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
전남 광주 기세훈(奇世勳) 고택
고택 뒤 700평 대숲에서 ‘사각사각’ 들려오는 대나무 이파리 소리와 온갖 새들의 합창, 그리고 대숲에서 자라 맛이 일품인 죽로차. 한국의 고급문화를 상징하는 ‘계산풍류’의 현장이 바로 기세훈 고택이다.
기(奇) 고(高) 박(朴)’이라는 말이 있다. 전남 광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성씨(姓氏)를 손꼽을 때 흔히 하는 표현이다. 광주 일대라고 하면 그 범주가 광주를 포함하여 나주, 장성, 창평(남평, 담양, 화순, 동복까지 포함됨)까지 이르는데, 이곳에서는 기·고·박 세 성씨를 명문으로 여기는 풍속이 현재까지도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에는 이 세 성씨보다 레벨이 떨어지는 집안에서 이들 명문과 혼사를 맺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다행히 혼사가 성공하면 주위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택(턱)걸이 혼사’라고 불렀다. 수백년간 명문으로 인정받아 온 기·고·박 집안은 그만큼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어느 집안이 명문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걸출한 인물을 한 명쯤 배출해야만 한다. 학문이 높고, 의리를 지키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세가지 자격 조건을 가진 인물이 나오면 그 집안은 주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명문으로 대접받게 되고, 그 인물은 그 집안의 중시조가 되기 마련이다. 기·고·박 세 성씨는 바로 이런 인물들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광주 일대에서 기씨 집안이 명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출현 때문이다. 고씨 집안에서는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삼부자(三父子)가 함께 전사한 의병장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을 배출하였다(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 국회부의장을 지낸 고재청, 3공 때 국회의원을 지낸 고재필씨가 그 후손들이다).
박씨 집안에서는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을 날린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년)과 그의 동생인 육봉(六峯) 박우(朴祐, 1476∼1547년), 그리고 육봉의 아들로 시인이자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년)을 배출하였다(국회의원을 지낸 박종태, 전남대 총장을 지낸 박하욱씨가 그 후손들이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들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한편으로 기·고·박이라고 할 때 기씨를 제일 앞에 세우는 이유는 이 지역 사람들이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울러 광주 일대를 가리키는 광(주), 나(주), 장(성), 창(평)이라는 표현도, 원래는 나주가 제일 큰 동네여서 나, 광, 장, 창으로 불려져 왔는데 광주에서 고봉이 배출됨으로 인해 광주를 앞세우게 된 것이라고 고봉 후손들은 힘주어 주장한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봉이라는 한 인물이 이 지역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던 셈이다. 아무튼 기씨가 명문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고봉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현재 기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봉 기대승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기씨 집성마을 중 하나가 광주시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마을이다. 광곡은 한자 이름이고 우리말로는 ‘너브실’이라고 부른다. 동네 앞에 나주평야의 일부분인 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서 너브실이다. 너브실 50여 가구 중에서 몇 집만 빼놓고는 모두 기씨들이 살고 있다.
너브실의 기씨 집성촌
너브실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奇世勳, 1914∼현재)박사의 고택이다. 애일당(愛日堂)이라 불리는 이 집은 고봉의 6대손인 기언복(奇彦復)이 숙종 때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봉 사상을 연구하는 ‘고봉학술원(高峰學術院)’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집 바로 옆에는 고봉의 아들이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거처했던 칠송정(七松亭)이 있고, 집 뒤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고봉의 묘지가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고봉이 죽기 전까지 수양하면서 공부하던 암자인 귀전암(歸全庵) 터가 남아 있다.
또 너브실 중앙에는 고봉을 추모하는 서원인 월봉서원(月峯書院)이 있고, 월봉서원 오른쪽에는 구한말 때 기씨들이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당인 귀후재(歸厚齋)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너브실에는 고봉이 공부하던 암자에서 묘지, 서원, 서당, 학술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는 셈이다. 고봉의 탄생지는 너브실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신룡동(新龍洞)이지만, 고봉 관련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너브실이고, 그 중심에 기세훈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기세훈 고택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일까? 300년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전통의 무게와 자연의 향취가 조화를 이룬 집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고택은 우거진 대밭과 소나무 그리고 각종 정원수들이 어우러져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아늑함을 준다. 그 아늑함을 대하니 미국의 베벌리 힐스가 생각난다.
