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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 운봉, 동학, 서학, 인월, 함양
여원치(여원재) 위치도
여원치는 섬진강 상류에 있으며,
남원은 섬진강 상류를 끼고 있다.
하여, 여원치는 남원 10경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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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는 아흔아홉구비를 돌아 남원과 운봉을 잇는 고개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숱한 전쟁을 치룬 역사의 현장.
여원치 능선에는 9개 산성과 성과 성을 잇는 순라길이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선 고갯마루 여원치.'
특히, 여원치는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려
이곳을 지날 때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예언한 곳.
하여, 여원치라 불렀는데 그 여인은 지리산신 노고할미
그 사실을 뒷받침하듯 여원치 동남쪽 도로 아래 마애여래불
운봉 현감 박귀진이 이 여래상에 대한 내역을 음각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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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 마애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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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5-3
여원치 정상 부근 바위에 새겨진 불상
고려 때 운봉현감의 글귀도 새겨져있다.
..................고려 운봉현감 박귀진 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이성계가 황산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
이 불상은 그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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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지만
머리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 좋은편.
조각수법이 평면적이어서 역동감은 없지만
넓은 어깨와 큰귀 또렷한 코는 시원한 느낌.
.........여원치 마애불에 관한 또 다른 전설.............
옛날 여원치 고개마루에 주막을 하는 주모가 살았는데
왜구가 주모를 희롱하므로 칼로 가슴을 도려내어 자결
그 여인의 정절과 애국심을 기리려 바위에 새긴 여인상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마애불.
이 전설의 신빙성을 한결 더 말해주는듯.
왼팔이 없는 마애불에 관한 또 다른 전설.
거지에게 적선을 하다가 붙잡혔던 여인의 팔.
스스로 짤라냈기에 정절을 기리기 위한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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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전설의 고향 여원치 중턱에 있는 여원정.
여원치의 정상 주지봉은 지리산 태극종주 첫머리.
여원정에는 주지봉의 산신단이 자리잡고 있는 곳.
이곳 제단에서 지리산 산신에게 소원을 빌면
만사 형통한다는데 특히, 득남을 한다는 전설.
여원치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남원 10경 중 하나
여원치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남원 시가지
미풍이 기억에서 잊혀진 추억을 떠올려주는 곳.
전북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 여원치.. 장동마을
남원에서 운봉 함양을 잇는 위치의 장동마을.
장동마을의 서쪽은 섬진강이고 동쪽은 낙동강.
옛 전라도와 경상도 길손들의 휴식처 장동마을.
노루도 쉬어갈 만큼 높다하여 장동(獐洞)마을
여원치 고개마루 도로 변에 위치한..장동마을.
장동마을은 운봉과 가깝지만 남원 생활권.
장날 장동마을 주민들은 남원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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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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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여진족과 함께 왜구를 물리쳤던 여원치.
여원치는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를 대변해주는 곳.
고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여진이 군을 파병할 만큼.
'여진족과 이성계는 어떤 관계였던걸까?'
백두산 북쪽 장백산맥 지대를 거점으로 살아 온 민족.
명나라 지배하에 한 지방의 여진족 수장 ‘누르하치’
1616년 국호를‘후금’이라 하고 여진족 나라를 창건.
'1115-1234년까지 원래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몽고족 원에게 멸망, 원은 1368년 명에 의해 멸망.
금(金)이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국호를 금이라 명명
한편 명(明)은 사천, 하남, 호북, 섬서에서 농민 봉기
이저성 혁명군이 명의 수도인 북경 자금성에 입성하여
숭정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라 청조(淸朝)제국이 시작.
한족으로부터 꾸준한 여진족 구축 항쟁을 받으면서
1912년 선통제 폐위까지 268년간 중국 대륙을 통치
한족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1912년 중화민국을 세우고
장개석(蔣介石)이 정권을 이어받아 중국 통일을 시도
여진땅을 만주라 불렀는데 만주란 여진족이 사는 고장.
여진족이 한족에게 침략자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문수(文殊)의 음과 뜻이 변한 만주(滿住)로 쓰다가
만주(滿洲)로 바꿨으며 현재 사용하지 않는 지명이다.
(지리산 일대의 뿌리깊은 문수보살 신앙.)
(한반도와 여진과의 관계를 대변해주는듯.)
한편 중국이 약화된 때 일본이 이조와 만주를 침략
1949년 모택동 인민해방군은 여진족 만주땅을 통합
중화 인민공화국을 건국 후 모든 외세를 추방하였다.
이성계(李成桂)의 이조건국 1392년을 전후해서
1260년 몽고족 진기스칸의 손자가 송나라를 멸망
1368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한다.
몽고족은 원나라 건국전 1230년경부터 고려를 침략
고려는 40년간 강화도에서1271년 원과 굴욕적인 강화
왕자 앞에 충자(忠字)를 붙여 원조에 충성한다는 忠( )王
고려 왕비는 원(元) 공주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세자는 원 궁실에 보내 길러서 고려왕으로 책봉
그러므로 당시에는 고려 말도 모르는 왕이 있었다.
당시 여진땅 '함흥'은 원에서 파견된 관리가 통치.
이성계는 1333年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로서,
당시 여진족 땅 영흥(함흥에서 70리)에서 출생했다.
그후 이성계는 부친을 따라 함흥에 이주하였다.
부친 이자춘은 원 쌍성총관부 관직을 받아 종사
원나라가 망하자, 여진족이 옛 여진땅을 회복했다.
이성계도 여진족과 합세해 함남 일대를 회복.
1360년 고려조 공민왕은 이자춘과 협의하여
돈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니
이성계도 고려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려는 내란이나 외침이 있을 때면
이성계의 군사를 청하여 이를 진압
이성계는 고려에서 공을 세우게 되고,
고려 조정에서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 말엽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
한편 명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만주까지 점령.
원은 명을 막고자 고려에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이때 고려조는 반 몽고파이며
반 원나라파 이성계를 파병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 후 즉위.
이성계는 고향 함흥 일대와
거란족이 살고있는 압록강 남부와
여진족 영역인 백두산과 두만강 일대.
모두 고려에 통합해 이조 왕조를 건국.
'조선' 국호를 사용한 이성계의 숨은 뜻
단군조선 옛 영화를 재건하려 한듯 하다.
거란족 여진족 고려족 조선족을 모두 통합
('조선'으로 오백년간 살아 내려왔던 이조시대.)
(그러나, 5백년간 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중국화.)
(중국 한족의 성씨로 개명하고 한자를 쓰게 된다.)
1107년 고려 전성기때 함흥평야, 홍원 일대까지 점령
여진족의 반격으로 철수했고 송시대에는 여진족이 지배.
거란족이 세운 려(遼)나라(916--1125) 가 지배하고 있다가,
다시 여진족 금나라(1115-1234)가 려를 물리치고 옛땅을 회복.
고려가 잠시 여진 땅 함흥 지방을 점령했을 때
고려 한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점령지에 거주.
고려가 철수하자 그곳 고려인들은 여진족과 융합
이성계가 출생한 1333년 고려인은 여진족으로 동화
이성계는 전주(全州)에서 유랑해서 온, 실향한 한족.
그땅에 살아온 여진족일 것이란 사실이 더 믿을만하다.
'즉, 여진족으로 동화된 전주 이씨..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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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옛 고구려 영역으로 고구려가 패망하자
집권세력이 사라져 마을 단위로 생활하게 되었다.
여진족 근거지 장백산맥 일대와 만주는 날씨가 추워
농사가 잘 안되므로., 유목과 목축업이 주 생계수단.
그들은 고구려 귀족을 도와 발해를 건국 후
요서 지역의 유목민 거란족에게 나라를 잃고
고구려의 '려'와 발해 국호 '진'을 합쳐 여진.
신라 왕족출신 고려인 김보함이 여진을 통합하고
자기 성을 따 금을 세웠으나 몽고족에게 멸망하고
또 흩어져 살며 흉년에는 수시로 고려 국경을 넘어와
곡식과 가축을 훔쳐가고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고려 조정은 골치를 앓고 있엇다
여진으로 도망간 고려의 죄인들도 있었고
고려에서 흉년들면 떠돌이 초적이 되었다가
고려 조정에 토벌하면 여진족 지역으로 도주.
고려에서는 여진을 야만인(오랑캐)라 불렀지만
여진은 고려를 존중하고 형제의 예로서 대했다.
정도전은 여진족과 함께 요동을 정벌할 계획.
태종 이방원의 도전으로 숙청되고 좌절되엇다
하여, 여진과 이성개 군대는 평안도 일대를 공격
명 압력으로 여진은 철수하고 이성개 군대는 토벌
그후 이조의 반 여진 정책은 더욱 강경하게 나갔다.
세종대왕은 여진족을 한반도 이북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설치해 여진족 국경 방어선을 설치했다.
그당시 이조가 여진족과 손잡았다면
만주와 요동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조는 명을 떠받들고 여진족과 왜를 격멸
여진이 청을 세우고 이조와 교류를 원했으나
인조가 이를 거부하자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여진은 이조를 형제의 나라라고 자기 영토로 안 삼고
이조 정권을 보존하고 중국을 지배하려 떠난 만주지역
임진왜란 전까지 만주는 여진 영역, 고종 때 이조 영역.
여진족이 고구려 후예이면 만주는 한반도 영역.
여진족이 중화민족의 후예이면 만주는 중국 영역
거란족은 터키 계열의 유목 초목민족이었고,
여진(돌궐)족은 만주족에서 분파된 민족이고,
만주족은 고조선부터 우리민족이 거주하던 지역
거란족은 만주족 몽골 한족의 압박을 받으며 멸망
소수가 유목생활을 하며 중앙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고려시대 몽골군에게 끌려간 20-25만의 고려 여인들
몽골로 끌려가서 노예와 성노리개의 대상으로 살았다.
