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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서면 주민자치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영덕
Ⅱ.산서의 묘각(廟閣)과 정자(亭子).재(齋)
1.묘각(廟閣)과 정자(亭子)
1)묘각(廟閣)
(1) 부조묘(不祧廟)
공은 단종대왕(端宗大王)의 국구(國舅), 즉 단조의 장인이다. 세조(世祖)의 황위찬탈로 인하여 단종과 운명을 같이하였고 그 연유로 삭탈관직되었으나 숙종(肅宗)24년(1698,무인)에 단종의 복위와 동시에 관직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으로 내리고 부조묘(不祧廟)를 허락하였다. 이 곳에 부조묘(不祧廟)를 건립하여 묘당을 모신 연유는 자손들이 이 곳으로 이거했기 때문이다.
(2) 부조묘(不祧廟)
공은 세종조(世宗朝) 대마도(對馬島)정벌 때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되어 큰 공을 세웠다. 또한 1433년 에 만주(滿洲)에서 득세한 이만주(李滿住)가 압록강을 넘어 자주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도절제사에 최윤덕(崔潤德), 부절제사에 이순몽(李順夢)을 임명하여 야인(野人)의 소굴을 격파하였다. 공이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조정에서 정렬공(貞烈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세종조(世宗朝)에 배향하였으머 부조의 전을 명하여 고향인 경상도 창원부에 묘당을 건립하였다. 공의 증손인 현감 최륜(崔倫)이 산서면 건지산으로 유배되어 이 곳에 정착하면서 묘당을 이전하고 위패를 모셨으며 강당(講堂)으로 경사재(敬思齋)를 세웠다.
(3) 어필각 (御筆閣)
오성리 성재동 부락에 위치하며, 가정대부 강원도도관찰출척사사간공(嘉靖大夫江原道都觀察黜陟使思簡公) 광주인(廣州人) 안성(安省)을 모신 곳인데, 호가 천곡(泉谷)이다.
獄兵馬公事者 永樂十二年四月二十二日 太宗十四年四月二十二日 ”이란교지를 내렸다. 이 교지는 당시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드며 특히 출척사라는 어사와 다름없는 특권을 부여하는 최대의 은전을 내렸던 것이다. 영조(英祖) 27년에 후손들이 각(閣)을 건립하고 조상의 위업을 빛나게 하였다.
2)정자(亭子)
(1) 성암정(城暗亭)
산서면 봉서리 성산(城山) 위에 소재한다. 창원인(昌原人) 정석후(丁錫後)는 우암(尤庵)과 동춘(同春)의 문도(門徒)로 종학(從學)하였으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만년에 성산에 정자를 지어 강학(講學)하였으며 한반환, 최춘자,김담허 제현과 더불어 수계(修契)하였다.
(2)불고정(不孤亭)
산서면 신창리에 소재하나 현재는 폐허이다. 흥덕인(興德人) 장복겸의 사적은 가요를 참고할 일이다. 산이름이 고산(孤山)이요, 정호(亭弧)가 불고(不孤)니 소동파(蘇東坡)의 “道山은 不孤 하다”는 의(義)를 취함이다.
(3) 송정(松亭)
산서면 봉서리에 소재한다. 송림(松林) 정약과 만헌 정염이 담락(湛樂)하던 곳으로 공들의 사적은(人物編)을 참고할 일이다.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다. 창원인(昌原人) 정상규(丁尙圭)는 궁경(窮經)하고 독지(篤志)하여 지조가 청개(淸介)하였다. 정자를 개울 위에 만축(晩築)하어 둔세(遁世)하였다.
산서면 사계리 월곡(月谷)에 소재한다. 창원인(昌原人) 정협규, 정익규는 유헌(遊軒)정황(丁熿)의 자손이다. 공의 형제가 노년이 되어 서산하계석(瑞山下溪石)상에 구정하고 서로 대하여 훈호하니 사람들이 우우(友于)한다 칭하니 이로 인하여 정자이름을 우우(友于)라 명정(名亭)하였다.
(6) 월수정(月水亭)
산서면 백운리 월펑부락에 소재하나 지금은 폐허가 되고 부락의 쉼터가 되었다.
산서면 동화리 능곡부락에 있는 부락민의 휴식처로 저수지(貯水池)가에 세워진 정자이다. “ 春水는 滿四澤 ”이라는 고시(古詩)에 의거하여 춘만(春滿)이라 이름하였다.
산서면 마하리 원흥부락에 소재한다. 옥천인(沃川人) 육중균(陸重均)이 부친의 묘소를 고봉(高峯)정상에 모시고 성소(省掃)길이 어려워 촌락 한 끝에 영사정(永思亭)
을 건립하고 조석으로 등정(登亭)하여 망묘망배(望墓望拜)했다 한다.
