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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천부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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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자료실 스크랩 전통음식
둥둥 추천 0 조회 81 13.09.28 02: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매운 찬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와 10평도 안 되는 방을 점령한다. 아이는 잠결에 안간힘을 쓰며 추위와 싸운다. 걸쭉한 목소리가 땔감처럼 훈훈하게 아이의 머리 위로 번진다. "내 댕겨오겠소" 동이 틀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벌써 일 나갈 채비를 마쳤다. 아이의 실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닭털이 묻은 낡고 헤진 장화의 뒤꿈치다. 아버지의 장화다. 다섯 살 아이에게 아버지는 '헤진 장화를 신는 사람'이었다.

  

남대문시장서 닭잡던 충청도 청년의 독립선언

 

<고려삼계탕>(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주인 이준희(50)씨가 아버지하면 떠오르는 영상이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서울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재작년 일흔넷에 작고하기 전까지 가게에 나와서 직접 쓸고 닦고 했던 분이다.


<고려삼계탕>은 이씨의 아버지, 이상림씨가 1960년에 명동의 옛 코스모스백화점(지금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길 건너 쇼핑몰자리) 건너편 골목에 세운 음식점이다. 명동은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황량한 서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들, 온갖 멋을 부린 서울 처자들, 색색의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이상림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씨는 충남 서천이 고향이다. 1956년 중사로 제대하고 23살에 서울로 올라왔다. 두 살 어린 아내를 고향에 두고 말이다. 건강한 몸을 한밑천 삼아 서울로 올라온 그는 남대문시장 닭전에서 일을 했다. 예전에는 사대문 안에 도계장(고기를 얻기 위하여 닭을 잡는 곳)이 있었다. 그 도계장을 '닭전'이라고 불렀다.

  

"한국 최초의 삼계탕 전문점" 자부심

 

이씨는 천성이 부지런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수십 리 길을 걸어 읍내에 두부를 팔러 다니곤 했었다. 그 부지런함 때문에 그는 닭 박사가 되었다. 축 처진 닭의 꼴만 봐도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아맞힐 정도였다. 아들 이씨는 집에서 만들어 먹던 삼계탕을 돈을 주고 사먹는 음식으로 만든 것은 아버지 이씨가 국내 처음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예약을 하기 위해 <고려삼계탕>에 전화를 걸면 "한국 최초의 삼계탕 전문점"이라는 안내음성이 들린다.


삼계탕은 어린 닭의 뱃속에 찹쌀과 마늘, 대추, 인삼을 넣고 물을 부어 끓이는 음식이다. 연계(軟鷄:병아리보다 조금 큰 닭)를 백숙으로 먹는 것을 '영계백숙'이라고 부르다가 인삼을 넣고 끓이면서부터 계삼탕이라고 불렀다. 인삼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끌자 ‘계’자와 '삼'자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과거 ‘좀 사는 집’은 개장국(보신탕) 대신 삼계탕을 먹었다.


복날이면 <고려삼계탕> 주방은 더욱 바쁘다.

 

 

아버지 이씨는 이 삼계탕을 푸짐하게 만들어서 200원에 팔았다. 당시 200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약 7000원에 이를 것으로 한국은행 쪽은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 공식 물가통계를 내기 시작한 것이 1965년이므로 정확한 계산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당시 연탄불에 삼계탕을 끓였는데 처음에는 잘 안 팔렸다. "삼계탕이 너무 많이 남아서 없는 살림에 온 식구들이 매일 포식했지요."이씨의 회상이다. 아버지 이씨는 여러 방법으로 삼계탕을 끓여보고, 다른 사람이 만든 요리법을 배우기도 해서 자신만의 삼계탕 맛을 만들어냈다.

 

  1978년 현재의 서소문 자리로

 

10석도 안 되는 자그마한 가게였지만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렸다. 그는 임대료가 올라가자 명동 사보이호텔 맞은편 건물 2층으로 가게를 옮겼다가 다시 옛 제일백화점 자리(지금 명동 한복판)로, 그곳에서 다시 진고개(지금 충무로 2가)로, 진고개에서 서소문 유원건설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1978년 드디어 지금의 <고려삼계탕> 자리에 터를 잡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건물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 이씨는 <고려삼계탕>이 번창하자 고향에 있던 가족들을 불렀다. 4남1녀의 장남답게 그는 책임감이 강했다. 셋째에게 <백제삼계탕>을 맡기고 다른 동생과 가족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게 하거나 다른 일을 하도록 도왔다. 그 못지않게 부지런했던 아내 황순금(74)씨는 벌집 같은 가게 쪽방에서 3남1녀를 길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잘되면 당신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일하는 사람만이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셨지요. 대학생 때 용돈을 한 푼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방학 때 가게 나와 일을 해야만 용돈을 주셨습니다."

  

가업 뛰어든 아들, 석달 간 전면 리모델링

 

리모델링을 했지만 49년 전통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1995년 <고려삼계탕>은 이씨가 교사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가업에 참여하면서 변화를 맞는다. 2001년 그는 3개월 동안 문을 닫고 건물 리모델링을 했다.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급여의 50%를 주고 3개월 휴가를 보냈다. 그들은 3개월 뒤 한 명도 이탈없이 다시 모였다. 이곳에서 21년째 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씨는 건물을 6층으로 올렸다. 각층마다 보조주방을 두어 빠른 서비스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부엌 안에는 화물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식자재나 기타 물품을 빠르게 옮길 수 있게 했다. 오골계탕이나 통닭 등 신메뉴도 추가했다. 영업사원을 두어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이 <고려삼계탕>을 찾도록 판촉활동도 벌였다.


<고려삼계탕>은 유명세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씨 부자는 지난 1985년 '高麗蔘鷄湯(고려삼계탕)'을 상표출원해 이듬해 등록을 마쳤다. 하지만 삼계탕집을 창업하는 이들이 너도나도 '고려삼계탕'이라는 이름을 따라썼다. 결국 이씨는 지난 2008년 동의 없이 상호를 사용한 한 모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이때부터 서울시내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던 '고려삼계탕' 상호는 이씨 집과 직영점만 빼고는 자취를 감췄다.

  

주재료는 중간 정도 자란 수평아리 '웅추'

 

어떤 맛이 반세기 동안 숱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고려삼계탕>은 닭 중에 웅추(雄雛)를 쓴다고 한다. 웅추는 수평아리를 말한다. 크기는 병아리와 다 자란 닭의 중간 정도다. 사람으로 치자면 청소년기쯤 된다. 육질이 담백하고 오래 삶아도 살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내장을 정리하면 약 450g 정도가 된다.


이 집에서 삼계탕을 만드는 법은 대강 이렇다. 웅추를 가져오면 내장을 버리고 식도를 잘라낸다. 그 안에 인삼, 멥쌀이 30% 섞인 찹쌀, 대추, 통마늘을 넣고 다리를 꼬아 묶는다. 솥 바닥에 해동피, 엄나무, 오가피 등을 깔고 웅추를 눕힌다. 바닥에 깐 약재들은 비린내를 없애고 고기 살을 더 담백하게 만든다고 한다. 솥에 정수기 물을 붓는다. 한 솥에 80~100마리 들어간 것을 기준으로 강불에서 45분 끓이는데 팔팔 끓기 시작하면 불순물과 핏물을 없애고 익힌다. 불을 중불로 낮추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약불에서 3시간 이상 끓여 부드럽고 뽀얀 국물을 만든다. 


뚝배기 안에서 봉화처럼 몽글몽글 연기가 올라오는 삼계탕의 국물은 맑으면서도 진하다. 뱃속에 들어간 닭 날개는 간질간질 위장을 간지럽히는 듯하다.  쫄깃하면서도 담백하고 튼실한 게 이 집 삼계탕의 특징이다. 삼계탕과 함께 나오는 밥은 팥을 삶아서 우린 물로 지어 보랏빛이 돈다.

  

무라카미 류·자이머우 등 "최고 음식" 칭송

 

이 집 단골 중에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도 있었다. "한번은 비서관 3명이 와서 3마리를 달라고 합디다. 살들을 발라내서 큰 1마리로 만들어서 가져갔다"고 이씨는 말했다. 미식가로 알려진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도 삼계탕을 한국 최고의 음식이라고 칭송했고, 중국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자이머우도 한국 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삼계탕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초밥처럼 세계인 모두가 삼계탕을 먹는 날이 곧 오리라는 신념으로, 이씨는 요즘 국제특허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일본, 중국, 베트남, 필리핀, 싱가포르, 미국, 프랑스 등 일부 국가에서는 특허권이 이미 나왔다. 그는 아버지의 정직과 성실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 아들의 세계화 꿈에 동참하려는 듯, 이씨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면서 알파벳을 외웠다고 한다.

"차가워 너무나 / 이빨이 너무 시려 / 냉면 냉면 냉면…"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곡 <냉면>의 한 소절이다. MBC <무한도전> 프로그램의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에서 개그맨 박명수와 소녀시대 제시카가 불렀다. <냉면>의 가사처럼 시원한 냉면을 찾는 계절이다. 장안의 유명 냉면집들 앞은 뱀꼬리처럼 긴 줄을 이룬다. 정통 평양식 냉면은 초겨울에 담근 동치미 국물과 꿩으로 만든 육수를 합쳐 냉면육수를 만들고 그 안에 삶은 메밀 소면을 넣어 먹는 음식이다. 고명으로 고기, 달걀, 배, 김치 등을 얹는다. 지금은 꿩 대신 쇠고기를 쓰고 고구마전분을 섞어 면을 만든다.

 

북쪽 사람들이 즐겨먹던 이 음식이 남쪽 사람들에게도 널리 보급된 계기는 한국전쟁이다. 남쪽으로 온 실향민들이 문을 연 평양식 냉면집들이 보급의 거점들이었다. <우래옥>, <의정부 평양냉면>, <강서면옥>, <남포면옥>, <평양면옥>, <평래옥> 등이 대표적이다. 가족들이 분점을 내면서 <필동면옥>, <을지면옥> 등이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는 <을밀대> <봉피양> 등도 문전성시다.

  

먹을거리 푸짐, 인심도 넉넉...짜지도 맵지도 싱겁지도 않게

 

이들 냉면집들의 주메뉴는 평양식이다. 하지만 다들 자신들만의 맛내기 비법들이 있다. 그 중에서 <남포면옥>은 동치미가 들어간 육수로 유명하다. 서울시청 뒤 중구 다동에 있는 <남포면옥>은 들머리부터 예사롭지 않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동치미 독들은 행군을 앞둔 군인들처럼 두 줄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다. 독 뚜껑에는 담근 날짜가 적혀 있다.


<남포면옥>은 1954년, 지금 사장인 이재현(55)씨의 어머니 조씨와 친척 곽봉순씨가 문을 열었다. 두 분 모두 평안도 남포가 고향이다.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에서 2년간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남포면옥> 자리에서 냉면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은 40평 규모의 한옥이었다. 이재현씨는 "어머니는 손이 크시고 손맛도 좋으셨다"며 "평안도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평안도의 동쪽은 산, 서쪽은 바다, 그 사이는 넓은 평야다. 평안도는 그래서 예부터 먹을거리가 넉넉한 고장이었다. 그런 덕인지 평안도 사람들은 음식도 푸짐하게 만든다. 맛은 짜지도 맵지도 싱겁지도 않은 게 특징이다.

  

어복쟁반도 군침... 고운 자태의 그, 단골들 희미한 옛그림자

 

어복쟁반


조씨와 곽씨는 냉면을 20원에 팔았다. 당시 전차 요금이 2원 50전일 때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낯선 어복쟁반도 만들어 팔았다. 두 사람은 평안도 음식을 '솔직하고 심심하게' 만들었다. 이 집의 간판격이나 다름없는 동치미에도 특별한 비법이나 기교가 없다. 북녘 고향에서 늘 하던 것처럼 구덩이를 파서 묻어 두고 자연 발효시켰다.


조씨는 1972년 마흔 여덟 나이에 작고했고, 이후엔 곽씨가 <남포면옥>을 도맡아 살림을 꾸렸다. 이씨와 형제들은 그래서 곽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단골들 중에는 고운 자태를 유지했던 곽씨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곽씨도 10여 년 전 작고했지만 조씨의 3남1녀중 둘째 이재경, 막내 이재현 형제가 1986년부터 <남포면옥>에서 일을 시작해 맛을 이어오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40평이 250평으로 늘어난 것과 논현점(2000년)이 생긴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ㄷ자 주방, 예닐곱의 요리사들 손이 안 보인다

 

<남포면옥>의 대표음식은 '어복쟁반'과 '냉면'이다. 그 맛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태어났는지 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ㄷ자 주방은 분주하다. 예닐곱의 요리사들이 정신없이 주방을 활보한다. 미리 만들어놓은 어복쟁반이 선반에 쌓여 있다. 팔뚝만하게 빚어둔 메밀 덩어리는 금고의 금덩어리처럼 겹쳐 놓여 있다.


"냉이 둘이요!"라는 소리가 들리자 새파란 신참요리사가 파르르 떨면서 냉면 덩어리를 가져와 기계에 넣고 엿가락 같은 면을 뽑아 바로 익힌다. 시간을 잴 틈도 없이 후딱 꺼낸 젊은 요리사는 찬물에 한 번 헹구고 그 옆에 커다란 얼음이 담긴 물통에 면을 넣어 한 번 더 헹군다. "잘 비벼 헹궈!" 선배 요리사가 핀잔 아닌 핀잔을 한다. 면을 돌돌 말아 그릇에 담자 다른 요리사가 고명을 얹고 준비해 둔 육수를 붓는다. 채 5분을 넘지 않는다.


남포면옥 냉면은 손반죽을 한다.

  

전문가들이 본 남포면옥

 

예종석(한양대 경영대학장, 맛칼럼리스트) : 냉면의 면은 메밀을 몇 퍼센트 사용하는 지가 중요하다. 최근 1~2년 사이 냉면 맛에 편차가 있다. '어복쟁반'은 높이 살 만하다. 대중적인 음식이 아닌데도 꾸준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김은숙(월간 <쿠켄> 편집장, 음식칼럼니스트) : '어복쟁반'의 유통(소의 젖가슴) 맛이 기억에 남는다. 천천히 씹으면 우유 맛이 났던 것 같다. 유통이 들어간 음식은 많이 보지 못했다. 들머리의 분위기도 정감이 있다. 오랫동안 그 분위기가 변하지 않아 맛도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냉면 맛은 ‘잘한다 못한다’ 말 할 수 없다. 서울 시내 냉면집들은 비슷한 맛을 내는 곳이 많다.

주방 들여다보기

평양 시장 상인 먹던 어복쟁반, 알코올로 데워
반죽 배우는 데 1년…동치미는 매일 담가 숙성

‘어복쟁반’은 큰 놋쟁반에 쇠고기 편육과 유통(소의 젖가슴), 삶은 달걀, 배, 버섯, 갖은 채소 등을 넣고 육수를 부어 끓여 먹는 음식이다. 평양 시장상인들이 주로 만들어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름은 우복(牛腹 :소의 뱃살)인데 나중에 어복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남포면옥>의 '어복쟁반'은 어떻게 만들까? 우선 쇠고기 양지머리, 유통, 쑥갓, 대파 등을 삶아 둔다. 삶은 고기는 양념(마늘 1/2작은술+설탕 1큰술+후추+참기름+간장)에 무친다. 삶은 채소 위에 고기를 얹는다. 날 쑥갓, 표고버섯, 새송이버섯, 팽이버섯, 계란, 대추, 은행, 잣, 홍고추를 올린다. 여기에 육수를 붓고 알코올을 쟁반 아래 그릇에 부어 데운다. ‘어복쟁반’을 먹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은 에어컨 바람 때문에 알코올이 날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남포면옥>에서는 은박지를 둘러 준다.


'냉면'은 면과 육수의 질이 중요하다. <남포면옥>의 냉면은 메밀과 고구마전분을 7:3로 섞는다. 반죽할 때 붓는 물은 뜨거운 물을 사용하고 손 반죽을 한다. 반죽이 끝나면 끓는 물에 넣어 1~2분 정도 삶는다. 반죽 정도에 따라 삶는 시간이 약간 다르다. 다 삶고 난 뒤에는 찬물로 한 번 헹구고, 얼음물에 다시 한번 면을 비벼 헹군다. 냉각기를 쓰는 집도 있는데 <남포면옥>은 55년 전부터 큰 얼음덩어리를 넣은 물을 쓴다.


육수는 고기 육수와 동치미국물을 7:3으로 섞은 것을 쓰는데, 그릇에 붓기 전 살짝 단맛을 내는 간을 한다. 고기 육수는 양지를 1시간30분~1시간40분 끓여 만들고 기름을 제거한 후 무, 양파, 대파, 마늘, 생강, 고추를 넣어 1시간 더 끓인다.


<남포면옥>은 동치미를 매일 아침 담근다. 좋은 무(탄탄하고 깍은 뒤에도 색이 잘 변하지 않는 무)를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잘라 독에 담고 그 위에 대파, 양파, 배, 마늘, 생강, 소금을 넣어 하루 재운 뒤, 다음날 물을 부어 자연발효 시킨다. 숙성기간은 여름에는 4~5일, 겨울에는 보름, 봄과 가을은 일주일 정도로 한다. 숙성기간 동안에는 독을 밀봉해둔다. 채소는 매일 가락동시장에서 사오고 쇠고기나 메밀가루는 40년 이상 거래해온 집에서 가져온다. <남포면옥>에서 소비하는 메밀은 하루 108㎏ 정도라고 한다.

 

  

 

 

 

 

 



어복쟁반 4만9천원(3인분) / 수육 1만6천원

불고기 1만7천원 / 곱창전골 1만 6천원

모듬버섯 1만3천원 /  쟁반만두 1만원

빈대떡 1만1천원 / 냉면·비빔냉면·온면 7천5백원

냉면 사리 4천5백원

* 논현점은 본점보다 약 10% 비싸다.