몇 년 전 LA 베벌리 힐스의 저택들을 둘러보면서 널따란 대지에 각종 꽃나무와 수목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장면들이 인상깊었다. 집이면서 동시에 수목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풍겨 나오는 이국의 꽃향기와 나무향기들이 도로 옆까지 적시고 있어서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베벌리 힐스의 향기 어린 집들을 맛보는 순간 뇌리를 스쳤던 것은 ‘나도 돈 좀 벌어야겠다’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베벌리 힐스에는 역사와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무게는 없었다는 점을 꼬집고 싶다. 분명 베벌리 힐스의 저택들은 아름답지만, 역사의 신산(辛酸)에서 우러나는 인문학적 지층(地層)이 쌓이지 못함으로 인해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사람이 지나치게 들뜨면 십중팔구 향락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향락을 목표로 한 집은 바로 졸부의 집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통의 무게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자연의 향기가 결여되어 있으면 박물관에 사는 것 같은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세훈 고택은 양자를 모두 갖춘 집임에 분명하다.
700평 대숲의 망우송(忘憂頌)
이 집이 지닌 자연의 향기는 대숲에서 나온다. 전체 대지 3500평 가운데 사랑채 뒤쪽으로는 700평의 대숲이 조성되어 있다. 대나무 숲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청정한 느낌이 든다. 옛 선비들은 그런 느낌을 유현(幽玄)하다고 표현하였다. 대숲에서 그윽하고 현묘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소리에 있다. 대숲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대나무 이파리가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들린다. 선비라면 그 대나무 이파리에서 나는 소리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일이 바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그 소리를 한참 듣다 보면 집착과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다. 이름하여 망우송(忘憂頌)이다.
폭포에서 나는 물소리 다음으로 듣기 좋은 소리가 바로 대 잎에서 나는 소리라고 한다. 폭포를 사람의 손으로 만들기는 매우 어렵지만, 대나무 숲은 인공으로 충분히 조성할 수 있다. 아무튼 선비집에서 대나무를 심는 것은 그 푸른 절개를 높이 사는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한발짝 더 깊이 들어가면 소리에 그 이유가 있다 하겠다.
집터 뿐만 아니라 대다수 절터에 대밭이 조성돼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남도 지역의 폐사지를 답사할 때마다 발견되는 점인데, 산 중턱에 푸른 대밭이 조성돼 있으면 그 자리는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짐작하면 거의 틀림없다.
대숲에는 또 하나의 소리가 있다. 새들의 소리다. 대나무는 줄기와 잎이 빽빽하기 때문에 밤에 새들이 몸을 숨겨 잠들기에 좋다. 특히 참새들이 많이 모여든다. 이 고택의 대숲도 마찬가지여서, 줄잡아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것같다. 그야말로 온갖 잡새들이 지저귀는 통에 늦잠을 잘 수 없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대도 각기 다르다. 한낮에는 시시때때로 꿩들이 운다. 석양 무렵은 까치들의 시간대다. 마치 노인의 쉰 목소리처럼 ‘까악 까악’ 하고 운다. 까치는 제일 높은 나무에 앉는 습관이 있고, 멀리 있는 것도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옛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초저녁에는 소쩍새가 지저귄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영락없이 ‘솥쩍다 솥쩍다’하는 소리인데, 그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수만년 전의 태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같다. 새벽에는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뻐꾸기가 지저귄다. 해가 뜨는 아침에는 수백 마리의 참새떼가 ‘지지 배배’ 단체로 합창한다.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소리로 들린다.
대나무 숲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온갖 새들의 합창을 인간에게 선사하는 서라운드 스피커를 달고 있는 숲이다.
한편으로 대나무를 심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집 뒤에 대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놓으면 범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옛날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호환(虎患)이 많았다. 어지간한 탱자나무나 싸리나무 울타리 정도는 호랑이가 쉽게 뛰어 넘는다. 그러나 빽빽한 대나무 숲은 호랑이가 쉽게 뚫지 못한다고 한다.
또 하나 현실적인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수공예품이 많다. 대자리, 대발, 죽부인, 광주리, 바구니 등 플라스틱이 없던 시대에 대나무는 일상생활에 긴요한 생필품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나무는 곧 생필품이었던 만큼 장날에 나가서 곧바로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고부가가치 자원이었다. 담양을 포함한 이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대나무 산지라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맛이 달콤한 죽로차(竹露茶)
고택의 대나무 숲 속에는 또 하나의 귀한 물건이 자라고 있었다. 바로 차(茶)나무들이다. 널따란 대숲 아래에는 푸른빛 차나무들이 티 내지 않고 자리잡고 있다. 같은 차나무라 하여도 대나무 숲의 차나무를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대숲은 사시사철 그늘이 드리운다. 이는 햇빛과 그늘이 이상적으로 배합된 반음반양(半陰半陽)의 조도(照度)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차나무가 성장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배경이 바로 반음반양이다. 따라서 대나무 숲에서 자라는 차는 그 맛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데, 특별히 이를 죽로차(竹露茶)라고 부른다. 대나무의 아침 이슬 기운을 받아 먹으면서 자란 차 잎으로 만든 차라는 뜻이다.
