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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카드, 휴대전화 단말기, 자동차에 심어진 RFID칩은 끊임없이 정보를 어딘가에 집적하지만 정작 그 정보의 주인은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경찰이 갑자기 교통 카드에 기록된 버스의 승하차 정보를 보고 특정 시점의 알리바이를 묻지 않는 한 그 기술은 단지 "배경"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지난 2005년을 시작으로 한국에도 매년 '빅부라더상'수상자가 나올 예정입니다. 상은 상인데 썩 명예롭지는 않은가봐요. 지난해 시상식이 열린 11월 22일에는 수상자들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주최측에서 수상자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인형을 준비해야 했 거든요. 하긴, 상 이름부터 기분 나쁠 만합니다. '가장 끔찍한 프로젝트상','가장 가증스 러운 정부상','가장 탐욕스러운 기업상'등, 이런 이름을 가진 상을 어느 누가 받고 싶겠습니까?
원래 '빅부라더'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사람들을 철저히 통제하는 전체주의 권력이 나오는데, 바로 그 이름이 빅 브라더입니다. 이제 이 상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셨지요? 정부와 기업이 정보통신기술 을 이용해 시민의 프라이버시와 같은 인권을 침해하는 일은 없는지 감시해서, 이런 인권 침해 행위를 한 대표적인 개인과 기관에게 주는 상이 바로 빅브라더상입니다.
이 상은 1998년 영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라이버스 인터내셔널'이 제정한 뒤 지금도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등 20여개 나라에서 해마다 시상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2005년 에는 주민등록번호(가장 끔찍한 프로젝트상).정보통신부(가장 가증스러운 정부상),삼성SDI (가장 탐욕스러운 기업상)가첫번째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이 상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감시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니까요.
감시사회, 당신도 예외일 수 없다.
2004년 국회 국정감사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산업자원부 산하 기관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는 직원을 '지각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해고한 일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알고보니 사측에서 직원을 해고할 목적으로 출근 기록을 조작한 정황이 발견된 것입니다.이런 사실은 노동조합에서 해고당한 직원의 버스, 지하철 스하차 기록을 검토한 끝에 밝혀졌습니다.
그 직원이 가지고 다니는 교통카드의 버스, 지하철 승차하기록은 회사가 제시한 지각 기록과 전혀 달라습니다. 지각했다고 기록돼 있는날, 회사에서 5~10분 거리의 버스와 지하철 정류장 하차 기록은 모두 출근 시간 훨씬 전이었습니다. 결국 지각 기록까지 조작해 해고하고싶었던 그 직원은 법원의 명령으로 다시 복집되어씃ㅂ니다. 별 생각없이 이용하던 교통카드가 얼마나 힘이 센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다른 일도 있습니다. 2004년 초 상당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채 경찰로부터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무슨 일을 했는지 해명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미궁에 빠진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찰이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3번이상 범행 지역을 지나다닌 사람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 를 벌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물론 경찰은 사람들의 버스 승하차 기록을 분석해 대상자 를 선정했고요.
나중에 진짜 범인(유영철이 밝혀지긴 했습니다만, 난데없이 경찰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사람 들에게는 잊지 못할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사람들이 교통카드를 사용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마친내 정보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기관(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나의 이동경로를 재구성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전파식별(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기술입니다.
RFID 기술의 빛과 그림자
RFID기술의 원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각종 정보가 집적된 소형 반도체 칩을 내장한 카드나 꼬리쵸를 인식익에 갖다대면 여러가지 정보가 무선으로 인식기에 전송됩니다. 반도체 칩의 저장용량만 허락한다면 그 안에는 온갖 정보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개인신상정보, 각종 상품의 가격, 제조일, 원산지정보 등,...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교통카드를 겸한 신용 카드, 휴대전화 단말기는 RFID기술이 적용된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스와 지하철 요금 정산에 RFID기술이 이용되면서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 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에서는 거리별로 요금 정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 이 언제, 어디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내렸는지 모두 추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용카드, 휴대전화 단말기와 연동해 버스나 지하철 요금을 정산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의 이동 경로가 고스랑히 기록돼 보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예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앞으로 RFID기술이 더욱더 보편화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미 교도소 수감자, 성범죄 사범, 환자, 노동자의 신체에 RFID칩을 이식하는 법안이 세계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2004년 서울 지하철공사는 직원에게 RFID칩이 내장된 목걸이 를 걸고 근무하는 방안을 추진하려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가 추진하는 RFID칩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요.