 

 

위치 : 서울 중구 다동 125번지

전화번호 : 02-777-3131 / 02-541-0808

영업시간 : 오전 12시~오후 10시 30분

주차 : 주차 안됨

골동반(骨董飯) 이라고도 불리는 비빔밥은 밥에 이런저런 나물과 고기, 고명, 양념,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는 음식으로서 가장 한국적인 음식으로 평가 받는 음식 중 하나이며, 김치나 불고기에 비해 늦게 알려지긴 했지만 국내 항공사의 기내식으로도 채택되어 외국인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한 음식입니다. 예전부터 섣달 그믐날에는 남은 음식을 해를 넘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궁중음식, 농번기 음식, 동학군 음식 등등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기도 합니다. 유래가 여러 가지 있다는 건 그만큼 일반 서민에서부터 궁중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 받는 음식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비빔밥이 문헌에 등장한 건 1800년대 말인데, 대략 200년 전부터 즐겨먹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비빔밥은 어느 지역의 고유음식이라기 보단 전국적인 음식이라 지방마다 그 지역 특산 농산물을 이용해 만들어 먹었는데, 대표적으로 전주, 진주, 해주 등에서 향토음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비빔밥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게 전주비빔밥이라 할 정도로 가장 유명하며,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 중 하나로 꼽히며 그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여겨졌다고 합니다. 비빔밥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타민과 무기질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영양식품이면서 건강식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 블로거 참이술 http://blog.naver.com/yjoshjh

  

양장구밥이 맛있는 미청식당

 

 


 

 

추천 블로거 기억저편
지역 부산

 

부산 기장군 일광면에 가면 별미 비빔밥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앙장구밥입니다. 앙장구는 성게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입니다. 즉, 앙장구밥은 ‘성게알 비빔밥’을 말합니다. 일광역 근처에 있는 미청식당이 이 앙장구밥으로 유명한 집입니다. 앙장구밥은 고슬고슬한 밥 위에 성게알과 깨, 김, 그리고 참기름으로 마무리되어서 나옵니다. 앙장구밥의 성게알은 두 가지 종류의 성게알을 사용하는데, 일반적인 성게의 알과 말똥성게의 알을 사용합니다. 기장 지역에서 해녀들이 직접 잡은 말똥성게알을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성게 중에서 가장 맛있는 성게로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합니다. 앙장구밥을 쓰윽쓰윽 비비다 보면 고소함과 녹진한 내음으로 기분 좋아지고, 한 숟갈 입으로 넣는 순간, 바다내음과 함께 성게알 특유의 부드러움과 녹진함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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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석이조로 즐기는 새벽집

 

 


 

 

추천 블로거 참이술
지역 서울

 

새벽집은 원래 고깃집으로 분류되는 식당이지만, 24시간 영업을 하는 탓에 인근에서 새벽까지 술 마시던 사람들이 출출한 배를 채우러 찾는 식당으로도 유명합니다. 맛깔스런 반찬과 함께 나오는 식사 메뉴가 여느 밥집 못지않게 훌륭한 수준을 자랑합니다. 그 중에서도 단골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메뉴가 바로 육회비빔밥입니다. 무나물,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당근, 호박 등 다양한 나물과 채소뿐 아니라 고기볶음과 육회가 푸짐하게 들어 있어 내용물이 아주 충실하고, 가격도 훌륭한 편입니다. 게다가, 선지해장국이 같이 나오기 때문에 육회비빔밥을 주문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두 가지 음식을 맛볼 수가 있어 일석이조라 할 수 있습니다. 양도 많은 데다가 맛있는 선지해장국이 딸려 나오니 든든한 한끼 식사로는 물론이려니와 저렴하고 가볍게 술 한잔 하기에도 손색이 없는 메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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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의 전주 비빔밥, 성미당

 

 


 

 

추천 블로거 비밀이야
지역 전주

 

비빔밥 하면 전주를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전주 비빔밥은 비빔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전주에 가면 전통을 자랑하는 비빔밥집이 많지만,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곳 중의 하나는 성미당입니다. 성미당은 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전라북도 지정 향토음식점이기도 합니다. 성미당의 육회비빔밥은 직접 담근 찹쌀고추장과 참기름, 콩나물, 밥을 넣고 초벌볶음을 한 후 그 위에 황포묵과 육회, 표고버섯과 갖은 채소를 얹어냅니다. 약 20여종의 고명이 있는데 오색찬란한 색도 아름답고 각 재료가 어우러진 맛은 더욱 뛰어납니다. 사골국물로 지은 밥에 직접 담근 고추장의 깊은 맛에 취해있다 보면 어느새 놋그릇은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다른 전주 비빔밥과 다른 점은 주방에서 한번, 손님이 상에서 또 한번, 두 번 비벼먹는다는 점인데 그래서 더욱 고소하고 고슬고슬한 비빔밥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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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비빔밥이 유명한 천황식당

 

 


 

 

추천 블로거 잠든자유
지역 진주

 

한국사람들에게 비빔밥만큼 친숙한 음식이 또 있을까요? 산간지형이 많고, 다양한 산채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우리나라는 산채비빔밥을 기본으로 각 지역의 특산물과 음식문화가 더해져 개성 있는 향토음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비빔밥이라고 하면 전주비빔밥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진주비빔밥을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진주비빔밥은 진주냉면과 함께 경상남도 진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입니다. 다른 지역의 비빔밥과 구별되는 특징이라면 숙주나물과 소고기육회가 들어가고, 무엇보다 선짓국과 같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천황식당은 3대째 80여 년간 진주비빔밥을 이어오고 있는 집입니다. 비빔밥은 양념도 간도 별로 강하지 않아 조금 싱거운 듯 담백하고, 함께 내주는 소고기 선짓국은 몇 번을 더 달라고 할 만큼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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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짐한 육회가 최고, 편대장영화식당

 

 


 

 

추천 블로거 김가
지역 영천

 

영천에서 먹거리 하면 육회가 먼저 떠오릅니다. 예전에는 '영천영화식당'이었는데 '편대장영화식당'으로 상호가 바뀌었습니다. 상호는 바뀌었지만 45년 동안 영천의 원조 육회집으로 여전히 성업 중이며, 대구에 직영점 두 곳을 두고 있습니다. 육회는 함박살(허벅살)을 사용하는데 소량만 나온다고 합니다. 본점 방문 시 종종 고기 손질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수작업으로 가느다란 힘줄과 지방까지 꼼꼼히 제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집 육회는 기름기가 전혀 없으면서도 부드럽고 찰기가 있습니다. 모양새는 여느 육회와 많이 다릅니다. 채 썬 파와 간장, 참기름, 설탕으로 간결하게 무쳐나옵니다. 육회비빔밥은 육회와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육회를 대접에 담아 별도로 조밥 한 공기가 딸려 나옵니다. 비빔밥의 육회 양을 보면 가격이 비싸다는 불만이 쏙 들어갑니다. 이것저것 나물도 채소도 없고, 고추장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육회+밥=육회비빔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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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어 보세요.

 

새싹비빔밥돌솥비빔밥된장비빔밥콩나물비빔밥열무비빔밥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첫손에 꼽히는 게 바로 불고기입니다. 옛날에는 너비아니라고 했으며, 말 그대로 고기를 불에 구운 것을 불고기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소고기 안심이나 등심을 양념하여 구운 것을 말합니다. 보통 불고기라 하면 불판에 국물을 넣고 굽는 서울식 불고기가 일반적이지만, 얇은 생고기를 살짝 양념하여 석쇠에 올려 숯불구이로 먹는 언양식 혹은 광양식 불고기도 최근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불고기는 재료에 따라 돼지불고기, 오삼불고기, 염소불고기 등 많은 종류가 있으며, 조리방법에 따라 미리 양념에 재웠다가 굽는 양념구이와 생고기를 그대로 썰어 굽는 소금구이가 있고, 굽는 방법에 따라 숯불구이, 석쇠구이, 돌판구이, 철판구이 등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불고기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야끼니꾸라고 하는 일본식 불고기도 덩달아 이에 편승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방식과 재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변주와 깊이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불고기가 우리의 전통음식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글: 블로거 비밀이야 http://blog.naver.com/mardukas

산성막걸리와 함께 먹는 흑염소불고기, 거창집

 

 


 

 

추천 블로거 잠든자유
지역 부산

 

먹을게 없어 밥을 굶는 판국에 쌀로 술을 만들어 먹어?’ 1964년 정부는 식량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전국의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시켰습니다. 그 결과 수 많은 전통 술도가가 사라지고,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그런 시대 상황에서도 대통령령으로 허가를 받아 계속 명맥을 이어온 막걸리가 있는데 바로 대한민국 민속주 1호로 등록된 부산 금정산성의 산성막걸리 입니다. 산성마을에는 막걸리와 함께 또 한가지 유명한 부산 향토음식이 있는데 바로 흑염소 불고기 입니다. 옛날에는 산성마을의 모든 집에서 흑염소를 키웠을 만큼 흑염소를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친숙하지 않은 먹을 거리인 탓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한번 맛을 보면 소고기와 구분이 안될 만큼 맛있습니다. 부산에 가면 숯불과 석쇠로 구운 흑염소 불고기에 진한 산성막걸리 한잔 꼭 맛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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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한 오징어불고기의 원조, 납작식당

 

 


 

 

추천 블로거 비밀이야
지역 횡계

 

횡계에 위치한 납작식당은 강원도를 찾은 스키어들의 추운 몸을 녹이는 음식으로 입 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유명해진 오삼불고기 전문식당입니다. 오징어와 삼겹살의 조합을 처음 만들어 낸 식당으로 동해안에서 잡은 싱싱한 생물 오징어와 삼겹살을 집에서 직접 담은 고추장으로 양념하여 불판에 구워먹습니다. 은근히 얼얼하게 매운 양념과 쫄깃하고 싱싱한 오징어, 고소한 삼겹살이 잘 조화되어 많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양념하여 석쇠에 직접 구워먹는 오징어 불고기를 곁들이기도 하며 매운 맛을 달래고자 대관령 황태로 끓인 황태국과 같이 먹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게 된 낙지불고기, 주꾸미 불고기 등은 불고기에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아닌 해산물을 함께 사용한 납작식당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고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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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맛이 느껴지는 오징어불고기, 단골식당

 

 


 

 

추천 블로거 김가
지역 예천

 

예천이 어디에 있는 곳이야? 라고 묻는 분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지난 여름 '1박2일'팀이 순대국밥 먹고, 양조장에서 생막걸리 마시고, 제유소에서 참기름 짜는 곳으로 방영된 후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치른 곳이지요. 용궁 단골식당은 45년이 넘은 오래된 식당으로 가장 유명한 메뉴는 오징어불고기입니다. 얼핏 보면 고추장소스 같지만 매운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적당히 배합해서 텁텁하지 않으면서 칼칼하게, 짜지도 않으면서 단맛도 지나치지 않은 완벽한 양념입니다. 양념한 오징어를 살짝 초벌로 팬에 뒤적이며 익힌 후 석쇠에 옮겨 연탄불에 재벌을 하는 방식인데 전혀 질기지 않게 익히는 것 또한 이 집만의 노하우입니다. 용궁면에서는 돼지막창을 순대껍질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단골식당에서도 부드럽고 고소한 막창순대를 맛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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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백한 소스의 생불고기가 일품인 손가네

 

 


 

 

추천 블로거 기억저편
지역 서울

 

외국인들에게 ‘한국’하면 생각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김치와 함께 가장 많은 대답이 나오는 음식입니다. 그만큼 외국에서도 통할만한 세계적인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은근한 단맛의 소스가 부드럽고 담백한 육질의 고기와 조화를 이루어서 모든 이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 같습니다. 성북동에 가면 질 좋은 고기와 버섯과 함께 담백한 소스가 버무려져서 나오는 생불고기집이 있습니다. 바로 ‘손가네’입니다. 무엇보다 이 집의 장점은 바로 고기 그 자체입니다. 불고기 육수에 오래 재우지 않고 내놓기 때문에 고기가 짜지 않고 얇게 썰어서 먹기 좋으며 야들야들한 식감은 만족감을 줍니다. 또, 불고기 육수는 짜지도 달지도 않고 먹기 좋은 육수 맛을 냅니다. 어느 정도 먹고 나면 불고기판에 사골육수를 살짝 붓고 당면을 넣어서 먹습니다. 불고기, 버섯, 당면과 함께 밥을 비벼먹으면 제대로 된 불고기 즐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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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고기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집, 우래옥

 

 


 

 

추천 블로거 참이술
지역 서울

 

불고기하면 떠오르는 불고기의 대명사격인 식당이 우래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을지로 4가 골목에 1946년에 문을 열었으니 벌써 60년이 넘은 노포(老鋪) 입니다. 원래 냉면과 불고기를 파는 식당으로 오픈한 만큼 대표적인 메뉴가 냉면과 더불어 불고기인 셈인데 그 외에도 등심, 갈비 또는 우설구이 등의 고기 메뉴와 육개장, 김치말이 등의 식사 메뉴도 단골들의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질 좋은 한우 고기를 감칠맛 나는 양념에 재워 특유의 구멍 뚤린 황동빛 불판에 구워 먹는 우래옥 불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맛입니다. 불고기 못지 않게 유명한 우래옥 냉면은 특유의 정육향 강한 육수에 구수한 메밀 면발이 돋보이는 냉면으로 특히 메밀 100%로 만든 순면이 유명합니다. 불고기를 다 먹은 후엔 밥 대신 구수한 냉면 사리를 넣어 끓여먹는 소위 불사리라는 음식도 별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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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하고 맛있는 불고기를 만들어 보세요.

 

소고기불고기       오징어불고기          닭불고기    돼지불고기  뚝배기불고기

 

쿵쾅, 쿠르르, 크고 작은 돌들이 굴러 떨어진다. 코끼리 무리가 달려드는 듯하다. 잘 생긴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박사가 펄쩍 뛴다. 가파른 절벽을 내달린다. 성궤가 눈앞에 있는데! 영화 ‘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1981)의 한 장면이다. 만약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한국판 ‘레이더스’를 찍는다면 그 주인공은 단연코 <음식디미방>일 것이다. 조선시대 고서적 <음식디미방>은 영화 속 ‘잃어버린 성궤’만큼 330여년 전 주방의 비밀이 가득한 보물이다. 장금이도 탐낼만한 음식의 비법들이 꼼꼼히 적혀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석계 이시명 선생과 결혼한 장계향 선생이 75살이 되던 해(1672년)에 쓴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이다. 이전에 허균의 <도문대작>이나 김유의 <수운잡방> 등의 요리책들이 있었지만, 모두 한자로 기록된 책들이었다. 이 책에는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 선생의 종가음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빛을 드러내다

이 보물책이 세상에 나오된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다. 1960년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김사엽 박사가 이시명 선생의 둘째 아들 존재 이휘일 선생의 후손 서가에서 책을 발견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서책’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김사엽 박사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전통음식연구가들은 금은보다 엄청난 보물이 이 책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5년 황혜성 선생(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기능보유자. 2006년 12월 타계)은 <음식디미방>을 보기 위해 경상도로 길을 나섰다. 그는 버스에서 한 학생에게 ‘재령 이씨댁’을 물었는데, 그 학생이 재령 이씨 13대 종손 이돈씨였다. 당시 그는 대학 1학년이었다. 장계향 선생의 285주기 불천위(집안의 뛰어나신 분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집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음식디미방

 

 

 

이렇게 황혜성 선생과 인연이 닿은 <음식디미방>은 <다시 보고배우는 음식디미방>(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저), <음식디미방 주해>(백두현 경북대학교 교수 저) 등의 여러 권의 책과 각종 논문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책은 경북대 고문서 보관실에 있다.

 

13대 종손 이돈(71)씨와 종부 조귀분(60)씨는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집안의 음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씨가 만든 석이편(석이버섯떡)은 단맛이 거의 없고 담백하다. 석이버섯을 잘게 다져 찹쌀가루, 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들고 그 위에 잣가루를 얹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 첫 맛은 너무 거칠어 떡인지 의심이 간다. 하지만 한 개, 두 개, 먹을수록 자꾸 손이 가게 하는 묘한 맛이 있다. 이 떡을 만드는 법은 <음식디미방>의 면병류 석이편법에 자세히 나와 있다. 종부는 “장씨 할머니 음식 중에 잡채, 대구껍질느르미, 동아느르미, 모시조개탕 등이 인상 깊다”고 말한다.

 

  

집안 몰락으로 흩어진 유물 찾으려 돈 버는 일부터 나서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에 있는 <석계고택>


지금 수원에 살고 있는 종손과 종부는 노구에도 조상이 남긴 유산을 아끼고 세상에 알리는 데 여념이 없다. 장계향 선생이 노년을 보낸 고택(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 옆에 집을 지어 종가를 새롭게 단장했다. 최근엔 <음식디미방>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곧 고향에 내려갈 예정이다.


6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종부는 안동 지역에서 열리는 종가포럼에 참여하고 종가음식에 대한 강연도 한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추운 겨울에도 고운 한복을 여며 입고 길을 나설 정도로 열정이 가득하다. 300여년 전 총명했던 장계향 선생을 보는 듯하다. 그는 “후손으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며 겸손해한다.

 

 

 

그저 평탄한 삶을 산 듯 보이는 종손은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의 아버지 이병흠씨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다. 집안은 황폐해졌다. 전쟁통에 집안의 유물들은 하나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씨는 종손으로서 그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쟁이로는 뜻을 이루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10년간 잡아온 교편을 접고 37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설립한 가방회사는 1970~80년대 ‘백만불 수출탑’에 이어 ‘오백만불 수출탑’을 탈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집안의 유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전가보첩>은 그렇게 해서 다시 찾은 집안의 유물이다. “할머니를 알리는 일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종손은 지금도 생각한다.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나눔에도 큰 손

장계향 선생을 흔히 ‘정부인 장씨’라고 부른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숙종 18년에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칭호를 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1598년(선조 31년) 경상북도 안동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 선생(고려 태조 정필의 후예)과 첨지 권사운의 여식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살에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했다. 장흥효 선생은 제자인 이시명 선생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장계향 선생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시도 잘 짓고 서예에도 능했던 장계향 선생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이함 선생의 문집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해요.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주었답니다.”종손의 기억이 곱다.


장계향 초상

 

 

 

장계향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은 장계향 선생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인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기록된 모든 음식 개량화해서 좀 더 실용적으로 복원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종손과 종부만 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결성돼 일부 음식을 재현하고 있다. 2009년엔 영양군청에서 허성미 안동과학대 교수에게 ‘음식디미방 레시피 표준화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최근까지도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모든 음식을 개량화해 좀더 실용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책에 기록된 음식법이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복원이 쉬웠다. 하지만 면 요리는 까다로웠다”고 말한다.


복원을 위해 한 가지 음식을 수십 번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기록한 양은 엄청나게 많아요. 평상시에 늘 먹는 요리가 아니라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집안의 큰 행사, 보양이 필요할 때 만들어 먹었던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 교수가 복원한 <음식디미방>의 음식은 저칼로리 건강식이다.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대부분 찌는 방법을 사용해 담백하다. 그 중에서 ‘느르미’가 독특하다. 밀가루가 들어간 소스 같은 것이다. 잡채도 특이하다.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가 어우러진 음식이다. 종부 조귀분씨는 이 복원작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맛을 보거나 만드는 방법을 지켜보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강한 불은 ‘매운 불’, 고명은 ‘교태’, 부패한 건 ‘독한 고기’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에서 재현한 <연근채가재육>


<음식디미방>의 뜻은 ‘음식 맛을 아는 법’이다. 그 법을 살짝 들여다보자. 총 146가지 조리법이 있다. 면병류(면과 떡)가 18가지, 어육류(생선과 고기)가 74가지, 주류 및 초류(식초)가 54가지. 부록으로 ‘맛질방문’이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난 것이 많다. 밥과 죽에 대한 요리법이 없다. 밥짓기는 너무 평범해서 뻔 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국수는 밀가루가 아니라 메밀가루와 녹두가루로 만들었다. 당시엔 귀한 음식이었다.


모든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임진왜란 때라고 하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 대신 천초, 후추, 마늘, 파가 들어간다. 육류요리가 많은 데 재료는 주로 소의 위나 개고기, 꿩고기다.  개고기의 창자로 만든 순대는 별미 중 별미다. 개장찜, 개장느르미, 누렁개 삶는 법까지 세세하다.

 

 

 

곰발바닥 요리도 있다. 각종 한과와 떡 만드는 법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숭어나 모시조개, 참게로 만드는 요리들도 있어 다양하기까지 하다. 양반집답게 술 빚는 법도 여러가지다. 다식은 두장의 기왓장을 붙여 불에 데워 만드는데, 오늘날 과자를 굽는 것과 비슷하다. 허 교수는 “버섯종류로 추정되는 진이나 곰발바닥, 자라, 참새, 개 등만 빼면 요리법에 들어가는 많은 식재료가 지금도 구하기 쉬운 것”이라고 말한다. 부록 ‘맛질방문’은 장계향 선생의 외가댁 맛질마을(지금의 예천)의 맛을 기록한 것이다.


장계향 선생의 표현법 역시 재밌다. 그는 강한 불을 ‘매운 불’, 고명을 ‘교태’, 부패한 고기를 ‘독한 고기’라고 불렀다. <음식디미방>을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책의 표지에 적힌 한자 때문이다. 후손들이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본문의 첫머리에 있는 한글 ‘음식디미방’은 장계향 선생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이 맞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맛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이 보물책을 보기 위해 누구든 ‘인디아나 존스’가 될 것이다.

 

주방 들어다보기

허성미 교수가 복원한 <대구껍질느르미> 요리법
 
1. 대구(건대구/반건조 염장대구 1마리)를 하룻밤 정도 물에 불린다. 그 껍질을 벗겨내어 물에 씻어 비늘을 제거하여 약과크기로 썬다.
2. 석이버섯(1g), 건표고버섯(3장), 참버섯(20g), 송이버섯(15g)을 다지고, 꿩고기(30g)를 잘게 다져 후추, 산초가루로 양념한다.
3. 1의 대구껍질에 2의 소를 넣은 후 밀가루풀(밀가루 7g, 물 10g)을 가장자리에 붙여 삶아낸다.
4. 꿩고기즙에 밀가루를 타서 골파(1뿌리)를 넣고 즙을 내어 느르미(밀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만드는 일종의 소스)를 만들어 끼얹어 낸다.