죽로차는 그늘에서 자란 덕에 차 잎이 연하고 부드러워 쓴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적다고 한다. 맛이 달콤하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차 잎이 연하면 솥단지에서 덖어 비빌 때 차 잎에 자잘한 상처가 많이 생기므로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리는 과정에서 맛이 잘 우러난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대밭에서 자라는 차를 상품(上品)으로 간주한다.
차 잎은 물에 우려먹는 용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나무 생엽(生葉)을 다른 채소와 함께 얹어 구운 돼지고기를 쌈해 먹으면 그 맛이 색다르다. 실제로 생엽을 씹어보면 시원하고 향긋한 맛이 오래도록 뒤끝에 남는데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차 잎은 식중독으로 배가 아플 때 먹는 가정상비약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남쪽 지방의 선비집에서는 집 뒤에 차나무를 심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집에서 사용하는 식수도 보통 지하수가 아니라 대나무 숲을 통과한 자연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나무 뿌리는 그물코처럼 깊고 촘촘하게 뻗어 가는 속성이 있는데, 물이 촘촘하게 뻗은 대나무 뿌리를 통과하면서 자동적으로 정제된다고 한다. 자연정수의 효과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대숲 밑에서 흘러나온 물을 알아준다. 이렇게 고택의 대숲은 집의 품격을 높여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실용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자연의 향기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집은 전남에서 유명한 양택 가운데 한 집에 들어간다. 흔히 전남의 양택을 꼽을 때 해남의 녹우당(윤선도 고택), 구례의 운조루, 그리고 기세훈 고택(애일당)을 꼽는다. 그래서 가끔 풍수를 연구하는 풍수마니아들이 버스를 대절해 답사차 다녀가곤 하는 집이다.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白牛山
먼저 좌향을 보자. 안채 자리는 자좌(子坐)로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자리는 묘좌(卯坐)로 정서향이다. 안채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살림 공간이기 때문에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남향으로 앉혔고, 남자들이 머무르는 사랑채는 뒷산의 지맥이 내려온 방향에 맞추어 정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집터의 형국(形局)으로 보면 이 집은 내려온 지맥에 따라 서향집으로 자리잡는 것이 맞는데, 안채의 살림 공간만큼은 햇볕이 많은 남향이 편리하므로 지맥의 흐름을 무시하고 남향으로 잡은 것이다. 사랑채가 풍수를 중시하였다면 안채는 실용을 중시한 결과로 해석된다. 이처럼 안채와 사랑채의 방향이 서로 다른 경우는 흔치 않다. 해남의 녹우당 정도가 이와 동일한 구조다.
이 집 주인 기세훈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집터는 노령산맥(호남정맥)의 지맥이 광주쪽으로 가다가 그 끝에 뭉친 곳이라고 한다. 혈자리는 맥의 끝에서 생기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호박이 호박 줄기의 맨 끝에서 맺혀 영그는 것처럼 열매는 끝에서 맺어지는 법. 풍수도 마찬가지여서 그 끝을 찾아야 한다.
‘천리행룡(千里行龍)에 일석지지(一席之地)’라, 용맥이 천리를 달려오다가 마지막에 혈자리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 이치를 아는 지관들은 지맥이 끝나는 종점을 찾기 위해 수백리 거리의 산등성이를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답사하여야만 하였다. 등산화도 없고, 버너도 없고, 물통도 없고, 고어텍스 재킷도 없던 시절에 수백리 답산(踏山)은 명당을 구하겠다는 종교적 신념 없이는 감행할 수 없는 고행이었음이 분명하다.
노인들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옛날 지관들은 산 속에서 허기와 갈증을 채우기 위한 비상식량으로 깜밥(누룽지)과 오이를 반드시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깜밥은 가볍고 장시간 변질되지 않아 비상식량으로 적당하였을 테고, 목이 마려울 때는 오이를 먹으면 갈증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
아무튼 집 뒤의 주산은 호남정맥의 한 줄기가 끝에서 뭉치며 이루어 놓은 산으로, 해발 260m의 야트막한 산이다. 옛날에는 청량산(淸凉山)이라 불렸는데 언제부터인가 백우산(白牛山)이라고 그 이름이 바뀌었다 한다.
청량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불교적 맥락의 이름이고, 백우산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는 의미의 풍수적인 이름이다. 불교에서 풍수로의 변천이 드러난다. 대체적으로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풍수국가였던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산 이름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산의 명칭에 투사된 결과다.
