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역 4번 출입구로 나와 50m쯤 직진 후 왼쪽으로 난 낙성대역 길을 따라 가다가, 인헌초등학교 앞에서
왼쪽으로 가면 낙성대역 4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조금 가면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가 나온다.
강감찬 생가지에 있는 향나무와 유허비.
향나무의 유래
낙성대 유허지에는 강감찬 장군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지는 향나무(일명,강감찬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향나무는 1968년 2월 26일 서울시 보호수(제1-23)로 지정 관리되어 오다가 1987년 고사(枯死) 되어
서울시고시 제801호(87,11,3)로 지정 보호수에서 해제되었다.
관악구에서는 1996년 4월 낙성대 유지 확장 조경공사를 하면서 고사된 향나무를 대체하는 나무를 심기로
하고 같은해 11월 고양시에서 수령 150년 된 나무를 구입 이 자리에 이식하였다.
이 향나무를 대체 식재한 이유로는 고사된 향나무의 영속성을 이어 받아
강감찬 장군 낙성대 유허비와 함께 장군이 태어 난 성역임을 표시하여
이 분의 높은 우국충절을 널리 후손들에게 기리기 위함이다"라고 쓰여 있다.
강감찬장군 유허비(서울시 기념물 제3호)
이곳은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仁憲公 姜邯贊, 948~1031)장군이 태어난 장소다.
낙성대(落星垈)라는 이름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큰 별이 떨어져 그 집으로 들어갔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강감찬의 탄생설화가 실려 있다. 설화에 따르면 한 사신이 하늘에서 큰 별이 이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확인해보니 그 집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은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강감찬의 공을 기려
생가 터에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석탑은 1974년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강감찬 사당을 지어 <안국사>라 이름 짓고
주변을 정리 하면서 그곳으로 이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 유허비가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라는 것을 알려 준다
고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은 서기 948년 금주(현 관악구 봉천동)에서 탄생 하였다.
초명은 은천이고 뒤에 고친 이름이 감찬이다. 호는 울정,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부친은 강궁진이며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이다.
983년 3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고 1026년까지 43년간을 관직에 있었다.
문인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고 1030년엔 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1019년 71세라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귀주대첩에 대승을 거두었고 1031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조정에서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인헌이라 시호를 내리고 모든 관리에게 명령하여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다. 장군이 탄생한 터를 후세에 전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3층 석탑을 세웠다.
그의 전승과 업적을 기리기위해 대한민국 무공훈장 중에<인헌무공훈장>이 있고 구축함에 강감찬호가 있다
거란군이 고려 성종12년(993) 1차로 침략했을 때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 물리쳤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년 뒤인 현종1년(1010) 겨울, 거란군이 4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한 번 침입하였고
고려에서도 강조 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크게 패전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만이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였다가
천천히 병력을 일으켜 수복하면 될것이라며 왕에게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하므로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귀주대첩은 우리나라 역사의 자랑인 3대 대첩(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 중 하나이다.
거란은 3차례에걸처 고려를 침략하였는데
1차는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나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 갔으며
2차는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략하였다.
이때 고려는 강조 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크게 패전하여 왕궁은 불타고
고려왕 현종은 나주로 대피하였으며 수많은 인질이 끌려갔다.
이후 현종으로 부터 친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거란은 회군했다.
그러나 1018년 성종은 고려 현종이 친조를 지키지 않고 강동 6성의 반환 요구에도 응하지 않자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고 황제의 친위군 10만으로 3차로 침략하여 속전속결을 시도한다.
현종은 이 때 71세의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박종검과 유참을 판관으로 임명하여 그동안 거란의 내침에 대비해 길러온 20만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막게 했다.
강감찬은 160cm 정도의 왜소한 체형이지만 전략과 용병술로 거란족 역사에 최대 참패를 안겨주었다
기병을 매복시키고 강물을 막았다가 물을 트는 수공으로 기습을 해 적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거란군을 이끌던 소배압은 전세가 불리하자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강감찬 장군의 군대는 귀주벌판에서 총 공세를 하여 10만 대군은 몰살하다시피 하고
살아서 압록강을 넘어 도망간 자는 겨우 수천명에 불과 했다.
백발이 성성한 72세의 노장군 강감찬은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수많은 포로와 물자를 바치니
현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성 밖 우봉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비단장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며 극진히
환영했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법하지 못했다.
새로 심은 향나무.
낙성대 공원이다. 이 곳에서는 전통혼례식도 한다.
돌에 새긴 낙성대 글씨.
박정희 대통령은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대한민국의 안보의 의표로 삼기 위해
장군이 출생한 이곳 관악산 기슭에 새로 유적지를 조성토록 지시하고 낙성대(落星垈)라는 휘호를 내렸다
서울시에서는 그 지시에 응하여 1974년 6월 10일 이곳에 안국사,안국문,사적비 등을 건립하고
박대통령이 내린 휘호를 자연석에 각자하여 오늘의 낙성대 공원을 조성하였다.
면적은 3만1,350m2로 강감찬 장군의 기마청동상과 사당인 인국사,안국문(외삼문),삼층석탑,내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5칸, 측면2킨의 팔작지붕집인 사당 내부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내삼문.
삼층석탑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호)
강감찬은 거란의 십만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 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장군의 공을 기려
그의 생가 터에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삼층 석탑 앞면에 "강감찬 낙성대(姜邯贊,948~1031)"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한 탑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상륜부(탑의 꼭대기에 세워 놓은 장식부분)는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다.
삼층석탑 1층 몸돌에 새겨 있는 "강감찬낙성대" 글씨.
삼층 석탑은 이 곳에서 약50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생가터에서 옮겨온 탑이다.
측면.
강감찬 장군 사적비, 생가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양이다.
유허비와 사적비
안국사
안국사 내부에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원래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렸는데 도난을 당하여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영정이 아니다.
배흘림기둥.
안국사의 기둥들은 나무로 만든 기둥이 아니다.
강감찬전시관에 있는 귀주대첩 기록화의 일부/ 김식
강감찬 장군 생가터에서 고사한 강감찬 향나무.
강감찬 장군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