2. 재(齋)
1.재(齋)
(1) 영모재(永慕齋)
산서면 사계리 월곡 대산동에 소재한다. 창원정씨(昌原丁氏) 도사(都事) 환(煥)과 충간공(忠簡公) 황의 묘재이다.
(2) 추원각(追遠閣)
오산리 월강부락에 소재한다. 이조참의에 추증된 안동권씨(安東權氏) 인의 묘재(墓齋)이다.
(3) 구양재(具梁齋)
백운리 구창부락에 소재한다. 능성구씨 공주목사 달충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남원양씨(南原梁氏) 준남(俊男)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능성구씨의 묘재이다.
(4) 영모재(永慕齋)
백운리 당동에 소재한다. 남양홍씨(南洋洪氏) 승사랑(承仕郞) 임(臨)과 아들 천경(天慶)의 묘재이다.
(5) 영모재(永慕齋)
건지리 방죽동에 소재한다. 진주강씨 군자감정 여주의 묘재이다.
(6) 저존재(著存齋)
마하리 원흥부락에 소재한다. 공조참의에 추증된 옥천유씨 경성의 묘재이다.
(7) 연동재
학선리 동고부락에 소재한다. 병조판서에 추증된 옥천육씨 지성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묘재이다.
(8) 영서재(永瑞齋)
오산리 하오 감나뭇골에 소지한다. 안동권씨(安東權氏) 감역(監役) 대수(大受)의 부인인 한양한씨(漢陽韓氏) 재실이다.
(9) 성경재(誠敬齋)
오산리 하오에 소재한다. 선교랑(宣敎郞)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묘재이다.
(10)취정재(聚精齋)
오성리 성재동에소재한다. 광주안씨 통덕랑(通德郞) 천룡(天龍) 군자감정(軍資監正)계생(繼生)의 묘재이다.
(11) 성경재(誠敬齋)
동화리 정풍이에 소재한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어모장군(禦侮將軍) 예(芮)의 묘재이다.
(12) 영산재(靈山齋)
동화리 등석에 소재한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수이조참판 정규의 묘재이다.
(13)상산재(商山齋)
신창리 탑동에 소재한다. 전주이씨(全州李氏)정규(挺奎)의 부인인 상산이씨의 묘재이다.
(14)추모재(追慕齋)
봉서리 척동에 소재한다. 홍주이씨(洪州李氏) 통훈대부 남평현감 행어모장군 충좌 위대호군(通訓大夫 南平縣監 行禦侮獎軍 忠佐 衛大護軍) 길종(吉從)의 묘재이다.
(15)궁양재(弓陽齋)
학선리 활목에 소재 한다. 함양오씨 병조좌랑을 역임한 세득의 묘재인데 , 이조 판서 팽숙의 아들이다.
(16)계월재(桂月齋)
사계리 반곡에 소재 한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성시(聲始) 이하 4세의 묘재이다.
(17)대산재(大山齋)
사계리 대동에 소재한다. 광주안씨 생원(生員) 승효(承孝)와 현감(縣監)충인(忠仁)의 묘재이다.
(18)유로재
신창리 신덕부락에 소재한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선교랑(宣敎郞) 달중(達中)의 묘재이다.
(19)운양각(雲陽閣)
오산리 초장부락 칠봉 아래에 소재 한다. 안동권씨 세극 자의 묘재이다.
(20)오운재(梧雲齋)
봉서리에 소재 한다. 창원 정씨 지형 의 묘재이다.
(21)제양재(梯陽齋)
사계리 월곡 대산동에 소재한다. 창원정씨 풍저창부승 한우의 묘재이다.
(22) 이로재(履露齋)
사상리 사창부락에 소재한다, 부안김씨 종대이다.
(23)영모재(永慕齋)
사상리 당동에 소재한다. 전주이씨 복의 묘재이다.
(24)영모재(永慕齋)
오성리 개치에 소재한다. 여산송씨의 재실이다.
(25) 애경재(僾敬齋)
오성리 등동에 소재한다. 광주안씨 화원의 후예의 재실이다.
(26) 경모재(敬慕齋)
오산리 하오부락에 소재한다. 안동권씨 양언의 묘재이다.
(27) 정송재(精松齋)
오성리 강정부락에 소재한다. 구례장씨 상현과 그 손자 언혁의 묘재이다.
(28) 송계재(松溪齋)
사계리 왕곡(왕곡)에 소재한다. 경주이씨 활계 대유부자의 묘재이다.
(29) 매산재(梅山齋)
쌍계리 양촌부락에 소재한다. 군자감정에 추증된 경주이씨 장근의 묘재이다.
(30) 율수재(聿修齋)
사계리 사반동에 소재한다. 통정대부좌승지에 추증된 청주한씨(淸州韓氏) 택교(澤敎)의 묘재이다.