 

 

“요것이 뭐시당가! 희한하게 생겼구만이라! 동치미는 동치민디, 우째 반토막이여! 쬐깐한 게 애기들 맹크롬 생겼구만!” ‘밀양 박씨 나주 종가’의 종부 임묘숙(83) 선생이 대청마루에 동치미를 내놓자 이 댁을 찾은 이들이 한마디씩 한다. 임씨가 “이거이, 반동치미여, 울 집에서 많이 해먹제”라고 대답한다. 지난해 12월 16일 종부, 임씨와 그의 아들, 박경중(63)씨가 살고 있는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지정이 되면서 방문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름도 ‘나주 박경중 가옥’에서 ‘나주 남파 고택’으로 바뀌었다. 남파는 박경중씨의 고조부 박재규 선생의 호이다. 이 댁의 종손은 박경중씨다. 그는 조선 인종 때 지방관헌을 했던 박부동 선생의 15대손이다.

  

누이의 분홍빛 저고리같은 빛, 국물이 끝내~줘요!

 

종부가 선보인 ‘반동치미’는 이 집의 내림음식이다. 모든 재료가 동치미의 반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세상의 ‘반’은 상실과 부족, 결핍을 떠오르게 하지만 임씨의 ‘반’은 다른 세상의 풍족함을 보여준다. 반동치미의 국물이 알려주는 종부의 넉넉한 맛의 세계다.


이 댁 반동치미는 국물색이 발그스레하다. 우리 누이 분홍빛 저고리 같다. 이 국물색의 정체는 무엇일까? 임씨가 알려준다. “고추가루제, 고춧가루, 우리 집 반동치미에는 빨간 고춧가루가 쬐까 들어가부러.” 임씨의 반동치미는 섬세하다. “무 잎삭 달린 거, 고놈 중간 크기로 고르고, 3쪽, 4쪽 잘라~.” 그렇게 십자로 무나 배추를 자르고 그 안에 갖은 채소와 과일로 만든 소를 채워 넣는다. 소는 새우젓국과 고춧가루로 버무린 것이다. 살짝 뿌린 고춧가루가 시간이 지날수록 반동치미 국물 사이로 물감처럼 번진다. 색의 비밀이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 청량한 하늘만큼 깨끗하다.


나주종가 생선전

 

 

 

이 댁의 음식에서 반동치미만 신기한 것이 아니다. 지난 12월12일 박경중씨의 증조부 박정업씨의 제사에는 고서적 같은 향긋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노련한 대장장이처럼 임씨는 눈 깜박할 사이에 뚝딱뚝딱 진수성찬을 만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서 며느리, 손주며느리, 서울에서 온 친척 아낙네까지 진두지휘했다. 금방이라도 툭하고 튀어오를 것 같았던 민어, 조기, 병치, 돔, 굴비는 종부의 손을 거치자 노르스름하고 얌전한 생선들로 변했다. 임씨는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생선의 매끄러운 껍질에 고소한 양념(간장, 마늘, 파, 깨, 참기름)을 바르고 석쇠 사이에 끼워 넣고는 숯불에서 구웠다. 고기집도 아닌데 신기하다.

 

 

 

남파고택 안채 전경


손주며느리 김선경(31)씨는 “저는 못해요. 할머니만 하시죠. 잘못 익히면 생선껍질들이 금세 벗겨져요. 제사상에 못 올리죠. 적당한 불을 아세요.” 김씨는 할머니, 임묘숙 선생의 음식솜씨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같은 나물인데도 할머니가 하시면 맛이 달라요. 3년째 배우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할머니는 제사 일주일 전부터 밑간을 하시고 준비하세요. 전날 장을 다 보시고요, 친정어머니께 죄송하지만 맛이 완전히 달라요. 종가의 음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세련된 김씨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고추전도 특별하다. 커다란 고추의 배를 갈라 그 안에 다진 쇠고기와 채소들을 넣은 고추전은 빵빵한 소시지 같다. 구운 홍어 맛도 도통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홍어를 굽고 난 다음 양념(간장, 깨, 파, 참기름)을 바른다.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이 댁 음식에는 집에서 짠 참기름이 많이 들어간다. 임씨는 전을 지지면서 “그라제, 예부터 참기름이 넉넉해서 많이 쓴당가. 근디 요즘 ‘전철’은 안 좋아, 옛날 것이 좋았지”라고 말을 잇는다. 전철? 지하철이 아니다. 임씨가 프라이팬을 부르는 명칭이다. 

 

  

7년 만의 첫 외출이 ‘할아버지’와의 첫 데이트

종부 임묘숙 선생은 18살 때 박씨 가문의 독자 박승근 선생과 결혼했다. 임씨가 시집와서 7년 만에 한 외출이 ‘할아버지’와 한 첫 데이트였다. “나갈 일이 없제, 바느질 하는 참모, 애기 봐주는 애기 다 집에 있고, 필요한 것도 일하는 사람들이 다사다주니깅, 나가면 또 소문나, 박씨 각시 왜 나왔지 하고.” 엄한 양반 댁이었다.  “할아버지(박승근)가 내 손을 잡고 나주역으로 가는 거여, 그때께 광주에서 제재소를 좀 했제, 손 꼭 잡고 미장원이랑라는 델 델고 갔어.” 수줍은 임씨의 긴 생머리는 발랄한 파마머리로 변했다. “그 양반이 만두를 사줬어, 어찌나 맛난지.” 박승근 선생이 36살에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임씨는 31살에 혼자가 되었다. 박경중씨가 11살 때다. 임씨는 평생 그 추억을 가슴에 담고 산다.


부부금슬은 좋았다. 대대로 자손이 귀했던 이 집에서 임씨는 6형제를 낳았다. 애처로워서 아끼고, 순해서 챙겨주고, 기특해서 보듬어주는 며느리였다.


박경중 선생의 증조부. 박정업 제사.

 

 

 

유달리 손님 치르는 것을 좋아했던 시어머니의 성품 때문에 집안에는 늘 30~4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손님과 집안사람들의 끼니, 집안 행사는 임씨가 주로 챙기는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밉기도 했제, 10시에 아침상 받으시고 3시에 점심상 받으시고 저녁 9시에나 저녁 자시는 거야, 겨울에는 얼마나 춥던지, 상 차리는 게 힘들었어.” 임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동네에서 현명하다고 소문난 종부였다. “그때께는 화순(임씨 고향)에 중학교도 없었어, 촌이라, 양반집이라서 (외지로) 여자 혼자 못 보냈지.”


예부터 종부의 미덕 중에 최고는 ‘잘 나누는 것’, ‘잘 베푸는 것’이다. 임씨는 ‘나누는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짱’이었다. 임씨는 제사가 끝난 후 그 많은 음식을 친인척과 오신 손님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 방법이 기가 막혔다. 똑같은 양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집은 노인이 많으니 부드러운 음식을, 어느 집은 애기들이 많으니깐 단 과자를, 집집마다 사정에 맞게 바리바리 싸주었다. 할머니가 나눠준 음식을 보따리에 싸서 집에 갈 때쯤이면 모든 이들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번졌다.

 

  

신식인 둘째 며느리는 누리집 만들어 할머니표 된장 선봬

남파고택의 대청마루 풍경


‘밀양 박씨 나주 종가’는 6대조부터 부농이었다. 5대조 박성호, 4대조 박재규를 거치면서 나주 땅 반은 ‘밀양 박씨 나주 종가’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나주사람들은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아침나절이면 이 댁의 일을 해주러 몰려들곤 했다. 하지만 세상사 늘 한결같지 않다. 박경중 선생은 “우리 증조부 박정업 할아버지는 한량으로 인심이 후한 양반이었제. 아버지 몰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 주고 그랬제. 근디 10년간 친구한테 빚보증을 잘못 서서 재산을 거의 날렸제. 그 화병으로 세상 뜨셨어”라고 말한다.


임씨의 시아버지인 박준삼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21살 때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종로경찰서에서 옥살이 했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에도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신간회’나주지회 상무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나주협동상회’를 만들어 일본상인들의 상권과 경쟁했다.

 

 

 

1945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부 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에 설립한 청운야간중학교는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였다. 청운야간중학교는 1963년 나주 한별고등공민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부농이었던 선대에는 독립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박준삼 선생의 동생 박준채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 11월3일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도화선이 된 여학생 박기옥과는 사촌이었다.


종손 박경중 선생은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울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영문학 공부했는데도 한글운동에 열심히 셨어. 제문도 한글로 쓰셨제.” 그는 할아버지 말씀이라면 꼼짝을 못했다. “전남대학교 법대를 가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기어코 농대로 보내버렸제. 농사만 지으라고.” 그는 군대 갔다 와서 농사 짓고 소를 키웠다.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도 따랐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나주문화원장을 지냈고 이어서 전라남도의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그의 아내 강정숙(59)씨와는 연애결혼했다. 강씨가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주 한별고등공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사랑이 꽃폈다. 그는 지금 나주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경중 선생은 슬하에 쌍둥이 남자형제와 딸을 두었다. 큰 아들 박준영(34)은 서울에서 외국계은행을 다니고 있고 재작년에 아들 박준량을 얻었다. 박경중씨는 “우리 준량이한테 거는 기대가 크제, 우리 종손이여”라며 웃는다. 박씨의 둘째 며느리 김선경씨는 최근 누리집(www.npgotaek.com)을 인터넷 세상에 띄웠다. ‘남파 고택’이라고 이름 지은 할머니의 된장을 세상에 선보이는 장터다. “할머니 된장이 너무 맛나요, 건강한 음식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요.” 종부 임씨의 손맛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이어간다.

임묘숙 종부가 전해주는 ‘반동치미’

 

1. 크기가 작은 배추나 무를 골라 길게 세로로 자르고 소금을 친다. 한나절 둔다.
2. 그 안에 여러 가지 채소와 과일로 만든 소를 넣는다.
3. 소는 잘게 썬 당근, 파, 쪽파, 미나리, 청각, 배, 석화, 무, 생밤채, 마늘채 등을 끓인 새우젓국물 조금과 고춧가루로 버무린 것. 

    새우젓국은 새우젓(1)과 물(5)을 섞어 끓인 것이다.
4. 그런 다음 이것을 끈으로 묶는다.
5. 이때 으깬 마늘과 생강이 들어간 작은 주머니를 만든다. 항아리에 바닥에 납작하게 썬 무를 깔고 묶은 동치미를 쟁여둔다.
6. 주머니와 사과와 배 조각, 청각을 사이사이에 끼워둔다.
7. 자른 납작 무로 맨 위를 막는다. (먹을 때는 이 무를 거둬낸다)
8. 끓여두었던 새우젓국물을 3일후에 붓는다. 동치미 위로 찰박찰박 찰 정도로.

 

소란스럽다. 달그락 달그락. 5평도 안 되는 작은 부엌에 아낙네들이 5명이나 모여 있다. 쪼그리고 앉은 폼이 천상 요가하는 인도인이다. 한복을 곱게 여며 입은 아낙도 있다. 대장이다. “고기 한동가리 가죠 온나”, “김은 어찔까”, “계름하겨 달라고.” 부엌 바닥에는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주인님을 위해 차린 듯한 산해진미들이 쫙~ 깔려 있다. 부엌에 들어선 이들은 모두 까치발로 총총걸음이다. 스르륵, 부엌문이 열리자 굵고 정겨운 소리가 들린다. “숙아, 다 됐나?” ‘안동 장씨 경당 종택’ 종손 장성진(72)씨가 아내 권순(71)씨에게 하는 말이다. ‘숙’은 딸의 이름이다.

  

돈전은 이란성 쌍둥이…우엉조림은 샤프펜슬 심만큼 가늘어

 

새해 1월1일, 경당 종택은 시끄럽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친지들이 종손에게 새해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인사도 인사지만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장씨의 재종숙인 장기철(70)씨는 “종부 음식은 감미롭지. 첫날 그 맛난 것으로 시작하면 최고로 기분좋지”라고 말한다.


종부가 만든 호박전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달걀노른자만 입힌 것은 노란색 호박전, 흰자위만 입힌 것은 흰색 호박전이 된다. “돈전 예쁘지?” 돈전? 납작하게 자른 호박 모양이 동전을 닮아서 ‘돈전’이라고 부른다. 우엉조림은 샤프펜슬 심만큼 가늘게 잘려 차분하게 접시에 앉아 있다. 육회는 두 가지 색이 어우러져 눈을 확 잡아끈다. 짙은 녹색의 미나리와 빨간 육고기. “우리 집안은 육회에 꼭 미나리를 넣지.” 장성진씨의 누이  후진(74)씨가 정겨운 미소로 일러준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미나리향이 혼례를 치르는 누이의 입술처럼 붉은 고기조각에 배여 있다. 후각이 입안의 세포를 깨우고 미각이 급하게 흥분한다. 맑고 넉넉한 명태찌개는 소금기 없는 담백한 바다 같다. 북어를 두들겨 만든 고운 가루를 참기름으로 버무린 ‘보푸라기’도 맛나다.


경당종택 손님 맞이상. 경당종택은 새해에 정갈한 음식으로 손님을 맞는다.

 

 

 

권씨는 바쁘게 ‘팥잎국’을 끓인다. 팥잎국은 종손 장씨가 가장 좋아하는 국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친근한 식재료다. 팥의 잎이다. 보기에는 맑은 시래기국 같지만 맛은 완전 딴판이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비할 데 없다. 장성진씨는 12년 전 갑상선암에 걸렸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넉달 만에 생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종부의 지극정성이 그의 마음을 돌렸다. 종부는 그가 좋아하는 팥잎국을 정성스럽게 식탁에 올렸다고 한다. “종손이 좋아해서 자주 해주었지요. 지금까지도 자주 해먹어요. 다른 집에선 이제 안 먹는 음식이지요.”라고 말한다.


팥잎국은 말린 팥잎을 살짝 삶아 콩가루에 묻힌 후 다시마와 멸치로 우린 물에 넣고 끊인 국이다.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숙명여대 한국음식연구원 연구원 심기현씨는 “일반적으로 말린 채소는 성분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고 식이섬유도 풍부하다”고 말한다. 콩가루의 영양은 말할 것도 없다.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선생의 아버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경당 종택은 경당 장흥효(1564~1634. 조선 중기 학자) 선생의 종가다. 장흥효 선생은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선생의 아버지이다. 장계향 선생의 친정이 되는 셈이다. 장흥효 선생은 벼슬길을 멀리하고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후학 양성에 전념한 학자이다. 안동 장씨의 시조는 태사 충헌공 장정필 선생이다. 장정필 선생은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에 당나라에서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넘어왔고, 고려 태조 13년에 김선평, 권행 등과 군사를 일으켜 견훤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고려 태조는 그 공을 높이 사 ‘태사’라는 벼슬을 주고 안동을 ‘식읍’(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리던 토지와 가호)으로 하사했다. 종손 장성진씨는 장정필 선생의 37대손이자 장흥효 선생의 11대손이다.


종부 권순 선생은 25살에 26살이었던 종손과 결혼을 했다. 조용하고 단아한 종부는 마음에 작은 한이 있다. 혼례를 치르던 날, 25살 처녀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이가 신랑이었다. 이날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을 입는 날이다. 평생 단 한번이다. 하지만 권순 선생은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지 못했다. 흰옷을 입고 절을 올리고 혼례를 치렀다. 종손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신랑은 군대 가버렸지. 시어머니 빈소가 집안에 있어서 3년간 조석을 올리고 곡소리도 했지. 3년간 흰옷만 입었다니까.” 종손은 “나 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며 지긋한 시선으로 종부를 바라본다.

 

  

겨울난 밤늦은 귀가 때면 문지방에 물 살짝 부어 얼게

 

경당종택 들머리


종손 장성진 선생은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3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대구시청 공무원시험을 치르고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종가를 지켜야 한다는 부친의 뜻 때문에 사회생활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부친은 종손에게 알리지도 않고 덜컹 대구시청에 사표를 냈다.

 

종손은 31살이 되는 해에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종손의 방황이 시작했다. 완고한 아버지와 젊은 열기가 충만했던 아들은 반목했다. 그 사이에서 종부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시누이 세 명과 살았다. 마음씀씀이가 착하다고 소문난 ‘선한’ 종부는 남편이 겨울날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문지방에 살짝 물을 부어 얼게 하고, 대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삐걱’ 소리라도 나는 날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들에게 시아버지는 불호령을 내렸다.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서 마음 졸이던 그에게 빛이 들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40여년 전 아버님이 정남향으로 있는 집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선조의) 묘 자리를 옮겼지. 그때부터 부자관계가 좋아지더라고.” 조금씩 마음을 잡은 종손은 농사도 짓고 종가를 알리고 지키는 일을 했다. 덜컥 갑상선암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강한 의지와 종부의 정성으로 이겨냈다. “나무와 꽃을 심고 담배, 술은 전혀 안 하고 뒷산 조깅을 했지. 마음을 비우고 살았어.”종손은 지금도 약을 계속 먹고 있지만 병은 거의 완치되었다고 말한다. “모두 아내 덕이죠.”

 

  

동동주는 술같지 않은 술…한과는 미술품

 

종부의 음식솜씨는 유명하다. 친정이 종가였기에 어릴 때부터 ‘배운 가락’이 있는데다 시집와선 시누이들에게 장씨 종가의 맛을 배웠다. 안동문화해설사 김호태씨는 “장씨 집안 음식솜씨는 안동에서도 유명합니다. 종부의 안동국시는 서울에서도 맛보려고 내려올 정도죠. 마치 장계향 선생이 돌아온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종부가 해주는 안동국시는 국수 가락을 신문지에 올려놓으면 훤히 글자가 비칠 정도로 얇다.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으면 사탕처럼 사르르 녹는다. 5살 아이가 누울 수 있는 정도로 큰 도마에 긴 방망이로 양팔을 벌려 반죽덩어리를 미는 모습은 진풍경이다.


새해를 맞아 이 댁을 찾은 손님들은 국수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종부가 마지막으로 내오는 동동주와 한과, 묵나물로 넉넉하게 배를 채운다. 종부가 집에서 담근 동동주는 술 같지 않다. 벌컥벌컥 들이켜도 그저 단 음료수를 마시는 듯하고 한과는 그 모양이 칸딘스키의 미술품처럼 세련되고 그윽하다. 묵나물은 또 어떤가! 안동국시처럼 부드럽다. 따끈한 종가의 온돌방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맛과 합쳐져 ‘마음의 평화’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행복감이 밀려온다. 손님들은 길을 나서면서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2010년 한해 무병장수할 거라고 믿는다.


경당종택한과.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종부의 한과

 

 

 

종손은 지금 ‘고택 체험’를 운영하고 있다. 전화로 신청하면 이 댁에서 자고 종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최근에 종부는 몸이 좋지 않다. 종손의 누이들도 음식솜씨가 뛰어나서 종부를 도와 음식을 만든다. (경당종택 054-852-2717, 음식은 정확한 양을 미리 주문해야 한다)

종부 권순선생이 알려주는 팥잎국

1.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팥잎을 따서 음지에 말린 뒤 양파자루에 담아 보관한다.
2. 말린 팥잎을 새벽 마당에 내놔서 이슬이 살짝 떨어지게 한다. (혹은 물을 촉촉하게 묻힌다)
3. 팥잎을 삶는다. 물에 3번 정도 헹군다. 꼭 짜서 칼로 다지고 콩가루를 묻힌다.
4. 육수(멸치와 다시마로 우린 물)를 낸다. 육수에 넣고 끓인다.
5. 물이 너무 많으면 콩가루가 벗겨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 양을 적게 한다. (팥 : 물 = 2 : 3)
6. 끓으면 물을 더 넣는다. 간장으로 간을 한다. 

