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강(외 1편) 이병초
흘겨만 봐도 시들어버릴 것 같은 소녀는 밤새 뭔가를 쓰다 만 종이쪽을 뒤로 감췄는지 동진강 잔물살을 눈썹에 매달았습니다
나는 눈도 못 맞추고 젖은 풀섶이나 바라봅니다 동트는 날빛에 묻어 반짝이는 새소리처럼 시간은 쉴 새 없이 귓전을 때리며 저리 빠져나가고 눈깜땡깜 소녀가 보고 싶었던 날들도 바람에 튼 햇살같이 볼이 땅겼습니다
門前門前을 떠돌다 돌아와 갯가 버려진 그물코에 감기는 물소리가 빠가사리처럼 소녀의 목젖을 톡 쏠 때마다 소녀는 눈을 질끈 감고 뒤 터진 기억 속에서 알몸으로 빠져나갔겠습니다만
잔물살 포개어져 깊어진 강물처럼 세월은 더 깊게 출렁거리고, 이슬비 젖은 초막 짚시랑물이 알몸으로 빠져나간 소녀의 잠자리에 또옥똑 떨어지고 싶었습니다
초짜
지난 십여 년 나는
주마다 집과 서울을 오갔다
전주에선 니 패를 안 읽어주냐
뭔 수로 끝을 보겠다는 거냐
밑천까지 거덜내자는 심뽀냐 하는 말들이
머릿속에 고랑을 타고 쪼아대도
대충 씹어 삼켰다
마중물 둬 바가지 퍼붓고 작두질해댄다고
따라지 망통이 땡이 될 수는 없지만
작신 밟힐 때 밟히더라도
끝끝내 질러버려야 할 끗수 때문에
차창 밖 산천은 철 따라 고왔다
차창 밖에 또
히끗히끗 눈발이 날린다
주저앉은 내 목을
침 묻혀 찍어내던 달빛과
내 몸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따로따로 밑줄 그었던 날들이
히끗히끗 공중에 떠다닌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집이 어딘지 몰라서
표도 못 끊고 히끗거리는 눈발이
질러버려야 할 끗수처럼
점점 더 굵어지고 있다
-『현대시』, 2011년, 3월호.
허기(외 1편) 이병초
때깨칼로 쥐밤 눈을 틔워
솔갱이 타다 만 불땀에 묻으려는데
등 훑어대는 바람이 아궁짝에 쏠리자
잿속에 묻혔던 불씨들이 일제히 눈을 뜬다
부지깽이에 재 위에 화르르 불이 감긴다
타다 만 솔갱이들 씨근씨근 지지며
혓바닥 날름거리며 지들끼리 엉켰다가
갈라졌다가 뜨겁게 되엉키어
야울야울 타오르는 불
몸띵이가 시키는 대로 좀 살자고
고개 쳐드는지 엉덩짝을 조이는지 까무러치는지
불길이 이들이들 자지러진다
뜨겁게 엉켜 있어도 되엉키고 싶은 징한 허기가
불 속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겠다
지붕 고치기
어디서 비가 새는지 보려고 지붕에 올라갔다 쥐새끼들이 까먹은 도토리껍질을 쓸어낸다 일껏 물어 날랐을 팥알 강냉이알 이빨자국 찍힌 고구마토막들이 기왓장 밑에 군데군데 소도록하다 틈 벌어진 정짓문짝과 인방 어름에 빨간 무씨 한 알 매달고 속절없던 거미줄처럼 살다 남은 찌꺼기들이 저렇게 기왓장 밑에 남아 있구나
필시 그럴지라도 비는 새지 말아야겠다고 잿간 구석에 내박쳤던 비닐뭉치를 푼다 아무데나 꼬라박혔던 내 젊은 날들은 어느 기왓장 밑에 저렇게 젖어 있는지, 가위 집으려고 고개를 돌리니 탱자울 그늘에 눌려 산태미가 납작해졌다 비 새는 데는 어디쯤인지 감이 안 오고 내 젊은 날들만 자꾸 짚인다
-『문학나무』, 2011년, 봄호.
『문학나무』, 시작노트
올겨울은 터무니없이 추웠다. 지푸라기 위로 얼굴 내밀던 마늘 촉들은 푸른 기를 진작 잊어먹었고 대숲의 바람소리를 쪼아 먹는 새소리들도 풀기가 없었다. 모두 혹한을 통과하는 중이었고 나도 여기서 한 발짝도 비껴가지 못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것만이 늘 좋은 게 아니라는 점을 저들도 알았고 나도 새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