(31) 영사재(永思齋)
쌍계리 연소동에 소재한다.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청주한씨(淸州韓氏) 원열(元烈)의 묘재이다.
(32) 면앙재(勉仰齋)
동화리 능곡부락에 소재한다. 남원양씨(南原梁氏) 통훈대부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달교의 묘재이다.
(33)회봉재(回鳳齋)
건지리 호병동에 소재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재실이다.
(34)영사재(永思齋)
백운리 가치(柯峙)에 소재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서(文書)의 묘재이다.(35)영모재(永慕齋)
건지리 진전에 소재한다. 함평모씨(咸平牟氏) 통훈대부(通訓大夫) 중례(中禮)의 묘재이다.
(36) 충모재(忠慕齋)
건지리 삽실부락에 소재한다. 문화유씨(文化柳氏) 복영(福永)의 묘재이다.
(37) 영모재(永慕齋)
이룡리 약촌에 소재한다. 흥덕장씨(興德 張氏) 장악원주부 익세의 묘재이다.
(38) 경모재(景慕齋)
사계리 반곡부락에 소재한다. 전의이씨(全義李氏) 병조좌랑 겸 실록국조보찬수관강령현감(兵曹佐郞兼實錄國朝寶纂修官康翎縣監) 휘 엽의 묘재이다.
3.정려(旌閭)와 비(碑)
1)정려(旌閭)와 석정문(石旌門)
(1)효자통정대부 행좌사간함평모공순지려(孝子通政大夫 行左司諫咸平牟公恂之閭)
명정연일 :미상 소재지 :건지리 진전 부락 창건 : 1934년(1981년재건)
공의 휘는 순(恂).자는 순지(恂之),호는 절강(截江), 서은 모씨로 관은 함평(咸平)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태종(太宗) 17년에 문과급제하여 검상(檢詳), 사인(舍人), 좌사간(左司諫)의 관직을 거쳤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에 똥을 맛보았고 하늘에 영험(靈驗)을 얻기까지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장사행렬(葬事行列)이 강을 건너려 할 때 물이 불어 곤경에 처하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울자 강물이 갈라져 무사히 장례를 지냈다. 조정에서 예조(禮曹)로 하여금 효자려(孝子閭)를 건립케 하였다.
(2)효자중의대부 행능성현령 임공휘옥산지려(孝子中宜大夫 行綾城縣令 林公諱玉山之閭)
옥산(玉山)의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국헌(菊軒), 성은 임씨인데, 관은 조양(兆陽)이다. 세조 14년에 출생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장수 현감을 역임하였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성종(成宗)연대에 효자로 이름이 높아 조정에서는 공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 모시는 특전을 내렸다. 이것이 장수 현감이 된 동기이기도 하다. 어느날 부친께서 산비둘기를 원함에 ‘구해 오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드리고 출근하였는데 하루 해가 저물었으나 산비둘기를 구하지 못해 불안한 마음으로 부모님이 계시는 산서면 오산리로 발길을 재촉하여 현재 장수읍 송천리 구락마을을 지나자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공의 앞에 떨러졌다. 이것을 주워 부모를 봉양하였다. 이 때부터 이 지역을 구락리(鳩落里)라고 부르는데 그 지명이 지금까지 쓰고 있다.
(3)효자남원윤공지려(孝子南原尹公之閭)
행섭(行躞)의 자는 필은(弼殷)인데 성은 윤씨, 관은 남원(南原)이다. 영조(英祖) 50년에 태어 났다.. 모친이 중병을 앓아 사경에 이르자 단지수형(斷指輸血)하고 기다렸으나 무효하자 자기 허벅지 살을 도려 약과 함께 다려드렸다. 하늘도 공의 효성에 감동하여 8년 여름를 더 살다 죽음에 시묘를 하였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하산하여 개처럼 수호(守護)하였으니 효성은 만물을 감동시킨다 할 것이다.