당시 고려의 인구는 1백만에서 150만 정도로 추정된다.
한 가정에서 한명 이상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끌려가는 딸을 보며 한탄하는 시를 지은 고려 재상.
궁녀를 제외한 전 고려인의 딸들이 끌려간 것 같다.
'몽골 반점은 고려시대 몽골인들의 정복 흔적.'
고려 시대에는 재혼도 가능했고,
정절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겁탈 당해 임신한 여인들
거의 자살했거나 화전민으로 숨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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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여진족 후예들의 풍습.'
이조 건국 초기에 귀화한 여진족들의 잔류민
산간마을에서 머리를 깎고 절을 짓고 살았다.
함경북도 부령군 회령군 유성군 종성군 온성군
경원군 경흥군 등 6진(六鎭)이 설치되었던 변방
여진족들의 은둔부락은 재가승 마을이라고 불렸다.
재가승들은 대개 산간에서 화전을 하며 귀리를 생산.
귀리로 황지(黃紙)를 생산해 세공(稅貢)으로 바쳤다.
황지는 연지라고도 부르며 진귀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소를 이용한 농업과 품앗이 소겨리 조직이 성행했다.
원래 화장 장례풍습은 함경도 매장풍습으로 바뀌었다.
마을 공동으로 상여를 준비해 장례 치루는 재가승생활
이들은 연중 4번 국사당에 산제를 올렸다.
민속놀이로는 주지춤·수박치기·길마지기·
벙어리놀음(걸립굿)·윷놀이·그네뛰기 장기
이들은 외부세계와는 별다른 거래를 하지 않고
혼인도 자기들끼리 하는 폐쇄된 산간오지 생활
차츰 함경도 한민족의 생활풍습에 동화되었으며,
특히 8.15 해방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거의 동화
운봉(雲峰)
옛부터 전라도 운봉, 경상도 함양.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선에는 인월.
흥부마을 역시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
청학동과 함께 지리산 십승지로 일컫는 운봉
백두대간 끝자락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분지.
옛부터 경상도 함양과 전라도 남원의 길목 운봉.
반야봉 일대는 남원에 편입되기 전까지 운봉.
노고단, 반야봉의 운해에서 유래된 지명.,운봉.
운해가 아름다워 풍류묵객들이 즐겨찾던., 운봉.
'옛부터 동편제 본향으로 명성 높은 운봉.'
'운봉. 흥부마을, 인월. 함양.'을 잇는 길.
옛부터 왜구의 침입으로 피혜가 잦았던 고장.
하여, 일본에 대한 경계와 저항의식이 거센 곳.
옛부터 주막과 여곽이 대물림했던 운봉마을 초입
전춘 전각 숲그늘에 다정한 연인 같은 백로 한 쌍
판소리 고장 답게 사랑가’ 한 자락을 엮어내는 듯.
황산대첩비가 있는 언덕위는 운봉 아이들의 놀이터.
운봉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황산대첩비와 피 바위
운봉아이들은 너나 없이 나무칼 몇 자루씩 갖고있다.
칼싸움 대물림은 운봉의 자존심인 황산대첩에서 유래
운봉 아이들의 칼싸움은 전통적으로 계승된 놀이문화.
'황산대첩비에서 인월 피바위까지 칼싸움 원정.'
고려 우왕 6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왕권이 실추되고
권문세족 토지독점과 농민 수탈로 극도로 피폐할 무렵
한반도 서해안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며 약탈했던 왜구들
그무렵 지리산 동북쪽 운봉 황산대첩은 유서 깊은 승전터
처음에는 아군의 열 배가 넘는 왜구들과 전투가 시작된다.
전투는 이성계 장군의 지혜로운 전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가 끝날 무렵 왜구 칠팔십명만 살아남아 줄행랑
당시 이성계의 화살에 죽은 적장 아비발도와 왜구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시냇가 너럭바위에 쌓아둔 시체들.
'그후 바위가 피로 붉게 물들게 되어..피바위.’
훗날, 당시 전승을 기리기 위해 황산대첩비 세운 선조.
그러한 연유로 황산대첩비가 있어 비전마을로 불리웠다.
운봉 땅과 지척인 비전리는 명창들의 전통적인 공연장소.
예나 지금이나 영호남의 교류가 활발한 운봉
'각성바지' 사람들이 어울리며 살아온 곳이다.
각성바지 집성촌을 이루고 한 형제처럼 사는 곳.
삼국시대 풍운의 거센 황토바람을 휘날리던 고구려
광활한 만주 벌판 영토를 잃고 지리산 자락에 정착
신라 유민정책에 의해 운봉에 정착한 고구려 후예들
고구려 유민들이 망국의 슬픔을 달래던 노래
운봉 동편제에는 고구려 유민의 한이 담긴 듯.
판소리 선구자 송씨 가문은 원래 고구려의 유민
송첨지 또는 또랑광대라 비꼬는 말투로 불린 그들.
이조 정조 임금 무렵에는 어전에서 북장단을 울렸고
비단 세필을 하사 받는 큰 영광을 누리며 신분 상승.
운봉 소리꾼들은 발길 닫는데로 산천을 유랑한다.
마치, 옛 고구려 유민들이 고향을 잃고 유랑한 듯.
섬진강 상류인 오원천변은 판소리 소리꾼들의 공연장.
섬진강 서쪽 광주·나주·보성 등지는 서편제 본향.
섬진강 동쪽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는 동편제 본향.
판소리 소리꾼들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 구경꾼.
가마끄는 역군들조차 서로 모셔 가려고 한바탕 소동
운봉은 예나 지금이나 명창들을 배출한 판소리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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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은 양강도 개마고원 두운봉(頭雲峯)에서 따온 이름.
두운봉 주위엔 궐덕산 노룡봉 희사봉 등이 애워싸고 있다.
황수원강까지 뻗은 평정능선은 각각 엄방천 장동천 발원지.
두운봉은 백두대간의 머리 지점
운봉은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점.
두운봉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 옥저 동예의 영토.
BC 108년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현토군에 속했다가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 소관 하에 들어 갔다.
고구려 태조 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미천왕 때부터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때 당의 지배를 받았고
699년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部)에 속해 있었고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 여진의 지배를 받았던 곳.
이 무렵 발해 유민들이 고향을 떠나 고려로 유입.
그들이 정착한 곳에 두운봉을 본따 운봉이라 명명.
지금까지 운봉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게 된 것 같다.
'따라서, 운봉은 발해 두운봉 유민들의 정착지.'
발해 유민들이 정착하기 전부터 고구려 유민 정착지.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 결과로도 추정된다.
훗날, 운봉 발해 유민들은 고려 창건의 밑바탕 세력.
'잃어버린 고향 두운봉을 되찾으려 했던 것일까?'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이조를 창건한 이성계.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1995년 전북 남원시 운봉읍으로 승격, 읍소재지는 서천리.
사방이 덕두산(1,150m)·바래봉(1,165m)·고리봉(1,305m)·
수정봉(805m) 등으로 둘러 싸인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배추·고추·마늘 고랭지채소 생산지이고 화훼재배도 활발.
용산리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면양목장 국립종축장이 있다.
동남부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운봉목기가 유명하다.
주촌(舟村)·덕산(德山)·공안(孔安)·행정(杏亭)·산덕(山德)
동천(東川)·용산(龍山)·북천(北川)·준향(準香)·장교(長橋)
권포(權布)·임(林)·신기(新基)·매요(梅要)·가산(佳山)·화수(花水)
17개 동리가 있고, 면적 69.49㎢, 인구는 2002년 현재 5,317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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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기도 한 고장.
봉화산에서 백운산(1278.6m) 아래 중재까지 숲길.
종주자들은 이 구간을 가장 볼 것 없는 곳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곳 역사를 알면 걸음마다 산행이 즐거워진다.
3억 2천 300만년 전, 동해의 해저 지각이 팽창
한반도 지각을 밀어붙이며 대대적으로 지각변동.
이때 한반도는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동고 서저의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이 탄생했고 지리산 또한 높이 솟았다.
세석평전처럼 지리산의 주능선 곳곳에 평탄한 곳이 그 증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동서로 밋밋하게 이어진 주능선 자락
남북으로 15가닥의 지능선이 있고, 그 능선과 능선 사이엔 계곡.
달궁 계곡, 심원 계곡, 뱀사골 계곡 하나같이 북동이나 남서 방향.
'어떤 이유로 그런 형태가 되었을까?'
한반도의 대륙 지각은 북서 방향으로 밀어붙인 해양 지각변동.
태평양 판의 횡압력을 받아 지각에 많은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
이때 금이 간 주방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 금이 갔던 자리가 계곡.
지리산 북서쪽 노치마을에서 여원치·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동쪽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신라였고, 서쪽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 구분을 오늘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사투리.
백제 권은 전라 방언을 쓰지만, 신라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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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을 조금 지나 인월 방향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옛부터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피혜 많았던 운봉.
운봉의 황산대첩비가 그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여, 역사적으로 항일 운동에 선봉이 되었던 고장.
고려 말에 함양·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한 일본 장수 아지발도
그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이지란이 활을 쏴 그를 죽인 곳.
그가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들이 대승해 세운 황산대첩비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승전비.'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백두대간의 한 구간인 여원치
이성계가 백발 노파로부터 승전 날자와 전략을 계시받은 고개.
아지발도가 젖가슴에 손댄 처녀가 자기 가슴을 베어 자결한 혼.