 

 

깔깔깔깔,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얀 눈이 지붕과 소나무 가지마다 걸린 조용한 한옥 앞에서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바쁜 걸음이다. 한겨울인데도 ‘강릉 선교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강릉을 여행지로 정한 이들이라면 이곳을 빼놓지 않는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 가옥은 소박한 미와 아름다운 정원들로 인기다. 건물들을 돌아 걸을 때마다 결마다 농도가 다른 나무들이 우아함을 뽐낸다. 고개라도 바짝 치켜들라치면 배시시 웃는 아이의 입꼬리처럼 올라간 기와들이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연못의 물향기가 꽃내음처럼 싱그럽다.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1703~1781)이 지은 집이다. 이내번의 선조 완계군 (효령대군의 7대손)은 한양에서 충주로 내려갔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그의 아버지를 완풍부원군로 칭했다고 한다. 그 후 가세가 기울자 이내번이 모친(안동 권씨)을 모시고 강릉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릉은 모친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과거 이 댁을 ‘완풍종가’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무나 재료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

 

들머리에 있는 기록을 꼼꼼히 읽다보면 어디선가 맛난 냄새가 난다. 이 댁의 부엌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냄새다. 거기엔 이 댁 며느리 홍주연(58)씨의 손맛이 배어 있다. 그는 둘째 며느리지만 1992년부터 강릉 선교장 8대 종부 성기희(2002년 작고)씨를 모시면서 맛을 이어받았다. 시어머니에게서 ‘두부선’, ‘전체수’ 등 담백하고 쫄깃한 집안음식의 맛내는 법을 배웠다.


홍씨는 “어머님은 엄하셨다. 무나 재료를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이셨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건져라, 썰어라, 알려주셨고, 내가 간을 하면 맛을 보시고 ‘됐다’ 하시면 100점이라는 소리셨다”로 말한다. 시할머니도 음식 솜씨가 좋았다. 어릴 때 기억에 오랜만에 고향집 가면 추운 겨울에도 30분이면 뚝딱 맛난 음식이 나왔다. 어머니에게 “할머니 따라 가실라면 아직 멀으셨어요”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차남 이강백(64)씨가 회고한다. 홍씨도 집안 여인네들처럼 뚝딱뚝딱 음식을 만든다. ‘선’이라는 요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우리 몸에 좋은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박이나 오이, 가지 등에 다진 쇠고기 등을 소로 집어넣고 짧은 시간 끓이거나 쪄낸다.


선교장 음식.전체수

 

 

 

이 댁의 ‘두부선’은 부드러운 두부 속에 영화 <아바타>를 담고 있다. 두부를 한 입 베어 물면 ‘나비족’의 숲에 들어선 것처럼 자연의 향이 물씬 풍긴다. 그 향취를 입 안 가득히 즐길라치면 돌연 그 숲을 종행무진 날아다니는 ‘이크란’을 만난 듯 놀라움이 머리카락 끝까지 뻗친다. 작은 덩이가 되어 콕콕 박혀 있는 쫄깃한 쇠고기와 닭고기, 석이버섯이 비상하는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두부선 한 덩이면 화성 탐험대가 며칠 버틸 식량이 된다. 그만큼 영양식이다. “간은 소금으로만 해요, 천일염을 사다가 간수를 빼고 볶아서 써요”라고 홍씨가 말한다. “설탕도 잘 안 써요. 선교장 뒤에 있는 감나무를 이용하지요. 홍시를 소쿠리에 받쳐두면 물이 빠지는데 그것을 써요.”

 

  

미술 전공자답게 색색 채소와 황태보푸라기로 ‘구절판’

 

황태보푸라기 구절판


뭉클한 영양식이 휙 하고 입안으로 사라지자 ‘전체수’(全體需)가 나온다. ‘전체수’는 닭, 꿩 또는 물고기 따위를 통째로 양념하여 구운 적을 말하는데 이 댁은 닭다리로만 한다. 모양도 희한하다. 닭다리가 마치 발레리나처럼 보인다. 닭다리에 칼집을 내고 갖은 양념을 해서 하룻밤 재운 후에 굽고 한지로 위쪽을 싸서 먹는다. “예전에 조상들은 손에 기름이 묻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색색 한지로 손잡이를 만든 거지요.” 홍씨는 맛도 맛이지만 모양을 내는 데도 수준급이다.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답다.

 

황태어장이 가까운 곳답게 황태를 이용한 음식도 많다. ‘황태구이’ ‘코다리찜’의 바삭바삭하면서 쫀득한 맛은 견줄 데가 없다. 음식이 어딘가 심심하면서 허전한 느낌이 들지만 다 먹으면 속이 편해서 부듯하다. 

 

 

 

색색 채소와 북어보푸라기가 함께 너른 접시에 등장하는 ‘황태보푸라기 구절판’은 홍씨의 아이디어다. 치자나 녹차를 이용한 물로 절인 무에 채소들과 보푸라기를 싸먹는 요리다. 아삭아삭 숲의 한 모퉁이를 씹다가 쭉쭉 눈앞에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한번 밟고 상큼한 시냇물에 발 담그는 맛이다. 홍씨는 종가댁 자손과 결혼해 그 음식을 배우고 새로운 음식도 만들어 더 풍요롭게 했다. 그가 서울에서 이곳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온 것은 1992년이다. 남편 이강백씨는 효자였다. 이씨는 아버지 이기재씨가 1980년 돌아가시고 어머니 성씨가 혼자 지내면서 건강도 나빠지자 강릉으로 내려왔다. 당시 성씨는 칠순이 넘은 나이였다.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8대 종부 성기희 선생은 선교장을 지키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이었다. 친정아버지는 여자도 학문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지식인이었다. 충북 단양이 고향이지만 일찍 서울로 올라가 신식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를 가고 싶으셨는데 여자를 안 뽑아서 서울여의전을 가셨지요. 일본 폐망을 앞 둔 때였는데 간호원이 부족하니깐 어린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 소문이 돌자 집안에서 우리 아버지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지요.”


성기희 선생은 21살 때인 1941년 4살 위인 선교장 8대 종손 이기재씨와 결혼을 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성기희 선생은 33살에 3남2녀 자녀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직장생활도 하면서 대학교육을 마쳤고 1974년 다시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건국대, 국민대, 이화여대 등에서 복식과 예절을 가르쳤다. 남편 이기재씨가 강릉 2대 시장에 취임하자 그 옆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관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89년 차문화교류 사절단 등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등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한 당찬 여성이었다.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들 줄줄이 발길

 

강릉 선교장이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된 데에는 이강백씨의 공이 크다. “1992년에 내려왔을 때 비가 새고 기와는 떨어지고 볼품이 없었지요.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 생각에 꽃을 심고 다듬었지요.” 그는 선교장을 ‘손님이 오는 집,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교장은 전통문화체험관도 있고, 한옥 체험과 전통의 맛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를 만들어 다른 고택들도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소가 되도록 돕는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밤길을 마다않고 차를 몰아 전라도, 경상도로 종횡무진 달린다.


선교장

 

 

 

그의 선교장 자랑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못에 반쯤 걸쳐 있는 ‘활래정’은 연꽃이 활짝 핀 계절이면 마치 큰 숲 위에 떠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처럼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직 대통령들 대부분이 다녀가셨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활래정’을 좋아하셨어요. 다리가 불편하시니깐 많이 걷지는 못하시고 돌에 한참을 앉았다가 가시곤 했지요. 정계 은퇴를 선언하신 후에 많이 다녀가셨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도 있다. “대통령을 마치시고 다녀가셨는데 강원도 마지막 여행이셨어요. 인간적인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진 찍자고 하면 거절 한 마디 안 하시고 팔짱을 끼셨죠. 그때 다과와 차, 떡을 드시고 가셨어요.”


안채에 있는 ‘열화당’은 이곳을 찾은 문인들과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는 공간이다. 출판사 ‘열화당’과 같은 이름이다. 대표 이기웅씨도 이 댁 사람이다. 지금도 강원도의 크고 작은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진다. 아름다운 고택이 주는 그윽한 미가 맛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우아하다.

홍주연씨가 알려주는 ‘두부선’

1. 두부를 손으로 으깨고 구멍이 촘촘한 망에 두부를 문지른다. 천에 담고 꼭 짠다.
2. 그 안에 달걀지단, 잘게 자른 석이버섯, 익히지 않고 다진 쇠고기(살코기)와 닭고기(가슴살)를 모두 섞는다.
3. 간수를 뺀 굵은 천일염을 낮은 불에 2시간 동안 볶는다. 그 소금을 넣어 간을 한다.
4. 흰후추도 조금 넣는다. 천에 싸서 양끝을 묶고 찐다.

 

“우리 어머니, 최고 솜씨요? 수란채죠! 수란채”, “우리 형님이요, 뭐 다 잘하세요. 그 중에서 수란채, 불고기, 모시송편 다 맛나죠!” 딸과 동서들이 한결 같은 소리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손 류영하(85)씨의 생신축하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음식에도 DNA가 있다고들 한다. 같은 송편이라도 맛이 천차만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DNA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손맛이 만든다.

  

음식 DNA부터 다른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 

 

안동 하회마을에 터를 잡은 류성룡 선생의 14대 종부 최소희(83)씨는 그 손맛이 남다르다. 종손 류영하씨와 스무 살에 결혼하기 전까지 그는 경주 최부자집 둘째딸이었다. 최준 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미식가였던 최준 선생은 맛난 음식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경성 요리집에서 맛난 것 드시면 그 요리사를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집에서 시연을 했어요. 모두들 따라해 보고 맛도 보고 했어요”라고 최씨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그가 경험한 맛 세계가 예사롭지 않다. 류영하씨는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아 여러 가지 놓고 먹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종부 최씨의 예민한 입맛과 섬세한 손맛이 소박하고 단아한 서애 류성룡댁의 부엌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름난 종가답게 이 댁에는 손님이 많다.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문했고 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갔다. 그때 최씨가 만든 음식이 ‘수란채’이다.


수란채에 들어가는 당근

 

 

수란채는 최씨가 귀한 손님들이 올 때마다 만드는 건강식이다. 찌고 데친 각종 채소와 문어, 게살 등에 수란(물속에서 반숙 정도로 익힌 달걀)을 얹고 잣즙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최씨가 만드는 수란채에는 보들보들한 영덕대게 다리살이 들어가고 당근이 꽃모양으로 다시 태어난다.

 

석이버섯은 기지개를 편 아이처럼 반듯하고 수란은 보름달처럼 넉넉하게 둥글다. 한 자리 차지한 데친 미나리와 문어도 향긋한 풍미를 자랑한다.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착한 맛’을 내고 있다. 숙명여대 식생활문화대학원 심기현 교수는 잣에는 비만을 예방하는 성분이 있고 대게나 문어에는 타우린이 있어 영양적인 면에서 훌륭하다고 말한다. “타우린은 피로회복과 강장효과가 있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조리법도 튀기는 것이 아니라 찌는 방식이어서 좋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저지방 고단백음식이다.

 

  

술꾼이라면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맛

 

종부 최소희 여사가 만든 가양주


잣이 들어가는 요리는 예부터 귀한 음식이었다. 종부 최씨는 꼭 국산 잣을 써야 맛나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만드는 수란채와 달리 미나리 등에 녹말가루를 묻히지 않는다. 수란을 만드는 방법도 조금은 차이가 있다. 국자에 달걀을 얹거나 그릇에 넣어 중탕으로 수란을 뜨지 않고 숟가락 뒤 부분으로 톡톡 쳐서 작은 구멍을 내고 물이 끓으면 천천히 달걀껍질을 깨서 넣는다. 흰자가 넓게 풀어지지 않게 숟가락으로 모으면서 반숙을 한다.


잣즙이 뿌려지는 순간 고소한 바다에 빠진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그 사이로 올라오는 미나리는 씹는 식감이 쫄깃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잘 떠서 드세요. 달걀 터트리지 말고 한 입 먹고, 나머지 먹어요”라고 최씨가 당부한다. 노 전 대통령은 수란채를 먹고 흐뭇하게 “맛있다”고 했다고 최씨가 전한다.

 

 

 

그는 향긋한 가양주를 만드는 실력도 최고다. 제사를 지내기 한 달 전부터 빚기 시작하는데 그 맛이 오묘하다. 달지 않은 듯한데 달고, 쓰지 않은 듯한데 쌉싸르하고, 신듯하면서 시지 않은 맛이다. 신선이 조화를 부린 술맛이다. “안동시장님이 최근에도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한 병만 달라고 부탁해서 주었지요”라고 종손이 말한다.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하다. 술꾼이라면 한번쯤 꼭 맛보고 혀의 기억회로에 저장해두고 싶은 달콤한 맛이다. 찹쌀로 죽을 끓이고 누룩을 넣은 후 1차 발효를 시키고 며칠 뒤 고두밥을 넣고 다시 발효시킨다. 이불에 폭 싸서 따끈한 방바닥에 두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성냥불을 켜서 꺼지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 지꺼기를 가라앉히고 용수(술이나 장을 거르는 데 쓰는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를 박는다. 제사 때마다 최씨는 이 술로 정성을 기울인다. 불고기 양념으로 만드는 닭다리나 모시 잎을 데쳐 꼭 짜고 쌀가루와 함께 버무려 빚는 모시송편도 담백한 건강식들이다.

 

 

 네살배기 시동생은 부끄럼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숨어 들고…

 

이 댁은 전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종가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가 류성룡 선생이다. 이순신 장군을 천거해서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해쳐나간 조선시대 학자겸 문인이다. 최씨는 “처음에 이 댁으로 시집간다고 결정 났을 때 어머니가 걱정도 많이 하셨어요. 큰 종가라서 잘 해야 할 일들도 많아서 그러셨지요”라고 말하면서 종부로서 일들은 오히려 별로 버겁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음고생은 집안의 대소사보다 신혼 때 했다. 종손 류영하씨는 일제강점기 말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을 정도로 열혈청년이었다. 종부가 “마음고생 할 일”들이 뒤따랐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다 그랬지”라고 종손이 회상한다.


그 옛날 최씨가 종택 ‘충효당’에 처음 왔을 때 풍경은 마치 오래된 한국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시동생이 네 살이었어요. 시어머니와도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마치 친자매처럼 지냈어요. 12살 차이였죠.” 어린 시동생은 부끄러움 많은 형수의 치마폭으로 자주 숨어들었다. 큰 누이처럼 키웠다. 시어머니 박필술씨는 종손이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종손의 아버지와 결혼한 분이었다. <명가의 내훈>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총명하고 현명한 분이었다고 사람들은 회상한다. 종손은 한국전쟁을 겪고 난후에 성균관대학교 생물학과를 다시 들어가서 석사까지 마치고 서울에서 생물교사로 일했다. 종부는 4남매를 키우면서 서울살림을 했다. 류영하씨는 아버지가 1971년 돌아가시자 이듬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 안동으로 내려왔다. 그는 종택 ‘충효당’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사람들과 소통하는 종가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KAL기 폭발하며 잃은 큰딸, 손님으로 북적대며 고통 치유

 

충효당에 가족들이 모이면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둘째며느리 문상원(52)씨는 “제사가 많기는 하지만 축제여요. 다들 모여서 음식을 만들고 나눠 먹고 웃음이 끊이지 않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북적북적 사람들이 자주 모이게 된 데는 가풍의 영향도 있지만 고통을 치유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종손 부부는 큰딸가족을 대한항공기(KAL) 폭파 사건(1987년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폭파된 사건) 때 잃었다. 미국 코넬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갔던 사위가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탄 비행기가 KAL기였다.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집안에도 신이 던져주는 삶의 고통이 있었다. “전날 이상한 꿈을 꾸었지요. 딸이 같이 미국가자 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여권이 없다, 하고 가져와야겠다 했는데 꿈이 깼어요”라고 종부는 말한다. 종손과 종부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고택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것으로 긴 고통의 세월을 이겨냈다.


충효당 안채를 찾은 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반짝반짝 봄볕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충효당’은 전국에서 찾아온 이들로 북적인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로 이곳을 찾은 이 누구라도 물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방학 중에 우연히 이곳을 찾은 대학생 한선미씨는 “추운데 들어와요, 궁금한 거 다 얘기해줄테니”라고 따스하게 맞아주는 종부의 손에 이끌려 ‘손녀딸’이라도 된 듯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씨가 종부에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종부가 한마디한다. “사람에겐 무엇이든 다 중요하지” 단아한 두 사람의 풍모가 우아한 고택과 어우러져 따스하기 그지없다.

종부 최소희여사가 알려주는 수란채

1. 잣을 숟가락으로 으깬다. 식초 조금 넣고 물을 붓는다. 망에 걸러낸다. 3번 정도 반복한다.
2. 마지막 내린 잣즙에 소금, 식초, 설탕을 넣고 새콤달콤하게 만든다.

3. 석이버섯은 뜨거운 물에 불리고 당근은 살짝 삶아 꽃모양으로 깎는다.

4. 대게는 삶아 다리살을 발라낸다.

5. 미나리는 살짝 데치고 홍고추도 먹기 좋게 자른다.

6. 달걀을 톡톡 구멍을 내서 끓는 물에 넣어 수란을 뜬다.

7. 그릇에 모든 재료들을 넣고 수란을 얹는다. 그 위에 잣즙을 뿌린다.

 

이것이 무슨 맛일까? 맛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건가? 쓴맛? 단맛? 신맛? 어느 한 가지 맛이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먹을수록 머리속에 물음표가 늘어난다. 냉면 사발만한 그릇 한가득 있는 밥알과 나물들, 국수 가락이 수저와 함께 한참을 놀더니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한 맛은 먹는 내내 물음표를 배가시켰는데 다 먹은 후에는 뿌듯하다. 든든하다. 갑가지 삶의 용기가 몰려온다. 정글을 헤쳐나간 탐험가의 용기가 이런 것이 아닐까! 밀림을 탐험하다가 열매를 따서 목을 축이고 그 위로 양쯔강의 물줄기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맑은 공기를 담뿍 들이마신 후에 밀려오는 차분한 뿌듯함이다.

  

이름? 이름은 뭐, 굳이 붙이자면…

 

이 음식은 지난 200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7일)안동 김씨 보백당 종가의 불천위(4대가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옮기지 않고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신위)제사에서 맛본 ‘메국수 나물 비빔밥’이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생소한 이름이다. “종부님 이 음식이름이 뭐죠?” “이름? 이름은 뭐, 제사 지내고 난 다음 먹는 음식이지. 굳이 이름 붙이면 ‘메국수 나물 비빔밥’이 맞을려나!” 종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종부는 제사상에 올리는 국수를 ‘메국수’라고 부른다고 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말하는데 설날에는 이 메가 떡국이 되기도 하고 추석에는 송편이 되기도 한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제사상에 올렸던 5가지나물을 밥 위에 얹고 그 위에 고명처럼 메국수를 올려서 함께 비벼먹는 음식이다. “제사 음식에는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안 넣지. 나물들도 모두 참기름과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한 것이고 국수를 비빌 때도 그렇게 하지.” 특별히 한 가지 강한 맛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유다.


보백당 불천위 제사에 올라가는 시금치

 

 

 

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무나물이 잘 비빈 쫄깃한 국수가락과 어울려 입안에서 모시적삼 같은 담백한 춤을 춘다. 국수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7:3으로 섞고 참기름이나 식용유 1숟가락과 물을 넣어 반죽한다. 밀가루를 뿌려가면서 큰 홍두깨로 밀어서 면을 만든다. 콩가루의 고소한 맛이 풍긴다.


종부는 “요즘은 꼭 그렇게 국수를 만들지는 않아! 힘들기도 해서. 예전 시어머니께서는 꼭 그렇게 만드셨지만.” 밤 8시에 제사를 올리고 한참이 지난 후 늦은 밤에 먹는 음식이다. 때를 놓쳐 먹는 음식은 위에 부담이 된다. 하지만 ‘메국수 나물 비빔밥’은 힘들게 지낸 제사의 노고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속도 편하다. 자연의 향취를 담은 음식이다.

 

  

불천위 제사의 풍경은 기록으로 남길 유산

 

보백당 불천위 제사


보백당 종가는 조선초기 문신인 김계행(1431-1517)의 집안이다. 김계행의 호가 보백당이다. 고려개국공신 삼태사 한 명인 김선평의 후예다. 안동김씨 묵계파의 입향조(어떤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인셈이다. 그는 젊은 날에는 성주향교, 충주향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50세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라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다. 낙향해서는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묵계서원은 1687년(숙종13년)에 창건되었다. 김계행과 응계 옥고(1382~1436:세종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학자)의 위패를 모셨다.


나풀나풀 봄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계절이 되면 묵계서원과 만휴정에는 여행객들이 모인다. 만휴정에서 내려다보는 송암폭포는 소박한 절경이다.

