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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째 날(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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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과 아홉정맥 종주 보다 힘든 길이었다
마지막 밤이 된 이유는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에서 이 장정을 마감하려 하기 때문이다.
월송정(越松亭) 이후는 옛길 평해대로(고산자의대동지지)와 동해안 자전거일주 등으로
이미 샅샅이 누볐으니까.
다시 걷는다 해도 북상을 반복하지 않고 최북단(강원도고성군현내면 통일전망대)에서
역(逆)으로 남하할 것이다.
백령도를 기점으로 삼았지만 서해뱃길의 잦은 중단으로 거듭 실패함으로서 출발하기도
전에 맥이 빠졌다
이 뱃길을 상용(常用)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며 여행자들도 때가 맞아 단번에 다녀오기도
하건만 발권을 하고 몇시간씩 기다렸어도 매번 실패했으니 어떤 암시가 내포되었던가.
어렵게 시작한 길도 복막염으로 배를 가르므로서 영광해안(전남)에서 중단했다.
이미 언급한 적이 있지만 아무도 없는 해안 어느 지점에서 맹장이 터졌더라면 해안길을
걷기는 커녕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감각이 둔하다 해도 맹장염을 2년여에 걸쳐 앓으면서도 모르고 지냈으며, 그런
몸으로 먼 타국에서 2천여km를 걷고 다녔다는 것은 더욱 불가사의한 일이다.
창선대교길(경남삼천포)에서는 하마터면 바다로 추락할 뻔도 했다.
초대형 트레일러의 횡포로 편히 걸을 수 있는 날이 하루도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
손가락 마디 하나가 불구가 되고 말았다.
거창한 모험심으로 착수한 길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새 루트라는 것이 지난한 일임에 틀림 없다.
고백컨대, 그 사이에 늙은 탓도 있겠지만 백두대간과 정맥들의 종주보다 더 힘겨웠다.
마지막 밤이기 때문인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못이루고 있는데 별난 손님들이 몰려왔다.
이 송림에 상주하는 특별한 주민들(음식 청소원들)인 듯 어린 자녀들을 거느린 고양이
가족인데 몰인정하게도 다 먹어치운 늙은이가 야속했겠다.
이즈음은 제철이 아니어서 수입이 신통치 않은지 밤에서 아침까지 집요한 두 놈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비상식량(초코파이 2개)을 까서 주었지만.
쾌청한 아침을 맞는 나그네의 기분도 날씨만큼이나 상쾌했다.
거울처럼 맑고 잔잔하고 유난히 푸른 바다가 더욱 평화롭게 보이는 아침 7시 35분.
이름 흰돌처럼 깨끗한 마을 백석리(白石) 지방어항을 떠나 칠보산휴게소를 지났다.
해발810m 칠보산 자락, 울진군 평해읍 전방 10km 해변, 7번국도상의 휴게소다.
잠시 7번국도를 따르다가 금곡리(金谷) 유금천(금곡교)에서 해안길을 다시 찾게 된다.
칠보산휴게소를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평해10km라니?
거리가 늘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가.
이정표 관리의 소홀함은 양의 동서나 선.후진국 불문한다.
이처럼 정확하지도 않고 그래도 지장없는 이정표라면 도로상에서 사라질 날도 오겠다.
당장에도 차량들은 이정표보다 내비(navigation)를 신뢰하고 있으니까.
소규모어항 금곡항의 금곡2쉼터에서 쉬면서 해안로를 살펴보았다.
예전에는(자전거로 해안 일주할 때) 길이 없는 절벽이어서 국도를 이용했는데 바다쪽에
기둥들을 박아 널따랗게 만든 길인 것 같다.
이 지역의 7번국도와 해안로의 관계는 다소 헷갈린다.
아마, 부분적으로는 7번국도가 신설되고 옛 7번도로는 해안로로 밀려났을 것이다.
개방된 정자마다 머물고 싶으니 정자 출입금지에 한이 맺혔던가.
영덕대게와 울진대게의 싸움은 조미료 전쟁의 재판?
금곡항을 벗어나면 곧 울진군의 최남단 지경(地境)마을의 소규모어항인 지경항이다.