(4)절부 조산대부 사옹원첨정 권백시처영인 창원정씨지려
(節婦 朝散大夫 司饔院僉正 權伯時妻令人 昌原丁氏之閭)
영인(令人) 정씨(丁氏)는 유헌(游軒)정황(丁熿)의 현손인 현감지(至)의 딸이며 현감 권백시에게 출가하였다. 정유재란때 적병을 피하여 숲속으로 갔으나 적병의 집요한 추적으로 봉변을 당하게 되자 남편에게 아들을 데리고 피신 할 것을 권하고 자신은 물 속으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5)열녀성균생원 풍천 노세기 처 유인창원정씨지려
( 烈女成均生員 豊川 盧世琦 妻 孺人昌原丁氏之閭)
명정연일 : 경종 3년 (1723) 소재지 : 산서면 하월리
유인(孺人) 정씨(丁氏)는 유헌(游軒) 정황(丁熿)의 현손인 석후(錫後)의 딸로 풍천인 생원 노세기(盧世琦)에게 출가하여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가족에게 온후하여 세상에 칭송을 받았다, 인조 16년 (1638)봄에 도둑이 들어 남편인 노세기(盧世琦)를 끌어 내어 온갖 만행을 저질렸다. 이때 부인은 도둑에게 재보(財寶)는 마음대로 가져가되 사람만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으나 도둑들은 더욱 흉기를 휘둘러 남편을 다치게 하려 하자 부인이 남편의 몸을 가리어 무사하게 되었다 인조 24년(1646)에 남편이 죽자 장사를 치른 후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나라에서는 열녀의 명정(銘旌)을 내려 열행(烈行)을 치하하고 정문을 건립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정려(旌閭)가 훼손되자 두 정려를 하나로 하고 편액을 한군데 걸어 현재는 하나로 유지 보존되고 있다.
(6)열녀 학생권희언처 남평문씨지려(烈女 學生權希彦妻 南平文氏之閭)
명정연일 :정조 7년(1783) 소재지 : 오산리 하오 마을
(7)열녀학생김익처 전주이씨지려(烈女學生金釴妻 全州李氏之閭 )
이씨는 사인(士人)경주(慶州)김익(金釴)에게 출가했다. 의행(懿行)에 숙취(夙就)하고 19세에 결혼하여 구고(舅姑)를 효성으로 받들더니 3년이 되던 병진년에 남편이 구질하니 위독함에 목욕도천(沐浴禱天)하고 몸으로써 대신하기를 원하였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다가 남편의 탈상을 하던 날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구고(舅姑)의 뇌수(牢守)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연하여 거의 미색(微色)이 없더니 한 달이 지난 망월(望月)에 구고와 이모에 삼찰(三札)로 고결(告訣)하고 세상을 떠났다.
(8)증통훈대부사복시정김련장처 열녀숙인진주소씨지려
(贈通訓大夫司僕侍正金鍊章妻 烈女淑人晉州蘇氏之閭)
명정연일 :고종(高宗) 26년(1889) 소재지 : 백운리 죽동 창건:1890년
소씨는 병든 남편을 극진히 간호하였는데 끝내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9)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 육호진지려.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 陸好鎭之閭)
명정연일 : 고종(高宗) 8년(1871) 소재지 : 마하리 원흥부락 도로변
호진(好鎭)의 호는 졸재(拙齋)로, 성은 육씨(陸氏),관은 옥천(沃川)이다.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侍墓)하였다. 고종(高宗) 8년(1871)에 명정(銘旌)의 특전(特典)을 받았다.
(10) 열부 박이항지처 원주원씨정려(烈婦 朴以恒之妻 原州元氏旌閭)
원주원씨(原州元氏)는 효자 박이항(朴以恒)의 처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남편 박이항과 상의하여 피난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누어 가기로 정하고 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부인은 딸을 데리고 각각 피난길에 들었다. 들판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알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피난지까지 침입한 왜병들이 달러들었다. 놈들을 피하여 깊은 계곡으로 도망갔는데 뒤따라온 왜병에게 희롱당하자 몸에 품고 있던 비수로 자기 유방을 잘라 놈들에게 던지고 자결하였다. 그 후 선조(宣祖)조정에서는 그의 갸륵한 마음을 기리어 절부(節婦)로 포상하였다.
(2) 석정문(石旌門)
(1) 효자증동몽교관 조봉대부 양공재철지려(孝子贈童蒙敎官 朝奉大夫 梁公在澈之閭)
공의 호는 송파(松坡)이며 남원인(南原人)이니 성지(誠之)의 후에다. 10세전에 모친을 여의고 부친만을 모셨으나 집안이가난하여 남의 고용살이를 하면서 조석문안을 드렸다. 아비의 병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여 연명케 하였으며 불우한 환경에도 매일 성묘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2) 효자 조봉대부 동몽교관 장기하지려(孝子 朝奉大夫 童蒙敎官 張基河之閭)
시대 : 고종(高宗)31년 (1884년)명정(銘旌) 소재지 :오성리 방화
3) 유인연안이씨효열기적비각(孺人延安李氏孝烈記蹟碑閣)
(3) 비(碑)
1). 비(碑)
(1) 증자헌대부 예조판서 양관대제학 시충간정선생신도비
(贈資憲大夫 禮曺判書 兩館大提學 諡忠簡丁先生神導碑)
시대 : 미상 소재지 : 월곡 대산동
선생은 천품(天稟)이 정직하고 효제충신(孝悌忠臣)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학문에 전력하여 전젹을 널리 읽었으며 춘추전(春秋傳)에 힙썼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논사(論事)에 반드시 뜻이 합하였고,대의가 있어 결정을 못하다가 공의익언에 즉시 결단을 내리니 조야간(朝野間)에 신망이 두터웠다. 선조조(宣祖朝)에 율곡()선생의 상차(上箚)로 과작을 회복하고 1686년 숙종 병인에 자헌대부예조판서 양관대제학 시충간을 증직 받고 사액으로 영천서원(寧川書院)이 설치되었다.