 

 

 

86세로 생애를 마감한 김계행은 당시로 보자면 장수를 했다. 종부 김정희(79)씨는 “우리 집안이 장수한 어른이 많지. 시어머니도 91세까지 사셨어”라고 말한다. 김씨도 아직까지 책을 젊은 사람들처럼 읽을 정도로 건강하다. 종손 김주현(81. 19대손)씨도 청년 못지않다. 종가는 지금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대구와 안동을 날마다 다닐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불천위제사의 풍경은 신기하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필수품처럼 된 시대, 연애질하는 사진조차 달나라까지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 흰옷을 입은 40여명의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는 풍경은 놀랍다. 마치 조선시대를 옮겨놓은 것 같다.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나 문화재를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보백당 불천위 제사를 자주 찾는다. 이날도 <사단법인 문화를 가꾸는 사람들>의 김기원 팀장이 출동해서 제사의 처음과 끝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기록으로 남기자는 차원입니다. 기록으로 남겨야 후손들도 알 수 있고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심한 듯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오늘날 건강식

 

종부 김정희씨는 21살에 종손 김주현씨와 결혼했다. 종손이 경북대학교 사범대 4학년 때다. 새색시는 종손의 졸업식날 대학교문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수줍게 서성였다. “궁금하기는 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지”라고 그날을 웃으면서 회상한다. 세상일에 수줍은 아낙네였다. 종손이 서울에서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곁에 있었다. 휴가라도 나오면 두 사람은 ‘전쟁과 평화’ 같은 영화를 손 꼭 붙잡고 보러갈 정도로 낭만적인 신혼을 보냈다. “종가 시집와서 일이 많았어. 그때는 몰랐지, 얼마나 일이 많은지. 지금도 고개가 설레설레 해”라고 말한다.


교실 8개를 빌려 제사상을 6개나 차린 적도 있었다. 종부는 그때 절을 24번이나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나던 때도 있었다. 32살 넘어 약국을 13년간 운영했는데 “그때는 정말 즐겁웠지, 경제적인 이유로 시작했지만 오는 사람들 인사하고 지내는 게 좋았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종손은 30년 넘게 역사 선생님으로 일했고 경상북도 교육감을 두 번 지냈다. 퇴임을 한 후에는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을 만들어 선조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16년 전 문중사람들을 모아 돈을 모으고 지금까지 장학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하기 위해 접시에 담은 떡

 

종부의 손을 거쳐 나오는 떡들은 넉넉한 인심을 담아 두툼하고 쫄깃하다. 경단, 부편, 잡과편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배추전은 싱거운 맛이 매력이다. 싱싱한 배추 잎을 따서 소금물에 잠깐 적셨다가 밀가루와 물을 섞은 것에 배추잎을 적시고 프라이팬에 굽는다. 평상시에도 자주 해먹는다. 진한 맛이 없어서 배추 자체의 아삭아삭한 맛이 더잘 느껴진다.  김주현씨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주로 채소로 음식을 많이 해주셨지요, 다시마나 해산물을 좋아하셔서 그런 요리를 잘 해주셨어요”라고 말한다. 이댁의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 중에 하나다. 옛 선조들의 무심한 듯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이 오늘날 건강식이다.

 

'메국수 나물 비빔밥' 만드는 법

1. 시금치는 삶아서 적은 양의 간장, 참기름, 깨소금으로 간을 한다.

2. 고사리는 물에 담가 두었다고 손질하고 볶아서 간을 한다. 도라지도 마찬가지로 한다.

3. 무는 얇게 채 썰어서 참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소금을 조금 친다.

4. 콩나물은 잘 씻어서 물을 붓고 삶아서 건진 후 무친다. (제철 산나물을 쓰기도 한다)

5. 국수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7:3으로 섞고 섞고 참기름이나 식용유 1숟가락과 물을 넣어 반죽한다.

6. 밀가루를 뿌려가면서 큰 홍두깨로 밀어서 면을 만든다. 면은 참기름과 소금, 통깨로 비빈다.

7. 그릇에 밥을 담고 그 위에 각종 나물을 골고루 얹고 맨 위에 비빈 국수를 고명처럼 얹는다.

8. 비벼서 먹는다. 싱거운 이는 양념 간장을 조금 넣는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한식

 

세계에 널리 알려져 사랑 받고 있는 비빔밥. 한식은 음식을 섞어서 비비고 삶고 하는 것이 유달리 많은 음식이다.


대체 우리 음식은 어떤 것일까요? 뉴욕의 어떤 음식평론가는 한식을 두고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하다.”고 했습니다. 한식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 문화적 총량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음식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해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 한식으로 생각되는 음식들 가운데에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한식의 대표 주자처럼 되어 있는 요즘 먹는 배추김치는 만들어진 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음식입니다. 불고기나 삼겹살은 1960년대 이후에 생겼으니 역사가 더 짧습니다.

 

이와 같이 긴 역사를 갖고 있는 한식은 많은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된장이나 김치와 같은 발효음식이 특히 발전해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꼽히는 특징입니다. 발효음식은 영양이나 건강 면에서 매우 뛰어난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더 각광받을 음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식은 음식을 섞어서 비비고 삶고 하는 것이 유달리 많은 음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국제적인 음식에는 비빔밥이 있고, 서민적인 음식으로는 설렁탕이나 각종 매운탕들이 있습니다. 아울러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하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고추를 사용해 매운맛을 즐기는 것도 그 특징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고추는 잘 알려진 것처럼 임란 이후에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그 이후 한국 음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국음식의 대가였던 강인희 교수 같은 분은 이 이후에 한국 음식이 완성되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먹는 식탁을 보십시오. 고추가 들어간 반찬이 항상 반 이상은 될 겁니다.

 

  

우리 음식은 밥을 먹기 위해 차려진다

우리 음식의 특징을 보려면 이와 같이 한이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니 더 복잡합니다. 그러나 여간 해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밥을 먹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을 했나요? 그러나 한식은 모든 것이 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비유를 든다면 밥은 왕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국은 왕비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장류나 김치는 영의정 같은 조정 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반찬들은 그 밑에 있는 관리의 역할을 한다고 해야겠죠.

 

한식은 여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한식의 상차림은 보통 ‘공간전개형’이라고 합니다. 한 상에 다 차려놓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서양식이나 중국식은 ‘시간전개형’입니다. 이 두 가지 형식이 어떻게 다른지 금세 아시겠죠? 양식은 각각의 음식이 시간을 두고 한 접시씩 나오지만 한식은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다는 것이지요. 한식에서 모든 반찬이 다 나열되는 것은 밥과 같이 먹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음식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음식을 같은 공간에서 맛볼 수 있도록 차린다.

 

 

그렇게 한 상을 차려놓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수저로 음식을 먹습니다. 여기에 한식의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즉 겸상을 하는 것입니다. 상 하나를 두고 여러 사람이 반찬을 이런 식으로 공유하는 것은 다른 나라 음식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물론 한국에도 외상 혹은 독상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특별한 경우에는 외상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관리가 새로 부임했을 때 그 지역의 노인들을 초빙해 접대하는 잔치를 묘사한 것입니다.

 

 

잔치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외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출처 : 김홍도. 기로세련계도(1804년 경)>

 

 

 

그런데 요즘 비싼 한정식 집을 가보면 전래의 공간전개형보다는 서양식을 따라 시간전개형으로 서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프부터 먹는 서양식을 따라 죽을 먼저 먹고 각각 음식을 단독으로 들다가 마지막에 밥과 국을 먹습니다. 하지만 양식의 시간전개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양식은 음식을 먹는 데 자유가 속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식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것

 

한식의 최고 장점 중에 하나는 자신이 그때그때 기호에 맞게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채소가 당기면 나물이나 김치를 먹으면 되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생선이나 불고기를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양식은 그게 안 됩니다. 자신의 자유나 창조 정신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샐러드가 나오면 그것만 먹어야 하고 스테이크가 나오면 고기만 먹어야 합니다. 양식에서는 채소와 고기를 같이 먹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음식은 고기를 먹을 때 김치나 마늘, 쌈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곁들일 수가 있습니다. 고기는 전적으로 이런 채소와 먹어야 하거늘 양식은 이런 자유를 완전히 빼앗아 갑니다. 고기만 먹는 게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양식처럼 한 디쉬(dish)만 먹는 것이 서양 문화에 경도된 사람들에게는 멋있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음식을 주체적으로 먹어야지 왜 주는 대로만 먹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공간전개형인 한국 음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음식의 온도 문제인데 음식이 항상 깔려 있으니 곧 식겠죠. 어떤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 명이 같이 먹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같은 음식에 수저를 대기 때문에 비위생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찌개 같은 음식을 먹을 때 여러 명이 자기 숟가락을 담그는 것은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을 잘 고친다면 한식은 분명 경쟁력 있는 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수저를 사용하는 이유는 찌개나 국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

 

그 다음 특징은 먹는 도구와 관계된 것입니다. 한식은 포크와 칼을 사용하는 양식과는 달리 수저를 사용합니다.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이나 일본도 우리와 같이 젓가락은 사용합니다만 숟가락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숟가락을 중시하는 이런 면도 우리 음식 문화의 독특한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숟가락을 애용할까요?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국과 찌개 때문입니다. 한식에서 국은 서양식에서처럼 반찬 급의 부식(副食)아니라 주식(主食)입니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개인적으로는 국을, 집단적으로는 찌개 먹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설렁탕이니 김치 찌개니 하는 한국인들의 애호 음식을 보면 한국인들이 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선회를 먹을 때에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매운탕을 끓여 먹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뜨듯한 국물을 더 좋아하는 민족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한식의 세계화는 우리 음식 사랑에서 시작한다

해외 입양인들에세 한국 전통의 맛을 전하기 위해. 접시에 비벼먹을 수 있도록 새롭게 만든 진주 논개 비빔밥.

 

 

 

지금 정부에서는 한식을 세계화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부터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야 하고 많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연구도 턱없이 부족하고 제대로 된 한식을 취급하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한식을 세계화하기 이전에 우리부터 우리 음식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심층기획 ? 한식, 세계를 요리하라 | 중앙일보 2010-02-11
중앙일보는 지난해 1월 말 '한식 세계화'를 어젠다로 제안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정부에 전담부서가 생겼고 민간에서도 의욕적인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전문가들은 “한식 세계화의 필요성은 일찌감치 국민적 합의가 이뤄졌지만...
불고기에 비빔밥까지…우주식품도 ‘한식 바람’ | YTN TV 2010-02-05
최근 전 세계적으로 우리 전통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주인들이 먹는 우주 식품에도 한식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안전성과 기능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재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 2008년, 첫 한국인 우주인 이소연 씨를...
한식이 뜨니 ‘우리 그릇’도 뜬다 | 헤럴드 생생뉴스 2010-02-01
막걸리, 비빔밥 등 한식의 세계화 바람이 거세다. 순수 전통음식과 퓨전요리, 고급 한정식과 군것질거리까지 우리 먹을거리의 세계무대를 향한 당찬 시도들이 넘쳐나는 요즘, 덩달아 우리 그릇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이 있듯...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신뢰, 가족, 연인, 정의, 부, 명예…? 사람마다 다르다. 삶은 그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찾아 나서는 여행길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만치 않다. 해답은 언제나 롤러코스트 같다. 우리 맛에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다행히 그 답은 명쾌하다. 한국음식연구원 전희정 교수는 “장입니다. 맛을 내는 조미료역할을 서양에서는 소금이 했지만 우리는 간장, 된장, 고추장이 했지요. 우리음식의 맛을 좌우합니다. 장맛이 좋으면 그 집안이 성한다는 옛말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전 교수는 장을 담글 때 중요한 것은 물과 소금, 메주, 독이라고 말을 한다.

  

메주와 간장 분리 기간도 여느 집보다 서너해 긴 4개월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고즈넉한 파평 윤씨 명재 윤증 고택(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의 종가의 장은 유명하다. 단아한 한옥 마당에는 수 백 개의 장독이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며 줄서있다. 물은 조상대대로 먹었던 우물에서 모터를 이용해서 퍼 올려 쓰고 메주는 가을에 농사지은 우리 콩으로 만든다. 소금은 몇 해 동안 간수를 뺀 서해안 천일염을 쓴다.


재료도 건강한데 이 댁의 장은 다른 집과 다른 점이 있다. ‘씨간장’, ‘씨된장’이다. 윤증선생의 13세손인 윤완식(55)씨는 “수 백년 이어온 전통입니다. 아주 오래전 담근 장맛이 아주 좋았던 때가 있었어요. 한 270여년 전이지요. 그때 그 장을 따로 보관해서 다음해 장을 담글 때 사용했어요. 해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집 간장과 된장은 ‘전독간장’, ‘전독된장’이라고 부른다. ‘전’은 ‘前’나 ‘傳’을 쓴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뜻이다.


명재고택 장독들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 기간도 다른 집과 다르다. 보통 장을 담그면 30~40일 지나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는데 이 댁은 약 4개월 넘어 분리한다. 윤씨는 “메주 속에 있는 좋은 것들과 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되요”라고 말한다. 장을 담그는 때도 그해 기후와 온도 등을 판단해서 황균국(메주의 발효를 돕는 균)이 가장 활발한 때를 잡는다. 이 댁에서는 보통 정월 말일에 담근다. 예부터 그날이 되면 향긋하고 구수한 메주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이곤 했다.

 

  

소금 고르는 감은 예술…단 하루도 장독대 안 비워

 

그는 11대 종부인 어머니, 양창호(92)선생에게서 장 만드는 법을 모두 익혔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어머니의 ‘감’을 못 따라가는 것이 있다. 소금 고르는 법이다. 양씨는 가장 맛난 상태의 소금을 골라내는 기술은 최고봉이다. “저도 올해 생산된 소금은 한 움큼 쥐면 감이 와요, 좋은지 아닌지, 하지만 어머니는 3년, 5년 간수를 오랫동안 뺀 소금들도 한 번만 쥐어보시면 ‘됐다’ 금방 아셔요.” 그는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19살에 시집와서 70년 넘게 한 가문의 종부의 역할을 한 어머니의 맛에 대한 감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금은 한 움큼 쥐었을 때 손에 붙지 않고 바삭바삭한 것이 좋다. 잘 붙는 것은 쓴맛이 있고 그것으로 장을 담그면 장도 쓰다. 좋은 소금으로 절인 배추는 그것만 먹어도 맛난 법이다.


독도 중요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그 항아리 모양은 위와 아래가 같은 원통이다.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다. 아래쪽 지방일수록 가운데가 넓고 주둥이가 좁다. 윤씨는 온도가 점점 올라가서 전라도에서 많이 사용했던 독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독의 겉에는 한지를 버선모양으로 잘라 거꾸로 붙였다.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한지가 빛을 많이 반사해서 벌레들이 꼬이지가 않지요. 어머니는 그 한지 위에 ‘꿀독’이라고 글자를 적었어요, 꿀처럼 맛난 장이 되라고 기원하신 거죠”라고 말한다. 전희정 교수는 그 유래가 버선본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어머니들은 집안에서 가장 잘 안 찢어지는 종이인 버선본을 사용했다.


명재 고택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딱 하루 집을 비운 것 빼고는 늘 이 장을 지켜왔다. 나들이 다녀오면 깨끗하게 몸을 씻지 않고는 장독대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윤씨는 “그때는 미신인가 했는데 잡균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선조들의 지혜였죠”라고 말한다. 장맛은 그렇게 집안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구운 김 한 장과 간장만 있으면 세 끼 끼니 뚝딱

 

종가의 나박김치


장맛이 좋으니 이 댁의 모든 음식은 간단한 나물 무침조차 맛깔스럽다. 이 댁의 둘째딸, 윤경남(64)씨는 “어릴 때 하얀 밥에 살짝 구멍을 내고 달걀노른자를 얹고는 우리 집 간장을 뿌리고 그 위에 살짝 꿀을 얹어 비벼먹었어요. 반찬이 없어도 그렇게 맛날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구운 김 한 장과 간장만 있으면 세 끼 끼니를 뚝딱 배부르게 해결했다. 윤씨는 어머니, 양창호 선생이 그 간장으로 만들어줬던 떡전골과 게장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소금이 아니라 간장으로 간을 하는 검붉은 나박김치도 독특하다.


떡전골은 모든 재료에 간장을 조금씩 넣어 간을 하고 떡은 육수에 하루 동안 재워둔다. 육수는 쇠고기 갈비뼈로 만든다. 양씨는 떡의 굳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칼이 힘겹게 들어갈 정도로 굳어 있어야 재워두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다진 쇠고기 살코기에도 간장으로 조물조물 간을 한다. 떡이 익은 후에도 간장으로 마지막 간을 한다. 쫄깃한 떡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우아한 맛이다.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마치 ‘태양의 서커스’의 단원들이 높은 외줄에서 정확한 균형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맛이다. 비단 옷 입은 우아한 우리 어머니의 단아함이 느껴진다.

 

 

 

맛난 간장으로 담근 게장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댁은 민물 게를 참기름에 하룻밤 재우고 게장을 담근다. 고소한 풍미가 입안으로 온통 아이의 까르르하는 웃음처럼 퍼진다. 전희정 교수는 “참기름의 기름은 지나치게 간장이 많이 침투해서 짜지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라고 말한다. 나박김치는 그 검붉은 색이 묘한 신기함을 자아낸다. 납작썰기한 배추와 무는 소금에 절이지 않는다. 김치의 간은 소금이 아니라 간장으로 한다. 고춧가루 물과 어우러져 싱그럽다. 맑은 물을 마시는 듯 하다가 이내 알싸한 매운맛이 코끝을 간지럼 태워 온몸이 신나는 춤을 춘다. 그 춤사위에 나박김치 사이로 동동 떠다는 달디 단 배 조각이 한수 거든다. 간장은 그 색만큼 진하다. 진한데 짜지 않다. 혀끝을 살짝 건드리는 단맛도 튀어나온다. 만날수록 폭폭 빠져버리는 연인을 닮았다.

 

 

 음식은 의외로 단아하고 검소…증조부는 일찍 깬 천문학자

 

명재고택 종가의 음식은 단아하고 검소하다. 파평 윤씨 중시조인 명재 윤증(조선 중기 학자) 선생은 제사도 짐이 될 수 있다며 간소하게 치르라고 후손들에게 일렀다. 불천위제사도 지내지 않고 제사상에 전도 없을 정도로 간소하다. 날도 양력으로 잡는다. 윤완식 선생의 증조부 윤하중 선생 때부터다.

 

그는 천문학자였다. “1944년에 돌아가셨는데 1939년에는 동아일보에 천문학에 관한 글을 기고도 하셨어요. <성력정수>라는 논문도 쓰셨어요”라고 윤씨가 말한다. 음력으로 하면 빠지는 날도 있으니 양력으로 해라 일렀단다. 신학문을 빨리 받아들인 증조부는 자손들을 모두 서울로 유학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는 1년에 한번 손자, 손녀들을 불러 모아 1년 계획서를 제출하게 했다. 그 내용을 보고 용돈을 주었다. 나이가 많은 동네 노인들은 그가 독립자금도 지원했다고 말한다.


종부가 살고 있는 명재고택 안채

 

 

 

양창호 선생은 19살에 중매로 11대 종손 윤여창 선생과 결혼해서 70년 넘게 고택을 지켰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정권을 견딘 강단 있고 활달한 여성이었다. 종부는 “내 퇴직금을 다오”, “사내들이 그것도 못 하냐”고 호통하실 정도로 여장부다. 지금은 귀가 어두워 예전처럼 사람들과 소통하기는 힘들지만 미각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자식들은 말한다.


12대 종손인 윤완식씨는 7남매의 둘째 아들이다. 7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형도도 12년 전 작고하자 그가 ‘종손’을 대행했다. 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윤씨의 큰 아들 윤형섭씨가 종손의 대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어린 후손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그를 12대 종손으로 정했다. 윤씨는 12년 전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집에 내려와 집안을 돌보면서 우리 전통문화에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 고택문화재소유자 협의회>를 만들어 고택을 수리하고 종가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고택 지켜내는 한 방법으로 교동간장 상품화

 

그는 고택 한쪽에 아담한 서가, <작은 도서관>도 만들었다. 누구나 그곳에서 우리문화와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다. 지난해에는 종가의 유물 1만643점을 충남 역사문화 연구원에 기탁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땅을 파고 유물을 묻어 지켜낸 것들이다. 그는 집안의 간장을 상품화해서 ‘교동간장’을 만들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어요. 고택을 지켜내기 위해서 한 방법이지요. 빈집이 되면 안 되죠. 사람이 사는 집이어야 하니깐. 어머니는 반대도 많이 하셨지만 지금은 잘했다 하십니다. 장독문화도 보존하고 싶었고 우리음식이 나이가 들수록 얼마나 건강음식인지 깨달으면서 결심했지요”라고 말한다.