울진군이 강원도였을 때 경상북도와의 경계에 있다 해서 지경이라 했는데 지금은 도계
(道界)가 아니고 두 군의 군계(郡界)지만 계속 그 이름을 쓰고 있단다.
병곡면과 후포면의 면계, 금곡리와 금음리의 리계도 된다.
지경항 입구 도로변에 울진대게 홍보대가 서있다.
이미 예견했지만 울진군의 전의(戰意)가 상상 이상임을 경계점에서부터 느끼게 한다.
1962년 11월 21일, 관할 도가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바뀌었음에도 지자체 간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다.
울진대게는 14c초엽인 고려때부터 울진의 특산물로 자리잡아 왔다는 것,
같은 고려시대지만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의 대게산지 이야기(1345년)보다 조금 빠른가.
후포항에서 23km밖인 왕돌초(여의도 2배의 거대한 수중암반)가 대게의 주요 서식지인
데다 후포항과 죽변항이 전국 대개생산량의 50%를 점유해 절대 우위에 있다는 것.
울진의 말대로라면 영덕을 멀찍이 따돌리는데도 울진이 왜 후발이며 추격자인가.
도로(해안도로) 보수공사를 지휘하고 있는 울진군청 공무원(?)에게 물었다.
예전에, 울진은 동해안에서 육상교통이 가장 열악한 사각지대(死角地帶)였단다.
그 한(恨) 때문인지 대부분이 자동차전용도로인 어엿한 7번국도가 있으며 교통량이 썩
많지 않은데도 고속국도를 원하고 있다.
전국 지자체중 고속국도가 없는 곳은 자기네 밖에 없기 때문이라나.
공사중인 이들로 부터 들은 말이다.
부산~함경북도 온성 간의 7번국도는 AH6(아시아고속도로6호선)에 든 동해대로인데도.
울진의 어항들은 잡은 고기의 판로가 막막했기 때문에 육상교통이 발달한 이웃 영덕의
강구항을 유통 창구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단다.
비록 그랬다 해도 원산지는 엄연히 울진이라는 것.
특히 인기 최고인 대게의 레콘키스타(失地回復)만은 반드시 하겠다고 전의를 가다듬고
있으나 '영덕대게'라는 소비자들의 고정된 인식을 돌리기가 용이한 일인가.
광복 후 1세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대기업 간에 조미료 전쟁이 있었다.
일제때 부터 조미료 '아지노모토(味の素)'에 익숙해진 주부들이 같은 발음인 '미원(味元
/아지모토)'을 애용하게 되었다.
소비자는 무의식적으로 '아지모토'를 찾고 경쟁사의 조미료 '미풍(味豊)'을 손에 들고도
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지모토라고 답변했다.
별별 루머(rumor)를 퍼뜨렸으나 이미 조미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미원을 어쩌지 못한
경쟁사측은 의기소침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경쟁을 포기했다.
절대 우위의 경제력을 가진 무소불위의 재벌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긴 것은 소비자들의
무의식적 고정관념이었다.
우리나라 제일 재벌 이병철의 소위 3불(三不)중 1인 조미료 전쟁의 결말이다.
'대게'의 소비자에게는 동해안 어느 지점에서 잡혀왔느냐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영덕의 어항에서 먹거나 구입하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굳어진 인식이 '모든 대게는 영덕
대게'라는 것이다.
그래서 울진땅에서도 영덕대게를 달라 하고 울진대게를 손에 들고도 누가 물으면 영덕
대게라고 대답한다.
조미료 미원과 미풍의 관계처럼.
울진의 당국자와 관련 주민들은 소비자가 야속할 것이다.
예전의 열악했던 교통도 원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하다.
불만 때문에 고개를 돌린 소비자라면 오히려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만을 해소하면 되니까.
그러나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는 소비자들에게 단심가(丹心歌)로 응수하겠는가.
고정된 관념일 뿐 무관심한 소비자들이기 때문에 영덕대게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울진에게는 소비자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하여 애쓰는 것보다 오리진(origin/원산지)에
무관심한 소비자의 '무'자를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어야 한다.
관심을 가져야 말이 먹힐 것이니까.
울진대개의 레콘키스타를 이루려면?
해안에 거의 밀착되어 있는 7번국도를 들락거리는 나와 거의 동행하는 해파랑길.