소 이름이 들어간 산들은 형세가 부드럽고 완만해 풍수가에서 선호한다. 백우산 역시 완만하고 부드럽다. 그런데 이름에다 왜 흰 백(白)자를 붙였을까. 오행론(목, 화, 토, 금, 수)에서 볼 때 흰 색은 금(金)이며 서쪽을 상징하는 색이다. 산의 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붙인 이름일 것이다.
이 집은 터 뒤의 내룡이 아름답게 내려온다. 구불구불 갈짓자로 내려오는 모습에서 용의 꿈틀거리는 힘이 손에 잡힐 듯하다. 산 맥의 꿈틀거림에서 용의 움직임을 연상하는 것은 풍수문화권의 독특한 미학이다.
내룡이 이처럼 아름답고 힘있게 내려오는 곳은 양택보다도 음택이 더 알맞다고 본다. 음택의 주체는 사람의 뼈이고, 뼈는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밖의 외기(外氣)보다는 땅 속의 내기(內氣)를 더욱 많이 받는다고 보고, 내룡이 내기를 주관한다고 본다. 고봉의 묘를 백우산 줄기에 잡은 것도 그 내룡의 아름다움을 중시한 결과로 여겨진다.
고택 전방 300∼400m에는 영산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황룡강(黃龍江)이 활처럼 돌아 나가고 있다. 풍수학의 고전인 ‘설심부(雪心賦)’에서는 “산은 인물을 관장하고,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물줄기가 아닌, 황룡강이라는 큰 물줄기가 집터를 활처럼 돌아 나가는 것은 이 터가 재물이 풍부한 터임을 암시한다.
물도 그 흘러가는 모습에 따라 호칭이 다르다. 터 앞을 활처럼 둥그렇게 감싸면서 돌아 나가는 물을 금성수(金星水)라고 한다. 지그재그로 굴곡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가는 물은 수성수(水星水), 디긋(ㄷ)자 모양으로 평평하며 각지게 흘러가는 물은 토성수(土星水),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뾰쪽하게 흘러가는 물은 화성수(火星水), 한 일(一) 자처럼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물은 목성수(木星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고택 앞을 흘러가는 황룡강은 금성수에 해당한다. 금성, 수성, 토성수는 길하다고 보고 화성, 목성수는 흉하다고 본다.
산수역거(山水逆去)의 풍수
집 앞의 조산(朝山)은 구룡산(九龍山)이다. 구룡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산은 초보자가 보아도 용을 연상할 수 있을 만큼 구불구불한 모습이 선명하다. 고택 사랑채에서 바라보았을 때 구룡산 좌측에는 조그만 삼각형 모양의 봉우리가 2개쯤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바가지 모양의 둥글둥글한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삼각형은 필봉(筆峰)이고, 바가지 모양은 금체(金體)의 노적봉으로 간주한다. 바위 암벽의 살기는 전혀 보이지 않고 금체의 노적봉들만 많이 보인다. 노적봉 역시 재물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정원에 높이 서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 가려 문필봉과 노적봉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풍수에서는 나뭇잎이 가리면 그 봉우리의 기운이 중간에 차단된다고 믿는다. 은행나무로 인해 좋은 기운이 차단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조산이나 안산의 좋은 봉우리를 가리는 나무는 잘라 버리거나 아예 키우지를 않았다.
원래 집 마당 안에는 지붕을 넘어갈 정도의 키가 큰 나무를 키우지 않는 법이다. 전통 민속에 따르면 지붕 높이를 넘어가는 오래된 나무나 큰 나무가 자라고 있을 경우 그 나무에 목신(木神)이 사는 수가 많기 때문에 집에 좋지 않다고 본다. 만약 목신이 살고 있는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면 ‘동티’가 난다고 한다.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길을 넓힌다고 동네 앞의 수백년된 나무를 톱으로 잘라낸 후 작업한 인부들이 몇 명씩 죽었다는 소문은 그러한 동티를 말한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집안에 지붕을 넘어가는 키 큰 나무를 애당초 키우지 않았다. 큰 다음에 자르려면 아무래도 부담이 되니까 말이다.
사랑채에서 보았을 때 구룡산 좌측에 있는 삼각형의 문필봉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이 은행나무는 조치를 하는 것이 좋을 성싶다.
이 터에서 또 하나 주목할 사항은 산수역거(山水逆去)다. 산수역거란 산과 수가 서로 엇갈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산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가고 있다면, 물은 그 반대 방향인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매우 좋게 본다.