(2) 책선무원 종이등공신 증이조참의 안동권공인사적비
(策宣武原 從二等功臣 贈吏曹參議 安東權公寅事蹟碑)
공의 휘는 인이고, 자는 사율(思栗), 호는 칠봉(七峯)으로, 안동권씨이며, 증영의정 동흥부원군(贈領議政 東興府院君)상(常)의 아들이다. 1550년(明宗 5)생으로 선조(宣祖)무자에 진사하고 천사(薦士)의 명으로 신묘에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이 되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독향관(督餉官)이 되어 막주(幕籌)에 곡당(曲當)하고 벽획(擘畫)에 득의(得宜)하여 조금도 유책함이 없음에 여러 사랍들의 계문으로 내섬사주부가 되고 또 계문하여 군자감판관이 되고 선무 원종이등공신에 책훈되어 올해에 청양을 비록하여 덕산, 거창(居昌) 등 삼읍현재를 역임하니 아는 자 학계우도함을 탄식하였다. 광해조에 미처 정난이 심하고 이륜이 두상함에 사환을 버리고 2형 지사공 황과3형 판서공 희와 더불어 남원 오산촌에 퇴거하여 시국하고 종죽하며 인사를 사절하고 산림에 우유하여 금서로 자오하여 시월을 보매더니 1619년에 졸하였다. 후손이 공의 방걸 절렬 인의 충공 등을 비에 새겨 세웠다.
(3)현감김영문선정비 (縣監金永文善政碑)
시대 : 병자 5월 소재지 : 산서면 오성리
(4)현감 박제억거사비(縣監 朴齊億去思碑) 시대 : 신사 5월 소재비 : 산서면 오성리
(5)현감 유심청덕선비(縣監 兪深淸德善碑) 시대 : 미상 소재지 : 산서면 오성리
(6)현감 박기회 선정비(縣監 朴基灰 善政碑) 시대 : 신묘 10월 소재지 :산서면 오성리
(7)덕곡 육선생유허비(德谷 陸先生遺墟碑)
시대 : 순종(純宗) 3년 기유 소재지 : 산서면 동화리 능곡부락
(8)통정대부용양위부호군면재양공유허비
(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勉齋梁公遺墟碑)
시대 : 1909년 己酉 仲秋 소재지 :마하리 원흥부락
공의 휘는 달교(達敎), 자는 경회(警誨), 호는 면재(勉齋), 관성은 남원양씨이다. 학식이 심수(深遂)하고 행위사 순실(淳實)하여 사우(師友)의 추중(推重)한 바 되고 가훈 8조를 지어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심명케 하고 몸소 실천함을 자면(自勉)하였으나 나이 대기(大耆)에 이르러 우노(優老)의 모범으로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龍驤衛副護軍)에 제수 되었다. 후손이 공의 음덕을 추모하여 묘소 근처에 비를 세우다.
(9)통훈대부 돈녕부주부 가헌권공유허비(通訓大夫敦寗府主簿 稼軒權公遺墟碑)
시대 : 1949년 己丑 소재지 : 오산리 칠봉하
(10)이상일시혜비(李相一施惠碑)
시대 : 1918년 5월 소재지 : 산서면 쌍계리 공이 혜택을 입은 리민(里民)들이 건립하다
(11)한천거사 이환용공적비(寒泉居士 李桓溶攻蹟碑)
시대 : 1965년 2월 소재지 :봉서리 척동 공의 휘는 환용(桓溶)이고 자는 태선(泰善),호는 한천(寒泉)이니 관성은 홍주 이씨이다. 권청련재(權靑連齎)의 문인으로 경사(經史)에 전심하고 시문에 능숫하여 [문집(文集)]2권을 간행하고 처사에 관인하여 선조의 일에 정성을 다하여 많은 공을 남기므로 공적비를 세웠다.
(12)능성구씨남원양씨수호지천(綾城具氏南原梁氏守護之阡)
시대 :1967년 3월 소재지: 백운리 구창
송강 능성구공 원필과 증가선대부 남원양공 지한의 배위숙부인 능성 구씨는 남매의 사이로 두분의 묘소가 한 국내에 있어 양가의 후손이 내외척이 된 고로 성소를 매양 같이하고 송추의 금량도 서로 꾀함이 우금 10여세라 제전과 재우를 두어 영세토록 향화하고자 하여 양가 후손들이 비를 세워 그 뜻을 새겼다.
