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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온의 생활 실천
대승불교의 핵심을 설한 경전인 [반야심경]에서는 오온무아를 오온개공이라고 설명하면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부언하고 있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다시 곧 색이며,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뜻이다.
색은 곧 공이며 무아다. 실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색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색즉시공을 통해 우리는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다. 오온이 모두 공하며 무아라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오온이 괴로워하던 것들이 사실은 괴로울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색즉시공은 우리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게 되면 자칫 무기공으로 빠지거나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공하고 무아라고 하니 이 세상은 다 필요 없고, 성공할 이유도 없으며, 열심히 잘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반야심경에서는 다시금 중도적 이해를 위해 색즉시공에서 머물지 않고 나아가 공즉시색을 설하고 있다. 색이 곧 공이지만, 공은 다시 색인 것이다. 텅 비어 공한 세상이지만, 그러한 공한 가운데 아름다운 다양성의 삶이 있다. 텅 비어 공하다고 해서 이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대충대충 막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 공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다 이룰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무아와 연기의 가르침, 공의 가르침은 이 세상이 텅 비어 그 어떤 것도 고정되거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다 만들어낼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장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꿈 속에서는 오히려 견고하게 정해진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 먹은 대로 다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색즉시공이지만 다시금 공즉시색이기 때문에 공하고 텅 빈 이 세상, 이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온이 공하며 무아이지만, 다시금 공하며 무아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드러난 오온의 꽃을 아름답게 피워낼 수 있다. ‘나’라는 오온의 존재는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존재로도 피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이다. 내가 오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곧 오온으로 나를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며, 깨닫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두 가지 중도적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색즉시공의 실천으로 ‘오온으로 괴로움 소멸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공즉시색의 실천으로 ‘오온으로 행복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오온으로 괴로움 소멸하기(고를 소멸하는 오온명상)
나의 괴로움은 곧 오취온의 괴로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취온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이 쌓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존재를 우리는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무아(無我)를 실체적인 ‘자아’로 여기는 것이다. 오온이 나라면, 나의 괴로움은 오온의 괴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괴롭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오온이 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 사성제에서 공부하겠지만, 부처님께서 하신 모든 설법은 궁극적으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인간에게 고(苦)가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이유는 우리의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데 있다.
마찬가지로 이 오온의 가르침 또한 우리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생겨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이 ‘나’가 실체가 있는 줄 알고 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겨났고, 그 ‘나’가 사실은 다섯 요소의 모임에 불과하고 그 다섯 모임 또한 모두가 텅 비어 공한 것이라면 그 모임인 ‘나’ 또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공한 ‘나’에게는 집착할 이유도 없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괴로워해야 할 ‘괴로운 나’가 사실은 없다면, 괴로움이 붙을 곳이 없지 않은가.
괴로움을 소멸하려면 괴로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출처가 어디인지, 무엇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괴롭기는 한데 도대체 누가 괴로운지도 모르고, 왜 괴로운지도 모르며, 그 괴로움의 원인도 모르고, 그 괴로움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괴롭다는 것은 곧 오온이 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온은 말 그대로 다섯 가지의 쌓임이다. 그렇다면 ‘내가 괴롭다’고 할 때, 그 괴롭다는 것은 곧 오온 중에 어떤 요소가 괴롭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괴로울 때는 다섯 가지 요소 중의 하나 때문에 괴롭다. 물론 두세 가지의 요소가 합쳐져서 괴로울 수도 있고, 다섯 가지 요소 모두가 총체적으로 다 괴로울 수도 있다.
고(苦), 오온으로 해체하여 사유하기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괴로울 때 그저 막연하게 ‘괴롭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이 오온의 어떤 요소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오온의 어떤 요소가 괴로운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괴로움에 대해 쪼개고 해체하여 살펴봄으로써 괴로움의 원인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고, 막연하게 괴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로 인해 괴로웠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어떤 요소 때문에 괴롭다는 결론이 나게 되었다면, 그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색수상행식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아이기 때문이다. 즉 색온 때문에 괴롭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사유해보면 색온은 실체가 없다. 수온 때문에 감정적으로 상처받아 괴로웠는데 사유해보니 수온은 무아이며 실체가 없다. 그 감정에 사로잡혀 그 싫은 느낌이 느껴질 때마다 괴로움을 받았었지만, 가만히 사유해보니 그 감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더욱이 그 감정이 나인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면, 감정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가 쉬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저 뭉뚱그려 막연하게 ‘나는 괴롭다’라고 했던 것을, 오온의 가르침을 통해 다섯 가지로 해체해서 살펴보고, 그 각각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사유하여 깨닫게 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더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오온무아의 가르침을 통해 막연하던 괴로움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 사유해 봄으로써 보다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색온의 괴로움, 수온의 괴로움 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해체하여 사유해 볼 수 있는지, 또 각각의 온으로 인해 괴로울 때 그것이 비실체적이며 무아임을 사유함으로써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색온의 괴로움
먼저 ‘색온의 괴로움’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맞았거나, 육체적인 고된 노동을 하거나, 몸에 상처가 나게 되었다면 색온의 요소가 괴로운 것이다. 오온 가운데 색온, 즉 육체적인 요소가 괴로운 것이다. 색온의 괴로움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괴로움이다. 맞아서 괴롭거나, 상처 나서 괴롭거나, 잠을 못 자 괴롭거나, 힘든 일로 괴롭거나 하는 등의 몸이 괴로운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색온의 괴로움, 즉 육체적인 괴로움은 실체적인 것일까? 몸이 괴로운 것은 절대적인 괴로움인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축구선수가 축구시합을 할 때, 우리 팀이 이기고 있고, 그것도 내가 한 골을 넣었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는 분명 몸은 힘들고 지칠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즉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것이 곧 실체적인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육체적으로 힘들더라도 마음은 괴로울 수도 있고, 괴롭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육체적으로는 분명 힘든 상태이지만, 그로인해 마음까지 괴로울지 말지는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산 길을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며칠이고 계속해서 걷는다는 것 자체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인 육체적 걷는 행위가 어떤 경우에는 괴로움도 되고, 어떤 경우에는 즐거움도 된다. 스스로 선택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지리산 종주를 한다면 이는 육체적인 고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산행이지만,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산악행군을 하거나, 마지못해 산 길을 걸어야 한다면 더없이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똑같이 군복무 중에 행군을 할지라도 스스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행군에 임하거나, 혹은 부대 전체적으로 파이팅이 넘치는 가운데, 훌륭한 리더십의 지휘관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행군을 하게 된다면, 혹은 행군 끝에 있을 달콤한 휴가증이나 포상으로 인해 동기부여가 되어 열심히 임하게 된다면, 같은 군생활 중의 행군이라 할지라도 괴롭지 않게, 혹은 다소 힘들겠지만 성취감을 가지고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절에서 철야정진을 하며 3,000배를 할 때 보면, 많은 신도님들은 육체적으로 고된 강행군의 절수행을 하지만, 그래서 몸은 힘들고 피곤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괴로운 것은 아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하다. 3,000배를 끝낼 때의 그 기쁨과 성취감과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감이다.
