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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1.200km 시코쿠헨로에서 유일한 사카우치 아루키
이른 아침에, 어제 헨로교류살롱녀가 세워준 내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함을 알게 되었다.
대중교통(버스)편으로 마에야마 헨로교류살롱 앞까지 돌아가서 준우치(順打ち)로 걸으려
한 마지막 구간을 사카우치(逆打ち)로 걸을 수 밖에 없음을.
그 쪽으로 가는 첫 버스가 10시 이후에 있는 대중교통 취약지역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새벽같이 궁촌, 벽촌을 누비는 국내의 대중교통
(버스) 체계와 판이한 것을 이국 늙은이가 어찌 하겠는가.
국내의 농.어.산촌에서는 새벽같은 시간대에도 대중교통(버스)편이 활발하여 백두대간과
정맥들, 기타 목적지 접근이 어렵지 않다.
히치하이크도 용이했으나 이곳 헨로에서는 보장이 없는 새벽의 편승에 기댈 수 없잖은가.
헨로교류살롱~오쿠보지 간에는 뇨타이산(にょたいざん/女体山) 코스가 있다.
'사누키시'와 '히가시(東)카가와시'에 걸쳐있으며 해발 774m의 사누키산맥(讃岐)에 솟아
있는 산인데 무수한 산 이름 중에서 하필 여체산이라 했을까.
무슨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대로 과연 전설이 있단다.
옛날, 불의로 인해 교토에서 추방된 한 귀족의 딸이 시도 포구(志度浦)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쇼야(庄屋/村長)가 동정하여 집에 데려와 평생 돌봐줬다.
은의(恩義)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도 이 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던 그녀가 죽었다.
촌장은 그녀를 인근의 연못(靑木池)에 묻고 작은 사당을 세웠다.
이후, 비가 부족할 때 이 사당에 모여 빌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
그러나, 이 연못에 부정(不淨)한 것들이 표착하기 때문에 마을민들은 이 사당을 야하즈산
(矢筈山) 동쪽 봉우리로 옮겨 뇨다이진자(女体神社)라 하고 제사지냈다.
이후, 이 산은 뇨타이산(にょたいざん/女体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단다.
게다가 나가오 타운에서 보면 여성이 위를 향해 누워있는 모습이고 정상이 여성의 특징부
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산형에서 여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있단다.
이에 더해,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すさのおのみこと/일본의 神)를 모시는 난타이
진자(男体神社)의 대칭개념인 뇨타이진자는 전국(日本) 각지에 두루 존재한단다.
이 코스는 잘 알려진 루트 중 하나지만 하기모리의 완강한 권유로 제외되었다.
난이도 불문, 준우치에도 그랬는데 난이도가 높아지는 사카우치에서 그 길을 택하겠는가.
하기모리가 반대의 이유를 말하지 않은데다 내가 그 길을 걸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까닭은
끝내 모르게 되었지만.
이같은 이유들로 인해 시코쿠헨로에서 유일한 사카우치 아루키(逆步行)를 하게 되었다.
1.200km 막판, 88개 레이조 중 결원의 사찰인 88번오쿠보지에 골인하는 구간에서.
이유 불문, 3번현도를 주축으로 하는 루트를 따를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극히 짧은 자투리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전일 차량으로 달렸던 길이며 앞에서 언급한
상반된 성품의 두 청년을 목도한 길이기도.
그들도 하기모리에 세뇌되었나?
뇨타이산 코스를 두고 이 길을 택했으니.
배낭을 방에 둔채 숄더백만 메고 숙소 야소쿠보(八十窪)를 나섰다.
사카우치의 애로는 대간과 정맥, 십대로, 까미노 등에서 골수에 사무치도록 겪었다.
이 이른 아침에 사카우치를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에도 어제 오후에 운전
녀와 대화하면서도 눈에 담아두느라 긴장한 것이 천만 다행이다.
3번현도와 국도, 무명 지방도 등을 들락거려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쿠보지 입구의 두 문주(門柱/四國靈場結願所. 醫王山大窪寺) 앞에서 국도377번과 무명
지방도)로 갈리는데 나는 후자를 택했다.