집 앞의 조산인 구룡산은 집터의 왼쪽(북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남쪽)으로 뻗어가는 용맥(龍脈)이 구불구불 길게 내려와 집터 앞에서 조산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황룡강은 집 터의 오른쪽에서 발원하여 왼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진행 방향이 서로 엇갈리면서 산수역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수역거의 반대도 있다. 풍수에서는 산수역거의 반대를 산수동거(山水同去)라고 부른다. 이는 산과 물이 같은 방향에서 시작하여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현상이다. 동거(同去)는 좋지 않게 본다. 바다도 난류와 한류가 서로 맞부딪치는 곳에 물고기가 많듯이, 산과 물도 서로 부딪치는 곳에서 묘용(妙用)이 발생한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산과 물도 서로 스파크를 발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집터 바로 앞에 흐르는 조그만 실개천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보통 사람은 이 실개천을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풍수가에게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실개천은 이 집의 내당수(內堂水)가 된다. 이 내당수는 좌우 양쪽에서 두 줄기가 집터를 감아 흘러오다가 대문 앞쪽에서 하나로 합수(合水)돼 다시 황룡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집터를 좌우에서 감아 돈 물줄기가 합쳐지는 경우도 매우 상서롭게 본다.
고봉사상의 산실, 고봉학술원
현재 이 집에는 고봉의 사상을 연구하는 고봉학술원(高峰學術院)이 있는데,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씨가 사재를 털어 꾸려나가고 있다. 영남학파 쪽에서는 퇴계에 가려 상대적으로 남명에 대한 조명이 소홀했듯이, 그간 기호학파 쪽에서는 율곡에 가려 고봉에 대한 조명이 소홀했었다. 고봉학술원은 호남학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고봉사상을 본격적으로 조명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올해로 15호째 발간된 학술지 이름도 다름 아닌 ‘전통과 현실’이다. 고봉사상이 지닌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현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전통을 현실에 연결할 것인가 등의 문제 의식이 담겨 있는 제호라고 여겨진다. 결국 전통과 현실이 따로 놀지 않도록 어떻게 서로 연결시킬 것인가가 그 핵심일 것이다.
이는 비단 고봉학술원에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퇴계학(退溪學), 율곡학(栗谷學), 남명학(南冥學) 연구소 역시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유교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송광사에서 세운 보조사상연구원(普照思想硏究院)이나 해인사의 성철선사상연구원(性徹禪思想硏究院)에서 지향할 과제이기도 하다.
현재적 의미를 놓치면서 과거 조상의 업적에만 집착하다 보면 문중학(門中學)에 머물거나 자칫 시대착오(anachronism)라고 비판받을 염려도 있다. 어떻게 하면 현재를 붙잡을 것인가? 누구나 주문은 하기 쉽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기가 어려운 숙제다.
방법은 결국 서양 역사학자의 표현대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 그리고 대화를 하자면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다. 내가 보기에 그 대화를 하기 위한 기씨 집안의 살롱이 고봉학술원이고, 기세훈 고택이다.
먼저 과거를 보자면 고봉 기대승의 생애와 사상에 주목해야 한다.
고봉은 당대의 석학 퇴계와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하다. 사단(仁의 측은지심, 義의 수오지심, 禮의 사양지심, 智의 시비지심)은 선한 마음의 이성(理性)을 가리키고, 칠정(인간의 일곱 감정, 희·노·애·락·애·오·욕)은 인간의 본능적 감정(感情)을 가리킨다.
여기서 퇴계는 사단은 이(理)에서 발생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서로 혼합시킬 수 없고(不雜), 따로 분리시켜 보려는 입장이었다. 퇴계가 이와 기를 분리하려 한 것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이의 세계인 윤리와 도덕을 중시함으로써, 본능적인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이성이 중심이 되는 문명세계로 나아가자는 의도다.
금욕적인 퇴계, 풍류적인 고봉
반면 고봉은 양자를 서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不離)는 반론을 폈다. 사단과 칠정의 분리가 너무 인위적인 구분이라는 지적이었다. 이성과 감정은 두부 자르듯이 잘라지는 게 아니다, 사단(理)과 칠정(氣)은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라는 입장이다.
몇 년 전 작고한 이을호(李乙浩) 선생은 고봉의 이러한 입장을 ‘이이일원론적 묘합(二而一元論的 妙合)’이라고 정의했다. 둘이면서 하나인 이이일(二而一). 이는 고봉의 주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9년 후배인 율곡이 뒤를 이었고, 다시 남인의 거두였던 윤백호(尹白湖)로 이어지고 다산(茶山)을 거쳐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까지 관통하는 사상사적 흐름이라고 이을호 선생은 주장하였다.