시대 : 1976년 3월 소재지 : 산서면 마하리 원흥
산전(山田)을 개간하여 옥야로 만들고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어 수원을 넉넉히 하니 호치평(胡峙坪) 경작인들이 비를 세웠다.
(14)유인경주설씨효열비(孺人慶州偰氏孝烈碑)
설씨는 청수인(淸州人) 한봉기(韓鳳起)의 처이다. 남편 공경함을 예로 하고 구고(舅姑)섬기기를 효로 하여 정성의 절차와 공양의 도리에 순덕을 다하였으며 남편이 죽자 하종코자하였다가 노구고와 치자의 양육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집이 가난하여 백리의 길을 왕래하며 부임함에 중도까지 왕영(往迎)하여 그의 노고를 가름하고 혹 구걸하여 구고를 봉양하고 스스로 초근으로 연명하니 장수교궁으로부터 포상되었으며 그 후 비를 세웠다.
(15)회산서선생추모비(晦汕徐先生追慕碑)
시대 : 1977년 소재지 :산서면 건지리 보병동
공은 휘가 상호(相鎬: 자 漢重. 호晦汕 )로 관성이 달성서씨로 효심이 지순하고 우애가 자심하였으며 팔은양(八隱梁)선생의 문에 수업하여 문예(文藝)가 숙취(夙就)하여 학업이 대진하고 의약복서에도 지식이 깊었으며 한일합방 이후로는 임천(林泉)에 회적(晦跡)하여 후생들의 교회(敎誨)에 전력하였다. 문생 65명이 융친계(隆親契)를 조직하여 비를 세우고 잠덕(潛德)을 추모하였다.
(16)이승의 효자비 (李承儀 孝子碑)
시대 : 미상 소재지 : 산서면 오성리
이승의(李承儀)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6세손이다. 천성이 지효하여 부모 공양에 소홀함이 없이하였고 친병(親病)에 대소변을 맛보아 병세를 가늠했으며 물고기를 원하여 물가에서 땅을 치며 우니 고기가 뛰어나와 공진(供進)하여 차도가 있었다. 또 산에 들어가 백일치성을 드리는데 호랑이가 호위하였다 한다. 이 일이 알려져 숙종조(肅宗朝)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7)유인효열부남양홍씨지비(孺人孝烈婦南陽洪氏之碑)
시대 : 1982년 소재지 : 산서면 쌍계리
홍씨는 경주이씨 가문에 출가하여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도와 살았으나 불행이 남편이 중병에 눕게되자 간호는 물론 시부모와 4형제의 자식을 양육하느라 삯품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였다.남편이 끝내 타계하자 때로 고용하여 부모를 모셨다. 주위에서는 효부요.열녀라는 칭송이 자자함에 아들이 비를 세워 부인의 덕을 전하고 있다.
시대 : 1964년 중춘 소재지 : 산서면 마하리 원흥부락
공의 휘는 정중(定中: 자 致能. 호는默齋)인데 관성은 울산김씨요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선생 후예인데 연재(淵齋) 송병준에게 사사하여 학업에 성취하였다. 1895년(고종32.을미)에 전라감사 이도재에의해 천거되어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 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포부를 펴지 못하고 계남.산서 등지에 학당을 만들어 후세 교육에 전력하여 많은 문재를 배출하였다.. 만년에 은둔한 산서면 마하리 원흥부락에 비를 세워 학문과 덕망을 추모하였다.
(19)죽하구선생추모비(竹下具先生追慕碑)
시대 : 1980년 3월 19일 소재지 : 산서면 백운리
공의 휘는 기진(璣鎭)인데 관성은 능성 구씨로 안빈낙도의 선비 대도를 몸소 실천한 분이다.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선비로서 처세하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였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제자들이 공의 은혜를 보답코자 재물을 모아 이 비석을 세웠다.
(20)금란계원우정불망비(金蘭契員友情不忘碑)
시대 : 1985년 소재지 : 산서면 동화리 봉정 부락
(21)삼일운동기념비(三一運動記念碑)
국운의 불행으로 왜구의 침략을 당하여 국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잔학한 폭정이 민생을 조육하나 국인이 다 원망하여 마침내 기미의거를 분발하여 만국의 이목을 경동하니 실오 천고의 장렬함이다. 우리 면에도 애국지사 15인이 있으니 충주인 박정주. 창원인 정호현.창원인 정봉수. 부안인 김형택. 인천인 이화백. 경주인 이길동. 경주인 이상욱. 문화인 유동렬.경주인 이상일. 경주인 이규섭.흥덕인 장화삼. 창원인 정대화.옥천인 육상룡.안동인 권봉옥.경주인 이종호가 본부에 연락하고 각 부락을 선동하여 산서 장날에 수백인을 규합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일경의 총압으로 부산자가 많이 나자 군중이 해산되고 15인이 주모자로 대구 감옥에 체수되어 6개월부터 1년 6개월까지 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지사들을 심문함에 박정주가 높은소리로 크게 꾸짖어 이르되 “백주에 도적이 우리 집에 들어 물건을 약취한즉 누가 큰소리로 꾸짖고 축출치 않으리?” 왜관이 말이 막혀 다시 묻지 아니하고 감옥에 투입하여 고형을 받아 수년후 병으로 인하여
(22)남곡한공용덕경모비(南谷韓公容德景慕碑)
시대 : 1968년 소재지: 산서면 쌍계리
공의 휘는 용덕으로 관성은 청주 한씨이다. 학식과 덕망이 있고 후세교육에 힘써 제자를 배출했다. 제자들이 비를 세우고 공의 덕을 추모하였다.