어제 편승한 여인의 차가 전자의 길을 달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른 아침의 기분이 차
없는 오솔길을 걷고 싶어서 그랬다.
실은, 국도를 따라 잠시 걷다가 터널로 갈라지는 바이패스 길 앞에서 되돌아 온 것이다.
오래 가지 않아서 국도에 흡수되지만 잠시라도 상쾌하고 편한 마음이고 싶었으니까.
이 길이 헨로미치 임을 확인해 주는 헨로표지가 한참을 걸어 당도한 여기(마키가와/槙川)
삼거리(국도에 합류지점)에 붙어 있을 뿐이니 사카우치의 애로가 입증되는 사례다.
뇨타이산 코스는 숙소인 야소쿠보(八十窪)에서 오쿠보지 우측으로 우회, 교류센터 지근의
3번현도에 합류하기 까지 산속의 구절양장에 다름아니다.
외길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분기점이 많기 때문에 사카우치의 경우 헤매기 일쑤일
것이며, 더구나 인가가 없는 산속의 길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편이었지만 지나간 길이며 민가들이 종종 있는 길인데도 애로가 입증된 사카우치.
국도(377번)를 따라 타게야시키(竹屋敷/旅館 野田屋/사누키市 多和 竹屋敷)를 스쳐가서
정자(同一마을)에서 잠시 첫 휴식을 취했다.
이 길이 몇개의 헨로미치 중 하나임을 입증하는 오헨로휴게소(お遍路休憩所)다.
이 국도 구간은 본래 현도3번인데 신설된 국도에 흡수되었으며 직선화 과정에서 남게 된
자투리들이 특별한 용도 없이 길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듯.
차량도 사람도 다니지 않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자동차의 바퀴와 사람 발자국의 온기가 끊기면 길의 명(命)도 끊기는데 이 길의 운명은?
자투리가 끝나는 지점(준우치에서는 시작점)의 지장존(地藏尊/東谷마을)을 지났다.
천체망원경박물관, 타와주재소(香川県사누키警察署多和駐在所)와 타와공민관 등 고마잔
(護摩山)의 북쪽 자락에 형성되어 있는 타와의 다운타운.
모든 기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케치간노 사토(結願の鄕)임을 자부하는 타운의 삼거리.
오쿠보지에서 5km지점에서 국도는 좌측으로 틀고 헨로미치는 우측 현도3번이다.
반신반의 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살롱녀 아키토모 쿄코(秋友京子)
가쿠니시(額西), 아이쿠사니시(相草西) 등 타와 타운의 마을들을 지나면 현도3번은 헨로
교류센터가 자리한 마에야마 타운에 진입하며 아이쿠사히가시(相草東) 마을이다.
어제 확인하였던 마에야마소학교 입구에서 3번현도를 떠나 하나오레(花折)임도를 따르는
헨로미치가 다시 3번현도에 합류하는 지점의 마을.
오쿠보지 7km 지점을 지나면 곧 왼쪽 노변, 절개지 벽에 '대사의 물'(大師の水)이 있다.
사계절 산의 표면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으며 시코쿠레이조 88개소의 결원의 사찰인
오쿠보지에 참배하는 많은 헨로상들이 피로를 풀어 '대사의 물'로 불리게 되었단다.
이 부근의 산은 현(香川県)의 조림지로 히노키(檜木)가 식림되어 있는데 용출수는 이같은
풍부한 나무들에 의해서 잘 보존되고 있다고.
근년에는 여기에 이 지역민들에 의해서 '水仏さん' 으로 청수지장(淸水地藏)이 안치되고
야생화들로 단장하며 청결한 물이 잘 보전되고 있단다.
물 한모금 마신 후 얼마 가지 않아 또 만난 지장존.
간이 지붕 아래 석지장이다.
마리아상(像)을 비롯해 까미노의 무수한 상들과 헨로의 석지장들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각기 자기네의 신앙이므로 외부인의 왈가왈부할 대상은 아니지만 친숙해졌을 만도 한데
여전히 서먹하다.
내가 불교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마음을 전폭으로 보내는 지장보살의 상(像)인데 홀대
받고 있는 듯 하여 짠하고.