하여, 노파의 고마움을 기려 벽에 여인상을 새긴 산신각을 지었다.
그 여자 산신령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곳을 여원치라고 명명.
이성계는 이곳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에 훗날 이조창건의 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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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 고남산 운봉' 오르니 고려 승전고 들리는 듯.'
고려 때 이성계의 승전을 기리는 지리산의 몇몇 지명.
그곳에 남아있는 이성계에 관한 자취를 좀 더 살펴보자.
노치마을의 당산 소나무 앞에서 산줄기들을 바라다본다.
눈앞 수정봉이나 고남산은 백두대간이 아니라면 동네 뒷산
그러나, 백두대간의 한 부분이라 지리산과 동등한 지위
'낮은 산이 없이는 높은 산도 없는 법.' = 산에 관한 이치.
여원치(450m)는 남원, 운봉, 함양을 잇는 24번 국도 고갯마루.
고려 말 왜구의 희롱을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한 여인
산신령이 되어 이성계의 전승을 도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여원치에서 두 시간 걸어서 가면 고남산( 846.5m)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 유서 깊은 산이다.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던 곳이다.
동행한 정도전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하여, 아랫마을의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조창건의 발판이 된 지리산을 훗날 반역의 산이라 한다.
지리산에는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는 고려의 지지세력이 많았기 때문.
특히, 운봉은 '동학의 난'을 비롯해 이조정권에 항거세력이 많은 고장.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 경로당은 종주자들 잠자리.
마을 끝 지점에서 매점을 하시는 신순남 할머니
“여원치에서 출발했어? 그럼 오늘 복성이재까지 가겠구만.”
모래재에서 새맥이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단순하다.
오른쪽으로는 산동네 치고는 꽤나 너른 들판에 안긴 마을이 옹기종기.
남원시 운봉읍 일대. 이 한가로운 마을이 한때는 혁명의 싹을 틔운 곳.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운봉의 황산에서 치른 왜구와의 전투에서 대승.
이조가 창건할 수 있었던 전기를 마련한... 운봉.
'이조의 멸망 계기'인 동학혁명이 일어난....운봉.
................운봉 찾아가는 길......................
군산에서 전군산업도로를 이용 전주로 입성
전주동부우회도로를 이용 전주를 우회한후 남원
남원 춘향터널 500m지나 우회전 구례 순천방향 도로
약 7-8Km진직후 첫 갈림길에서 좌회전 (이백, 운봉방향)
약 10분정도 직진후 검문소 삼거리에서 우회전(운봉,인월방향)
오르막 시작 재를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운봉 면소재.
운봉 소재지 뒤에 보이는 산이 지리산 자락의 바래봉.
읍내로 진직하면 이정표에 바래봉 철쭉군락단지 표지.
전주,임실,오수,운봉,인월로 이어지는 직행버스.
남원에서 운봉 인월로 향하는 직행버스나 시내버스
운봉에서 도보로 약 15-20정도 걸으면 바래봉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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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봉 철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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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철쭉제 열리는 바래봉은 원래 면양목장이었다.
농촌진흥청 축산기술연구소 남원지소에 해당하는 구역
이곳 면양은 여름이면 모기를 피해 고지대로 올라갔다.
면양은 철쭉 말고는 모른 식물을 먹을만큼 식욕이 강하다.
하여, 바래봉이 자연스럽게 철쭉 군락지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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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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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
17년전 한봉단지로 행정고시 이후 전국 최고의 토종꿀 특산품
온갖 약초와 야생화 밀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생산된 자연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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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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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 실상사를 중심으로 산내면, 마천면, 일대에서 생산보급.
실상사의 3000(식솔 포함 4,000)명이 넘는 승려들의 공양그릇
바루와 보살을 비롯한 식솔들의 제기 생활 목기를 제작 보급
산내면 일대 지리산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이용해 목기를 제작
남원 산내면의 '산내목공예 기술학교'는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
플라스틱, 스텐레스 식기 대중화로 목기는 맥을 점점 잃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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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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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까지 운봉에 조성되는 지리산 자생식물환경공원
지리산 일대 희귀식물, 국내 자생화, 육종배양 및 복원ㆍ
지리산은 국내자생식물 4천5백여종 중 1천4백여종을 보유
이중 약용식물은 1백74종, 식용식물은 2백85종으로 드러났다.
운봉은 솜다리(일명 에델바이스)와 뻐꾹나리 자생지.
그외 희귀 멸종식물로 알려진 많은 식물이 발견된다.
또한 정령치는 정영엉겅퀴, 용담과 동자꽃ㆍ구절초ㆍ
물매화ㆍ하늘나리ㆍ감자난초ㆍ투구꽃 등등의 군락지.
정령치에서 세걸산 방면은 지리산오갈피와 엄나무ㆍ
고로쇠나무ㆍ큰꽃으아리 등등의 자생지로 밝혀졌다.
지리산 자생보호식물이자 한국보호식물 천마와 희어리
그외 금낭화와 까치수영ㆍ노루오줌ㆍ동자꽃ㆍ땅나리ㆍ
술패랭이ㆍ우산나물 등의 야생화도 곳곳에 분포한다.
지리강활과 지리개별꽃ㆍ지리괴불나무 17종 특산식물
개불알꽃ㆍ깽깽이꽃ㆍ도깨비부채 등 15종의 희귀식물,
나도풍란과 돌매화나무등 6종의 멸종위기 식물이 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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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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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최대 지리산 자생식물환경공원 조성 계획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지리산 바래봉 자락에 조성.
국가예산 67억여원이 투입 2007년 마무리되는 이 공원
약 14만㎡의 부지 공원에 자생식물 전시관 및 연구시설
이곳은 최근 환경부로부터 자연생태 우수마을로 선정
산덕리 삼산마을은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
마을 숲 이른 봄에 산까치와 멧새들이 새끼를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초가을, 함박눈 펑펑 내리는 겨울날
멧비둘기들이나 매에게 쫓긴 꿩들이 마을숲으로 피난.
기나긴 한겨울밤에 부엉이의 외처로운 쇳소리 울음
봄날 새벽 슬픈 접동새 울음이 퍼지는 마을숲 정경.
마을 옆 300m 쯤 떨어진 곳에 450평의 넓이 푸른 세상.
200년 넘은 서어나무와 느티나무 1백여 그루가 울창하다.
이곳은 칸 영화제 수상작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촬영장소
동학.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사 울고 간다.'
동학군 지도자였던 전봉준에 대한 추모의 노래
'녹두새' 는 전봉준의 별명인 녹두 장군에서 유래.
아랫녘 새야 웃녘 새야 전주 고부(古阜) 녹두새야
녹두밭에 안지 마라. 두류박 딱딱우여. - 제목 : 녹두새
이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는 18 세기
농업 ·산업 ·수공업 ·봉건적 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의 붕괴.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1862년(철종 13) 진주 봉기
삼남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문란한 국정에 대한 항거.
............ 전봉준과 동학 혁명(갑오경쟁)................
전북 고부군 궁동면에서 1855년 태어난 천안 전씨.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그 탓에 녹두라는 별명을 지닌 그의 쏘는 듯한 눈빛
전봉준은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가르치던 훈장이었다.
논 세마지기 농사에 여섯 식구가 의존해, 아침엔 밥을 먹고 저녁엔 죽.
1890년 동학에 입도, 고부 접주가 되었다.(동학은 1860년 최제우 창시)
당시 천주교는 우리 민족 사상에 큰 영향.
천주교(서학)에 영향을 받은 사상이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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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서양세력의 침투와 이조사회의 내재적 위기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 동학.
당시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주의에 빠져
변화하는 사회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고
불교는 사회를 주도할 역량이 부족했다.
서양의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조사회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때
새 이상 세계를 목표로 등장한 것이 동학.
몰락양반의 후예이자 서자였던 최제우
신분상 당시 사회에서 입신 출세할 수 없었다.
그러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40세까지 방황.
1860년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강신체험(降神體驗)
이 체험을 통해 한울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주장
그 도를 민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東經大全을 저술
일반 대중들을 위해 한글로 쓴.,용담유사 龍潭遺詞〉
이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은 점차 늘어나 교도들을 조직
각 지역 교도들을 통솔할 책임자 접주'(接主)들을 임명
그 지역을 접소(接所)라 명한 후 동학세력은 점점 확대
조정은 동학을 위험세력으로 간주해 최제우를 처형
그러나,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보려는 신원(伸寃)운동
마침내 최제우에 의해 도통을 이어받은 제2대 교주 최시형
1890년대 본격적인 교조 신원운동을 벌이면서 세력이 확산.
동학교도의 정당한 종교활동을 보장해달라는 시위.
이러한 주장에 대해 조정은 매우 미온적인 반응 뿐
동학교도들은 의견이 2가지로 갈라졌다.
남접 중심 동학교도들은 부패한 봉건정부 타도 강경론
북접(최시형 중심세력)은 지속적인 교세확장의 온건론
두 파는 의견 대립을 넘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비난.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이조말기
사회적 부패와 억압적 상황은 혁명적 상황
1894년 전라남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전국적인 '갑오 농민항쟁'에서 남접은 원동력
정부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북접도 전쟁에 참여
전반부에서는 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정부군을 공격
후반부에 이르러 청과 일본 지원으로 농민군이 대패.
북접 접주들은 1900년 손병희를 제 3 대 교주로 선출.
그러나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가
동학을 진정 계승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
천도교에 반대해 별도의 교단이 생겨났다.
동학의 교리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손병희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
최제우의 경우 한울님은 초월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성격과 내재적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월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시형의 경우, 천주는 인격적·초월적 개념 대신
천(天)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이 우세하게 나타났다.