오늘날 시각에서 퇴계와 고봉의 노선을 굳이 구분한다면 퇴계가 도덕적 원칙을 고수하면서 금욕적인 실천에 주력하는 입장이었다면, 고봉은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는 포용적 태도와 자연을 즐기는 풍류적인 입장 쪽이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가 거주하던 안동 지역이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순도 높은 유교적 전통과 선비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퇴계의 학풍이 영향을 끼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기호지방, 특히 호남지역에 문학과 예술 그리고 풍류가 발달한 것은 고봉의 사상적 노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고봉이 주장한 이이일(二而一)의 사상적 원리는 현재 한민족의 숙제인 남북간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사상적 단초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남북은 둘이면서 하나가 아닌가.
한편으로 치열하게 사상논쟁을 벌인 고봉과 퇴계의 인간적 관계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필자는 학술세미나에서 토론을 하다 보면 생산적인 결과가 도출되기보다는 오히려 감정만 상해서 헤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칠논변이 시작될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세였고, 고봉은 32세였다. 편지 왕복을 통한 두 사람의 논변은 8년이나 진행되었다. 퇴계는 성균관의 대사성이라는 원로학자의 위치에 있었고, 고봉은 이제 막 대과에 급제한 촉망받는 신예 학자였다. 퇴계와 고봉의 관계에서 주목을 끄는 점은 26세나 연상인 퇴계가 아들뻘인 고봉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토론상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퇴계의 인품을 느낄 수 있다.
또 고봉은 원로의 학문적 권위에 눌리지 않고 예리하게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퇴계에게 자신의 신상 문제를 자문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참신한 젊은 지성을 만났다고 생각한 것 같고, 고봉은 인품이 훌륭한 어른을 만났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오늘날 생각해보면 퇴계와 고봉의 관계는 인품과 지성의 상보적 만남이었다. 퇴계는 고봉에게서 신선한 관점을 보충 받았다면, 고봉은 퇴계에게서 학문과 인생을 숙성시킨 것 같다.
전주대 오종일(吳鍾逸) 교수의 연구(‘高峰思想의 입체적 조명, 그의 인생 歷程을 따라서’)를 보면 퇴계와 고봉은 서로를 신뢰하고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였음이 나타난다.
퇴계가 서울을 떠나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갈 때, 고봉은 한강가에서 유숙하며 봉은사(奉恩寺)까지 퇴계를 따라가 배웅하면서 배가 떠나려 할 때 그 석별의 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이하면 붙잡으리. 모랫가에 닻줄 끌고 못 떠나게 배회할 제 밀려오는 애간장 시름을 어떻게 할거나.(漢江滔滔日夜流 先生此去若爲留 沙邊 纜遲徊處 不盡離腸萬斛愁)’
또 선조 원년 승정원에 있던 고봉은 당시 가까이 모시던 선조가 낙향한 퇴계에 대해 갖고 있는 심정과 조정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이에 대처해야 할 퇴계의 처신에 대해서도 일일이 편지로 적어 보낼 정도다.
이러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퇴계는 고봉에게 자신의 아버지인 찬성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써주기를 부탁하였고, 고봉의 나이 44세 때 퇴계가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그의 묘 앞에 묘갈명을 써서 바쳤다.
오늘날 퇴계의 묘 앞에 서 있는 묘비가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은 인간관계의 전범을 후학들에게 보여주었다. 아울러 안동에 살았던 퇴계와 광주에 살았던 고봉의 아름다운 관계는 오늘을 사는 영·호남의 식자층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마지막으로 고봉의 계산풍류(溪山風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계산풍류란 경치 좋은 계곡에다 누정(樓亭)을 지어놓고 사대부들이 문사철(文史哲)을 담론하면서 즐기던 조선시대의 고급문화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호남에서 서원 창건은 대체적으로 16세기 후반쯤에 이루어지지만, 누각과 정자들은 그 보다 40∼50년 앞선 시대에 세워진다. 호남의 고급문화는 서원보다는 누정에서 먼저 출발하였다는 말이다.
고봉의 계산풍류(溪山風流)
호남 계산풍류의 현장은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시작되어 창평, 담양 일대로 이어지는 라인에 자리잡은 수많은 누정들이었다. 면앙정(仰亭), 소쇄원(瀟灑園), 독수정(獨守亭), 식영정(息影亭), 송강정(松江亭), 환벽당(環碧堂), 명옥헌(鳴玉軒), 풍암정(楓岩亭) 등을 포함하여 약 70여 개의 누정들이 창평, 담양 일대에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빈번히 일어났던 사화를 목격한 선비들이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와 자연과 벗하면서 생겨난 누정들이다. 당시에는 150여 개의 누정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 일대는 한국 누정문화의 본고장이자, 한국 문예부흥기의 중심지였다.
