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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뜻을 세우다
송성애와 헤어진 후 정신을 차려 공부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구한말 고종임금의 마지막 어의이셨던 청강 김영훈 선생님의 수제자이신 이천 선생님께 친구 김동섭 등과 함께 선생님 한의원에 가서 매주 목요일 아침에 1시간 반씩 임상 강의를 듣기로 했다. 복학생들이 성실하니 복학생 위주로 6명이 열심히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공부하던 터라 선생님도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전수해주셨다. 그 당시 강의료라는 것이 없이 훌륭하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추석 명절에는 자택으로 조기 한 두릅 정도 들고 찾아뵈면 사모님은 떡이며 과일들을 한상 차려 놓으시고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시어 우리들에게 술을 한잔씩 권하시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청강선생님이 직접 쓰신 처방을 모두 전해 받아 그 것들을 정리하여 <청강의감>이라는 한의임상서를 내신다고 우리에게 정리와 교정을 부탁하셨다. 청강선생님은 의학적으로도 명성이 있으셔서 어의가 되기도 하셨지만 처방글씨인 화제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만큼 명필이시기도 했다. 경성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입구에 현판도 청강선생님의 제자를 받아 돌에 새긴 것이다. 같이 공부한 제자들은 열심히 선생님을 도와 책도 내고 출판 기념회도 했다.
이렇게 흉 허물없이 선생님의 한의원에 드나들며 정이든 그 해 설날엔 제자들과 딸들을 모아 놓고 윷놀이도 하며 한 가족처럼 즐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동섭은 나에게 여자를 소개할 테니 선을 보라고 한다. 누구냐니까 암튼 좋은 분이니 토요일 오후 3시에 청량리에 있는 호텔 커피숍으로 나오란다. 그래서 나가보니 아풀싸! 선생님 둘째 따님이 와 계신다. 어떻게 오셨느냐니까 엄마가 나가보라고 해서 나오셨단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도 훌륭하신 선생님께 사사를 받는 것도 영광인데 사위가 되어 달라는 청원이신 것이다. 정말 더 없는 영광이었다. 하지만 생명은 혼자 결정할 수 없어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서 올라 오신 김에 큰누나와 그리고 여자 쪽에선 선생님 사모님이 함께 대면을 했다. 생명의 가족들은 '너는 연애할땐 크고 멋진 여자들과 사귀고는 결혼은 저렇게 약한 여자를 데려 오냐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대학졸업반에 가까워지며 의학을 하는 의사 또는 과학자 심지어는 일반 환자들도 침을 맞고 한약을 먹으면서 한의약의 원리에 대하여 늘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일단 치료 효과는 인정하는데 왜 낫는 것이냐? 에 대한 물음을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을 못하는 것이 답답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일본의 도야마라는 지방은 우리나라 대구처럼 한약의 집산지이고 일본 전국의 한약 장사가 그곳에서 지원되어 그간 번 돈으로 도야마대학 “한약 연구소”가 있다고 한다. 그곳은 연구한 결과를 병원에서 검증하고 치료 효과가 검증된 것은 제약회사에서 상품화하여 돈을 벌고 그 돈은 다시 연구소에 투자된다고 한다. 생명은 그 말씀을 듣고 우리도 “한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의학 연구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는 글을 논문형식으로 써서 들고 다녔다.
그런데 생명이 졸업반의 대표인 졸업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 <한국의약신문>의 편집장인 김국장이 다른 일로 인터뷰 좀 하자고 한다. 나가 만나보니 화통하고 한의학에 대한 애정이 넘치시는 것이었다. 생명은 불쑥 그 원고를 내밀었다. “제가 그냥 써 본 글인데요. 한번 읽어 보세요” 하며 건네주었다. 대충 훑어보시더니 너무 참신하다며 신문에 내주겠다고 빼앗아 갔다. 3일후 나온 주간지에 그 내용이 실렸다. 여기저기서 선배들의 아낌없는 찬사와 격려가 쏟아졌다.
