구름같이 몰려드는 팬클럽도 없지만, 노을빛이 붉게 물드는 인생의 황혼 길에서 그들이 내지르는 노래는 그 자체로 숭고한 포효다.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삶이었을지라도, 마이크를 잡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당당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마이크를 잡느냐고. 하지만 그에게 노래는 단순한 미련이 아니다. 꺾이고 상처받았던 한 생애가 세상에 던지는 마지막 자존심이자,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숨결이다.
그의 소망은 전국 모창 가수들과의 경연대회를 열어, 진짜 모창 가수 “소~나”로서 인정받고 싶다고 한다. 또한, 후배를 양성하는 가요 교실에 꿈을 가지고 있다는 소~나 선생은 경제적 시달림 속에서도 희망을 넘어 기필코 해 내야 하는 절박함 품은 그의 방에는 늘 새벽이 일찍 찾아온다.
삼림욕과 운동으로 몸을 풀고 목을 가다듬으며, 그는 오늘도 하루를 30시간처럼 살아간다. 무대 위에서 쓰러질지언정 결코 마이크를 놓지 않겠다는 그 늙은 호랑이의 포효가, 저물어가는 황혼의 하늘을 향해 서럽도록 울려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