고급문화는 역시 먹고사는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가능한 법. 이처럼 많은 누정들, 즉 조선시대의 살롱들이 들어설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창평 들판의 튼실한 경제력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통계이긴 하지만, 창평 일대에는 천석꾼이 600가구 가량 살았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만큼 창평 일대의 들판은 풍요로운 땅이었고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여기에는 앞서 잠깐 밝혔듯이 조선시대 고부가가치 자원인 대나무 숲도 한몫 거들었다. 또 그러한 부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창평의 한과와 엿으로 남아 있다. 특히 쌀로 만든 창평엿은 입에 달라붙지 않아 전국에서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쌀이 귀하던 때에 쌀로 엿을 만들어 먹었을 정도로 창평은 부자들이 살았던 곳이다.
박석무씨는 ‘무등산의 풍류와 의혼(義魂)’이라는 글에서 그러한 계산풍류의 인맥을 잘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계산풍류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30대에 연산군의 학정을 만나 고향에 내려온 지지당(知止堂) 송흠(宋, 1459∼1547년)에서 처음 시작된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0∼1545년),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3년)이 송흠에게서 학문과 문학을 배우면서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는 면앙정의 제자로서 소쇄원에 주로 머물렀다. 대사성을 지낸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년)은 양팽손의 아들로 계산풍류의 멤버였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년),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년)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다.
가장 한국적인 정취가 어려 있는 정원이라고 평가되는 소쇄원을 세운 인물은 양산보(梁山甫, 1483∼1536년)이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기묘사화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내려와 소쇄원을 세웠다. 양산보는 면앙정 송순과는 인척간의 아우이고,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이다.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년),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년),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년)과 같은 당대의 일급문사들이 계산풍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모여서 자연의 풍광을 예찬하고, 시를 짓고, 고금의 학문을 논하는가 하면, 나라를 걱정하였다. 여기에서 논의되었던 내용들이 후일 사림들의 상소를 통해서 조정에 반영된다.
16세기 호남의 기라성 같은 문사들의 모임인 계산풍류의 중심무대가 소쇄원이었다면, 그 좌장격은 바로 송순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고위관직을 역임하면서도 그 학문과 인품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호남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는 가사는 그가 면앙정을 보며 남긴 글이다. 송순 밑에서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등이 가르침을 받으며 풍류를 익혔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었다.
송순이 회갑을 맞이해서 면앙정을 증축하고 제자들에게 ‘면앙정기’를 부탁할 때, 다른 사람을 제쳐두고 고봉에게 부탁한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가 1553년이니까 고봉의 나이 불과 26세 때였다. 난다 긴다 하는 기라성 같은 선·후배 문사들을 제치고 불과 26세의 고봉이 발탁되었다는 사실에서 고봉이 계산풍류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고봉은 젊은 시절 문사들과 어울리면서 풍류가 무엇인지 알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고봉을 평가할 때 그가 참여하였던 계산풍류의 정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계산풍류의 정신은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휩쓸리지 않고 풍류를 즐기면서 문사철을 연마하는 데 있다.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산풍류의 멤버들이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난을 당해서는 의병장으로 나가 싸웠다.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이 그렇다.
가학을 잇는 후손들
대충 과거를 더듬었으니 이제는 현재를 보자. 고봉학술원에서 발간하는 ‘전통과 현실’의 표지는 창간호부터 현재까지 소쇄원 전경을 담은 그림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소쇄원으로 상징되는 호남 계산풍류의 전통을 오늘날에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바로 고봉학술원이 지향하는 목표이고, 기세훈 고택은 고봉학술원을 뒷받침하는 건축적 토대라고나 할까.
서양식으로 말한다면 기세훈 고택은 살롱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고급문화는 살롱에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도 이제 살롱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본다.
현재 한국에는 룸살롱 말고는 학자와 예술가가 모일 수 있는 진짜 살롱이 없다. 살롱을 제공하는 패트런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모른다. 쓸 만한 일에 돈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집어 보면 한국의 돈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데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사회가 각박한 하향평준화 쪽으로만 가지 않나 싶다.
모든 일은 일단 둠벙부터 파놓아야 한다. ‘둠벙 파 놓으면 개구리 뛰어든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고봉의 13대 후손인 기세훈 고택은 전통의 무게와 3500평의 넓은 대지, 새들이 지저귀는 대밭과 차나무, 돌담길, 그리고 학술원까지 갖추고 있다. 한국적인 살롱, 그러니까 계산풍류를 계승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마련된 셈이다.