즉 사인여천·양천주(養天主)·인즉천(人卽天) 개념
사람을 하늘처럼
마음속에서는 천주
사람이 하늘이란 주장
손병희 단계에서는 전통적인 천주개념은 사라지고
인간을 천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인내천 사상이 등장.
동학 당시 종교적 의식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고
천도교에 와서 의식절차가 본격적으로 제정되었다.
최제우와 최시형 단계는 주문 외우는 것을 가장 중요
유교식 복잡한 제사 대신에 간편한 제사행위를 행했다.
그후 천도교 단계에 와서 오관제'(五款制)를 정립했다.
서학.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
바티칸은 세계에서 제일 작고도 큰 나라.
로마 교황청이 바티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10억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천주교.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력한 종교이다.
16세기 중엽 중국과 일본에 전파된 천주교.
1593년 12월 일본을 교화한 에스파냐 신부.
이조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1614년 실학이 이조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발전.
특히,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은 가톨릭을 깊이 연구.
이 두 학자가 천주교를 최초로 서학이라고 부르기 시작.
이조의 탄압 대상이 되어 1887년까지 100 년간 천주교 박해.
.............천주교 박해 100년 수난사................
1801년 순조 즉위후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
득세한 노론파가 남인파에게 정치보복을 가했던 신유박해.
이로 인해 천주교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를 한다.
그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와 유진길 정하상 등이 순교.
1845년 마카오로 유학했던 김대건이 신부가 되어 귀국
1846년 체포되어 병오박해로 김대건과 교우 9명이 순교.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2만 카돌릭 신도들이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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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후기 16세기말~ 17세기 초에 전래된 천주교(서학).
일본, 명, 청 사신 및 이조 학자들을 통해 유입된 서학.
서학은 이조에서 새 학문을 추구하던 실학자들의 관심사.
1
8세기 후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일부 남인 학자들
천주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며 천주교 정착에 기여.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내세 사상은 서민층에게도 쉽게 호응
'그러나, 유교 제사의식을 거부해 사회문제.'
마침내 1785년(정조 9)에는 사교로 규정하여 금지령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당시 집권세력 노론벽파
자신들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명목으로 천주교 탄압.
그러나, 서양인 신부들이 계속 들어와서 포교활동.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귀국하여 적극적인 포교활동
19세기 천주교 교세가 확장 및 서양 열강의 통상 강요
이조 조정은 백성들이 천주교와 외세의 결탁을 우려
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며 천주교를 탄압.
그러나, 천주교는 봉건사회를 해체한 개혁사상으로 작용.
순조 즉위후 60년 간 세도정치로 농촌은 극도로 피폐.
국가기강이 해이해지자 탐관오리들은 권력을 남용한다.
사리사욕을 채우고 횡포를 일삼자 농민들은 더욱 궁핍.
가난에 찌들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마침내 파산
고향을 떠나 걸식하거나 산간벽지로 들어가 화전민
국경을 넘어가 간도나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천주교는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과 부녀자 중심으로 확산.
이조에서는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귀양보낸다.
심지어 5 가구씩 한 단위로 묶어 천주교도 색출을 공동 책임.
천주교도들은 순교를 택하지 않으면 귀양살이
그 가족들은 관아의 노비, 관비, 방지기로 전락.
천주교 동정녀까지 정절을 유린당하며 살아야 한다.
<천주교 = 서양 학문 =서학>. <동학 = 동양 학문>
천주교 박해로 인해 동학은 종교로까지 급성장한다.
동학은 천주교 교리와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
동학의 근본 사상은 인내천
즉 백성이 하늘이므로 평등.
귀천을 가림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
동학사상은 이조에서 종교로서 급성장.
"양반, 부자, 선비는 들어오지 말라."
상민, 노비, 백정, 특히 여성들에게 큰 호응.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고 비참했다.
왕 이하 양반 귀족들은 사리사욕과 권세 다툼
탐관오리와 세리의 악행으로 농토를 버린 농민들.
전국을 떠돌며 방황하다 굶어죽는 백성이 많았다.
깊은 산속에 전답을 일궈 이상향을 추구한 화전민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등 외세가 밀려들어 올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 지자 일어난 동학혁명
이조의 집권 보수세력이 외세와 손잡고 부를 축적한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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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년 음력 정월 10일 새벽, 첫닭이 울자마자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 맨 천여명 농민들이 괭이와 죽창
매서운 새벽 바람도 잊은 듯 농민군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군들은 단숨에 고부관아를 들이쳤다.
조병갑은 미리 알아채고 부호 은씨 집에 숨었다가 전주로 피신.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갇혀 있던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을 빼앗아 도로 나누어 주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속속 가담해왔다.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오하영, 손여옥이 농민군을 집결.
3월 27일 보국 안민의 깃발을 올리고 격문 발표, 행동 개시.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와 부귀를 멸하라
이는 전봉준이 제창한 농민군의 4대 강령이다.
1만 3천명의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파죽지세로 함락,
4월 27일 전주로 입성하자 고종과 민씨 일파는 당황.
민영준은 비밀리에 청나라 군벌 원세개를 만나 파병 요청.
한반도를 수중에 넣을 기회를 엿보던 청은 이미 출병 준비.
5월2일 군함 2척을 이끌고 청나라 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한편 호시탐탐 이조를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도 병력급파.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가 420 명 병사와 대포4문을 이끌고 서울 입성.
같은 날 섭지초가 이끄는 청군 1천 5백명이 아산만에 도착하자
일본군 6천여 명이 인천, 서울 일대를 장악하며 청군을 견제했다.
그러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판단,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강화를 제안해 5월9일 전주화약이 맺어지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했고 농민군은 호남 일대에 농민자치를 실천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청일 양군은 철수하기는 커녕, 저희끼리 전쟁
그 결과 일본이 승리를 거둬 이조는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9월 농민군은 다시 10만 대군을 이루고 혁명군은 공주를 향해 진격.
그러나, 10월 21일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일본군 화력 앞에 무너진다.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군에게 일본군은 무수한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쓰러진 농민군은 500 여 명에 달했고 그들이 흘린 피는 냇물이 되었다.
11월 7일 간 벌어진 공주 공방전 마지막 날,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 참패.
대포와 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맞아 농민군은 분투 끝에 논산 방면으로 후퇴.
전봉준은 서울 정세를 살피려고 순창 피로리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정봉준을 주막으로 안내한 뒤 관가에 밀고하여 잡히고만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 하에 서울로 호송되어 일본 공사관 감방에 갇혔다.
전봉준을 따르는 농민들의 폭동이 두려웠던 이조 당국.
전봉준을 일본군에게 넘겨 주자 그의 기개에 감복한 일본인들.
전봉준을 회유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
5번 법정에 선 후 1895년 3월 29일에 교수형. 그의 나이 41살.
"구구한 생명을 위해 살길을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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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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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백년동안 탄압 속에 무수한 순교자 탄생
이 순교의 역사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큰 자랑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
매년 9월운 우리나라 순교자 성월로 지정하여,
그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그 행적을 기리는 달.
천주교는 이조의 유교적인 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고
인간관계 기본규범 및 인륜(人倫)을 저버리는 행위
이 때문에 천주교 사건들은 사옥(邪獄)이라는 표현
19세기에 발생하였던 대표적인 4 가지 교난.
1. 신유교난 (辛酉敎難, 1801)
1800년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正祖)가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純祖)가 즉위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내린 노론 벽파 대왕대비 정순왕후
수렴청정하며 남인 시파(南人 時派)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남인 시파의 대부분이 천주교에 동조하는 입장이었기에
정순왕후는 신유년 1월 천주교 박해를 통해 이들을 제거
당시 남인 및 천주교 지도급 인물들이 대부분 잡혀 처형
권철신(權哲身),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정약용(丁若鏞), 정약종(丁若鍾) 등이 이 때 국문
특히 이 중에서 정약종, 이승훈 등 6명은 참수형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 이가환 권철신 등은 옥사.
충청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도 공주에서 사형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신자들이 고초를 겪자 자수 처형
전주에서도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다.
황사영은 대역죄가 선고되어 능지처참의 사형
2. 기해교난 (己亥敎難, 1839)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한 교난
헌종이 나이어리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이 때 대비의 오빠인 김유근이 적극적으로 보필했다.
김유근은 유진길(劉進吉)에게 세례받는 등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유근이 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자,
천주교에 적대적인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장악.
1839년 대왕대비에게 천주교도 근절 정책을 건의.
초기에는 별로 잡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김순성의 밀고로 주요인물 체포.
정하상, 유진길 불란서 선교사 앵베르 주교
모방(maubant) 신부, 샤스땅(chastan) 신부
3명의 선교사는 8월 14일 새남터에서 효수형
유진길, 정하상 외 100 여명이 참수형.
3. 병오교난 (丙午敎難, 1846)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체포되면서 발생한 탄압 사건.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 제3대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
만주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입국시키고자 노력
서해안을 통한 해상로 개척의 임무를 띠고
황해도 백령도 부근으로 파견되었던 김대건
돌아오는 길에서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
해주감영에서 김대건은 신분이 탄로나 서울로 압송
현석문을 비롯한 천주교인 10명이 함께 체포되었다.
마침 1846년 9월 불란서 동양함대가 홍주해역에 나타나
기해교난 당시 불란서 선교사들을 죽인 사건을 따지자
긴장한 이조 조정에서는 김대건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9월 16일 김대건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현석문, 임치백 등 8명의 남녀 천주교인들이 처형
9 순교자는 1925년에 로마 교황청에서 복자로 시복.