나와 함께 금음3리(金音)의 어촌정주항 금음항을 지났다.
금음교 건너 '백암회센터 휴게소'의 너른 광장에도 범선의 돛을 타고 오르는 붉은 울진
대개의 대형 조형물이 서있다.
붉은 카펫길 같은 인도를 걸어 삼율해안교를 건너면 삼율리(三栗) 후포해수욕장에 이어
경북요트경기장이다.
길지는 않으나 폭이 넓고 고운 모래가 어린 아이 피부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철 지난 해수욕장은 청명한 것보다 차라리 비내리는 날이 운치가 있겠다.
인파가 들끓어야 하는 넓은 백사장의 휑한 광경은 산만하기만 한 느낌뿐이고 소형 원형
스테이지 지붕에는 갈매기들만 날고 있다(조형물)
해수욕장 해변공원의 소나무숲은 당장에는 엉성하지만 오래가지 않아서 훌륭한 방풍림
숲으로 성장하겠다.
과도한 사랑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은 나무에도 적용된다.
나무를 아끼면 나무를 버리게 되니까.
과감한 간벌이 최선인데 그러지 못한다면 아예 식재 간격을 넓히는 것이 차선이다.
정자 '희망나눔쉼터'의 안내판은 오히려 솔직하다.
"이곳은 동네 어르신들 쉼터입니다.
관광객 여러분들은 잠시만 쉬어가시고 쓰레기는 가져가시길..."
누구나 부담 없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 스키와 함께 요트가 사치 스포츠로 분류되는 시대는 종료된 것 아닌가.
서해가 황해(yellow sea)라는 이름처럼 맑지 못하지만 호감을 갖게 하는데 한몫 하고
있는 것이 청결미가 있는 요트항들과 도전과 낭만을 공유한 요트경기인 것 같다.
아직 미약하나 늘어나는 요트 수요에 따라 요트산업이 유망산업의 하나가 될 것이고.
후포리의 반달형 후포항, 연안항에 들어섰다.
한마음광장의 홍게축제 선전아치가 아직도 제자리에 있다.
2월 말과 3월 초의 일인데 그후에는 행사가 없었음을 뜻하는가 한해를 오직 울진대개로
올인한다는 의미인가.
울진대게 홍보전시관이 있는 왕돌초광장 뒤에는 후포등대(등기산공원)가 있다.
옛날부터 부근을 지나는 선박의 지표역할을 하기 위해 낮에는 하얀 깃발을 꽂아 위치를
알리고 밤에는 봉홧불을 피웠다 해서 등기산(燈基山)이라 했다는데 등대가 들어섰다.
우리 고대 항로표지시설을 설치 운영했던 역사적인 곳에 광달거리 19마일(35Km),음달
거리 5마일의 등대가 1968년 1월 24일에 점등, 임무를 수행하고 있단다.
그 위치야 말로 등대터가 될 역사적 운명을 타고난 자리인가.
후포항을 떠나 코너링하면 갓바위다.
등기산 아래 도로에서 30여m 바다에 박혀있는 "바위가 갓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는 흔한 내력의 바위인데 T.T.P( tetrapod/築港工事)로 막아서 육지가 되었다.
해발64m의 낮은 등기산을 '갓바위전망대' 라는 이름으로 개발한 것은 좋은 발상이다.
관망 대상이 빈약한 것이 아쉽지만 금강산을 인근으로 옮겨올 수는 없지 않은가.
돌산의 안전시설도 돌이 아니고 방부목 일색이다.
체념했기 때문인지 실망도 없다.
갓바위에서 얼마쯤 북상하면 빨간 등대를 가진 제법 큰 규모의 후포방파제가 있다.
어항도 여객항도 아닌 곳에 해안생태계에 악영향을 주는 방파제가?
'평해광업사원아파트'가 있고 방파제에 꽤 큰 화물선이 정박하고 컨베이어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대에 광산이 있고 방파제는 채광물 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지자체는 넉넉한 포구(厚浦)가 낙후된 포구(後浦)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애쓸 테고 환경
단체들은 제동을 걸 것이 불보듯 뻔한데 현수막도 포스터도 없다.
현재 가동 여부도 모르고 나그네가 참견할 일 아니겠기에 지나쳤다.
