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혜 교수]김교신과 조선산 기독교에의 그리움 <진리의 벗이되어> 제52호(2001년 3월)에 실린 양현혜 교수(이화여대)의 글.
근대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구는 스스로와는 구별하는 의미로 아시아 지역을 '동양'이라고 명명했다. 아시아에 부여된 이 명칭은 단순한 지역적인 개념 외에 서양적 입장에서 논해진 의미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구와는 이질적인 것으로서 뒤떨어지고 미개하며 역사를 주체적으로 형성해 갈 수 없는 세계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서구 중심주의적 동양 이해는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들의 경우에조차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저술하여 미국인의 조선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리피스(W. E. Griffis)는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그 역사라는 것은 단지 민담에 불과하며,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와 같이 민족적인 허영심과 동물 신화에 근거하여 전통적이고 지역적인 가치의 차원에서만 어림잡은 연대기"일 뿐이며, 따라서 역사라는 범주에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계속해서 그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어 버릴 때, 그 때 비로소 고대적인 역사가 끝나고 근대적인 역사가 출발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피스는 조선의 역사 단계가 그리스도교=서구 근대문명에 의해 개혁되어야 하는 고대적 과정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조선은 고유의 역사적 실체를 박탈당하고 역사 없는 공간으로 폄하되었다.
따라서 조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긴급했던 과제는 자신의 주체성을 소외시킨 서구 중심주의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의 역사적 주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조선 기독교사에서 이 문제를 가장 심도있게 고뇌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조선의 국가 주권이 해체되어 가던 1901년 함흥에서 출생한 김교신은 1919년의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직후 일본에 유학하여 그 곳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다. 그 사이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성서 지도를 받으며 동료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기독교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힘썼다. 귀국 후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등에서 교사로서 민족 교육에 힘을 쏟는 한편,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하여 '조선산 기독교'를 주장했다.
그는 <성서조선>의 창간사에서 학적 양심의 추구도 사해동포적 사랑의 실현도 '조선과 자아'의 관계를 빼놓고는 결코 도달할 수 없듯이, 기독교의 보편적인 진리도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장과 합함으로서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명언했다. 그리고 미국적 기독교를 흉내내거나 자민족 우월주의의 병에 걸린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선교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기독교라면 차라리 기독교인이기를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설파했다.
김교신의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기독교의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의 의미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는 교리도 성경도 교회 조직도 예배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 즉 인간의 주체를 확립시키며 동시에 상대화시키는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타자의 시점에 서는 '하향적 아가페'의 삶을 통해 유형화(有形化)시켜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제외한 기독교의 다른 모든 요소는 각자의 개인적인 기호(嗜好)이고 다양한 인간 개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 진리를 담을 형식은 미국의 기독교는 미국적 기호가 깃들인 형식으로, 일본의 기독교는 일본의 감수성이 어울러진 형식으로 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조선의 감성과 기호와 역사 의식이 녹아 있는 조선적 형식으로 복음을 담아내는 것이 조선 기독교인의 마땅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김교신이 전통적인 가치와 미의식의 의미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천박한 상업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미국적인 종교심에 비해 "은밀히 덕을 쌓고 은밀히 보는 하나님에게 보답 받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조선 재래의 '은덕(隱德)'의 심성을 예찬하기도 했고,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는 담박미의 정서를 재발견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한편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탐욕을 긍정하고 그 성취를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복적인 서구적 인간상을 환영하는 세태에 대해 "선을 행하지는 못해도 선을 행할 것이라는 도(道)는 알았고 이를 두려워 할 줄은 알았"던, 그래서 선을 행하는 척이라도 하려고 했던 조선 유교도의 '위선을 그리워' 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는 조선 유교의 정신적 이상주의를 기독교의 '하향적 아가페'의 정신을 매개로 하여 "그 형태는 지양(止揚)하고 그 정신은 완성"하기를 염원했다. 동시에 불의에서 오는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는 자세를 통해 신의 '아가페'를 역사 속에 구현하며 조선의 기독교를 튼실하게 성장시켜 나가기를 소망했다.
결국 김교신이 꿈꾸었던 '조선산 기독교'는 기독교를 통한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역사 현실 안에서 고난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불의를 정화해 나가는 '창조적 자기수고(自己受苦)'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며 창조해 가려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산 기독교'의 구조는 서구 중심주의의 지적 폭력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려 했던 그의 고뇌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교신에게 있어서 복음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고 기독교는 '죽음을 이긴 종교'일 수 있었던 것이다.
신자 수 1,000만과 120여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제법 몸통을 불리고 모양새를 갖춘 한국 교회에 대하여 이제는 양적 팽창보다는 질적 성숙에 경주해야 할 때라는 교회 개혁의 목소리가 교회 안팎으로 드높은 지금이다. 어떠한 개혁이고 성숙이어야 하는가? 그 중심에는 수량적 성장 제일주의와 서구산 수입 모조품의 종교로서의 부박(浮薄)함을 벗어 던지고 한국이라는 토양이 배양해 온 고유의 감수성과 과제를 담지하면서 복음의 빛을 형상화하는 '한국산 기독교'로 거듭 나야할 당위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에 던지는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라는 화두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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