4. 병인교난 (丙寅敎難, 1866)
1866년 시작 1873년에 끝난 대규모 천주교 탄압.
이는 당시 실권자인 대원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불안을 느껴
천주교 선교사를 이용하려던 대원군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천주교 탄압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체포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이었던
홍봉주(洪鳳周), 남종삼(南鍾三) 등
포청에 잡혀 들어가며 병인교난이 시작
9명의 불란서 신부 및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천주교 탄압을 더욱 부채질
1873년 대원군 실각 후에 비로소 탄압도 종식되었다.
병인교난 당시 처형된 천주교인들은 8,000명 이상
103위 성인들 대부분 병인교난 당시 순교한 사람들.
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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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태극종주 북부능선 들머리..'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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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에서 섬진강 다리 하나 건너면 전남 구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와 비슷한 여건.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었던 격전지.
'인월은 농지 부족한 오지마을이자 빨치산 격전지.'
경남과 전북의 도 경계선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
경남 함양에서 5분도 안되어 사투리가 바뀌는 인월
흥부전의 배경마을로 알려져 관광지 개발 붐이 한창.
흥부전은 이조 후기 작자 연대 미상의 소설.
흥부전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된 판소리 소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는 지역의 이야기.
형인 놀부는 심술이 궂고 욕심이 많아서
부모 재산을 독차지하고 아우를 내쫓는다.
그런데도 형을 원망않고 가난하게 사는 흥부.
흥부는 자식이 많고 재산이 없어 형에게 양식을 구걸
흥부는 남의 품을 팔기도 하고, 매를 대신 맞아 돈벌이.
온갖 애를 쓰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는 처마 밑에 떨어져 다리 다친 제비를 살려주고,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 하나를 심어서 부자가 된다.
박이 열렸는데 그 속에서 많은 금은보화가 쏟아졌기 때문.
이 소식을 들은 놀부는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싸매주지만,
제비가 가져다준 박씨에서 온갖 재앙이 쏟아져나와 패가망신.
흥부전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도덕적 측면
빈부 격차를 문제삼은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이해
서민의 실생활과 직접적 연관을 갖는 소재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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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위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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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건국 초기엔 국력이 튼튼하였으나
고려 말 숭불 정치로 인한 승려들의 발호와
원나라의 80년간 국정 간섭으로 극도로 어수선
왜구들은 공민왕 이래로 침략이 잦아져
해안과 내륙까지 깊숙히 쳐들어와 장기전
때론 개경 변두리까지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1380년 (고려 우왕 6년) 왜구가 남부 내륙을 휩쓸자
이성계 장군이 인월에 주둔한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
당시 인월에 진을 친 아지발도를 괴수로 하는 왜구들.
아지발도는 18세쯤 되고 특히 괴상한 힘이 있는데다
키가 7척이 넘었으며 화살이 뚫지 못하는 갑옷을 착용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녀 아군에게는 실로 공포의 대상
그는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자
고려 조정에서 이성계를 남원에 급파했던 것.
이성계는 여진족 귀화병과 고려군 혼성부대를 편성
변안열을 참모로 하고 퉁두란을 부원수로 하여
전주를 거쳐 남원에 들어와 인월로 향했다.
이성계 장군은 본진을 황산에 주둔하였는데
황산은 운봉과 동면의 중간에 솟은 고지였다.
황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인월이 손에 잡힐듯 한데 굽어보면
운봉 람천 물이 황산 밑을 흘러간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나온 것을 알았지만
이성계가 황산에 진을 친 다음에야 인월에 당도.
인월과 황산은 지척지간 인지라
아지발도군은 말을 몰고 총 공격.
이성계는 퉁두란과 함께 천하의 명궁.
아지발도의 투구를 겨냥해 활을 쏘아
입을 벌리면 입을 맞추어 죽이기로 작정
계획되로 이성계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에 맞았고
아지발도가 입을 벌린 순간에 입과 목을 꿰뚫은 화살.
아자발도는 마상에서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
그가 흘린 피가 바위에 스며들어., 피바위(血巖)
아지발도 없는 왜구들은 오합지졸이 되었는데
고려군이 쏘는 화살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이날 싸움은 해가 넘어가 이윽고 차츰 어두워졌다.
이에 이성계 장군은 용력을 부려 달을 잡아당겨
일찍 뜨게 하여 왜구를 무찔러 승리하게 되었고
싸움터 마을을 인월리(引月理)라 부르게 되었다.
이성계 장군과 퉁두란의 용맹은 더욱 높아졌으며
후일 이성계가 이조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황산대첩으로 민심은 이성계 장군을 신격화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인물이 이성계 휘하로 몰리게 된 계기
인월은 이성계가 이조을 건국하는데 큰 의의가 있는 곳.
...................진포(鎭浦)대첩..........................
고려 말 진포(충남 서천군)에 대규모로 침입해온 왜구
1380년(우왕 6) 8월에 500척이나 되는 왜적 선단(船團)
밧줄로 배를 서로 묶어놓고 연안에 올라와 살육과 약탈
최무선(崔茂宣)이 화포(火砲)로 왜적의 배를 불사르고,
그곳 왜적을 무찔르자 살아남은 왜적은 주력부대와 합류
각지를 노략질하며 남원 운봉을 거쳐 황산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지휘하는 고려 군에게 참패.
황산대첩의 원동력이 된 것은 최무선의 진포대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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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구들은 우리 나라 해안에 자주 침입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까지 죽이곤 했다.
최무선은 중국인 이원에게 화약 제조법을 배워
1380년 금강 하구 왜선 500척을 화약으로 폭파.
금강 하구는 왜구가 내륙으로 들어오는 지름길.
1383년 5월 남해에 침입한 왜구들을
원수 정지가 화포 함선으로 물리쳤다.
1389년 원수 박위에게 100 척 함대를 이끌고
쓰시마(대마도) 왜구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되자 오키나와 왕이 신하의 예를 갖춰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왔고, 조정과 친교를 약속.
최무선의 화약 무기 개발은 더욱 발전돼
임진왜란 때 왜선을 격파하는데 큰 역할
왜군의 화포는 5~6 m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이조 수군의 화포는 10~15 m까지 나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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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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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아영면 인월 성리마을은 흥부전 배경마을.
설화 속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
이 마을에 전해오는 복덕가(福德家) 춘보설화(春甫說話)
성리마을에 박춘보(朴春甫) 묘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
성리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의 지명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주민들이 도운 고개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
흥부가 제비를 고쳐준 발복집터, 고둔'이란 곳집(창고) 터
고둔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개마루에 위치.
사금모퉁이는 흥부가 금을 채취해 부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흰죽배미'란 흥부가 부자가 된 후 은인들에게 주었다는 논.
흥부 아내가 이웃의 흰죽을 먹고 살아나 명명된‘흰죽’
'노디막거리'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개울의 지명으로 추정.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여있지만 개울가에는 억새가 무성
흥부가 성공한 후 이웃을 잊지 않은 나눔의 정신이 바람직.
...............성리마을 찾아가는 길...............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뱀사골행 시외버스를 타고
(20분 간격, 6:50~ 20:30), 인월리에서 하차(30분 소요).
여기서 아영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 탄다(약 10분 소요).
88고속도로 대구방향 - 지리산 I.C - 좌회전 아영 방면 -
아영면사무소 삼거리 좌회전- 8km - 성리 마을 - 20분 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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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일대 남원시 아영면에는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다.
대신 아영면에 있는 인월요업 역사관에서는 민박을 한다.
관광지 : 황산대첩비, 실상사, 바래봉,
뱀사골, 정령치, 구룡폭포, 지지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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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 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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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아지발도를 물리친 황산벌
인월면과 아영면 여러 마을의 이야기
지리산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들어선 인월(引月)
1380년 고려 말 우왕 6년 이곳에서 왜구와 전투.
금강 어구인 진포 해전에서 최무선 장군의 화포 공격
배 500 척을 잃어 퇴로가 막힌 왜구가 경상도로 우회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진출할 때 왜구와 맞선 이성계
당시 삼도도통사였던 이성계 장군은
인월에서 왜구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인월은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에 이르는 중간지점
왜구가 함양 도륙 후, 남원산성을 치고 운봉현을 방화.
왜구는 인월에 주둔하고 한양까지 북상하려 전열을 정비
이성계가 남원 운봉을 경유 황산(荒山)에서 왜구와 대치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용맹스러운 것을 안 이성계
아지발도 투구를 쏘아 맞추고 투구가 떨어지자
동두란이 재빨리 사살하니 적은 기세가 꺾였다.
이성계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아군의 10배나 되던 적은 겨우 70명이 도망쳤다.
약 200년이 지난 선조 10년(1577년) 8월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비석을 세웠다.
1945년 1월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일제는
이 비를 폭파하고 비문 각자를 모두 지워 버렸다.
현재 인월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 부락의 지명은
이 성계의 업적을 기리는 지명들로 바뀌어 명명.
지리산 인터체인지를 벗어나면., 인풍리(引風里).
이 마을에서 7대를 살아 온 박남보(69) 할아버지.
이계순(67) 할머니와 사이에 아들 둘과 딸 여러 명
150년 전 5대 조부께서 토정비결을 보시고
지리산 주변인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인풍리는 길 양쪽으로 내인풍과 외인풍으로 구분.
박 할아버지가 사는 내인풍은 현재 40호(일제 때 60 호)
일정 초 인풍리 북쪽 면소재지 갈계리에 국민학교가 있었고,
너더리(현재 강평마을)로 옮겨 졸업한 다음해 해방을 맞았다.
그당시 논밭농사로 생계를 이어왔지만 대부분 소작
운봉에 살던 만석군이 인월의 대부분 논을 소유했다.