오쿠보지 10km지점에도 휴게 정자가 있으나 자주 쉴 만큼 피곤해지지 않은 아침이다.
방재책 공사와 관계된 시설인 듯 한 곳(바로 옆)에 "아무나 마시십시요" 물도 있으나 역시
아직은 그런 것이 요구되지 않는 때다.
그보다, 10km지점을 지났다는 것은 사카우치 길도 종점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곧 '미치노에키 나가오2km 지점을 지났다.
이웃하고 있는 헨로교류센터도 그만큼 남았음을 의미한다.
현도3번 노변(좌측)에 토리이(鳥居)와 그 옆, '堂免藥師堂' 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작은
건물이 울창한 숲에 가려져 얼핏 지나치기 쉽겠다.
지근에 민가도 보이지 않는데 버스 스톱(道面) 표지판까지 있는 이 건물의 용도는?
이름으로 보아 불당 같은데 인기척이 없다.
진즉 '大窪寺10km' 안내판을 보고 왔는데 아직도 오쿠보지10km(공중에매달린이정표)다.
안내 기관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라지만 이토록 맞지 않은 손발을 맞출 비법은 없는가.
일본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한국은 더하고 까미노에도 비일비재하니 말이다.
현도(3번)에서 뇨타이산 코스가 분기해 나가는 지점을 2번 지나고 또 하나의 토리이(三社
神社?)를 지나 '오헨로교류살롱500m' 지점(안내판)을 통과했다.
우측, 마에야마 댐의 담수가 실감나게 입체적이다.
곧, 좌측이 마에야마간이우편국 앞인데 전일에 여기까지 진행했다가 포기했기 때문에 이
아침에 사카우치 걷기를 하게 된 것이다.
준우치(순방향)는 오쿠보지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과정을 역(逆)으로 추구하면 된다.
다만, 남의 나라 도로에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송죽(松竹)숲들이 3번현도의
개설로 절단난 절개지가 되어버린 점에 대해서는 유감스런 마음이다.
미치노에키 나가오~오헨로교류살롱 간의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업무시간이 10시
부터라 아직 닫혀 있을 것으로 예상한 살롱문으로 들락거리고 있는 사람들.
버스편 단체관광객으로 보이는 남녀 일군인데 그들이 오헨로교류살롱의 개문시간에 맞춰
당도하려고 만만디 했던 나를 후회(?)하게 했다.
칼날 같이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는 개(폐)문 시간이 이처럼 고무줄 시간이니 상당히 일찍
도착할 수 있었지만 10시에 맞추느라 늑장부린 것이 후회될 수 밖에.
단체 관광객 안내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사카우치로 왔다는 내게 다시 놀란 살롱녀.
단체객이 떠난 후 비로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어제는 1시간여를 함께 했음에도 묻지도 않았지만 알려주려 하지도 않은 자기의 이름을
스스로 적은 메모지를 내게 준 것이다.
어제는 내 이야기를 반신반의했는데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다는 아키토모 쿄코(秋友京子).
하도 경이로운 일들이라 내 말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었다니 이럴 수가.
이미 확인한 대로 대중교통편은 아직 없고 내가 히치하이크하는 것은 걷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므로 이 아침의 재회는 사카우치로 걸어왔음을 뜻한다는 것.
그러므로 믿을 수 밖에 없지 않으냐는 쿄코.
하마터면 무실한 한국늙은이로 기억할 뻔한 것을 사과하겠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쿄코야말로 실 없는 여인이 아닌가.
이른 아침에 버스가 없음을 알면서도 아침에 버스편으로 돌아오라 했으니.
한국의 늙은이를 골탕먹이려고 부러 그랬겠는가.
상책은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말했을 뿐인데 사려 깊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어제 석양처럼 오쿠보지로 가는 내 편승편을 어렵사리 마련하고 민망할 때에
짓는 미소를 담은 90도 경례로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유종의 미로 마감한 것이다.
까미노의 용서의 문(Puerta de Perdon)과 헨로의 88개소 미니 본존
쿄코가 주선한 편승 SUV차량의 운전자도 어제처럼 곱상한 젊은 여인인데, 그녀 역시 한.