봄꽃들이 만발하면 명재고택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든다. 세상 사람들과 고립되어서 홀로 외롭게 있는 낡은 집이 아니라 현대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곳이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길게 늘어선 장독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해 4계절 이곳을 찾는다. 집을 나서는데 종부 양창호 선생이 한마디 던진다.  “우리 집 간장 맛 어때요?” 돌아오는 답은 “따봉.” 엄지손가락이 기와집 처마만큼 올라간다. (고택체험을 할 수 있다. 미리 식사를 예약하면 이 댁 간장으로 만든 된장국과 간소한 반찬을 맛 볼 수 있다. 간장은 500ml가 1만9천원, 900ml가 3만3천 원이고 된장은 450그램이 1만 원, 900그램이 1만9천 원이다)

 

윤경남 선생이 알려주는 떡전골

1. 조금 딱딱한 가래떡 준비한다. 3~3.5센티로 자른 후에 4등분한다.

2. 쇠고기 갈비뼈로 육수를 만든다. 한 5~6시간 끓인다.

3. 육수에 떡을 12시간 재워둔다.

4. 다음날 지방이 없는 순 살코기를 준비해서 곱게 다진다.

5. 다진 고기에 파, 마늘을 넣고 배도 갈아 넣는다.

6. 참기름과 전독간장으로 간을 해서 조물조물 만진다.

7. 재워 둔 떡과 육수를 분리한다.

8. 육수의 기름을 걷어내고 전독간장을 아주 소량 넣어 간을 한다.

9. 그 육수를 끓이다가 떡을 넣는다.

10. 준비한 양념 고기를 넣고 익힌다.

11. 다 익으면 황백지단과 석이버섯을 고명으로 올린다.

12. 석이버섯은 끓은 물에 불려 돌돌 말아 잘게 썰어 올린다.

 

 

봄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꽃바람 대신 3월에 꽃샘 눈보라가 친다.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아 공포스럽다. 싸락눈이 하늘을 덮은 3월 중순 서울에서 1시간가량 거리에 있는 경기도 광명시 ‘충현 박물관’을 찾았다. 물어물어 가는 길은 팀 버튼의 ‘앨리스’로 만든다. 복주머니의 주둥이처럼 박물관 앞은 좁고, 크고 작은 집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도시 속에 꽁꽁 숨어있다. 충현 박물관에는 문화재가 많다.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있는 고택은 흔히 너른 주차장과 잘 정비된 도로가 있기 마련인데 충현 박물관은 아니다.

  

3대에 걸쳐 영의정 지내…살아서도 검소 죽어서도 검소

 

충현 박물관은 조선시대 학자 오리 이원익 선생(1546~1634)의 후손들이 사재를 털어 세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 제 90호로 지정된 오리 선생의 사저 관감당과 후손이 살던 종택,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오리영우(梧里影宇)와 오리 선생의 영정 4점, 친필 임금의 교서 문집 등 각종 유물 150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교수였던 이원익 선생의 13대 종손 이승규(71)씨가 지난 2003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동갑내기 아내 함금자 씨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이씨는 “유물들과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많았지요”라고 말한다. “이원익 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 세상에 널리 알려도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등을 공부하고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만나 조언도 구했다.


충현 박물관에 소장된 여러가지 생활도구들

 

 

 

오리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청렴하고 검소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조세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의 유서에는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장지를 고르지 말고/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도록 하라/풍수가의 말을 신빙하지 말고 자손대대 한 산지에 장사하여/시제와 속절의 모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라고 적혀있다. 충현 박물관은 종가의 후손이 문을 연 거의 유일한 박물관이다.

 

  

그냥 먹다 질려서 색다르게 만들다 보니 함씨표 탄생

 

종부 함금자 선생이 호박죽 만들 때 사용하는 팥과 동부


이 댁 밥상 역시 오리 선생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다. 종부 함금자 씨는 “결혼하고 내려오니 대고모님이 계셨어요. 그분께 집안 음식을 배웠지요. 고추장, 된장 직접 담그고 콩나물이나 두부도 직접 만들었지요. 깔끔한 한식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남아서 버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함씨는 파 써는 것부터 배웠다. “김치는 배추에 생태를 꼭꼭 눌러 넣으셨는데 고모님 아니고는 제대로 넣지도 못했죠.”  이 댁 송기 송편은 쫄깃하고 향긋하다. “삶은 송기(소나무 속 껍질)와 빻은 쌀가루를 섞어 만들었어요. 고모님의 맛은 남달랐어요. 낙지두루치기도 낙지 맛을 많이 살리셨지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아껴 낭비 없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함씨도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색다른 음식을 만든다. ‘함씨표 호박죽’이다. 아침마다 먹는 이 호박죽은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마당에 호박을 키웠어요. 늙은 호박으로 처음에는 그냥 호박죽을 만들어 먹었는데 언제부터 질리더라구요. 그래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색다르게 만들었지요”라고 말한다. ‘함씨표 호박죽’은 호박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흰콩, 밤, 우유, 팥, 올리브유까지 고루고루 들어가서 걸쭉하고 고소하다.


첫 한 모금이 확 입안을 당기지는 않지만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에 전해진다. 만드는 법은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고 세심하다. 채 썬 호박과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고 물을 넣어 익힌다. 흰콩도 불려 익혀두고 삶은 밤까지 합쳐 모두 믹서에 간다. 찹쌀가루를 조금 넣어 죽을 만든다. 완성되면 우유를 조금 넣고 삶은 팥이나 동부(팥보다 조금 큰 콩) 알갱이를 넣어 함께 먹는다. 이 댁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아침식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죽을 먹어왔다. 고혈압이나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을 피한 방법이다.

 

  

일흔 넘은 노부부 서로에 지극, 얼굴만 봐도 ‘하하 호호’

 

종손부부가 건강을 지킨 비법은 한 가지 더 있다. ‘사랑’이다. “무슨 사랑?” 일흔이 넘은 두 사람은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정겹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하하하” 웃음꽃을 피운다. 세상에 절대로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사랑과 방귀라고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솔솔 밥상에서 피어오른다. “우리는 연애 결혼했죠. 데이트 신청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는데 모두 거절했죠. 근데 지금 남편만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어딘가 어수룩하고 투박해 보이는 점이 좋았지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60년대 초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이씨와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함씨는 대학 때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았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그는 학생 때 나라를 위한 지도자가 되라는 이태영 선생(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의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결혼하고 광명시 고택에 내려와서 살았다. 종가의 제사도 지내고 문중의 일들을 보살폈다. 남편은 학업을 모두 마친 것이 아니라서 서울 신촌으로 출퇴근을 했다. 인턴을 하면서 집에 내려오지 않은 적도 많았다. 어린 신부는 낯선 환경에서 무섭기도 했다. 당시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집 뒤에 집안 조상들의 무덤이 많았어요. 이원익 선생의 유언 때문이었어요.” 바람이 휙휙 불거나 폭풍우 치는 밤이면 이불 깃을 꼭 쥐고 잠을 청했다.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이씨도 “아내 같은 사람은 없다.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도 아내는 조상들이 물려준 것을 우리 대에 없애버리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했죠”라고 서로를 칭찬한다. 이씨는 젊은 날 아내의 사진을 최근까지도 지갑에 넣고 다녔다. 지금 그 사진은 빛바랜 누런색을 입고 거실액자에 끼어있다.

 

  

종가 살림하다 뒤늦게 박물관장 맡아 꽃 펴

 

함씨의 꿈은 늦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박물관장을 맡고부터다. 정성스럽게 유물들을 관리하고 도록을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고 종가가 어떻게 지금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고민한다. ‘영정 보물지정 기념 이원익전’(2005년), ‘종가의 새로운 변모, 충현 박물관의 어제와 오늘’(2008년) 같은 전시도 꾸준히 기획중이다.

 

박물관을 더 잘 운영하기 위해 67세의 나이에 숙명여대 대학원에 입학해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이원익 선생이 남긴 유산을 잘 지켜낸 공로로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국 200여 곳 사립박물관이 회원인 사단법인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신임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충현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조선시대 월급봉투

 

 

이원익 종가는 종가로서 독특하다. 불천위제사를 비롯한 모든 제사들을 없앴다. 이원익 선생의 탄신일에 추모행사만 한다. “고민을 많이 하고 결정한 일이죠, 결정은 했지만 아직까지 고민은 계속 하고 있어요, 고택들이 지금 세상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다.

함금자 선생이 알려주는 호박죽

 

1. 늙은 호박의 껍질을 벗겨 채 썬다. 양파도 채 썬다.

2. 올리브유를 두르고 볶다가 물을 넣고 익힌다.

3. 흰콩은 물에 불린 후에 살짝 익혀둔다.

4. 밤은 삶아 둔다.

5. 이 모든 재료를 믹서에 간다.

6. 찹쌀가루를 조금 넣어 죽을 만든다.

7. 완성되면 우유를 조금 넣고 삶은 팥이나 동부(팥보다 조금 큰 콩) 알갱이를 넣어 함께 먹는다(함금자 선생은 밤을 얼려서 보관하다가

    만들 때마다 해동해서 사용한다).

‘포식혜’ 이름이 낯설다. 한국전통음식을 연구한 조리서에서도 보기 드문 이름이다. ‘식혜’하면 쌀밥을 엿기름물로 삭혀서 만든 우리나라 화채가 떠오른다. 음료가 별로 없던 시절 어머니는 얼음 동동 띄운 달짝지근한 식혜를 만들어주셨다. 우리네 훌륭한 마실거리였다. 하지만 포식혜는 마실거리는 아니다. 오히려 생선과 소금, 밥을 섞어 삭힌 ‘식해’와 비슷하다. 하지만 생선이 들어가지 않는다. 죽순, 동아(박과 식물)를 넣어 만든 죽순식해나 동아식해도 있지만 이것과도 또 다르다.

  

이것 저것 이리저리 충돌해 요상한 맛

 

이 신기한 음식은 강릉 창녕조씨 종가댁의 내림음식이다. 맛은 짭짜름하고 색은 붉다. 밥반찬으로 그만이다. 이 댁 9대 종부 최영간(64)씨는 시어머니 김쌍기(88)씨에게서 배웠다. 최씨는 “종가라서 제사가 많았어요. 명태포나 오징어포나 각종 포들이 많이 남았죠. 어머니는 아깝다고 하셨죠. 그 포를 이용해서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말한다. 포식혜는 만들기가 간단하다. 명태포나 오징어포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물에 적셔둔다. 그 포에 엿기름, 고춧가루, 찹쌀밥, 무를 섞어 삭히면 된다. 이때 무가 중요하다. 무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어서는 안된다. “콩알 크기만하게 썰어요, 무가 삭으면 효소가 나와요. 2주 정도 지나면 독 위로 물이 올라오는데 그때 먹으면 됩니다”라고 최씨가 일러준다.


적은 양을 만들어서 필요할 때마다 먹는 음식이다. 주홍치마처럼 색이 붉어 맛을 보지 않아도 매운 느낌이다. 하지만 맵지 않다. 은은한 맛이 유유하게 흐르는 우리 강을 닮았다. 시인 백석(백기행 1912~1995)이 국수를 두고 ‘아 반가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포식혜도 반가운 음식이다. 살아남은 음식이다. 살짝 딱딱한 포와 뭉클하게 삭은 밥알들이 이리저리 충돌해서 요상한 맛을 낸다. 최영간씨는 어쩌면 사라져버렸을 포식혜같은 우리 먹을거리를 잘 보존했다.


집에서 직접 만든 메밀묵

 

 

 

26살이 되던 해 이 댁 며느리가 된 최씨는 재미있는 장면을 만났다. 모내기를 하기로 한 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댁에 모였다. 한나절 모두 힘을 합쳐 모내기를 마치자 시어머니는 못밥상을 차렸다. 들과 산에서 자란 나물들을 뜯어 무쳐서 삶은 팥이 들어간 따끈한 쌀밥과 함께 상에 올렸다. 힘든 노동을 마치고 먹는 밥만큼 맛난 것이 있을까! 웃음꽃 피우고 식사를 끝내자 사람들은 다른 집으로 건너갔다. 일종의 품앗이였던 셈이다. 한달 동안 마을의 모내기는 이어진다. 김매기를 할 때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꾼들을 ‘질꾼’이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 질꾼들은 일이 끝나면 질상을 받았다. 질상은 못밥상보다 화려하다. 잡채나 호박전이나 메밀묵, 감자떡 등이 올라간다. 볍씨의 일부를 따로 두었다가 만든 씨종지떡도 한 자리 차지했다. 씨종지떡은 설탕이 흔하지 않던 시절 단맛을 내기 위해 호박오가리, 대추 등을 넣어 만든 떡이었다.

 

 

 떡하니 차려지는 일꾼들 밥상인 질상…전통음식점으로 부활

 

대청마루에 말리고 있는 나물들


“70년대 언제부턴가 사라졌어요. 결혼해 온 이후 몇 번 못 봤어요. 시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시할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자애로우셨지요. 며느리, 손주 며느리 모두 아끼셨어요. 질꾼들을 잘 챙기셨어요.” 시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뭉클 들 때면 못밥상과 질상이 생각났다고 한다. 1998년 최씨는 그 그리움 때문에 일을 저질렀다.


 “여학교 선배가 농촌지도소(농촌기술센터)에서 일했어요. 시할아버님이야기와 못밥상과 질상 이야기를 했어요. 당시 ‘농촌주부일손가꾸기’ 같은 농촌지원 사업들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곳과 연결시켜 주었지요.” 그는 집안의 내림음식들과 못밥상, 질상을 ‘서지초가뜰’이라는 간판을 단 전통음식점을 열어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하는 식 그대로예요. 우리가 농사지은 쌀과 집 주변에 나는 산나물로 밥상을 차려요.”

 

 

 

이 댁 나물 맛도 포식혜나 씨종지떡만큼이나 독특하다. “묵나물로 만들어서 그래요. 왜 이름이 묵나물이냐면 묵혔다가 만든 나물이라서 그래요.” 묵나물은 제철에 뜯어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먹는 나물을 이르는 말이다. 이 댁은 제철 나물을 뜯어서 햇볕에 말린다. 꾸덕꾸덕 마르면 삶고 집된장이나 간장으로 무친다. 마늘도 거의 넣지 않는다. 깨가루와 들기름으로 무쳐서 더 고소하다. 부드럽기가 솜털 같고 쫄깃하기가 찰떡 같다. 3~4가지 나오는 나물들이 각자 자신의 색깔을 드러낸다.


두고 온 고향땅의 흙냄새가 폴폴 고소하게 난다. 담백한 맛에 반해 버린다. 숭늉은 또 어떠한지! 잊고 지낸 외할머니의 손맛이 생각난다. “쌀을 도정하다가 남는 싸라기를 숭늉 만들 때 넣어요. 우리 쌀은 향쌀이라고 해서 맛도 좋지요.” 맛난 숭늉의 비결을 최씨가 말해준다.

 

  

신혼 부부가 들르면 아주 특별히 화전 대접

 

조상들의 맛을 잇고 이 댁을 지킨 사람들은 여자들이다. 최씨의 시어머니 8대 종부 김쌍기씨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시아버지를 모시고 7남매를 키워냈다. “시어머니는 소박하고 씩씩한 여성이지죠, 지금도 팔순이 넘으셨지만 영민하셔요”라고 최씨가 말한다.


김쌍기 선생은 18살 시집올 때 가져온 농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김씨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가르침 때문이다. 농 문짝 안쪽에는 친정아버지의 당부의 글이 적혀 있다. ‘발의 거동은 무거우며 손의 거동은 공손하며’로 시작하는 글은 마지막에 ‘눈빛거동은 씩씩히 할디니라’로 끝난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최영간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지켰다. 최씨가 말한다. “결혼하고 왔을 때 막내 도련님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형수님 소리도 못했지요.” 9대 종손인 남편 조옥현(68)씨를 따라 한때 도시에 나가 산 적도 있지만 몇 년 되지 않는다. “맏이로서 동생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다 보니 도시에도 나가게 되었죠.” 그런 집안의 역사 때문에 시누이들도 언니처럼 최씨를 따른다.


최영간씨가 만든 화전. 집 주변에 피는 꽃으로 만들었다.

 

 

 

최씨는 신혼부부가 ‘서지초가뜰’을 찾으면 종종 화전을 만들어 낸다. 집 주변에 피는 들꽃들을 따서 만든다. 태극모양으로 만든 화전도 있다. “종부로 살면서 내 아이들 잘못 챙겼어요. 우리 아들 내외 같아 보이죠. 태극모양은 태양 같은 자손을 누구든 얻으라는 뜻으로 만들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지초가뜰’로 들어서는 길은 좁다. 구불구불 길을 걷다가 쉬다가를 여러 번 하다보면 아담하고 예쁜 한옥이 나온다. 한옥 앞에는 논이 있고 뒷산에는 대나무 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휘릭 바람이 세상소리를 전한다. 여행객들에게 한자락 봄바람이 분다.

종부 최영간씨가 알려주는 포식혜 만드는 법

1. 명태포, 오징어포 같은 말린 포들을 준비한다. 물에 촉촉하게 적셔둔다.

2. 포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찹쌀로 밥을 해둔다. (포가 밥공기로 하나:찹쌀은 1kg)

3. 무(밥공기 하나 양)는 작은 콩 크기 정도로 자른다.

4. 포와 무와 엿기름(밥공기 하나)과 찹쌀, 고춧가루(밥공기로 두 개 혹은 두 개 반)를 작은 단지에 담아 2주간 삭힌다. 으깬 마늘(한 숟가락 정도), 소금(밥 공기 1/2)을 넣는다.

 

초등학생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문을 열자 마당에 큰 기와집이 반갑게 맞는다. 마당 한쪽에는 덩치 큰 개들이 멀끔히 쳐다보고 짖지도 않는다. 낯선 사람들이 자주 찾기 때문에 예사로 아는 모양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학인당’은 한옥체험을 하는 종가다. 조선시대 조광조의 제자였던 학자 백인걸(1497~1579)의 후손들이 살면서 운영하고 있다. 종부 고정환(79) 씨가 웃으면서 “뭐하러 내려와~, 별것도 없어~”라며 핀잔을 준다. 충청도 사투리와 비슷한 전라도 말이 정겹다. 그는 몇 년 전 본채 옆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한 뒤에는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다. “먹을 게 거기서 거기지~ 다른 거 뭐시 있겄어~!” 며느리 서화순(51) 씨가 옆에서 거든다. “어머니, ‘한채’ 있잖아요, ‘생합작’도 있고.” 그때서야 고씨는 “맞어 ‘느르미’도 있고 그라재”라고 말하며 웃는다. “김장철에 많이 해먹었지, 한채.” 고씨가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채 써는 손놀림이 여느 무형문화재 보유자 못잖아

 

한채는 추울 때 먹는다고 해서 ‘한채’, 차갑게 해서 먹는다고 해서 ‘한채’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장철 겨울 무가 주재료다. 겨울 무는 무 중에서 최고다. 맛은 달고 식감은 아삭아삭 살아 있다. 열량도 적고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생선회나 구이와 함께 먹으면 산성을 중화시킨다. 조상들이 생선조림에 무를 넣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뿌리에는 소화효소(아밀라아제)가 있어서 과식을 했을 때 먹으면 속이 시원하다.