거일2리어촌계의 '용지곶 1종공동어장경계' 표석 부터는 거일리다.
'게알'이 기알로 변음되었고 한자화 과정에서 거일(巨逸)로 쓰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게(蟹)의 알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는데 평해읍(平海) 땅이다
'거일2리 울진대게 원산지마을' 표석 이후는 홍게와 갈메기 조형물로 치장한 포장 해안
길(울진대게로)이 거일2리 중심지 양쪽으로 한동안 이어진다.
마을 해변에는 대게 원산지마을 답게 울진대게 유래비를 비롯해 대형 대게와 대게잡이
선박과 어부들 등 조형물들을 설치했다.
한데, 왜 썰렁하고 공기가 반쯤 빠진 타이어 같은 느낌이 들까.
조형물의 배치가 산만하고 과객의 발을 붙들겠다 하면서도 거일쉼터(정자)가 홀로 있을
뿐 아무 시설도 없고 만사가 귀찮은 듯 활력이 전혀 없는 울진대개의 원산지 마을이다.
총 연장 470m의 잔교(棧橋)식 해상유료낚시터.
국내 최대규모로 관광사업 활성화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는 공사도 무슨 사연인지
파일을 박다 중단했다.
완성되어 강태공들이 몰려들면 수요에 따른 공급이 활발해 질까.
총체적 침체상태인 마을 전체의 분위기에 활력소가 되면 다행이겠지만.
울진군은 영덕대게로부터 울진대게의 명예를 되찾고 싶은가.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 대게의 아이콘으로 등극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좀 더 진지하고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확실한 키(key)를 주지는 못해도 지금처럼 바람 빠진 타이어 같은 전의나 의지가지고는
안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거일2리가 진정 원산지라면 인력(引力)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까짓 조형물 보다 이곳을
울진대게의 원산지를 넘어 우리나라 대게의 메카(Mecca)로 만들어라.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아파 하지 않는 이 시대"에 순례자처럼
오게 하고 감동먹고 가게 하라.
그러면 실지회복(레콘키스타)은 절로 되고 울진은 대게의 아이콘이 될 것이다.
장정, 미스터리 월송정에서 끝나다
군인들의 해안 방비가 완화된 이후 동해안은 처처가 해수욕장이다.
기복 심한 수심만 유의하면 무시로 맑은 쪽빛 바다와 정감 높은 백사장을 즐길 수 있다.
환경단체들이 우리 해안의 오염을 걱정하나 한반도 해안은 세계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북남미해안인 서남태평양, 멕시코만과 가리브해 등 중미해안, 동서 대서양 등 유명세가
톡톡한 해안을 다녀오면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지만 이는 관광사대주의자들의 행태다.
실은 말할 수 없이 더러우니까.
와이키키해변을 비롯해 유명하다는 해수욕장들을 새벽에 걸어보라.
발디딜 데가 없도록 쌓여 있는 온갖 쓰레기를 치우느라 대형 갈퀴차들이 바쁘다.
낮에도 한번 더 그래야 하는 해변이 수두룩하다.
그런 수고 하지 않아도 이 정도인 해변을 가진 우리야 말로 복받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수시로 하며 걷는다.
당장, 그런 고마움을 느끼며 거일리 해변을 걸어 거일1리까지 갔다.
일명 구암(狗岩)마을이다.
14C중엽, 마을을 개척한 이가 마을 동쪽의 개처럼 생긴 바위를 보고 개바위라 한 것이
한자로 구암이 되었다는 마을에 전설이 있다.
구암리는 부유한데 반해 가난했던 기알리에서는 원인이 개바위 때문이라 했다.
개바위의 머리는 기알(거일2리)로 향하여 있고 꼬리부분이 거일1리에 내려 있는 형국은
기알 것을 먹고 구암에 배설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기알주민들은 명주실 밧줄을 만들어 밤중에 개바위를 넘어뜨려서 방향을 틀어놓았는데
그 후로 역전이 되었다나.
거일1리는 어촌체허마을을 표방하면서도 소규모어항이나마 구암항의 유지가 어려운가.
배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구암을 떠나 직산2리(直山)로 갔다.
태양광패널을 연상하게 하는 해변의 즐비한 은멸치 건조대가 장관이다.