일간의 기구한 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헨로를 완주한 내 체력이 궁금한 듯.
자기 오도상(父親)은 70대초인데도 헨로 걸을 체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 늘 안타까우며, 내
자녀들이 부럽단다.
새벽같이 떠났던 오쿠보지 마을(多和兼割)로 돌아왔으나 어제 석양과 달리 아침에 지나
갔던 오쿠보지 입구의 문주(門柱/四國靈場結願所. 醫王山大窪寺) 앞에서 하차했다.
오쿠보지 진입이 빠르고 편한 것이 이유다.
정오 전에 88번 오쿠보지를 마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오헨로살롱녀의 호의적 협조 덕이다.
단지 오쿠보지를 마친 것이 아니라 시코쿠헨로 88개 레이조의 마지막인 결원의 절(結願の
寺)이며 1.200km헨로의 대단원에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
약식 또는 편법이 없는 일주, 완주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감하게 된 것이다.
토쿠시마켄(德島県)과의 현계(県界) 지근, 야하즈산(矢筈山/해발782m/讚岐山脈) 동쪽의
중복에 위치한 오쿠보지(大窪寺).
요로(養老)원년(717), 이곳을 방문했을 때 영몽(靈夢)을 감득한 교키보살이 초암(草庵)을
짓고 수행한 것이 최초라는 사찰.
고닌(弘仁)7년, 당(唐)에서 귀국한 고보대사가 현(現)오쿠노인(奧の院) 근처의 암굴(胎蔵
ケ峰)에서 허공장구문지법(虚空蔵求聞持法)을 수법(修法)하고 당우(堂宇)를 건립했단다.
등신대(等身大)의 약사여래좌상을 조각하여 본존으로 하고.
(虚空蔵求聞持法은 두뇌를 銳利하게 하며 記憶力을 좋게 하는 수법이란다)
또한, 스승인 당의 혜과화상(惠果和尙)으로부터 받은 삼국(印度, 唐, 日本)전래의 석장(錫
杖)을 바치고 오쿠보지(大窪寺)라고 이름지었으며 결원의 사찰로 확정했다는 것.
여성의 입산(參詣)을 금하던 때였지만 일찍부터 용인하고 권청(勸請)할 수 있게 됨으로서
여인 타카노(高野)로도 번창했다는 오쿠보지.
약사여래는 왼손에 약종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 통상인데 이 본존의 약사여래는 호라가이
(ホラ貝/조가비,소라)를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란다.
사람들의 번뇌의 안개를 그 소라의 나팔로 불어서 날려버린다는 뜻인가.
또, 대사당 안(지하), 밟고 다닐 수 있는 모래 도량에 88개소의 미니 본존이 모셔져 있다.
이 곳을 한바퀴(88개소 미니본존) 돌면 1.200km헨로 일주의 참배와 동일하다나.
결원의 사찰에 당도했다면 이미 87개소의 레이조를 거쳐서 왔음을 의미하는데 한바퀴 돌
미니어처(miniature)가 왜 필요한가.
까미노 프랑스길에서 산띠아고가 100km 미만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의 한 교회(Iglesia de Santiago)에는 용서의 문(Puerta de Perdon)이 있다.
질병 또는 부상으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순례자가 이 문을 통과함으로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당도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면 의식의 문이다.
'약식 완주'라는 점에서 양 지역, 교회와 사찰이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하나 전혀 다르다.
까미노에서는 조금 남겨놓은 상태에서 돌발사태로 인해 부득이하기 때문에 편법을 허락
한다는 뜻이지만 헨로의 경우는 황당한 편법이다.
전심전력함으로서 성취를 목전에 두고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애석함이 전제되어 있는 전자
와 단지 1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뿐인 약식 순회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이해되지 않고 불만스럽고 미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시코쿠의 1.200km헨로
우여곡절 끝에 완주는 했으나 이해되지 않고 불만스럽고 미진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누누이 말했는데도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거니와 참으로 힘겨운 여정이었다.
육체(체력)의 문제라면 조절이 용이하지만 그것이(조절) 어려운 정신에 있기 때문이었다.
도중 하차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몇번이었던가.