이 댁의 한채는 무와 배를 오묘하게 배합한다. 채 썬 무와 배의 만남이다. 일단 무를 세로로 반토막 내고 채 썬다. 배도 납작하게 썰고 생강, 마늘, 밤도 글자가 비칠 만큼 가늘고 얇게 썬다. 종부가 파를 썬 뒤에 냉장고에서 석류를 꺼내 살펴본다. “으 못 쓰겠다. 맛이 안 나겠어, 색이 변했네” 한다. 고씨는 대신 붉은색을 내기 위해 피망을 채 썬다. 탁탁 채 써는 종부의 손놀림이 여느 무형문화재 보유자 못지 않다. 옆에서 지켜보던 며느리는 “석류 넣으면 아이들이 좋아해요, 빨간색이 나서 아주 예뻐요”라고 말한다.


백범 김구선생이 묵었던 방


 

 

이 모든 것을 순서대로 넣는다. 중간 중간에 소금이나 설탕, 식초, 깨소금 등을 넣어 맛을 낸다. “맛이 어떠? 겨울 무가 아니라서 어떨까 모르것네.” 고씨가 말한다. “어머니 괜찮네요, 맛나네요”라고 며느리가 맛본 소감을 밝힌다. 아삭아삭한 무의 식감이 잘 살고 단 배가 살짝 튀어나와 하늘을 나는 기분을 선물한다. 피망의 붉은색과 파의 녹색은 한채를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든다. 음식에 오방색을 넣어 만드는 우리 한식의 전통을 잘 살렸다. 여름에는 무 대신 오이를 써서 만든다고 한다.


이 댁에는 이렇게 소박한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살려 담백한 밥상을 만들지만 제사 때는 다르다. 귀한 것들을 만들어서 올린다. ‘생합(백합)작’이 그것이다. 생합작은 손가락 만한 크기의 백합을 사서 살을 파내 잘게 다진다. 다진 쇠고기, 당근, 표고버섯, 불린 다시마도 함께 버무려서 양념장에 재운 뒤에 살짝 볶는다. 이것들을 백합의 껍데기에 차곡차곡 넣고는 밀가루를 살짝 뿌리고 달걀을 부어 익힌다. 한 개씩 들고 작은 숟가락으로 파먹는 재미가 있다. 고단백질 영양식이다.

 

  

딸처럼 예뻐해준 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뚝뚝

 

학인당 본채 마루에서 바라본 마당


“우리집은 ‘맛나지’가 있어.” 고씨가 말을 잇는다. 이름이 생소하다. 전주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맛나지’는 일종의 장조림이다. 지금의 장조림과는 다르다. 쇠고기를 손가락 반 만하게 썰어 불고기양념에 반나절 재워두었다가 통마늘을 넣고 간장, 꿀, 참기름 등을 부으면서 조려 만드는 음식이다. 오랫동안 보관하고 먹는다. 며느리 서씨는 “일종의 저장 음식이다”라고 설명한다. “양념장 만들 때 마늘, 깨소금 넣으면 안돼야”라고 고씨가 주의사항도 전한다. “예전에 집에서 만든 간장을 썼지, 3년이나 5년 묵은 거 썼어”라고 말한다. 손주들에게 밥반찬으로 주면 좋아라 했단다. 지금도 성인이 된 손주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꼭 이 ‘맛나지’를 찾는다.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손맛이 밴 음식이다.


종부의 고향은 경상도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와서 지금까지 살게 되었다. 종손 백정기(81) 씨와는 23살에 결혼을 했다. 백씨는 중앙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전쟁에 휘말렸다.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말한다.

 

 

 

“(신랑이) 출세하는 것도 안 바랐어요, 그저 건강하게 일을 마치고 평범하게만 지내길 바랐지, 직장생활 할 때도 만날 아팠어”라고 고씨가 말한다. 백씨는 한동안 그 상처 때문에 고생을 했다. 38살 뒤늦은 나이에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서 정년퇴직까지 다녔다. 시대의 아픔이 콕콕 박힌 상처는 여러 세대가 지나도 오래가는 법. 지금 백씨는 몸이 좋지 않다. 그 곁을 고씨가 지키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인복이 많아, 훌륭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만났지, 시어머니는 딸처럼 예뻐해 주셨어”라고 말한다. 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난다. “우리 대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밥 먹이셨어, 편찮으실 때 외상값 갚으러 시장에 대신 나가니깐, 외상값 안 받아도 좋으니 빨리 나으셔야 한다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한다.


고씨는 2004년 큰아들, 백정우(56) 씨가 내려오기 전까지 덩그런 고택을 홀로 지켰다. “먹고 입는  데보다 집 고치는 데 돈이 더 들었지, 비도 세고. 집을 지키려고 시집왔나 싶더라구”라고 말한다. 지금 고씨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아들과 며느리 덕분이다. 머무는 방 앞에는 고씨가 만든 작은 꽃밭이 있다. 돌멩이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울긋불긋한 꽃들을 심었다. 고씨는 ‘나만의 꽃밭’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정부요인들이 영빈관으로 사용…주말엔 한옥체험

 

한참을 이야기에 빠져 있는데 백정우 씨가 손을 잡아끈다. 아늑한 한옥, ‘학인당’ 곳곳을 소개시켜 준다.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던 방에는 70년대 드라마에 나오는 오래된 자개농이 있고, 좁은 복도 선반에는 김추자 씨와 이미자 씨의 엘피판이 보인다. 이곳은 해방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영빈관으로 사용했었다.

 

백씨가 안내한 다락은 빛의 잔치다. 한옥의 격자 창틀을 뚫고 깊숙이 들어오는 빛은 다락방을 앨리스가 간 이상한 나라로 만든다. “이곳은 한옥체험을 하기 위해 방문한 이들 중에 원하는 분들만 아침에 한번 공개합니다”라고 백씨가 말한다. 올해 초에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가 찾기도 했다. 한옥의 아름다움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학인당 본채

 

 

 

‘학인당’(전북민속자료 제8호)은 백인걸 선생의 10대손인 백진석(진수, 1832~1906) 선생이 조선말기 흥선 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중건에 자금을 대면서 짓게 되었다. 고종이 감사의 뜻으로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그는 궁을 짓는 목수를 부탁했다. 그의 아들 백낙중 선생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 1905년부터 2년8개월 동안 지었다. 궁중 건축양식을 민간에 도입한 한옥으로 조선말 전통 건축기법을 잘 보여준다.


주말이면 한옥체험을 하기 위해 이 댁을 찾는 이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신청을 하면 백씨가 만들어주는 깔끔한 채식 밥상을 받을 수 있다. 백 씨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인생의 시련을 아내와 함께 이겨냈다. 한동안 강진에 있는 백련사에서 머문 것이 힘이 되었다. 그때 사찰음식을 익혔다. 그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다. 다양한 세상살이를 겪은 이 답게 그는 겸손하다. “이 집을 지키기 위해 그런 일이 있었나봐요. 지키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만든 정갈한 밥상이 ‘학인당’  만큼이나 우아해 보인다.

종부 고정환 선생이 알려주는 한채

1. 무 1/3을 세로로 길게 잘라 채 썬다.

2. 배 반개를 납작 썰기를 한다.

3. 마늘과 생강, 밤 한 두 개를 얇게 채 썬다.

4. 파를 손가락 마디 만한 길이로 자른다(머리 부분은 안 쓴다).

5. 석류를 까서 알갱이를 따로 둔다.

6. 그릇에 무를 넣고 굵은 소금을 조금 뿌리고 배를 섞는다.

7. 설탕을 뿌리고 마늘, 생강, 밤을 섞는다.

8. 깨소금, 식초를 뿌린다.

9. 파와 석류 알갱이(혹은 피망)를 넣어 버무린다.

10. 잣을 넣어 먹는다.

 

현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무엇일까요? 소주 아닐까요? 매일 전국에서 엄청난 양의 소주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주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소주는 인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원래 소주는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굳이 분류해서 보자면 우리가 시중에서 많이 먹는 소주는 주정(酒精), 즉 에탄올(먹는 알코올)에 물을 타 희석해서 만든 희석식 소주입니다. 반면에 진짜 소주는 막걸리의 원료인 ‘술밑’을 증류해서 만드는 안동 소주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주의 유래

 

요즘은 소주가 마치 국민주처럼 되어 있지만 우리 민족이 원래부터 소주를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원래 청주(혹은 약주)와 막걸리(혹은 탁주)를 주로 마셨습니다. 귀족은 청주를 마시고 일반 백성들은 막걸리를 마셨지요. 우리 조상들은 소주 같이 센 술 만드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소주를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몽골의 영향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것처럼, 고려 말에 우리는 몽골의 지배를 받는데 이때 이들이 먹던 소주가 고려에 소개된 것이지요. 이 계통의 소주로 지금 세간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안동소주입니다.

 

그런데 왜 안동에서 소주를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몽골이 일본을 치기 위해 만든 병참기지가 안동과 개성에 있었던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몽골군이 이곳에 주둔해서 소주를 만들던 것이 그대로 정착되어 안동이 소주로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개성에서는 근자에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다는데, ‘아락’은 아랍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주는 아마도 아랍지방에서 만들어져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소주는 앞에서 말한 대로 주로 쌀을 발효시켜 그것을 증류해서 만드는 반면, 지금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소주는 이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지금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희석식 소주는, 우선 고구마나 사탕수수 같은 원료로 당밀을 만듭니다. 이 당밀은 95%의 알코올 농도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연속식 증류기를 이용해 에탄올(에틸 알코올)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다음 여기에 물과 그밖의 첨가물을 타면 우리가 먹는 소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주가 처음 나왔을 때 알코올 농도가 몇 도였는지 아십니까? 지금 소주는 20도 이하까지 알코올 농도가 떨어졌지요? 처음 나온 소주는 30도였답니다. 그게 뒤에 25도로 되어 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최근에 계속 떨어져서 20도 밑으로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이렇듯 소주는 도수가 높았기 때문에 처음 나왔을 때에는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에 쌀이 부족한 탓에 순곡주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국민들이 어쩔 수 없이 소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막걸리의 질이 너무 떨어져 소주를 먹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1960~70년대에 술을 마셨던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카바이드’ 막걸리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막걸리를 쌀로 만들 수 없으니 밀가루 등으로 만들었는데, 발효를 빨리 시키려고 카바이드라는 하얀 돌 같은 것을 넣은 경우도 있었답니다. 이 물질을 물에 넣으면 가스가 나오는데 여기에 불을 붙여 램프 대용으로도 많이 썼지요. 이런 화학물질을 넣어 막걸리를 만들었으니 이 술을 마시면 뒤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국민들은 막걸리를 외면했고 대신 소주를 찾게 됩니다. 이 관습이 굳어져 소주가 더 인기가 있는 술이 된 것입니다.


전통주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안동소주.
<출처 : wikipedia(Matt and Nayoung Wilson)>

  

우리나라 술의 역사

 

 

소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부터 우리나라 술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보기로 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미인주’라는 게 있었답니다. 이 술은 미인인 여성이 곡물을 씹어 뱉은 것을 발효시킨 것입니다. 왜 씹은 곡물로 술을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곡물의 전분이 침 속에 있는 ‘프티알린’이라는 효소에 의해 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곡물 양조주는 이와 같이 전분을 당화(糖化)해서 발효시켜야 술이 되는데, 전분을 당화하기 위해 넣는 것이 바로 누룩입니다. 한자로는 ‘국(麴)’이라고 하는 누룩은 밀 같은 곡물을 반죽해놓으면 곰팡이의 포자가 붙어 발효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누룩 만드는 방법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 쪽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수수보리’라는 이가 일본으로 누룩을 가져와 술 빚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응신’이라는 이름의 천황은 수수보리가 만들어준 술을 먹고 취해서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후 수수보리는 일본의 주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고려 때의 [고려도경] 같은 기록을 보면 ‘왕이나 귀족들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는 반면 백성들은 이렇게 좋은 술은 못 마시고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와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때 백성들이 먹은 술은 막걸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청주는 막걸리에서 나오는 술입니다. 막걸리가 다 되면 통에 ‘용수’, 즉 싸리 등으로 만든 긴 통을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그게 청주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법주 같은 여러 종류의 청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소주를 고아내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소주고리’. <출처 : wikipedia(karendotcom127)>

 

 

쉽게 꺼지지 않는 전통

 

 

그런데 이 청주를 약주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금주령과 관계될 듯합니다. 조선조에는 금주령이 여러 차례 내려졌는데 약재를 넣은 약주는 예외였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청주를 약주인 양 사칭하면서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술을 약주로 부르게 되고 그것이 오늘날 술을 통칭하는 이름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위에서 본 세 가지의 술만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초에 쓰인 [임원경제십육지]같은 책을 보면 170여 가지의 술 이름이 나옵니다. 술의 종류가 아주 다양했던 것이지요.

 

 

 

 

최근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막걸리. <출처 : wikipedia>


사실 큰 가문에서는 제사지낼 때 쓰기 위해 나름대로 술을 빚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종류의 술이 있었겠지요. 그러던 것이 일제기에 대규모 양조업체가 생기고 밀주 단속이나 세금을 물리는 등 우리 전통술에 대해 단속을 강화하자 그 많던 전통주들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뒤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순곡주 제조 금지령’이 발동되고 여전히 밀주를 단속해 전통주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진행되다 1980년대에 들어와 지나친 간섭을 의식한 정부가 한 도에 민속주 하나씩 개발하게끔 숨통을 틔어줍니다. 이것은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올림픽을 의식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온 게 앞에서 언급한 안동 소주 같은 지역의 명주였습니다. 그 뒤로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많은 전통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꽤 인기를 끌었던 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주가 20도 이하로 도수를 낮추자 다시 전통주들이 고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술이 꺼져가는 것 같더니 이제는 막걸리 열풍이 붑니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막걸리는 전통의 주조법을 따르되 많은 연구를 거쳐 나온 명품입니다. 근자의 막걸리 열풍을 보면서 전통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꺼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안도가 됩니다.

 

 

전통주, 우체국쇼핑몰(ePOST)까지 판매 확대 | 뉴시스 2010-03-31
4월부터 한산소곡주 등 전통주를 우체국 인터넷쇼핑몰(ePOST)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충청체신청은 4월부터 전통주에 대한 인터넷 판매가 허용되면서 우체국쇼핑에 등록된 전국 44개 업체 210종의 전통주를 우체국 창구뿐만 아니라 우체국쇼핑몰에서도 구입...
서울에서 제주까지…‘전통주 대표선수’가 뛴다 | 한겨레 2009-12-14
“서울의 참이슬, 강원은 처음처럼, 경북 참소주, 전남 천년의 아침, 부산에서는 시원(C1)….” ‘서민의 술’ 소주는 프로야구 리그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지역 주류업체의 연고를 바탕으로 한 ‘전국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지역 대표선수를 자처하고 있는 소주는 “우리...
 

김치는 마치 한식의 대표 선수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우리 음식을 대표하는 아이콘처럼 되었습니다. 아니, 어떤 때는 아예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등장하는 김치는 주로 배추김치입니다. 여러분들은 배추김치가 생긴 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新) 식품’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TV사극에서 고종 초기의 수라상에도 이 배추김치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배추김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요?

 

현재의 배추김치의 맛과 형태는 약 100년 전 형성된 것이다.

 

 

주재료의 변천사

김치에서 고추가 빠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고추의 수입에서부터 보아야 하겠습니다. 고추가 임란 뒤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사실은 꽤 잘 알려진 상식입니다. 그리고 이 고추가 한식에 도입되면서 한식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음식의 대가였던 고 강인희 교수 같은 분은 고추의 수입기를 한식의 완성기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추가 들어와서 곧 김치에 쓰였던 것은 아닙니다. 김치에 고추가 쓰였다는 기록은 18세기 중엽의 문헌인 [증보산림경제](1766) 같은 책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고추가 들어온 지 150년쯤 지나서야 김치에 쓰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김치에 무엇을 넣었을까요? 한국인들은 매운맛을 좋아했던지 그 전에는 김치에 초피가루를 넣었다고 합니다. 흔히 산초와 많이 혼동되는 초피는 초피나무의 열매로 만드는 토종 향신료로 추어탕 등지에 넣어 먹는 까만 가루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가루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가루로 가공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로워 이용에 불편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고추는 재배하기도 쉽고 가공하기도 쉬워 한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아마 매운맛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고추는 최고의 향신료였을 겁니다.

 

 

문제는 배추입니다. 지금의 배추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재래종 배추는 잎사귀에 힘이 없고 무엇보다 성겨서 옆으로 처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배추는 잎사귀도 많고 아주 실해 단단하지요? 이 배추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배추를 들여와 우리나라 토양에 맞게 품종 개량해 현재의 배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김치가 나온 것이 약 100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김치를 전 국민이 자유롭게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김치를 만들 때 중요한 재료 중의 하나인 소금은 원래 비싼 식품이었습니다. 때문에 일반 평민들은 지금처럼 소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잣집에서 김치 담그고 남긴 소금물을 쓰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바닷물로 배추를 절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치를 담그면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얼마나 질 좋은 김치를 먹는지 알아야 합니다.


김치의 주재료인 고추. 조선시대 수입된 이후 약 150년쯤 지나서야 김치에 사용되었다. <출처: Wikipedia>

 

  

저장과 보존 방식의 우수성

사실 김치는 순수 우리말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자의 ‘침채(沈菜)’가 세월 따라 변해서 생긴 단어입니다. 우리나라는 김치의 종주국답게 약 200 종류나 되는 김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서울 코엑스에 있는 김치박물관에 가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 김치가 왜 대단한 식품인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흡사 한국인들이 입을 모아서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칭송하면서 정작 어떤 면이 그런가 하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치 하면 그저 발효식품이다, 유산균이 많은 식품이다 하는 정도만 알 뿐 그게 왜 대단한 식품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치의 위대성을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김치 담그기는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까지 ‘채소를 겨울 내내 싱싱한 상태로 저장 및 보존시켜주는 제일 뛰어난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하고 냉장고도 보편화되어 있어 겨울에 채소를 먹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존상 비타민C를 먹어야 하는데, 이것은 주로 채소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겨울엔 채소를 먹을 수 없어 인류는 많은 저장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많이 썼던 방법이 소금에 절이거나 말려서 보관하는 방법인데 이렇게 했다가 먹으면 아무래도 영양이 많이 파괴되고 맛이 없습니다.

 

부추, 고춧가루, 젓갈로 버무린 부추 김치. <출처: Wikipedia>


김치는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김치가 대단하다는 것은 겨울 내내 채소의 신선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끔 저장하는 방법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식품에는 이렇게 한겨울에 채소를 싱싱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김치는 신기하게도 겨울 내내 싱싱할 뿐만 아니라 어떤 단계든 모두 제각각의 맛이 있습니다. 담근 바로 직후에 먹는 ‘겉절이’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맛있게 잘 익은 단계를 거쳐 마지막 시어질 때까지 맛이 없을 때가 없습니다. 아무리 ‘시어빠져도’ 김치찌개로 해 먹으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김치찌개는 원래 신김치로 조리하는 게 더욱 맛있기도 합니다. 이런 훌륭한 저장법 덕에 우리 조상들은 겨울에도 비타민C를 섭취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히 고추에는 사과의 50배, 밀감의 2배나 되는 엄청난 양의 비타민C가 있다고 합니다.

 

 

  

만드는 과정의 단계별 특징과 효과

 

김치 만드는 단계에 나타나는 특징에 대해서 볼까요? 우선 배추를 소금으로 절입니다. 원 상태의 배추는 서걱서걱해서 사람이 씹기에는 다소 뻣뻣합니다. 소금은 이 뻣뻣함을 줄여줘 먹기 좋게 바꾸되 신선함은 유지시켜줍니다. 그 다음으로는 소금물에 들어 있던 효소들이 배추의 섬유질과 화학반응을 하면서 발효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미노산젖산이 생기고 김치의 독특한 발효맛이 나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양념을 넣는데 이 양념은 지방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추는 말할 것도 없고 마늘, 파, 젓갈, 오징어, 잣 등등 그야말로 다양한 양념이 들어가지요.

 

양념은 소금 때문에 열려 있는 배추의 섬유질 구멍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엄청난 양의 유산균이 만들어집니다. 김치의 독특한 맛은 이 유산균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데, 이 균은 창자의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고 다른 나쁜 균들이 번식하는 것을 막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유산균이 발효되는 과정에 이산화탄소가 아주 조금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물에 녹으면 탄산이 되어 김치에 시원한 맛이 나게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탄산이 너무 많이 배출돼 김치에 기포가 생깁니다. 그래서 조상들은 이 과정을 더디게 진행시키기 위해 김치를 땅에 묻었던 것이지요.  