마침 선생님도 그 글을 보시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생명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대학원에서 한방정신과를 전공해보고 싶었다. 본과 2학년 때 의암리 봉사에 갔을 때 간질환자가 매일 제일 먼저 와서 기다리곤 했다. 30대 초반 여자 분인데 간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갔다가 간질 발작을 하는데 그만 화롯불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깊이 입었는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뼈가 드러날 정도로 흉측했다. 생명은 정성껏 소독도 해주고 약도 처방해주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치료를 받다가 간질발작을 하는데 눈동자를 뒤집더니 팔다리가 꼬이고 그 상처부분의 핏줄이 터져 시뻘건 피가 사방으로 물총 쏘듯이 사방 벽으로 뿌려지는 것이었다. 정말 아찔했다. 잠시 후 발작은 가라앉고 조용해졌다. 한 참후에 정신을 차린 듯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충격적이었다. 저런 환자들에게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간질은 정말 신의 저주를 받은 천형일 뿐인가?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까? 의학의 한계를 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방신경정신과를 전공하여 간질을 정복해보고 싶었다, 대학원 시험을 3개월 앞두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였다. 열심히 공부한 효과가 있어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고 스트레스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83년 생명은 겨울 청계천에서 8비트 미국 애플사의 조립품인 컴퓨터를 구입하여 처음으로 컴퓨터게임을 하다가 보니 앞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한의학을 컴퓨터로 정보화하여 분석을 통해 한의학을 과학화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그래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너무 바쁘고 힘들어 프로그래밍은 포기하고 대신 16비트짜리 한방진단인 양도락측정기가 장착된 컴퓨터를 거금 520만원에 구입하였다. 그 후 주식회사 소드컴퓨터와 함께 한방진단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의사가 손으로 보는 맥을 컴퓨터의 모니터에 맥이 그려져 나와 그래프로 볼 수 있게 하였으니 한방의 과학화를 가능하게 했다. 아울러 전자 맥진 진단이 한방 의료보험에 포함되어 모든 한의원에서 수가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전자차트를 통해 진찰하는 방법을 계속 연구하였다.
석사과정을 마치자마자 지도교수님은 1주일에 1번씩 토요일 마다 경주의 동국대학 한의과 대학에 강의를 하러 내려가라고 하신다. 그래서 금요일에 마지막 버스를 타고 경주에 가서 자고 토요일 오전 강의를 하고 오후에 올라오게 되었다. 교수님은 생명이 동국대학에 교수로 남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경주는 너무 멀어서 서울에서 내려가서 교수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방신경정신과학이란 책을 지도 교수님과 공동으로 출간하고 강의를 하는 중에도 한편으로는 박사과정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새로이 생긴 박사과정에 정원은 적게 할당되고 후배들의 지원자가 많아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봄, 가을로 뽑는 박사과정에 아무리 시험을 쳐도 떨어지니 부인은 답답하여 점을 보았단다. 그랬더니 학문을 할 운이 끊어졌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험을 쳐서 5년만에 7번 떨어지고 8번째 들어가니 그야말로 칠전팔기한 셈이다.
