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모임이나 사람 이름을 처음 짓고 쓴 것은 주시경 선생이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니 1908년에 만든 ‘국어연구학회’란 이름을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이라고 했다가 1913년에 ‘한글모’로 바꾸고 제 아들딸이름도 ‘송산’은 ‘솔메’, ‘삼산’은 ‘세메’, ‘춘산’은 ‘봄메’, ‘왕산’은 ‘임메’로 바꾸고, 주시경이라는 제 이름은 ‘한힌샘’이라고 부르고, 우리말 이름을 ‘한말’, 우리 글자 이름을 ‘한글’이라고 짓고, ‘말모이’란 새 낱말을 만들면서부터다. 그래서 나는 주시경 선생을 우리말 이름 선구자라고 한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여러 사람이 한말글로 이름을 짓고 호적에 올렸으며, ‘경성’이란 땅이름이 ‘서울’이란 우리말 이름으로 바뀐다. 우리말이 살아나는 큰 빛이었다.
미국 군정 때인 1946년 8월 15일 서울헌장이 공포되고 ‘경성’이 ‘서울특별자유시’로 바꾼다. 옛날에는 ‘서울’이라는 말이 한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두루이름씨였으나 ‘한성’이나 ‘경성’ 이라고 부르던 한자말 땅이름이 우리말 홀이름씨 땅이름인 ‘서울’이 된 것이다. 그리고 1949년 10월부터 ‘조선어학회’란 이름도 ‘한글학회’로 바뀌고 ‘조선어 큰 사전’이라는 이름도 ‘우리말 큰 사전’이라고 바뀐다. 땅이름이나 모임이름에서 한자말을 버리고 우리 토박이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식으로 짓던 한문이름이 우리 한말글로 짓기 시작했고 일본이 강제로 창씨개명하게 한 사람이름도 우리말 이름으로 바뀌어 우리 이름이 해방된 것이다.
조선어학회란 모임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꾸게 된 것은 우리말과 글을 살리자는 뜻도 있었지만 그 때 어쩔 수 없는 까닭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남쪽에서 ‘대한민국’이 서고,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나라가 서면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남쪽에 있는 ‘조선’이란 이름이 들어간 단체 들 이름에서 ‘조선이란 말을 빼고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체육회‘는 1948년 9월 4일에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른 단체들도 바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도 모임 이름에서 ’조선‘이라는 말을 빼고 다시 지어야 했다. 거기다가 일제 때 조선어학회를 이끌던 이극로가 1948년 남북협상회의를 하러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임원개선도 하고 모임 이름도 바꾸게 되었다.
그래서 9월 25일에 이극로를 뺀 임원 개선을 하고 10월 2일에 이름을 어떻게 바꿀까 회의를 했는데 “한글학회(정인승), 국어학회(정태진), 국어연구회(이희승, 방종현), 우리말학회(이강로, 유 열), 한글갈모임(최상수), 대한국어학회(최현배), 한국어학회(김윤경), 대한국어학회(최현배)” 들들 여러 이름이 나왔는데 토론을 하고 투표를 한 결과 한글학회로 결정이 되었다. 그 때 이름을 한글학회로 정한 것은 한글을 모르는 이들도 많고 그 전인 4월에 조선어학회 재정을 돕는 모임을 ’한글집‘이라고 지은 일도 있고, 한글을 살리자고 한글날도 있었으니 한글을 알리고 쓰게 하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한글 살리자는 한글학회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 이름을 최현배가 지었다며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제 광복 뒤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기 시작한 일들을 살펴보자, 광복 뒤에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지는 분이 더 많이 있겠지만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진 음악가 금수현님, 사회운동가 김철님, 철학자 정종님 들 세분들 이야기를 하련다. 나는 주시경 선생을 한글이름 선구자라고 말하는데 이 세 분들은 한글이름 개척자라고 말을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에 우리 말글로 이름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남다르지만 그 이름을 살리려고 애쓴 일도 훌륭하고 나라 공식 문서인 호적에 처음 올리고 한글로 쓰게 한 것은 이름 혁명이었다.