시대 : 1987년 9월 8일 소재지 : 산서면 동화리 파출소 내
1950년 6.25 동란으로 몇 개월간 국사가 마비되었으나 UN군의 도움으로 회복되자 산서면에도 방위대가 자진 결성되어 수호하는 도중 경찰관 4명과 대원 11명이 순직한바 있었다. 1987년 수복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산서면 민과 재외동지의 희사로 비를 건립하고 군의 보조를 얻어 당시전사자의 명복을 매년 9월28일에 빌게 되었고 와비에 당시 대원 51명의 이름을 기재하여 건립하게 되었다.
(24) 사인안창수시혜불망비(士人安彰洙施惠不忘碑)
시대 : 미상 소재지 : 산서면 오성리 성재동
공의 휘는 창수요 관성은 광주 안씨이다. 이를 즐기고 인을 행함은 옛날부터인데 의를 중히 하고 베풀기를 좋아함은 누가 이 사람 같겠는가.재물이 풍영치 아니하고 나이도 노숙이 아닌데 사적은 고인에 비길 만하여 편석에 여송 하였다.
(25)후재한선생경모비(後齋韓先生景慕碑)
시대 : 1968년 3월 19일 소재지 :산서면 쌍계리
(26)회산한공규일추모비(晦山韓公圭鎰追慕碑)
시대 ; 1988년 소재지 : 산서면 쌍계리
공의 휘는 규일은 관향이 청주 한씨로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제자들이 스승의 인품과 문학을 돌에 새겨 영세에 전하고 있다.
(27)옥천육공한균효자비(沃川陸公漢均孝自碑)
시대 : 1989년 소재지: 산서면 마하리
공의 휘는 한균이요. 관성은 옥천 육씨로 남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효하여 부모 공양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하였다. 친상을 당하여서도 3년동안의 여묘를 지성으로 하였다.
(28)유인광산김씨열행비(孺人光山金氏烈行碑)
시대 : 1957년 소재지 :산서면 쌍계리 양촌 부락
김씨는 경주 이상준의 부인이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더니 남편이 병이 들자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허벅지 살을 도려 치료하고 하늘에 빌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니 그 때나이 25세였다. 수장을 입에 대지 아니하고 하종코자 하니 부당의 효유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예제를 하루 같이 하고 교자를 엄중히 하여 조금도 과실이 없게 하였다.
시대 : 1989년 소재지 :산서면 사상리 127-2
정씨는 정창룡의 딸로 김해인 김인국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를 효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항여 남편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쓰고 가정을 돌보아 생활을 편안케 하였으며 종족간에도 화목을 위주로 하여 칭송이 자자 하였다. 남편이 병이 들자 백방으로 약을 수하고 하늘에 자신이 병고를 대신하기를 빌었다. 임종에 열지주혈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다. 하종코자 하였으나 친척들의 만류로 뜻을 돌이키고 초상의 예절을 다하였다 그 뒤 시부모를 더욱 효로 봉양하니 주위의 칭송이 높았다.
(30)두남안선생추모비(斗南安先生追慕碑)
시대 : 1989년 3월 소재지 :산서면 이룡리
공의 휘는 병태로 관성은 순흥안씨이고 만석 종해의 아들이다. 일찍이 청연재 권선생에게 수업하니 학문이 심수하고 언행이 일치하여 동양 이수형.지산 권양규.한천 이환용.소석 김학열.회당홍순주와 일시선양으로 추종 되었다. 경술국치 후 치발찬씨와 언어문학 철폐에 항거치 못해 만주 북안으로 원둔하였다가 광복후 환국하여 후진양성에 전념. 성취한 자가 많았다. 문생 45명이 취성계를 설립하고 선생장리의 땅에 비를 세워 갱장우모 하였다.