고택에서는 매년 학술회의가 열리므로 많은 학자들이 머물다 간다. 주변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에 화가들도 많이 오고 소설가, 도예가, 사진작가, 국악인, 디자이너, 향토사학자, 조각가, 영화인들도 방문하곤 한다.
고택의 종손인 기세훈씨는 올해 88세의 고령이다.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광주고보를 거쳐 와세다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서도 판사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는 판사를 못하면 못했지 기고봉의 후손으로서 창씨개명은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1969년에 서울고등법원장을 거쳐 초대 사법연수원장을 지내다가 사법권 독립을 요구하는 사법파동의 주역이 되어 옷을 벗었다. 그 뒤로 변호사 생활을 해왔다. 현재는 행주 기씨(幸州 奇氏) 대종회 회장을 맡고 있다. 8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만나보니 아직 눈에 힘이 있고 강단이 있는 분이라는 인상이 든다.
―일생 법조인으로 살아오셨는데 법조계와는 다른 분야인 고봉학술원을 지원하시게 된 이유는?
“호남 유림회 대표를 맡았던 선친께서 저를 보고 한탄하신 말이 있습니다. ‘너 대에 우리집 가학(家學)이 끊기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는 고봉 집안의 가학이 끊긴다는 사실에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가학을 이어야 한다는 선친의 당부도 있었고, 거기에다가 한국의 전통학문과 풍류를 계승하고 싶은 제 나름대로의 의지도 작용한 결과입니다.”
―돈을 버는 일이 아니고 돈을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변의 반대도 있었을 텐데요.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많았어요. ‘전통과 현실’을 한번 발간하는데 비용이 3000만원 정도 들어갑니다. 특별히 부자가 아닌 저에게 적은 액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의 모든 보람을 여기에다 두고 있기 때문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께서 돌아가시면 이 일은 누가 계승합니까?
“큰아들이 할 겁니다.”
기세훈씨는 2남3녀를 두었다. 장남인 기춘석씨(59)는 한양대 의대 내과과장으로 있고, 간(肝)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질문을 아버지 옆에 앉은 기춘석씨에게 돌렸다.
―전공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저도 고민했습니다.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인문학이 주를 이루는 ‘전통과 현실’을 이어간다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의 전통이자 동시에 계산풍류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를지라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의학쪽 논문이긴 하지만 창간호부터 ‘전통과 현실’에 논문을 게재해 왔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참여 방법이었죠.”
올해 발간된 제15집 비용은 기춘석씨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기세훈씨의 차남인 기백석씨(49) 역시 중앙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로 있다. 큰사위인 김병교씨는 우주항공연구소 소장이자 충남대 교수이고, 둘째 사위인 정승기씨는 전주 영진건재와 태평양수영장 사장이다. 셋째 사위인 신동우씨는 아주공대 건축과 교수다.
집 뒤에 세운 납골당
기세훈씨 고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집 뒤켠에 있는 납골당이었다. 큰돌에 ‘바르게 사신 어른들의 유택’이라는 글귀를 새긴 이 납골당에 기세훈씨 자신부터 죽으면 화장해서 들어갈 것이라 한다. 앞으로 가족들이 죽을 때마다 매장을 하지 않고 이 납골당에 안치하겠다는 뜻이다.
전통을 계승해온 명문가의 종손으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알고 보면 매장보다 화장이 위험 부담이 적다. 매장의 경우 물이 나오는 곳에 잘못 묘를 쓰면 그 후손들이 당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화장의 경우는 뼈를 태워버리기 때문에 해도 없고 득도 없는 무해무득이라고 본다.
풍수가에서는 뼈는 혼백(魂魄)중에서 죽은 사람의 백(魄)이 들어가는 매체로 작용한다. 따라서 매장을 할 경우 이 백은 조상과 후손이 영적인 교신을 하는 매체라고 본다. 매장을 하고 나서 보통 10일 이내에 직계가족의 꿈에 망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풍수가에서는 이 꿈을 그러한 영적 교신의 흔적으로 간주한다.
묘가 잘못되면 교신의 주제도 골치 아픈 내용이 많다. 골치 아픈 전화는 차라리 받지 않는 편이 낫다. 그게 바로 화장법이다. 화장은 조상과 후손간의 교신 수단인 뼈를 불로 태워버리기 때문에 전화가 올 수 없다. 그래서 화장이 무해무득이다. 명당 같으면 한번 배팅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국토도 좁고 명당을 구하기도 힘들고 명당도 아닐 바에는 화장이 훨씬 안전하다. ‘바르게 사신 어른들의 유택’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이 집안의 납골당을 보면서 전통과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신동아
출처 더 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