먼저 광복 뒤 금수현 선생은 본래 성씨가 ’김씨‘인데 ’금씨‘라고 우리말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아들딸 이름은 “나라, 난새, 내리, 누리, 노상”으로 지었는데 ’ㄴ‘으로 시작되는 돌림자로 지었다고 한다. 그 아름 ’금난새‘는 이름난 음악연주 지휘자다. 금수현님은 음악 선생이었는데 한글학회 최현배 회장과 함께 힘써서 교과서에서 “쉼표, 도돌이표” 같은 우리말 음악 용어를 쓰게 했고 오늘날까지 그 용어가 살아있다. 금난새는 요즘 한 방송에 나와서 그 2세 이름들은 ’ㄷ‘자로 시작되는 돌림자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에 대법원에서 성씨를 ’김씨‘가 아닌 한글로 쓰는 ’금씨‘로 쓰는 것을 인정한다는 팔결도 받았다. 이제 성씨도 우리말 우리식으로 바꾸자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바꿀 때가 되었다.
사회운동가요 정치인인 김철 선생은 일제 때 동경대학을 나오고 광복 뒤 일본 동경에서 살고 있었는데 1948년에 큰 아들을 ’밝힘‘이라고 우리말로 지었고 그 다음 아들은 1953년에 ’한길‘이라고 지었고, 1956년에 귀국해서 정치활동을 하면서 난 셋째는 ’누리‘라고 지었다. 그런데 큰아들 ’밝힘‘은 학교에서 다른 애들 명찰은 모두 한자인데 저만 한글이라 친구들이 놀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수군대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고 ’한길‘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름난 소설가 정치가로 활동했고, 셋째 ’누리‘도 요즘 중앙대 교수로서 활동이 활발하다. 김철 선생이 일본에 살면서도 아들딸 이름을 우리 말글로 지었다는 것은 아주 잘한 일이고 칭찬한 일이다.
정종 교수님은 내가 대학 1학년 때에 철학개론 강의를 들은 내 은사이신데 큰 아들은 “정어지루(목원대 교수)”라고 지었고 따님이 넷인데 “어지나, 나미나, 모라나, 보미나”로 지었다. 그 때 우리 말글로 지은 것도 남다르지만 세 글자로 이름을 지은 것은 이름 혁명이었다. 금수현님도 1945년 광복 뒤 큰아들 출생신고 할 때에 동사무소에서 한글을 받아주지 않아서 애먹었다고 했는데 정종 교수님도 미국 군정 때에 큰 아들 ’어지루“ 출생신고를 하려고 면사무소에 가니 받아주지 않아서 군청에 가니 마찬가지 비웃기만 해서 도청까지 찾아가 “한자로 지은 이름만 호적에 올릴 수 있다는 법이 있으면 내 놓으라!”고 따지니 그런 법이 없으니까 어쩔 수없이 받아주더라고 했다. 보통 사람은 포기했을 터인데 애국심에서 나온 끈질긴 투쟁 결과였다.
오늘날 한글이 이만큼 널리 알려지고 쓰이게 된 데는 한글날과 한글학회라는 이름에 ’한글‘이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이고, 많은 이들이 한말글로 이름을 짓고 쓰게 된 것은 광복 뒤 금수현, 김철, 정종님들 같은 분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말글 이름 씨앗을 뿌렸고 오늘날 한글운동꾼들이 애썼기 때문이다. 이제 주시경 선생이 우리말 이름은 ’한말‘로 우리 글자 이름을 ’한글‘로 새 이름을 짓고 ’말모이‘란 새 말을 만든 정신을 살려서 한말글로 이름도 짓고 새말도 만들어야겠다. 나라에서 ’경성‘이란 일본 한자말을 버리고 ’서울‘이란 우리 토박이말 땅이름을 썼듯이 우리 땅이름을 살려서 쓰고 회사이름, 아파트 이름 들을 영문으로 짓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해야겠다.
우리말이 살아야 우리 겨레 얼이 살고, 한글이 빛나면 우리나라와 겨레도 빛나기 때문이다. 우리 한말글을 살리고 빛내는 일은 우리가 힘센 나라에 짓밟히지 않는 선진국이 되는 길이고 돈과 힘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정부와 국민 모두 마음만 굳게 먹고 조금만 애쓰면 쉽게 될 일이다. 우리 모두 우리 한말글로 이름도 짓고 우리 자주문화를 꽃펴서 후손에게 물려주고 인류 문화발전에도 이바지 하자. 이 일은 우리가 꼭 해야 시대사명이고 우리가 살 길이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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