(31)서산처사이공풍호기적비(瑞山處士李公灃鎬記蹟碑)
공의 휘는 풍호요 관성은 전의이씨이다. 석탄 문정공의 후예로 고종 정묘년에 마평에서 출생하였다. 약관에 문장기개가 탁월하여 등과에 뜻을 두었으나 한말 혼탁기를 당하여 초지를 단념하고 임하에 은거중 동학란이 발발하여 호남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나주 목사 민종렬이 공에게 남원향약장을 임명하고 민심수습을 요청하니 수락하고 민심의 안정과 양민가담자의 선처에 공헌하였다.의병장 이석용과 의거에 모의하였고 광복 될 때 까지 항일에 초지일관하였으며 향당의 윤리진작과 누습배척에 헌신하고 6.25동란때 마을의 안전 고수애 힘써 재화를 면케 하였다. 향당 유림의 권유협조로 자손이 건립 하였다.
시대 : 1992년 소재지 :산서면 이룡리 약촌
공의 휘는 익세로 관성은 흥덕장씨이다. 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 건의 아들로 1560년에 출생하여 장악원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고 임천에 귀와하여 요산요수하며 여러 곳으로 반이하였다. 1991년 신비에 충북 재천으로부터 이룡리 선영에 이장하고 영모재를 창건하니 그의 사적을 비에 각하여 세웠다.
(33) 소희사위탑(小喜捨位塔)
시대 : 1990년 소재지 산서면 건지리 진전
원불교 의식에 의한 모상칠) 김봉애 백골장이다.
시대 :1995년 소재지:산서면 쌍계리
공은 청주인이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편모를 효봉하더니 모부인의 병에 상분하여 치료하였으며 대소의 사역을 몸소 처리하며 지혈로 3일을 연명하였다. 후손이 비를 세웠다.
(35) 효자 전주이공하규지비(孝子 全州李公夏奎之碑)
시대 : 1990년 소재지: 산서면 오성리 방화
공은 효령대군 보의 후예이다. 평소 부보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리어 먹기를 원하니 그 때인즉 동한이었다. 때마침 고기장수가 리어 두 마리를 팔러온즉 리어를 먹고 효험이 있어 천년을 마쳤으며 평생을 3일마다 성묘하되 풍우에도 불폐하였다. 도내 유생 20여 인이 순상에 고하였으나 당시 국사의 간난으로 작설을 입지 못하였다. 원래 남원 대산면에서출생하였으나 후손들이 이 고장에 거주한고로 이 곳에 비를 세웠다.
(36) 초산이기호공적비(樵山李奇鎬功蹟碑)
시대 :1990년 소재지:산서면 건지리 호병동
이름이 기호로 관향은 전주이씨이다. 생계가 어려워 배우지 못함이 한이 되어 동리아동들의 학업을 휘하여 서당 답600평을 동네에 희사하고 회산 서상호를 고빙하여 동네아동으로 하여금 무료 학습케 하였다. 마을사람이 그 공로를 높이 창양하여 공적비를 세웠다.
(37) 동곡광주안공사적비(東谷廣州安公事蹟碑)
시대 : 1994년 소재지 : 산서면 오성리 동등
공의 휘는 종묵 광주 안씨이다. 총혜가 절륜하고 품성이 간중하고 과묵하며 불기하고 불구하며 학문은 덕성을 함양하여 천리에 독행하였다. 그 아들이 비를 세웠다.
(38) 오진상공덕비(吳震相功德碑)
시대:1936년 5월 소재지: 산서초등학교 교정
산서초등학교 설립초창기에 부임한 오선생은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애국심이 강하여 단일민족의 우수성과 유구한 역사와 전통 민족성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었다. 일본관청의 감시와 협박을 받으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교육하였다. 오선생이 학교를 떠난 후 제지들과 유지들이 그의 교육정신과 공로를 기념키 위하여 세웠다.
시대:1927년 소재지:산서면 마하리 평촌부락
공의 휘는 학수이고 관향은 연안 이씨인데, 문청공 자지의 후예이다. 자유로 어버이 섬기기를 알아 친지를 승순하고 무열 하며 혼정과 신성을 게을리 아니하며 친병에 하늘에 빌어 대신하기를 원하고 똥을 맛보며 음식을 감하고 병을 고치고자 단지주구하여 수일의 명을 연장하고 거상 3년에 계치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광무5년에 정표의 전이 내렸으나 불행이 모든 문자가 불에 타고 향도천몇 편의 장만 남아 있다.
(40) 송암창원정공효행비(松菴昌原丁公孝行碑)
시대 : 미상 소재지:산서면 봉서리
휘는 헌규로 창원정씨이고, 륜의 후예이다. 평일에 항상 생선으로 부모를 봉양하였고 불행이 부친이 풍병으로 위석함에 시탕을 지성으로 다하고 모친 또한 풍병으로 7년간을 간호함에 정성을 다하여 회춘한 수년 후에 죽으니 향린이 효자라 칭하고 포상코자하였으나 절대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