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신윤복, 고사인물도, 견본담채, 118.5 x 43cm, 일본인 개인 소장
1. 그림 <고사인물도>
비단에 그린 신윤복 그림으로는 대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섬세한 인물과 교자상의 표현과 함께 화사한 채색으로 전래 실경 풍속화의 기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 무엇을 그린 것인가?
그림의 상단에는 '귀신같은 군사들도 마침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지금 무슨 분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분의 도덕이 매우 높음을 알겠다'라는 화제가 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제갈량과 맹획의 고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칠종칠금’은 일곱번 풀어주었다가 일곱번 사로잡는다는 말로, 오늘날 이 말은 '상대편을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뜻으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칠금(七擒)'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3. 어떻게 일반에 공개되었나?
일본 개인 소장자가 2008년 K옥션 경매에 내 놓으면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4억 ~ 5억원으로 추정된 이 그림은 결국 경매에서 유찰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그림은 1811년 조선통신사의 사자관(寫字官)인 피종정이 신윤복에게 부탁해 선물용으로 일본에 가져간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림 상단에 ‘조선국 혜원사 경사화원(朝鮮國 蕙園寫 京師畵員)’이라는 한자가 행서체로 쓰여있다.
4. 칠종칠금(七縱七擒)에 관한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은?
삼국시대 촉한의 제1대 황제인 유비는 제갈 량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위나라를 공략하여 생전의 유비의 뜻을 받들어야 했던 제갈 량은 먼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유선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제갈 량은 적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썼다. 과연 반란군은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등장한 반란군이 바로 맹획이라는 장수였다. 맹획이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노강 깊숙이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맹획을 생포한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촉한의 무장인 마속(馬謖)도 '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으로, 군사전은 하책일 뿐 심리전을 펴 적의 마음을 정복하라'고 했다. 제갈 량은 오랑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북벌(北伐)도 한결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여 맹획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부하 되기를 자청했다. 여기서 '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