일본인 선생에 대한 적개심이 이토록 사무쳐 있고 반일 감정의 억제가 벅차도록 충일되어
있음을 미처 모른채 덤벼들었다가 큰코다칠 뻔 했으니.
내가 불(佛) 신앙과 무관하기 다행이지 불자였다면 공포에 얼마나 떨어야 했을까.
이미 언급한 대로 불교는 연기(緣起)를 전제로 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종교다.
이 자비는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체, 즉 살아있는 미물까지 포함한 포괄적, 보편적 사랑을
뜻하며 연기를 깨달을 때 나타나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전제로 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그러나 88개의 헨로레이조들에서는 당연히 있어야 할 자비와 사랑, 중생을 포용하는 온기
(溫氣)를 느낄 수 없었다.
통과해야 하는 엄중한 검색대가 있다는 느낌일 뿐.
이 검색대를 무탈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봉납이라는 이름의 뇌물을 바치는 것이 제도화
되어 있기 때문에 너나 없이 모두 금품을 바치는 것이리라.
내가 불자가 아니기 때문에 갖는 불경(不敬)일까.(기독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 불교의 최고진리로 믿는 일본밀교의 거두 쿠카이(空海/弘法大師).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여 본성을 봄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禪宗)
의 견성성불(見性成佛)과 양극 현상이다.
즉신성불은 살아서 즉시 성불하거나 즉시적 응보가 따르니까.
이 시코쿠헨로도 에몬사부로에 대한 그 응보의 결과로 태어난 길이며 후다쇼들의 곳곳에
노사츠(納札)와 동전이 넘쳐나는 것도 겁박의 산물들이 아닌가.
불자가 아닌 내게도 전심으로 존경하는 유일한 불보살이 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메뉴'白岩斷片' 13번, 56번, 70번글 참조)
지옥이 텅 비도록 중생의 제도가 완성되기 전에는 사파를 떠날 수(成佛) 없다는 분이다.
시코쿠헨로에는 빨간 스카프를 두른 대소 지장존이 도처에서 헨로상을 보살피고 있으나
육도(六道: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중생의 화도(化導)를 위해 변신을 거듭하며
그들을 찾아다니느라 성불의 기약이 없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의 자비와 달리 쿠카이에게는 제도(濟度)는 없고 오로지 가차없는 상벌만 있으니
죄악의 공략에 원천적으로 연약한 중생이 활개를 펼 수 있겠는가.
코보대사는 헨로의 레이조(靈場)로 왜 88개소를 선정했을까.
소위 엿장수 맘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1.200km헨로에는 보다 많은 사찰이 있으며, 그래서
레이조에 버금간다 해서 벳카쿠(別格) 20레이조를 따로 선정했는데 아예 합산하여 '108레
이조'라 하지 않고?
8은 일본인들의 기호(嗜好) 숫자란다.
밑으로 갈수록 퍼져 나가는 모양인 한자 팔(八)자가 갈수록 더 발전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 이유라는데 8이 겹치는 쌍팔(88)은 더욱 좋아서 인가.
그렇다면 108은 어떠한가.
108번뇌를 깨끗이 청소한다는 뜻이 포함되고, 그러면 성불도 목전으로 다가오고.
88레이조를 잇는 총연장도 애매하다.
각 레이조(88개) 간의 코스가 워낙 많기 때문에 집계할 수 없다.
최소 약 1.100km에서 최대 약 1.400km로 간주된다는 정도다.
코스의 선택에 따라서 도보 완주자 개개인의 기록이 다를 수 밖에 없으며 1.150km내외가
대다수의 완주 거리로 알려져 있는 듯 하다.
그러므로 1.200km라는 수치는 근거가 없다.
1.200년 역사 역시 애매한 표현이다.
창건과 레이조 지정연도가 각기 다르며 최종 연도를 기준한다 해도 셈하는 연도에 따라서
다르고 세월에 따라 햇수(年數)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1.200년이었다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수정이 불가피
할 것이다.
1.200km는 1.200년 역사에 맞춘 홍보 용어가 아닌지.
형기(刑期)를 마쳤다면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하건만.