 

 

 

김치는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냉장 기술이 발달되어 그 우수함이 조금 바라지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김치 냉장고까지 나왔으니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식탁에서 김치가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특히 라면 먹을 때가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이 김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김치가 그만큼 훌륭한 식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것을 무턱대고 외국에 수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치는 언제나 밥이나 국수와 같이 먹는 반찬이기 때문에 한국인들도 김치 하나만 먹지는 않지 않습니까? 따라서 김치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많이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장 김치를 담는 모습. 김치를 소금에 절여 놓으면 배추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고 아미노산과 젖산이 생성되어 독특한 맛이 나게 된다.

 

 

 

 

“김치에는 종주국 배추가 제격” | 아시아 경제 2010-08-17
‘원조 김캄 맛의 비밀은 배추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aT(농수산물유통공사, 사장 윤장배)는 부산대학교 김치연구소, 대상FNF 한국식 신선연구소의 협조로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 한국배추로 김치를 담갔을 때 일본배추보다 씹는 맛이 뛰어나다는...
김치에서 기능성 유산균 분리 성공…유제품시장 파급효과 기대 | 뉴시스 2010-06-29
김치에서 발효식품에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기능성 유산균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전북도농업기술원은 지난 2년간 전통식품에서 기능성 미생물을 탐색한 결과, 김치 및 동치미에서 발효식품에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산균(락토바실러스 파라카제이 등 6종) 분리에...
김치, 누구냐 넌? | 해럴드경제생생뉴스 2010-02-05
연말연시에 불우이웃 돕기로 김장을 담그는 일은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풍경이다. 이탈리아에서 스파게티를 말거나 일본에서 초밥을 싸서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얘기는 못 들어 본 것 같다. 김치는 한국인에게 부식이기도 하지만 끼니 때마다 밥상에 올라와야 하고, 넉넉히...
 

우리 음식 가운데 기내식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음식은 아마도 비빔밥일 겁니다. 비빔밥은 우리 국내 항공사들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외국 항공사들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비빔밥이 외국에서도 인기가 좋은 것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비빔밥을 좋아했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덕에 비빔밥이 세계에 많이 알려졌지요. 그런가 하면 일본인들은 ‘비빈바’로 읽으면서 이 음식을 아주 좋아합니다.

 

비빔밥은 원래 골동반(骨同飯) 혹은 화반(花飯)으로 불렸다.
골동반은 ‘어지럽게 섞는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화반은 ‘꽃밥’이라는 뜻이다.

 

 

화반(花飯)으로 불린 백화요란(百花燎亂)의 음식

그래서 이번에는 비빔밥에 대해 보려는데 이와 더불어 이 음식에 나타나는 한국 음식의 원리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비빔밥을 보면 한국인들은 섞는 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 같지요? 전 세계에 한국인들처럼 이렇게 섞어서 비비고 끓이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 음식처럼 찌개나 탕, 전골 등 여러 가지를 섞어서 끓이는 음식이 발달한 음식도 없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섞는 음식 가운데 대표격에 해당하는 것이 비빔밥입니다. 이러한 비빔밥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 음식의 진정한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 한국인들 많지 않습니다.  비빔밥은 원래 골동반(骨同飯, 혹은 骨董飯) 혹은 화반(花飯)이라 불렸는데 골동반의 경우 한자는 ‘어지럽게 섞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빔밥은 그리 오래된 음식은 아닙니다. 비빔밥이 처음으로 등장한 문헌은 1800년대 말엽에 간행된 [시의전서]라는 조리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지럽게 섞는다’는 것은 잘 지은 밥에 몸에 좋은 온갖 채소와 약간의 소고기, 그리고 여기에 고추장이나 간장을 넣어 섞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이렇게 섞기 전의 비빔밥을 보면 어떻습니까?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지방마다 다릅니다마는 우리가 주위에서 흔하게 접하는 비빔밥에는 대체로 비슷한 재료가 들어갑니다. 즉 콩나물(혹은 숙주)이나 도라지, 고사리 같은 나물과 양념해 잘 볶은 소고기(혹은 육회), 야들야들한 청포묵이 어우러지고 거기에 달걀이 얹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실 비빔밥은 이보다 더 화려한데 그 때문에 백화요란(百花燎亂), 즉 ‘온갖 꽃이 불타오르듯이 찬란하게 핀다’고 표현합니다. 앞서 본 것처럼 비빔밥을 화반, 즉 ‘꽃밥’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재료 고유의 맛들이 한데 어우러져 나오는 맛의 매력

 

 

이 비빔밥이 각광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선 재료들의 구성에 있습니다. 음식학자들은 보통 가장 좋은 건강식을 말할 때 채소와 고기의 비율이 8대2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빔밥은 채소가 조금 많지만 이 비율에 근접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아니 채소가 적정 비율보다 많이 들어 있으니 더 훌륭한 건강식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비빔밥은 예서 끝나면 안 되지요. 가장 중요한 순서가 남았습니다. 고추장을 넣고 비비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빔밥입니다. 여기에서 비빔밥 맛의 비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비빔밥은 두 가지 맛이 제대로 나야 최고의 비빔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아무리 여러 가지 재료를 넣었더라도 이 재료들이 자신의 맛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각 재료들이 맛을 잃는다면 비빔밥 안에 들어갈 의미가 없겠죠. 각 재료들은 고추장과 잘 섞여 자신만이 갖고 있는 맛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비빔밥은 이 다양한 재료들이 섞여 새로운 상위의 맛을 내야 합니다. 이 새로운 맛을 내기 위해 고추장 같은 소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때 고추장(혹은 간장)은 각 재료들을 엮어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촉매에는 참기름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비빔밥은 바로 이 두 맛, 즉 각 재료들의 고유한 맛과 그것이 합쳐져 나오는 상위의 맛이 제대로 나야 진짜 비빔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빔밥을 많이 먹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시중에서 아직 이런 비빔밥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비빔밥이라는 음식이 그냥 아무 거나 넣고 별 생각 없이 비벼 먹는 음식이 아니라 이와 같이 매우 섬세한 음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섞고 비비는 한국식 요리 특징을 잘 보여주는 비빔밥

 

이렇게 여러 재료를 섞어 새로운 맛을 내는 것은 앞에서 본 찌개나 탕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음식들도 끓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맛이 나오지 않습니까? 한국인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를 뒤섞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을 잘 하니까 어떤 학자는 ‘한국 문화는 보따리 문화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비빔밥은 섞음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한 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비빔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파격의 미학을 실현시켰다는 것입니다. 비빔밥이 처음에 나오면 어떻다고 했습니까? 꽃이 만발한 것처럼 예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예쁜 것은 잠깐이고 여기에 고추장을 넣고 마구 비벼대지요? 그래서 그 아름답던 것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질서를 단번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국인들의 강한 야성과 역동성을 봅니다. 세상에 음식을 이렇게 먹는 민족은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일전에 중국 교수와 같이 비빔밥을 먹었는데 그는 결국 비비지 못하고 그냥 밥과 재료들을 따로 먹더군요. 도저히 비빌 수가 없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회덮밥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는 원래 일본 사람들처럼 아주 정갈하게 썰어서 간장에 살짝 찍어 먹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을 한국인들은 밥에 회를 듬성듬성 썰어놓고 채소를 듬뿍 넣은 다음 고추장을 풀어서 비벼서 먹지 않습니까? 이 음식을 처음 접한 일본인들은 섬뜩 놀랜다는데 먹어보면 맛있어 한다고 하더군요.

 

비빔밥은 그야말로 종류가 다양합니다. 지금은 전주비빔밥이 유명하지만 원래는 진주 같은 다른 도시의 비빔밥이 더 유명했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방마다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거제 지방에서는 멍게를 넣는다고 하지요? 그 외에도 치즈비빔밥이나 낙지비빔밥 등 들어가는 재료들이 제한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안동의 헛제사밥일 겁니다. 이것도 비빔밥의 일종인데 제사를 지내고 남은 것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고추장이 아니라 간장을 넣습니다. 여기에 간간이 찐 조기나 도미, 상어고기 등을 곁들여 먹기도 합니다.


돌솥비빔밥. 비빔밥은 지역에 따라 그 종류와 재료가 다양하다.

 

따라서 맛도 물론 좋지만 독특합니다. 그러나 이 음식은 이런 것보다 후손들이 조상들과 같이 먹는다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이라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비벼서 같이 먹었다니까 후손들의 공동체 의식을 기를 수 있는 음식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비빔밥은 그저 하나의 음식에 불과하지만 뜯어보면 이렇게 우리 문화 코드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음식, 아니 더 나아가서 다른 전통물도 이런 눈으로 보면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렁탕 같은 음식도 고기의 모든 부위를 넣어 섞어 오래 끓임으로써 새로운 맛을 내는데, 비빔밥과 그 원리가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내식 비빔밥 맛 좋아요” 시식행렬 50m | 중앙일보 2010-09-27
한국 항공사의 기내식 비빔밥이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세계 139개국 685개 기업·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24일부터 26일까지 일본 도쿄의 '빅 사이트'에서 열린 여행박람회 'JATA세계여행박람회 2010'에서는 한식 기내식 메뉴인 비빔밥의 시연회가 돋보였다...
'비빔밥 요리책' 세계로 세계로… | 한국일보 2009-09-09
한식 세계화의 대표 주자인 '비빔밥'을 소개하는 요리책이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 4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이 책은 지난 7월 도서출판 리스컴에서 발행한 '세계인의 웰빙 푸드, 비빔밥(전지영 지음)'에서 기본 이론과 요리법을 발췌해 제작됐으며...
[예종석의 오늘 점심] 화이부동의 참맛 비빔밥 | 한겨레 2010-06-01
우리 선조들은 음식에서 섞음의 미학을 즐겼다. 국에다 밥을 섞은 탕반이나 국수에다 묵과 미나리, 숙주나물, 고기 다진 것 등을 섞은 골동면, 온갖 고기와 해삼, 전복, 천엽 등에다 전유어와 국수, 떡까지 신선로에 담아 끓여 먹은 열구자탕이 좋은 예다. 다양한...

동지팥죽 한 그릇 어떠세요?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은 왜 그립고 아름답다 생각하는 걸까?" 친구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쓰고, 다루고, 먹고, 겪던 당시에는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던 사물이나 사안들이 골동품화한 지금은 왜 그리 아름답고 그리운 형상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을까. 사라져 아쉽고, 불현듯 생각이 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지곤 하는 걸까.

 

"추억과 향수는 아름답다"는 말도 그렇다. 곽재구의 시에선 사평역이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한줌의 톱밥', '한줌의 눈물'로 연결돼 삶의 고단함을 노래하는 장소지만 우리에게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연유는 또 무얼까. 어쩌면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둔갑시키는 '시간의 마력'이 작은 행복을 주는지 모른다. 그 고통, 그 아픔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면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요 현재적이며 당연히 아름다움 또한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호호 불며 먹던 '동지팥죽'

 

동지팥죽에 얼음 "동동" 동치미
1997 12. 19 [동아일보] 23면


의문은 남는다. 단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진 것들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름다우며 아쉽고, 그리우며 되살리고 싶은 데도 그냥 추억의 곳간에 갇혀버린 것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춥고 긴 겨울밤, "온 식구가 둘러앉아 호호 불며 먹던 동지팥죽"이 바로 그런 '갇힌 것'의 하나다. 문풍지를 때리던 북풍한설조차 돌려세울 것 같던, 그 뜨겁고 맛깔스러운 동지팥죽은 지금 너무 쉽게 우리 주변에서 물러나 버렸다.

 

동지는 1년 중 밤이 가장 긴 때다. 북반구에선 연중 가장 남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며 고도가 가장 낮다. 태양이 떠있는 시간이 가장 짧으므로 일조량도 가장 적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 가장 추운 날이어야 맞다. 하지만 지표와 대기가 머금은 열량 탓에 최한 추위는 한 달쯤 후에 온다. 음양 중 음(陰·어둠 밤 달)이 극에 달하고, 이때 미세하며 작은 양(一陽·밝음 낮 해)이 처음으로 생겨나니 음양 순환의 끝이자 시작인 날이 또 동지다. 농경사회에선 그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쇠며 축제를 벌였다. 기독교의 성탄일도 동지축제 풍속이 옮겨진 것이란 설도 있다.

 

바로 그 '동짓날 긴긴 밤', 우린 팥죽을 쑤어 조상과 조상신에 올리고 가까운 친척친지와 나눠먹는 아름다운 풍속을 키웠다. 궁중에서는 관상감(지금의 기상청)이 만든 황장력(黃-粧曆·누런 표지의 책력, 달력)을 백관에게 나눠주고 관리들은 다시 백성에게 돌려 모두의 다복다행을 기원했다. 단옷날 한여름에 대비해 부채를 선물하고, 동짓날 새해맞이 달력을 돌리는 것은 이른바 하선동력(夏扇冬曆)의 미풍양속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나눔의 기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왔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던 정겨움도 실종

 

그러나 어쩐 일일까. 동지 무렵 연말연시 달력을 돌리는 풍속은 여전하지만 팥죽을 올리고 함께 먹는 풍습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빨간 팥죽에 동동 뜨는 하얀 새알심- 그걸 먹어야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그래 아이들이 연신 입언저리를 혀로 쓸며 핥던 팥죽의 기억이 사라졌다. 부엌에 쪼그려 앉거나 무쇠 솥 옆에 붙어서 한 명은 지푸라기나 나뭇가지를 아궁이에 쓸어 넣고 다른 한 명은 큰 주걱으로 솥을 휘휘 젓던 정다운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도 간데없다. 뜨거운 팥죽그릇을 꼬맹이 고사리 손에 들려 가난한 이웃에 보내던 정겨움이 실종됐다.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아침, 팥죽그릇을 들면 손바닥은 뜨겁고 손등은 얼어터질 듯 했다. 꾀를 낸다고 털장갑을 끼고 들고 가다 미끄러워 떨어트리며 뜨거운 팥죽을 뒤집어쓰고 울며 집에 돌아온 아이를 어머니는 맛 좋은 팥죽을 떠먹여주며 달래곤 했다. 팥죽을 쑤면 우선 조상신께 한 그릇 올린 뒤 이어 장독대, 광과 각 방에 또 한 그릇씩 놓아둔 뒤 먹게 마련이지만 귀여운 아들에겐 언제나 예외였다. 할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한 수저씩 떠주면 입안의 뜨거움 때문일까, 눈물 콧물이 주책없이 흐르곤 했다.

 

동짓날 팥죽 풍습은 붉은 색을 싫어하는 역신을 쫓아낸다는 전설에서 시작됐다. 대문에 붉은 팥죽을 바르거나 뿌림으로서 귀신을 몰아내고 한 해를 병치레 않고 보내려는 바람이 그 안에 담겼다. 그러나 선조들은 제 식구, 제 피붙이만의 행복을 기원한 게 아니었다. 행복과 기쁨은 나눠야 커지고 눈덩이처럼 구른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실천했다. 그래 시식(時食·때에 맞춰 먹는 음식)을 만들면 언제나 이웃과 나눴다.


동지팥죽 풍속은?
1982 12. 22 [매일경제] 11면

 

"할머니 만수무강" 이웃서 팥죽가져와 위로
1967 12. 25 [경향신문] 8면

1967년 동짓날. 서울 종로구 화동 주민들은 89세난 정은성 할머니에게 팥죽을 쑤어주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할머니는 52년 전부터 조선왕실이 쓰던 복주우물을 혼자 지키며 살아왔다. 창덕궁에서 쓰던 이 우물물은 고종도 마시던 것. 갑신정변 임오군란의 와중에 혹시 누가 독이라도 탈까 보아 궁에서 우물까지 1백m 거리에 포졸을 세우고 상궁이 그 사이를 지나 물을 떠오곤 했다. 당시 포졸이던 남편이 갑자기 병사하며 유언으로 "우물을 지켜라"고 한 것을 52년 동안 하루같이 우물가 삶을 보내왔다.

 

관할 파출소에서도 할머니에게 쌀 한말과 연탄 1백장을 보내 "한겨울 추위에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보내시기를" 기원했다. 신문들은 이 온정기사를 사회면 중요기사로 다루며 세밑을 어렵고 힘든 이웃과 나누며 보내자고 호소했다. 논설위원들은 동지팥죽의 기원과 우리 전통으로 굳은 '이웃 나눔'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 어느 칼럼은 "작은 밝음이 어둠 속에서 생겨나는 동지는 곧 희망의 싹이 트는 날"이라며 "지나면 밝고 따스한 날이 오듯 나누면 밝고 따스한 기운이 사회에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지?' 명절로 안 여기고 요리법도 몰라!

 

그러나 사실 팥죽을 쒀 나눠먹는 동지의 전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60년대 초반부터 언론은 절기로서의 동지를 소개할 때 마다 꼭 "사라지는 전통이 아쉽다"는 말을 함께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50년대에는 전쟁으로 피난 다녀 말 그대로 '살기 바빠' 팥죽을 쑤어먹을 겨를이 없었다. 판잣집 단칸살이에 팥죽은 호사였다. 강냉이 죽, 미군 군용 식으로 한 끼 때우기도 힘들었던 시절 일부러 팥과 찹쌀을 구해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60-70년대에 이르러서도 급격한 도시화와 그에 따른 간편식 바람을 타고 팥죽은 더욱 더욱 추억의 창고 안쪽으로 들어앉았다. 백자 항아리 그림을 자주 그린 수화 김환기 화백과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의 집에 들렀던 어느 제자가 동짓날 하얀 백자에 담겨 나온 붉은 팥죽을 보고 감탄한 얘기도 있지만 삶에 찌든 보통 이들에겐 그야말로 '그림 속 팥죽'이었다. 그 아름다운 팥죽 이야기는 1959년의 일이고 일화는 79년 칼럼으로 알려졌다.


세시풍속도 상품화
1988 12. 22 [매일경제] 15면

 

"팥죽이 뭡니까"
1994 12. 22 [동아일보] 31면


회사마다 대량으로 찍어 돌리는 달력이 캘린더 걸로 채워지던 시절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신문은 "동방예의지국의 안방에 벌거벗은 여체가 걸려있어서야 되겠느냐"며 동짓날 달력 돌리기 풍습이 에로틱 세속화하는 것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거리에 종은 울리는데 자선냄비엔 들어가는 것이 적다"고 한탄했다. 바로 팥죽 나눔을 통해 이웃과의 작은 정조차 단절하고 사는 무감정 세태를 한탄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동짓날 거리에 나갔던 여기자는 "동지팥죽? 그게 뭐예요?"라고 되묻는 주부들을 만나 기사를 실었다. "지방에 살거나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주부들의 경우 팥죽을 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신세대 주부들은 동지를 명절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예전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아 명절음식을 챙겼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시간도 없고 끓이는 방법도 몰라 반찬가게에서 파는 2천 원짜리 팥죽을 사먹겠다.'" 하긴 솥에 얹혀 지은 밥도 전기밥솥에 자리를 내준지 수십 년인 지금 직접 쑨 팥죽을 얘기하다니, 자칫 쫓겨나기 십상이다.

 

  

올해 동지에는 팥죽 한 그릇 어떠세요?

 

올해 동지는 12월22일이다. 초순에 끼면 애동지라 해 팥죽도 끓이지 않는 법이지만 올핸 그렇지도 않다. 팥죽 한 그릇이 그냥 팥죽 한 그릇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며 정이고 아름다움이며 나눔이던 시절이 있었다. 호호 불며 한 수저 가득 팥죽을 넣어주던 엄마의 눈을 마주보던 아이들은 아마 지금 중년 노년이 되었을 게다. 가난한 이웃 팥죽 돌리기에 나섰다 벌건 팥죽을 뒤집어 썼던 아이도 그럴 테지.

 

왕십리 중앙시장, 독립문 영천시장, 영등포시장 등 재래시장에는 옛날 팥죽을 쑤어 파는 곳이 있다. 불린 쌀을 넣어 함께 끓인 서울식, 새알심만 넣고 끓인 남도식이 그곳엔 다 있다. 입언저리를 핥으며 먹는 팥죽이 제 맛이다. 세상은 추워도 거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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