초가집에 낙엽을 긁어 때는 어려웠던 마을이었으나
일제 때 진흥촌으로 선정되어 관에서 지원을 받았다.
뽕나무 재배, 누에고치, 담배 등의 특산물 재배 농가.
원래 인풍리는 경주 이씨가 처음 정착
현재 경주 이씨는 한 가구만 남아있다.
6.25 전후 반란군과 빨치산이 자주 내려왔으나
인풍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인명 피해가 없었다.
현재 70에서 95세에 이르는 노인이 많은 장수마을
40년 전 박 할아버지가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했을 때
돌담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간이 숙박시설이 있었고
여자 혼자 운영하고 있었고 천왕샘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지발도의 누나가 전장에 나가면 황산을 조심하라 했다.
경상도 함양까지 처들어온 아지발도는 누나의 말이 걸려
마침 산청 왕산(王山)을 황산으로 착각하고 조심하였으나
아무 일이 없자 팔랑재를 넘어 황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피를 흘리며 죽은 곳이 피바위
인근 중군리는 당시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
사창 마을은 무기를 저장하는 무기고였던 곳.
인풍(引風)은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시
달을 끌어 솟게 하고 바람을 일게 하여
왜적을 섬멸시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무리(西茂里)는 황산대첩 적의 시체를
내(川) 서쪽에 묻어., 서무듬 또는 서무.
취암리(就岩里)는 뒷산 수리바위에서 유래.
사창(社倉)은 현(縣)의 창고가 있었던 곳.
정봉(鼎峯)은 황산대첩 군사들의 밥을 짓던 곳.
자래(自來)는 지형이 자라 모양처럼 생긴 곳.
구평(龜坪)은 뒷산이 거북이등 같다 하여 유래,
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 폭격
아영면 인풍리 지나 인월면 좌측으로 취암리 입구.
취암리는 취암, 덕실, 구평(동무) 마을로 구분된다.
9대째 취암 마을에 살아오신다는 오형순(72) 할머니
바로 옆마을 구평에서 취암으로 20세 때 시집을 왔다.
오 할머니는 일제 때 어려웠던 일부터 이야기 하셨다.
61년전 기묘년 물이 부족해 큰 흉년이 들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보리이삭을 훑어 먹었고,
물을 대지 못하는 논에 벼 대신 메밀을 심었다.
병자년의 대홍수 때는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여자라 당연히 학교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 시절,
지금의 인월 시장터가 인월 국민학교 자리였다.
한 학년이 두 개 반 정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 대부분 길쌈하여 옷감을 자급 자족,
뽕 누에 재배, 삼베, 명주 베, 면베 생산
70리 되는 남원장에 가지고 나가 팔고
소금 쌀 등 생활필수품을 사가지고 왔다.
새벽에 나가 늦은 밤 집에 도착하곤 했다.
취암리는 일제 때 논이 많지 않았으나
개간하여 지금처럼 논을 많이 만들었다.
일제 때는 마을에 디딜방아간이 두 군데
쌀은 공출로 뺏기고 콩깨묵을 배급받았다.
일제 때 80여 호 되던 취암리는 현재 50여 호
원주민은 외지로 떠나고 외지인들이 살고 있다
6.25 전후해 반란군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인근 산 방공호로 마을 사람들이 피신했다.
인월국민학교에 주둔한 아군을 빨치산으로 오인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많은 군인이 죽기도 했다.
오 할머니댁 길 건너 아영면의 봉대리를 찾았다.
길 양쪽으로 논엔 비바람으로 쓰러진 벼이삭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인적이 드물다.
15대 째 이곳에 사신다는 김기주(84) 할아버지
동갑 김계완 할머니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셨다.
400년전 난을 피해 아곡마을로 정착한 15대 조부
봉대리란 산에서 토사가 많이 내려와 쑥대가 많아
쑥대 봉자를 썼으나 일본인들이 받들 봉자로 개명.
훈장인 6대 조부 서당 제자들이 관직에 많이 올랐다.
일제 때 봉대리는 60여 호였으나 지금은 50여 호
주로 벼농사를 하고 있던 일제 때 서너 집만 지주
마을 사람들은 그 집 일을 하고 식량을 얻어 왔다.
봄에는 보리 나기까지 초근목피로 버텼고
밥 한 끼 옳게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공출은 말도 못하게 심해
공출에 응하지 않으면 일본놈이 두들겨 팼다.
5일마다 열렸던 남원이나 인월, 함양장에 나가면
생필품을 사왔지만 가지고 나갈 물건조차 없었다.
김 할아버지는 일제 때 면소재지 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마치고 17세 때 다시 5학년에 입학.
당시에는 기혼자도 국민학교를 많이 다녔다 한다.
27세 일본군으로 끌려가 캄차카반도 섬에서 비행장 건설
6.25 때 빨치산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마음고생이 심했다.
인월은 남원과는 300m나 차이 나는 고지대로서
15일 가량 기후 차이가 나 농작물 냉해가 발생
김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동안 어둠침침한 방안의 형광등
이름모를 잡초들이 가득한 김 할아버지의 뜰에는 가을비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점점 고령화 되어가는 마을.
인월 서무리에서 3대째 사시는 조대근(71) 할아버지
3대 조부께서 이 마을로 이주해 오시면서 마을 훈장
서무리는 일제 때 식량을 공출 당해 초근목피로 연명.
식량 대신으로 삼았던 쑥은 뿌리마저 남지 않았다.
쑥죽 또는 소나무 껍질 하얀 속을 물에 불려 먹었다.
간혹 배급되는 콩깻묵으로는 배고픔을 이길 수 없었다.
학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한 부락에 3명 정도 학교를 다녔다.
귀한 소금은 벽소령을 넘어
하동까지 가서 져다 먹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바로 옆 황산을 왕산이라 부른다
일제 때 100 호 마을이었으나 현재 80 호로 줄었다.
장날은 3일과 8일이었는데 3일은 아랫장터,
8일은 인월 구사거리와 지리산 진입로 장터
약 60년 전 큰 수해로 아랫장터는 폐지되었다.
30년 전부터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남원이나 함양으로 장을 보러 나가며
인월장터는 차츰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해발 450m 인월은 고랭지 감자, 배추, 무 등을 생산
마을 전체가 지리산 끝자락인 덕두봉 계곡물을 받아
간이 상수도시설을 설치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 때 무쇠솥 제작하는 곳이 있었지만 곧 없어졌다.
최근 모대학 교수가 용역 받아 흥부 놀부 마을을 선정
형제의 마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에 이의를 제기
인월면의 성산 마을은 놀부 마을,
아영면의 상성리는 흥부 마을
주민들 간 이견이 분분하다.
함양.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흔적이 남아있는 정자
상류층 전유물로 백성은 쉽게 접근 할 수 없던 곳.
옛부터 선비의 고장 함양은 경치가 뛰어나기로 유명.
150여 정자가 산재한 함양 절경 중 으뜸인 화림동 계곡
화림동(花林洞)은 이름 그대로 화사한 꽃과 울창한 수풀
맑은 물이 계곡의 기암괴석과 암반을 휘감아 도는 절경지.
안의면 소재지에서 장수, 전주방향 26번 국도를 타고
육십령으로 가는 길목에는 예로부터 8담 8정의 절경지.
현재,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 4정자가 남아 있다.
덕유산(1,508m)에서 발원한 금천이 서상-서하를 지나며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소(沼)를 이루고 흐르며 장장 40리.
남명 선생도 이 지방 선비들인 옥계 노진, 개암 강익 등과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만큼 뛰어난 경치를 간직하고 있다.
안의면 안의교 지나 육십령 국도로 4km 오르면 농월정 계곡.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정자.
옛 조상들의 풍류 사상이 깃들어 있는 곳
함양을 찾은 시인들은 한번은 거치는 정자.
월연암 위로 미끄럼타듯 물살이 세차게 흐르고
물길따라 패인 골은 묵객들이 술잔을 띄우던 곳.
정자는 2층 누각 작은방 삼면으로 난간을 돌린 형태.
농월정에서 국도 따라 2km 오르면 동호정 계곡.
여기서 2km가량 더 오르면 바로 거연정 계곡이다.
자연속에서 거(居)하고 싶어하는 옛 선비들의 마음.
옛부터 절경을 뽐내던 화림동 계곡.
지금은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로 인해
주변 절경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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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시작, 함양에서 끝난 지리산 옛 산행기.
남계서원 풍영루, 연암 박지원 사적비, 학사루 등
함양은 지리산과 관련된 문화재 유적지가 많은 고장.
이조시대까지 한양(진주)과 진주를 잇는 길목.
옛부터 한양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지름길 함양.
옛부터 함양은 지리산을 오가는 들머리이자 관문.
<남계서원>.
정여창은 연꽃을 좋아해 재실의 이름도 ‘애련헌’
앞뜰의 귀퉁이 연못에도 연꽃을 심었을 정도였다.
풍영루에 오르면 연꽃무늬 장식과 그림이 보인다.
남계서원을 나와 소담스런 마을길을 잠시 돌아가면
김종직 제자 김일손(1464~1498)을 배향하는 청계서원.
순종 1년(1907)에 지은 단층 팔작지붕 한옥으로
구경재와 동서재가 있고. 솟을삼문 입구에 홍살문.
<연암 박지원 사적비. 허삼둘 가옥>
화림동과 용추계곡에서 흘러내린 금호천
금호천 안의교를 건너가면 광풍루가 있다.
정유재란(1597)에 소실 선조 34년(1601) 복원
정면 5칸. 측면 2칸 2층 누각 팔작지붕 겹처마.