칠당가람(七堂伽藍)은 큰 사찰이 갖추고 있는 7종의 건물을 말하며 불교 사찰들이 바라는
최고 경지다.
국가(韓 中 日)와 시대, 종파에 따라 명칭과 유무(有無)가 약간 다르기는 하나 대개 법당
강당, 경장, 종루, 탑, 승방, 식당, 삼문 등으로 되어있다.(식당과 삼문은 택일)
건물들의 배치도 일정한 룰이 있는 듯이 보인다.
시코쿠헨로의 레이조들은 본당과 대사당, 여러 이름의 당(堂)과 루(樓), 탑 등이 공식처럼
되어 있는데 완만한 산 비탈에 위치하기 때문인지 옹색하다는 느낌인 오쿠보지 경내.
한때는 100동이 넘는 당우를 자랑했으나 덴쇼(天正/1573~1592)의 병화(兵火)를 피하지
못한데다 메이지(明治) 33년의 화재 등으로 사세(寺勢)가 크게 위축되었단다.
그랬음에도, 타카마츠(高松) 한슈(藩主)의 비호를 받고 역대 주지들의 진력으로 흥륭(興
隆)을 회복하고 결원성지(聖地)의 법등(法燈)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찰이다.
오헨로교류살롱녀가 준, 새로 구워낸지 3개월(2014년 7월 6일) 밖에 되지 않은 DVD(結願
の寺)에 따르면 4계의 자연 경관도 빼어나고.
양 팔을 V자 형태로 높이 들고 성취감을 만끼하게 되는 광대한 오브라도이로 광장(Plaza
del Obradoiro/Santiago de Compostela)의 환희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단일 루트로는 까미노에서도 유일하게 1.000km가 넘는 '비아 데 라 쁠라따'
(Via de la Plata/The Silver Way)보다 더 장거리인 시코쿠헨로다.
이 최장거리를 40일 이상 걸어서 완료했으므로 어떤 성취감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가느다란 기대를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가슴은 평상시와 다른 박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불도가 아니기 때문으로 돌릴 수 있으나 최종성지에 다름아닌 결원의 사찰에 골인한
불자들도 별난 데(감동)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완주한 순례자들이 연출하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의 감격적인 신(scene)들은 감동적이다.
매일 정오에 갖는, 산띠아고 까떼드랄(Catedral/대성당) 안을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채운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Mass)도 장관이다.
'보따푸메이로'(Botafumeiro/공중에 매달려 그네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향을 뿜어내는 香
爐)가 향을 뿜을 때는 환호가 절정을 이룬다.
이는 거르는 날 없이 매일 이어지는 축제미사인데 의식이 각기 다른 종교행사에서 동일한
감격 또는 감동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내가 모르고 있을 뿐, 불교 나름의 감동을 주는 어떤 행사가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인지 적잖이 허전했다.
대부분의 헨로상이 중대형 차편으로 왔다가 그 차로 돌아가고 아루키 헨로상의 수는 워낙
적은데다 이따금 도착하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는데 어떤 형태의 행사가 가능하겠는가.
당도한 각자의 내적 감정 변화는 삼자인 내가 간파할 수 없지만 결원의 장소라 하나 독경,
봉납, 기타 여느 사찰과 다름없는 순서가 끝나는 대로 뿔뿔이 사라지는 헨로상들인데.
내가 헨로 걷기를 결심하고 도중 하차하지 않고 완주한 힘이 감동적인 마감에의 기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잖은가.
집 토끼를 두고 멧 토끼 잡으러 나온 것도,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린 것도 아니다.
세월호의 참사를 곁에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이 감당하지 못할 형벌로 다가왔기 때문에
택한 도피행각이 시코쿠헨로 1.200km 걷기였다.
단순한 도피가 아니고 그 형벌의 대체 수단인 고행이므로 반드시 마쳐야 하는 수형의 길.
오쿠보지에 당도함으로서 수형생활이 끝났다면 당연히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영어(囹圄) 상태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었다.
오쿠보지를 나와 배낭이 있는 숙소로 가는 걸음은 이전의 감옥으로 되가기 위해 소지품을
챙기러 가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 사이에 진정되기 바라고 기대했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은 세월호 사태 속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