서울시는 승용차 요일제에 참여한다면서 혜택만 누리고 이 제도를 지키지 않는 '얌체족'을 가려내기 위해서, RFID칩을 나눠주고 자동차에 부착하도록 했습니다. 여러가지 혜택 때문에 이 RFID칩은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잇습니다. 그러나 이 RFID칩을 부착하면 개인의 운행 기록이 고스란히 서울시의 데이터베이스에 남을 수 있다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울시는 남산터널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 RFID칩으로부터 정보를 읽을 수 있는 인식 기를 부착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RFID칩을 단 자동차가 언제, 어디를 이동했는지 에 관한 운행기록이 고스란히 서울시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소리없는 추적'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RFID기술과 같은 '유비쿼터 스기술'의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숨어서 감시하는 기술
'유비쿼터스'란 말은 원래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1988년 미국의 마크 와이저가 "사용자가 네트워크, 컴퓨터를 의식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점속할 수 있는 환경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 면서 처음 세상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미 부분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는 와이저의 주장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의식하지 않고'라는 언급입니다.
일단 RFID칩이 내장되면 평소에 그것을 의식하며살기란 쉽지 않슷ㅂ니다. 교통카드, 휴대전화 단말기,자동차에 심어진 RFID칩은 끊임없이 정보를 어딘가에 집적하지만 정작 그 정보의 주인은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경찰이 갑자기 교통카드에 기록된 버스의 승하차정보를 보고 특정시점의 알리바이를 묻지 않는 한 그 기술은 단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가자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은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지조차 알지 못한채 감시를 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푸코는 『감시와 처벌』 에서 소개한 '파놉티콘'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 콘은 손쉽게 죄수를 감시하도록 고안된 원형 감옥입니다.
중앙의 감시탑을 중심으로 죄수의 방을 배치하면,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잘 볼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죄수는 간수의 보이지 않는 시선때문에 늘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므로 외적 강제 없이도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게 됩니다. RFID기술과 같은 유비쿼 터스 기술에 둘러싸인 채 감시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 바로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이런 부작용을 의식한 탓인지 정보통신부는 2005년 7월'RFID프라이버스 보호 가이드라인'을 발표 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은 일단 RFID기술이 사생활을 침해할 소지를 막기 위해서 인체에 칩을 이 식하거나, 칩을 이식하거나, 칩 속에 개인 정보를 담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이드 라인은 '개인이 동의만 한다면' 개인정보를 저장 가능하도록 하고 있어서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입 니다.
특히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보통신 기술은 대중화된 반면 프라이버시와 같은 '정보인권'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적은 한국의 현실을 염두에 두면, 이런 의문은 곧 걱정으로 바뀝 니다. 정보인권을 아예 법으로 보장하려는 '개인정보보호법'이 1년이 넘도록 국회에서 방치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나 할까요? 이 법이 방치된 데는 정보 인권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무관 심에 더해 개인의 정보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있는 기업의 반발도 한몫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 21세기 초반의 한국은 과연 어떻게 기억될까요? 조지 오웰 『1984』에 보이는 빅 브라더가 지해했던 나라로 기록될까요? 아니면 유비쿼터스 기술의 부작용을 사전에 인식하고 그 위험을 예방한 나라로 기록될까요? 아무래도 현재까지는 전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전자파놉티콘 사회, 이것이 21세기 한국의 미래가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누군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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