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도토리 장군
-강감찬-
이번에는 한국위인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난 처음에 너무나도 고민을 많이 했다. 왜냐면 외국에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종대왕, 이순신, 광개토대왕, 유관순, 김구나 이이 등...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분들의 업적이 너무나도 사람들한테 잘 알려지고 너무 흔하기 때문에 나는 화재를 돌려,
‘사람들이 잘 알긴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어떤 위인을 쓰면 나도 공부가 되고 대단히 좋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위인들을 찾다가 문뜩 강감찬이 떠올랐다. 나는 나처럼 키도 작으면서 우리나라의 장군까지 된 강감찬을 꽤 존경하고 있었다. 뭐, 꼭 이런 이유는 아니지만, 강감찬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훌륭하다, 작고 볼품없었지만 위대했다, 또 많이 알면 귀주대첩 등등... 그러나 그의 상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강감찬을 고르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년도 더 지난 948년, 지금의 서울 봉천동인 금주 고을에 강궁진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고려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삼한 벽상 공신’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딱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자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강궁진의 아내가 부처님께 정성을 다해서 빌었고 마침내 그들은 귀여운 사내아이를 얻었다. 강궁진은 정말 기뻐하며 그의 이름은 강은천이라 지었다. 그런데 평소 몸이 허약하던 아내가 그만 은천이를 낳고 죽어버린 것이다. 은천이는 엄마 젖을 못 먹어서 그런가, 너무 볼품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머리는 정말 비상했다. 그리고 아무리 아이들이 놀려도 꾹 참고 즐겁게 서당을 다녔다. 그런 은천이가 무술을 하기로 결심하자, 아버지는 정성껏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다. 하지만 964년, 은천이가 17세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너무 슬퍼진 은천이는 공부를 하지도 않고 사냥을 하며 슬픔을 달랬다. 하지만 장차 큰 인물이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강감찬으로 바꾸고 다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강감찬 장군은 어릴 적 작은 체구와 볼품없는 외모로 많은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매우 총명했고, 또한 서당을 좋아해서 아이들의 놀림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서당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게다가 그는 커서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고 싶다는 명확하고 좋아하는 꿈, 목표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기에 장군이 된 것 같다. 그의 아버지도 그에게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가르치셨다. 이처럼 부모님께서 살아계시면 항상 우리를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노력하시는 부모님도 갑자기 생각이 났다. 잠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방탕하기 시작했지만 다시 뉘우치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도 참으로 대단했다. 여러모로 본받을 점이 많다. 어느 상황에서도 항상 당당 할 수 있게, 키나 외모로 판단되지 않게 나도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해야겠다.
강감찬이 다시 공부에 열중하게 된지 벌써 몇 년이 흐른 후, 그는 36세라는 나이에 장원급제를 했다. 모두가 그를 볼품없다고 비웃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해 그가 머물렀던 양주와 동경을 아주 잘 다스렸다. 게다가 그가 너무나도 잘 다스려 그의 평판이 좋아지자, 그는 개경으로 올라와서 예부 시랑, 즉 나라의 교육과 외교를 맡아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 무렵, 고려 북쪽 땅에 있던 사이 안 좋은 거란족들이 호시탐탐 그들을 노렸다. 이를 안 현명한 강감찬은 조정의 대신들을 찾아가서 의논했지만 아무도 직책 낮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거란의 소손녕이 80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그러나 서희라는 충신의 외교솜씨로 무사히 큰 전쟁을 비켜나갈 수 있었다. 그 후로 4년 후, 성종이 세상을 떠났고 어린 목종이 왕이 되고 조정은 점점 대신들의 권력 다툼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 와중 강조라는 장군이 목종을 쫓아내고 현종을 왕 자리에 모시는데, 하필 거란족이 이것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것이었다. 모두가 항복을 권의 하는 순간 드디어 강감찬 장군이 나서 항복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단은 개경을 함락한 거란을 피해 나주로 가고 그 후, 하공진이라는 말솜씨와 외교에 뛰어난 사람을 보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침략도 강감찬의 굳은 의지 덕에 모면할 수 있었다.
거란이 물러간 뒤, 임금은 강감찬에게 국방을 책임지는 중추원사로 임명한다. 그 은혜를 입은 강감찬은 감사하며 자신이 재산을 모두 나라에 바쳤고, 그 것을 목숨을 잃은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라 부탁했다. 이에 감동한 현종임금은 자신도 검소하게 살며 군사들의 가족을 보살펴주었고 이에 감명 받은 사람들은 지금까진 꺼려오던 군인이란 직업을 너도나도 하겠다고 일어서 고려는 몇 년 사이에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거란족이 또 고려를 침략하려는 것이었다. 거란은 계속해서 압록강 부근에 있는 강동 6주를 내놓고, 고려 임금이 직접 거란에게 인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리고 현종 임금은 강감찬을 서북면 행영통사, 즉 평안도 지방 국경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강감찬은 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강감찬은 홍화진에서 소가죽으로 둑을 만들어 놓았다가 거란 군들이 홍화진의 강을 건널 때 둑을 터뜨려 버렸다. 이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입은 소배압은 작전을 바꾸어 개경으로 갔지만 강감찬은 이미 그것을 알고 개경의 사람들에게 모든 식량을 숨기라 했다. 그래서 거란 군은 개경에서 또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귀주에서 마주친 강감찬의 고려군과 큰 싸움이 붙어 결국 10만 대군이 몇 천명 밖에 돌아가지 못한 참상을 겪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으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빛나는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그러나 또 거란족이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한 그는 개경주의에 성을 쌓는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성이 완성된 이듬해인 1030년, 현종임금은 강감찬에게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1031년 8월에 우리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강감찬 장군은 여든네 살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나는 가슴이 찡해지면서 강감찬 장군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워 졌다. 커서까지 볼품없다고 비웃음을 사면서도 끝까지 참으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장원급제도 하고, 고을도 잘 다스리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벼슬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하러 갔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귀담아 듣지 않아도 옳은 일은 절대로 굽히지 않으며 임금님께 항상 충성하던 강감찬 장군이야말로 정말 존경하고 싶었다. 아무리 거란족이 쳐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대신들은 벌벌 떨기만 할 때 강감찬 장군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강감찬 장군의 용기 있고, 꿋꿋하고 충성심 있는 면이 정말로 좋았고 제일 본받고 싶은 부분들이었다. 나도 언제까지나 작은 체구에 당당해지고, 항상 대범하며 용기 있게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