3년 동안의 월급쟁이를 마감하고 조원동 시장입구에 900만 원 정도로 남부경찰서 뒤에‘남부한의원’을 개업하였다. 8평 정도에 아주 옹색하게 진찰실은 겨우 침대 2개를 ㄱ자로 놓고 한약장을 칸막이로 대기실 겸 조제실로 시작하였다.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열심히 보살핀 결과 차차 나아져 3년 후에는 2배 정도 되는 옆집으로 확장해 이전하였다. 어느 날 허룸하게 차려 입은 한 아줌마가 물어본다. “원장님! 혹시 여기 인천에서 유명하신 신진돌 원장님이 유명한의원을 내셨다는데 모르시겠어요?,“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남부한의원 건너편에 커다란 5층짜리 건물에 유명한의원이 생겼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부러 사람을 사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광고를 하도록 한 것이다. 신진돌 원장님은 워낙 인천에서 유명하여 아침 4시에 중을 서야 9시에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아주 유명한 원장님이시다. 그런데 역시 직원들을 시켜 줄을 서게 하여 예약하도록 만들어 많은 모르는 사람들이 진료를 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명은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훌륭하신 분이라도 내가 더 젊으니 오래 살 것이니 기다리자! 라고 마음먹고 개의치 않고 전보다 더 친절하게 환자를 돌보았다. 그 해 어버이 날 특집에 생명은 KBS 언제나 청춘이라는 프로의 어버이날 특집 방송에 나가 “시청자 여러분! 어버이에게 좋은 옷 좋은 음식을 자주 준비해서 해드리는 것보단 나이 드신 부모님들은 외로우시기 때문에 자주 전화를 드리는 것이 더 좋은 효도입니다. 대화공양을 많이 하십시요!” 라고 대담에서 말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신진돌 원장님은 생명을 점심에 초대하시어 한 턱 내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이 원장 방송을 참 잘 하시네요. 참 잘 들었습니다!” 라고 하셨다.
생명은 늘 환자들에게도 한의학적 생리 병리를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고 성경 말씀을 잘 인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밥을 지을 때 불이 적당해야지 너무 세면 훌훌 넘고, 너무 화력이 약하면 밥이 설익는 것처럼 몸에서도 적당한 화력이 중요합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생명은 어려서부터 어머님의 영향으로 성경 말씀을 잘 인용했다. 예로 ‘하느님이 병을 주신 것은 인간이 교만하지 말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은 것은 조금 많이 잃은 것이지만 건강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절제해야 건강을 유지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늘 입으로만 하느님을 믿어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하여 혼자 스스로 무턱대고 강남성당에를 나갔다. 처음 미사에 참석하여 뭣도 모르고 밀떡을 신부님께 받아먹고 집에 왔다. 부인 강씨는 “그래 성당에 가서 세례도 안 받고 밀떡을 받아먹어?”, “그냥 아무나 다 먹는 것인 줄 알았지!” 그 후 생명은 6개월간 신부님에게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생명이 대학 다니던 19070-80년대는 농촌이 의료의 사각지대이었다. 그래서 농촌 무료진료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1990년대터는 다시 도시빈민이 의료의 사각지대이었다. 그 당시 달동네인 관악구에서 보건소를 중심으로 무료진료할동을 하였고 2000년대부터는 외국인 근로자가 가장 의료혜택을 못받던 상황이라 외국인 근로자들이 가장 많은 가리봉동의 외국인 선교교회에서 청년한의사회회원들과 함께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하다가 가장 외국인 진료를 조직적으로 하는 카톨릭 봉사단체인 라파엘 크리닉에 한의사가 참여 하지를 않고 있어 한의사협회의 카돌릭 신자들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을 활성화하고 싶어서 더욱이 세례를 받고 싶었다. 그후 잠원성당에서 천마산성당에서 의사들과 함께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무료봉사 활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생명의 아버지의 형제들이 7남매이셨는데 전사하여 돌아가신 분외에는 모두 암으로 돌아가시고 5촌 당숙들도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다. 