안의면 소재지 안쪽으로 들어서면 안의 초등학교.
1792년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 현감으로 머물던 곳.
실학사상가 연암은 55세 되던해 부임해 5년 간 재직.
함양군 용추계곡에 최초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연암.
< 허삼둘 가옥.>
갑오개혁(1894)으로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에
경제적 실권자 안주인 의견이 평면 구조에 존중되었다.
ㄱ자형 안채의 꺾인 모서리 부분에 부엌이 들어서 있다.
부엌 통로에 설치한 시렁과 선반이 매우 실용적이다.
그러나 안채와 사랑채의 화재로 내부가 불탄 채 방치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
26번 국도따라 육십령 방향으로 여정을 잡으면
골이 넓고 개울이 구비구비 완만하며 기암괴석
계곡과 너럭바위들이 만나는 곳에 있는 8담 8정
최근 농월정마저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고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만 옛 명맥을 유지
계곡 초입에서 반기던 농월정은 사진에만 남아 있고.
지금은 그곳 소나무숲이 장대 주춧돌을 내려다 본다.
한 굽이 돌아 황석산성 임진왜란 열사 추모하는 황암사
5리쯤 더 올라가면 냇물 가운데 바위섬 위 두칸 동호정
커다란 통나무 한면을 도끼로 파낸 계단이 눈길을 끈다.
동호정에서 1km 오르면 들쑥날쑥한 바위섬 위 거연정
50m 아래 정여창이 시를 읊었던 곳이라는 정자 군자정
<정여창 고택>
안의에서 국도 24번을 따라 함양으로 10km쯤 가면
지곡면 개평리에 중요민속자료 제186호 정병호 가옥
버스정류장에서 이정표를 보고 개울을 건너 마을 안쪽
사과나무 과수원 사이로 보이는 정여창 고택 소슬대문.
3천 평 대지에 사랑채. 안채. 별당. 가묘. 곳간 5 공간
솟을대문에는 정려를 게시한 문패가 다섯 개나 걸려있다
주변 경관을 끌어들인 사랑채가 주인 안목을 대변해준다.
방문 앞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과 추녀 밑 풍경소리
<함양 석조여래좌상. 학사루. 함양 상림>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함양 읍내
함양중학교 화단에 높이 4m '석조여래 좌상'
원래, 절터였고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한 편.
함양 읍내를 지나다 보면 군청 앞에 학사루.
1498년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던 현판 글씨.
최치원이 함양태수 때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후 숙종 18년(1692)에 중건.
학사루에서 1.4km 백운산 방향으로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최치원의 인공림
신라 말 그가 함양태수 때 홍수 예방용 상림.
.............상림숲.....................
위치 :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대덕리
함양읍 서쪽 위천 냇가에 자리잡은 호안림이며
진성여왕 때 함양태수 최치원이 조성한 숲이다.
당시 함양을 흐르는 위천수의 홍수피해가 극심.
최치원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뚝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상림 숲을 조성하였다.
당시 대관림(大館林)이라고 이름 지어 잘 보호하였다.
그후 중간 부분은 파괴되고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만 있다.
면적 21 Ha, 숲의 길이 1.6Km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
120종 2만 그루의 낙엽, 활엽수로 어우러져
사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숲 가운데 수로가 있어 날씨가 가물 때에도
충분한 수분을 공급할 수 있어 녹음이 짙다.
이은리 석불, 함화루 및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척화비, 사운정, 초선정 정자와 만세기념비, 동상.
독립투사들의 기념비 등이 숲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또한 숲 속에는 3,천여평의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야외 공연장 다별당은 문화 체험과 휴식 공간이 되고
함양의 대표적 관광자원으로 크게 각광 받고 있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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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IC에서 국도를 타고 백무동으로 가다보면
구불구불 고개마루를 오르게 되는 곳이 오도제.
옛부터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고개라 하여‘천령’
함양에서 장터목으로 가려 봇짐지고 넘던 길.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던 길.
전설 속 오도재는 함양에서 지리산 가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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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은 중국 함양과 옛날부터 관련이 있는 도시.
하여, 중국에 있는 함양 도시에 관해서도 알아보자.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도시..셴양(咸陽) .....
시안(西安 : 옛 이름 長安)은 몇개 현을 관장하는 행정중심.
중국 고대문명의 요람이었던 시안에서 북서쪽으로 20㎞ 거리.
BC 4세기 진(秦)이 중국을 지배할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자
BC 350년 진의 효공(孝公)이 수도를 옹(雍)에서 셴양으로 이전.
진(BC 221~206)이 중국통일 후 셴양은 통일중국의 수도로 팽창.
관청과 궁궐이 들어서자, 전국 12만 부호(富豪)가 셴양으로 이주.
BC 206년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중국의 패권 다툼
1974년 셴양 동쪽 진시황릉 부근에서 지하묘지를 발견했다.
진흙으로 빚은 실물 크기의 병마용(兵馬甬), 목제마차 등등
진 패망후 한(漢 : BC 206~AD 220)이 장안으로 수도를 이전.
셴양은 위성(渭城)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현으로 전락했다.
23년 후한이 뤄양[洛陽] 도읍 이전으로 현 지위에서도 탈락.
4~6세기 셴양은 정체되기도 하고 행정중심이 되기도 했다.
당대(唐代 : 618~907) 장안이 다시 수도로 되자 셴양은 현.
셴양은 장안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의 첫번째 기착지였으며,
웨이허 강 도하(渡河) 지점을 지키는 수비대의 주둔지였다.
셴양 원래 위치는 지금보다 동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곳.
명(1368~1644)이 개국한 1368년에 현청소재지 셴양으로 이전.
근래 셴양은 웨이허강 유역 거대하고 비옥한 관개지역,
주요산물은 곡물·담배·목화 등이고 면직물 제조업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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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함양은 아방궁 유적지가 있는 진나라 도읍.
영원불사를 꿈꾼 진시황은 생전에 아방궁을 건설.
사후의 삶을 위해 거대한 진시황릉을 건설하였다
서안시 서쪽 아방촌(阿房村)에 있는 아방궁 터.
그 크기는 동서 2500m, 남북 1000m의 규모이다
앞은 전(殿), 뒤는 궁(宮) 두부분으로 나뉘었다
진시황은 중국통일 과정에서 6국을 복속시켰고
중국통일 이후에는 군현제도(群縣制度)를 실시.
식량과 물자를 나르기 위해 수도 함양(서안)을 중심으로
거미줄같은 황제도로를 닦은 길에 맞춰 마차 크기도 통일
운하도 만들었는데 그 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특히, 중국대륙 남북 운하는 오늘날에도 귀중한 교통망.'
진시황이 각지 영주를 수도 함양으로 불러 모았는데
총 12만 명에 달해 궁 입구까지 꽉 들어찼다고 한다.
진시황은 중국통일후 9년 (서기 212년)에 아방궁을 건설
공사가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자 2세 황제가 마감 공사
아방궁에는 약 7백 전각이 약있고 동서 700 m 남북 120m
2층 건물로 동시에 약 1만명을 수용 할 수 있는 규모.
진시황은 복속시킨 6국 보석과 미녀들을 궁에 두었고
아방궁의 궁녀 수가 약 3천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온다
수많은 전각들은 바둑판 처럼 종횡 복도로 연결되어
황제는 그 복도로 다녀 소재를 비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방궁 건설, 진시황릉 건설, 만리장성 건설
연이은 대규모 사역에 국정은 피폐하고 민심은 이반되어
각지 민란의 대표적인 세력이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항우는 힘과 무예를 가졌고 유방은 지략과 덕(德)을 소유
항우가 유리했으나 덕이 부족해 인재를 얻지 못한다
반면 유방은 많은 인재를 얻어 한(漢)나라를 세운다
항우는 사면초가로 오강(烏江)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
한때 항우는 유방과 협력해 진나라 함양을 함락
아방궁에 불질렀는데 100일 동안을 탔다고 한다.
.......................... 중국 산시(함양)성......................
2001년 현재 인구 3,272만 명이고 황하 유역 중부에 위치한 성
동쪽 타이항산맥(太行山脈) 우타이(五臺)산맥, 북쪽 만리장성
성의 대부분 평균고도가 해발 300~900m에 달하는 고원이며 산야.
한족, 진 이외의 소수민족은 거의 없다.
중부에는 불교성지인 우타이산(五台山),
남쪽으로는 황하 유일의 폭포 후커우폭포
중국 4대 회음(회음) 건축물 융지푸지오사, 잉잉탑.
편양을 중심으로 펀주(汾酒)라는 술이 유명하며,
신장(新絳)의 종이, 붓 전통적 공예품이 유명.
역사.
산시성은 원래 북방 이민족인 선비족의 영역이었다.
점차 한족과 동화되어 지금은 거의 대부분 한족과 진.
산시성에 최초로 주민이 정착한 곳은 2,500년 전 함양,
도시 발달은 펀허강 서쪽 연안 춘추시대의 '진양'.
당나라 때 태원부(太原府) 설치, 하동절도사를 주재시켜
돌궐 침입에 대비했고, 五代 때 후당, 후진, 후한(後漢).
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래 3,000년간 북방 군사요충지
황폐와 재건을 무수히 반복해온 역사 깊은 도시.
옛부터 흉노족, 몽고족, 여진족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한때는 ‘전쟁의 신’을 섬기는 사원이 27개나 있었다
산시성은 윈난성 다음으로 중국에서 마약이 성행하는 곳
산시성은 탄광 5000곳이 있는 중국 최대 석탄 생산지
대기오염이 심각해 겨울에는 맑은 날이 드물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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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중국 고대구가 은(殷)나라 동호족(東胡族)의 한 갈래.