우리나라 멸치의 주산지는 남해안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의 죽방렴멸치를 비롯해 삼천포, 통영, 마산과 전남 여수, 완도 등 남해안을 꼽으며
동해안의 기장 앞바다도 멸치의 주산지에 든다.
여기 직산과 거일 앞바다는 우리나라 은멸치의 대표적 산지란다.
직산 지방어항이 은멸치항이라는데 새끼처럼 보이는 이 작고 가는 멸치들이 궁금했다.
치어까지 싹쓸이 하는 것이 아닌지?
이 작은 멸치들은 어종인가 치어인가.
세발낙지가 3개의 발이 아니고 가는 발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이지만 어린 낙지냐 어종
이냐의 다툼이 있는 것처럼 멸치도 그 논쟁에 포함되는 것 아닌가.
치어를 남획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 멸치어항의 장래도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통과하는 차량을 상대로 노상판매 중인 은멸치 주인에게 값을 물었다.
독심술이 있는지 내가 살 영감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 듯 무성의로 나왔다.
값이 궁금했을 뿐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해도 잠재고객이 될 여지마저도 없단 말인가.
거리에서 홍보용 전단 한장 받을 자격까지도 잃었고 교회와 장례용품 판매회사의 공략
대상으로 밀려난 늙은이가 먼 동해안에서도 소외감을 갖게 되다니.
직산쉼터의 시계가 오후 3시 5분을 알리는 때, 정자의 초로남이 쉬어가라며 붙들었다.
지형이 돼지 같다 해서 돈진(豚津)이라 했다가 저장(猪場)으로 바뀌었다는 해안마을(직
산1리)은 남대천 교량(월송정교)공사로 인해 통과할 수 없단다.
뒷편의 용정교(남대천)를 건너 논둑길을 통해 공사중인 도로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
지호지간이므로 편히 쉬었다 가시라는 것이다.
남대천이 왜 이렇게 많은가.
남반도에 만도 강원도 양양과 강릉에 각각 남대천이 있다.
철원(강원도)에도 한탄강 지천인 남대천(지금은 花江)이 있고 전북 무주에도 있다.
지금 건넌 남대천은 온정면(울진군) 조금리 748고지 동쪽에서 발원해 곧 동해로 빠지는
평해 남대천이다.
오랜 세월 건성으로 지나다녔는데 울진읍에도 남대천이 있단다.
다리를 건넌 후 남대천을 따라서 공사중인 월송정교 앞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너른 들의
논둑길들이 불안정해서 지그재그로 많이 돌아야 했다.
월송정교에 연결된 공사중인 새 도로를 타고 가다가 월송정이 빤히 보이는 숲길로 들어
섬으로서 39일간(실시간으로는 37일)의 장정을 마치기 5분쯤 전이 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평해읍을 지날 때마다 들렀던 월송리 월송정이다.
관동팔경중 하나인 월송정이 있어서 월송리라 했다 하나 월송정(越松)과 월송리(月松)
는 한자표기가 다르다.
월국(越國)에서 송묘(松苗)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 했단다.
또는 달밤(月夜)에 송림(松林)에서 놀았다 해서 월송정(月松亭)이라 했다고도 말하나
현판은 월송정(越松)이다.
월송정은 신라 화랑들이 웅지를 품던 도장이었으며 송강 정철(松江鄭澈)의 관동별곡에
의해 팔경에 들게 되었다고 하나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는 월송정이 없다.
그리고, 월송정은 원래 월송포 만호성(대동지지 越松浦鎭?)의 남문루였는데 현 위치로
이건했다는 것.
이중환도 흡곡 시중대(侍中臺), 통천 총석정(叢石亭),고성 삼일포(三日浦), 간성 청간정
(淸澗亭), 양양 청초호(靑草湖), 강릉 경포대(鏡浦臺), 삼척 죽서루(竹西樓)와 울진 망양
정(望洋亭) 등을 팔경(擇里地)이라 하여 월송정은 제외했다.
한데, 왜 관동팔경 중 하나라 할까.
미스터리(mystery) 월송정을 디카에 담은 시각은 2012년 9월 11일 15시 57분 01초.
마침내, 장정이 끝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정의 결정도 끝났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해 월송정에 다시 오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