또한 39살인 고종사촌동생이 멀리 살아서 어려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 했는데 전화가 와 남부한의원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히 위치를 알려주었더니 찾아 왔다. 찾아와 악수를 나누자마자 동생은 “형아 나 폐암이래!”, “형이 고쳐줘!”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작은 아버님은 술을 많이 하셔서 역시 62세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의 자식인 4촌들은 그래도 중풍 쪽으로 3분이나 앓았는데 그래도 4째인 사촌형이 49살에 위암이 온 것이다. 그 때 마침 생명은 대체의학을 통한 암치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 재미교포인 강사장이라는 분이 기공관련 방송을 보시고 찾아 오셨다. 1999년 그 당시 미국에서는 대체의학이라는 것이 용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멕시코로 나가는 국경 근처에 '티후아나'란 지역에 대체의학 암치료센터가 생겨 미국의 말기 암 환자들이 그곳에서 치료를 받기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한국에도 그 곳의 치료법이 방송에 소개되며 많은 암환자 들이 거기를 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강사장이 그 센터에 물리치료기를 납품하면서 그곳의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치료제며 치료기를 남부한의원의 이생명원장에게 제공하며 검증해보고 한국에 한의학과 대체의학을 함께 운용하여 효과가 있는지 검증해 달라고 하였다. 우선 암을 공격할수 있는 치료제, 미네랄, 생약바이러스치료제, Vitamin B12, 심지어 3,000 mg 짜리 Vitamin C 등 많은 치료제를 제공하며 과연 한 달만에 과연 암 덩어리가 줄어드는 지 검증해보라고 한다. 마침 4촌형이 위암이 커져 담낭이 나오는 곳을 막고 있으므로 십이지장을 잘라 위의 허리 부위에 연결시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청주에서 서울까지 매일 치료를 받으러 오기도 하였다. 2달 후에 호전되어 체중도 2Kg이나 증가하여 열심히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약값이 너무 비싸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고 홧김에 귝수를 2그릇 먹고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되어 수술자리가 터지고 복막염으로 고생하다 운명하였다. 그 후로 친구의 가족들 중 암 환자들이 많이 찾아 와 치료해 본 결과는 일단 통증을 완화시키고 임종하기전까지 몰핀을 거의 안 쓰고 편안하게 임종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일단 말기암 환자가 완전히 낫는다는 것은 5년간 추적 조사와 다른 치료를 비교해보아야 하겠지만 말기암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할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방사선 치료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대부분 영양부족으로 사망하는 것은 한의학적인 침이나 한약약으로 보조적인 치료를 통하여 살아 있는 동안 도움이 된다고 믿고 치료를 해주었다.
그 가운데 저주파와 중주파를 이용한 '갈바니치료기'를 많이 이용하였는데 미국서 만든 치료기가 자동 프로그램이 아니고 수동이라 간호사들의 손이 자주 가는 단점이 있어 치료를 귀찮아 하고 또 치료 중 갑자기 토해서 침대 시트며 커튼에 토물이 오염되니 치료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겼다. 그래서 그때부터 의료기회사를 설득하여 한번에 세팅하면 치료를 끝내는 치료기로 업그레이드 시켜보자고 제안하여 오늘 날의 '생-큐'라는 파동치료기를 완성하였다. 약 500여가지 이상의 잘환을 보조치료하는 기계로 조작이 간단하고 활용범위가 워낙 넓어 간단히 뚜렷한 효과가 있는 타겟 증상이라도 검증을 해보려고 나중에 연구소에도 제안했지만 식약청 등록절차를 아직 못 올려 연구소에서 검증도 못하였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에게 꾸준히 적용하여 효과를 본 사람들은 마법의 기계로 추앙을 하고 있다.
피붙이들이 사고사 외에는 모두 암이라니! 그래서 곰곰이 집안의 문제점을 분석해보니 공통적으로 저혈압이 좀 많았고 정신과학적으로 성격들이 ‘수동적 공격형’이라 남에게는 너그럽고 관대하며 자신에게는 철저히 속박하는 이른 바 ‘외유내강형’ 들이었다. 결국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유일한 의사인 생명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숙제이었다.