진한 시대 다싱안링 산맥에서 남쪽 시라무룬 강으로 이주
후한(後漢 : 25~220) 때 외몽고 흉노족을 지배했던 선비족.
2세기 중엽 선비족 단석괴가 대인(大人)으로 추대되어,
우문(宇文)·모용(慕容)·탁발(拓跋)·단(段)·걸복(乞伏)
부락 군사연맹을 세웠고 부락을 동 중 서(西) 3부로 나누고
각 부마다 대인통령을 두자 <후한>이 단석괴를 왕으로 책봉.
선비족은 유목을 생업으로 삼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선비족이 만든 '각단궁'(角端弓)은 고대 중국의 유명한 무기.
단석괴가 죽은 후 선비족의 부락연맹이 해체되었다.
16국 시대에 선비족의 모용·걸복·우문·탁발 등등
각 부락이 나라를 세웠고 탁발부는 북위(北魏) 왕조
5세기에 중국 북부를 140여 년 동안이나 통치했고
선비족은 스스로 한족화(漢族化)를 열심히 추진했다.
선비족은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한족과 차츰 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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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전국 시대 혼란기의 진나라 유민들.
당나라의 '패망 고구려 유민들' 분산 이주 정책.
산시성 선비족이 한반도 함양 산청으로 이주한 듯.
산청은 함양과 이웃이고 옛부터 영남 옛 선비의 고장.
'경남 함양은 중국 산시성 함양에서 유래된 지명.'
.........함양군은 경남 서부에 있는 군.....................
88올림픽 고속도로가 영호남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
함양읍·마천면·휴천면·유림면·수동면·지곡면·
안의면·서하면·서상면·백전면·병곡면·엄천출장소
1개읍 10개면 1개 출장소 103개 동리. 군청은 함양읍 운림리.
면적 724.95㎢, 인구 42,920(2003), 인구밀도 59.2명/㎢(2003).
[연혁]
삼국시대 중기까지 가야문화권에 속했으며,
백제 신라 경계선에 팔량치같은 고갯마루 길.
7세기초 백제와 신라의 세력이 맞부딪쳤던 곳.
신라는 이곳에 속함군(速含郡)을 설치했으며,
757년(경덕왕 16) 천령군(天嶺郡)으로 개칭하고
이안현·운봉현(雲峰縣)을 영현으로서 관할했다.
고려초에 허주(許州)로 개칭하고,
995년(성종 14)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12년(현종 3)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 합천(陜川)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가 파견되었다.
1395년(태조 4) 이조 초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고,
1466년(세조 12) 함양군이 되었다.
1729년(영조 5)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788년(정조 12) 함양군으로 강등..일명 함성(含城).
1895년 진주부 하동군, 1896년 경상남도 하동군이 되었다.
1914년
석복면·병곡면·마천면·백전면은 그대로,
북천면·원수면·관변면이 위성면으로,
덕곡면·지내면이 지곡면으로,
휴지면·엄천면이 휴천면으로,
유등면·예림면이 유림면으로,
도북면·모간면이 수동면으로
통폐합되었다.
이때 안의군(安義郡)이 폐지
서하면·서상면은 그대로,
현내면·황곡면·초참면이 안의면으로,
대대면·지대면이 대지면으로
통합되어 함양군으로 편입.
1933년 위성면이 함양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 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석복면이 편입되었다.
또한 대지면도 1933년에 안의면에 편입.
1948년 여수순천10·19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해
지리산을 끼고 있는 이곳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1984년 군 중앙부를 관통하는 88올림픽 고속도로 개통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동맥이 지나게 되었다
[자연환경]
소백산맥의 동사면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지맥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산간분지.
북쪽 덕유산국립공원과 남쪽에 지리산국립공원
북쪽으로 남덕유산(1,507m)·금원산(1,353m)·
기백산(箕白山 : 1,331m)·망설봉(望雪峰:620m),
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1,915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촛대봉(1,704m)·칠선봉(1,576m)
서쪽으로는 깃대봉(1,015m)·백운산(白雲山:1,279m)·
삼봉산(三峰山:1,187m) 등 1,000m가 넘는 고산준령.
또한 군의 동부로 오면서 마안산(508m)·화장산(586m)
승안산(昇安山:309m) 비교적 낮은 산지들이 솟아 있다.
지질은 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편마암이 널리 분포,
곳곳에 화강암 산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웅장한 산세.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이 지우천·위천 등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유림면과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경계에서
임천강과 합쳐져 경호강이라 불리며 산청군에 흘러든다.
함양군의 얼마 되지 않는 농경지가 하천변에 펼쳐있다.
기후는 남부 내륙은 따뜻하나 산간지역은 일교차 큰 편.
함양군 고산지대에서는 침엽수림도 넓게 분포하고 있다.
[산업·교통]
산이 많아 경지율이 14.7%에 불과하나
농업가구가 전체가구의 58.5%를 차지한다.
경지면적 106.7㎢(논 71.6㎢, 밭 35.1㎢)
주요농산물로는 쌀·보리·감자·콩을 비롯
배추·무·고추·마늘 소채류, 사과·복숭아 감
인삼·잎담배·참깨 등의 특용작물재배도 활발.
넓은 산지를 이용한 농가부업으로 축산을 장려
한우·돼지·산양·닭·오리 등이 주로 사육된다.
양잠·양봉 명주실과 한봉꿀은 이 고장의 특산물.
양잠은 전체농가의 약 1.0%가 농가 부업,
수동면·안의면·지곡면·유림면·백전면
삼림이 울창하여 목재생산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밤·호두·잣·대추·은행·도토리·버섯 등 풍부.
지리산 일대 한지의 주원료가 되는 닥나무 자생지
군내 1개의 고령토 광산이 개발되어 고령토 생산.
함양읍 중심으로 경남제사 및 제사 공장들이 밀집
지리산 덕유산 국립공원 등 관광 유흥업소가 많다.
교통은 영남과 호남의 분수령을 이루고,
육십령·팔령·벽소령·팔량치·영원령 등
옛날부터 지금까지 고갯마루 길이 발달했다.
1984년 군 중앙을 동서로 달리는 88올림픽 고속도로 개통
이 지역의 산업·교통·문화 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문경-사천, 창녕-남원, 대구-전주 등을 잇는 국도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
[유물·유적·관광]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 함양상림,
최치원이 호안림으로 조림(신라말.).
함양 마천면 마애불입상(고려), 보물 제375호
함양군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에 있는 농월정
구석기시대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고,
수동면·안의면에서 마제석검·토기 등 청동기 유물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고,
이조시대에는 유교가 발달했던 곳이다.
불교 문화재
함양읍 교산리 함양석조여래좌상(제376호),
수동면 우명리의 승안사지3층석탑(보물 제294호)·
승안사지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33호),
서상면 옥산리 극락사지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44호),
마천면 추성리의 벽송사3층석탑(碧松寺三層石塔:보물 제474호),
덕전리 함양마천면마애불입상(咸陽馬川面磨崖佛立像:보물 제375호),
가흥리의 금대사3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안국암부도(安國庵浮屠: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등
유교 문화재
함양읍 교산리의 함양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25호)
안의면 교북리의 안의향교(경남 유형문화재 제226호)
수면 원평리의 남계서원(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
청계서원(靑溪書院: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주요건축물
안의면 금천리의 함양허삼둘가옥(중요민속자료 제207호)
지곡면 개평리의 함양정병호가옥(중요민속자료 제186호)
성종 때 무오사화와 관련이 있는 함양 학사루(유형문화재 제90호),
함양읍성 남문이었던 함화루(咸化樓:경남 유형문화재 제258호),
안의면 안의광풍루(安義光風樓: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지곡면 교수정(敎授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이 있다.
산성
신라시대 토성으로 서상면의 합미산성이 남아 있으며,
수동면 원평리의 함양사 근산성(사적 제152호)
서하면 봉전리의 황석산성(黃石山城:사적 제322호)
천연기념물
함양읍 대덕리 함양상림(咸陽上林:천연기념물 제154호)
휴천면 목현리 함양목현리 구송(천연기념물 제358호) 등
함양상림은 20만 5,842㎡에 이르는 울창한 활엽수림대 숲.
주요 관광자원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3개의 등산로를 비롯
고사목과 원시림, 한신계곡·백무동·용추폭포·
용추사지·옥계(玉溪)·서계(西溪) 등 많은 계곡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농월정·거연정·군자정 등
역사적 유물이 군내 전역에 산재해 천혜의 관광조건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군 동서를 관통하며 호남지방과 연결
[교육·문화]
안동과 함께 이조시대 영남사림의 본거지로 손꼽히던 유향
전통 교육기관으로 함양향교·안의향교·남계서원·청계서원
1962년부터 매년 5월 군민 단합을 위한 천령문화제(天嶺文化祭)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씨름과 줄다리기가 있다.
특히 함양 씨름은 역사깊고 종류가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체격에 따라 장사씨름·상씨름·중씨름·애기씨름으로 나뉜다.
전해오는 설화로는 인물과 지형에 관한 전설이 많아
최치원·정여창·김일손·유자광 등에 관한 이야기
전설
〈도덕고개전설〉·〈영원사연기설화〉·
〈애기소전설〉·〈상사바위전설〉 등.
민요
〈질꾸내기〉〈모내기노래〉·
〈시집살이노래〉·〈과부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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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말.
함양은 지리산 동쪽 끝에 있고 산청과 이웃.
산청은 지리산 동쪽 끝을 대표하는 고장이다.
산청에서 우리 민족의 옛 이동 경로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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