직접적으로 몸에 통증이 느껴질 때도 마찬가지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전교 석차가 떨어진 숫자 만큼 손바닥을 때리겠다고 공언하신 적이 있었다. 한 번 맞아 본 나로서는 얼마나 아픈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성적 발표날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그런데 성적 발표 날, 담임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매우 기쁜 일이 있으셔서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셨고, 결국 매의 양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체벌 강도도 약해졌다. 손바닥을 맞긴 맞았지만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맞으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맞으면서 기뻤다! 생각했던 것 보다 약하고 적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맞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언제나 괴로운 것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색온의 괴로움은 결정론적이거나,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몸의 괴로움이 실체적인 것이라면, 몸이 힘들 때 마음도 언제나 함께 괴로워야 할 것이지만, 이와 같이 몸이 힘들더라도 마음은 괴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색온무아이기 때문에, 색온의 괴로움 또한 비실체적인 것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힘들고 괴로운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몸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몸의 괴로움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온이, 즉 이 육체가 곧 ‘나’라고 한다면, 육체가 괴로울 때 ‘나’도 괴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나’가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괴롭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육체를 ‘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육체 안에 갇힌 제한된 존재로써의 ‘나’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 육체가 나인 것은 아니라는 생생한 사실을 깨달은 애런 롤스턴(Aron Ralston)의 실화가 있다.
롤스턴은 깊은 계곡에서 혼자 등반을 하다가 굴러 떨어진 큰 바위 덩어리가 오른팔을 짓누르는 사고를 당했다. 피범벅이 된 손을 아무리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았고,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손을 빼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기를 닷새가 지났지만 꼼짝없이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야말로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가지고 있던 비디오카메라에 유언을 남기며 모든 것을 체념했다. 그런데 죽음을 받아들이고 났더니 공포심이 사라지고 오히려 평화가 찾아왔다. 육신에 대한 모든 집착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팔은 나’라고 생각할 때는 팔이 바위에 깔려 꼼짝 못하고 죽게 될 때 ‘나’도 꼼짝 없이 죽게 된다고 생각했지만, 육신의 집착을 버리고 났더니 팔이 나인 것은 아니며, ‘나는 팔 이상의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때 비로소 팔을 잘라낼 용기가 생겼다. 이미 시퍼렇게 변한 팔은 잘라내도 아프지 않았다. 한 시간에 걸쳐 팔을 자르면서도 오히려 팔을 자르는게 행복했다고 말한다. 이 팔만 잘라내면 죽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롤스턴은 이 사건을 통해 ‘육신이 곧 나’인 것은 아니며, 나는 육신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색온은 내가 아니다. 이처럼 물질적인 육신은 내가 아니지만, 우리는 평상시에 이 육신과 팔, 다리 등을 ‘나’라고 생각하며 산다. 롤스턴 또한 닷새 동안이나, 팔을 자르고 자유인이 될 생각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팔이 곧 나라고 생각하니, 팔이 썩어 죽어가는 것을 곧 내가 죽게 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팔이 곧 내가 아니라는, 즉 색온은 무아라는 단순한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팔을 잘라내고 죽지 않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팔이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롤스턴은 아마도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을 것이다.
색온은 무아다. 내가 아니다. 우리는 색온 그 이상의 존재이다. 색온이 아프고 지치고 피곤하고 썩어 없어지는 순간조차,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롤스턴은 팔을 자르면서도 행복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우리는 색온의 괴로움이 올 때, 어쩔 수 없이 괴로워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색온의 괴로움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더 큰 존재인 것이다. 색온의 괴로움이 비실체적이며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물질적인 육신 그 이상의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육체가 바로 나’라는 자기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색온을 나와 동일시하는데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육체적인 괴로움, 즉 색온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첫댓글 나라고 여기는 나는 내가 아님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감사 합니다
붓다수업 책 잘 읽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보니 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꽃](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7.gif)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설명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