평상시 담배를 피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던 생명은 자신의 성공이 아버지의 봉상활동과 어머님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아버지 형제자매들은 60전후하여 일찍 돌아가신데 반하여 생명의 아버님이 85세까지도 건강하게 사신 것은 평상시 고향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하신 것도 큰 영향이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호기심천국이란 TV프로에서 어떤 의과대학에서 실험대상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테레사수녀님이 봉사활동을 하시는 습을 비디오로만 보여줘도 침속의 면역증진 물질인 베타글로블린이 증가하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런데 그중에도 실제 봉사활동을 한 학생들의 면역물질은 또 2배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봉사활동이라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닳고 무료진료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
박사과정에서 스트레스 해소에 대하여 연구하던 중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공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중국 연변에서 기공수련을 하고 돌아온 정 선생님을 소개받아 기공수련 사사 받고 후배를 동참시켜 ‘참의도수련회’를 창립하였다. 그래서 기감이 좋다는 강화도 마니산, 백두대간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련도 하고 때론 깊은 산속 절에도 쫒아 다니고 수련하였으며 중국의 명인을 초청하여 시연회도 가졌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는 생각으로 기공에 대하여 알 수만 있다면 다. 그렇게 마스터 해나갔다.
정 선생님은 체육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기공의 훈련이나 치료에 응용이 공개적으로 검증받는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으셨다. 그래서 가끔은 의학적 연구로 수련법이 공개되거나 책으로 써서 공표되는 것을 꺼리셨다. 그러나 일단 의학의 치료요법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학회라는 형식으로 출범해야 한다고 ‘대한의료기공학회’를 창립하고 사비로 학회지를 간행하며 한의사들에게 기공을 가르치고 여러 가지 질병에 응용해 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중국과는 수교도 없던 때라 홍콩을 통하여 들어오는 관련 책들을 중국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중국어를 잘하는 생명은 약 3년간에 걸쳐 환자 보는 틈틈이 노트북을 구입하여 번역해서 편집해 갔다. 타자 실력이 느려 띄엄 띄엄 쳐 나가다 속도가 안 나면 간호사를 대기 시켜 놓고 중국 기공책을 눈으로 번역하여 말하면 그 간호사가 타이핑을 해주어 진도가 나갔다. 그것을 그 당시 ‘천리안’ 이라는 인터넷 망에 연재하였다.
점차 많은 독자들이 생기자 출판사를 하는 고등학교 동창 고차원이 책을 내자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도 구해 그림을 그리고 출판비를 준비하여 <의료기공Ⅰ> 기초이론편을 출판하였다. 출간된 책을 들고 은사님에게 찾아갔다. “선생님 제 책이 나왔습니다.” “아이고, 자넨 밤에 잠도 안자나? 협회 일하랴 대학 강의 나가랴, 방송하랴, 그렇게 바쁜 사람이 또 책을 썼어? 대단하군!” 라고 하시며 칭찬해주셨다. 그 책을 출판을 하며 청년한의사회에서 운영하는 구로동한의원을 돕고 싶어서 인세를 기부하기로 했다 기대 했던 것만큼 많이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기공을 배우거나 지도하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책이었다. 1권 ‘기초이론편’을 내자 출판사가 힘들어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래도 곧 <의료기공Ⅱ> ‘임상실기편’ 나올 것이라고 광고를 했으니 할 수 없이 직접 원고를 들고 다니며 직접 인쇄를 하여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보내 주었다. 책을 낸다는 것이 목돈으로 들어가고 푼돈으로 들어와 실망이 컸다. 그래서 ‘기공진단학’ 이라는 책은 기공을 수련하면 투시, 오링테스트 등의 31가지 진단법이 나온다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었다. 실제로 훈련법도 나오는데 아쉽게도 원고를 다 써 놓고도 출간하지 못했다.
기공에 관련된 책을 써보니 좋은 책은 어느 분야에 전문가가 전문적인 내용을 통달한 사람이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정도가 이해할 수 있게 써 줘야 명저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또 남자라면 일생에 책을 한권 집을 한 채 지어보면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정말 책과 집은 짓기 전에 많은 기획을 하지만 책이든 집이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곳곳에 허점이 드러나며 많은 아쉬움을 남을 남기지만 그 결과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그 후에도 기공을 한방진료와 한방의료보험에 까지 포함시키기 위해 중국에서 연감을 뒤져 가장 잘 팔리는 기공치료기 ‘중의양생기공기’를 중국에서 처음으로 들고 들여 와 진료하기도 하며 기공치료로 박사학위 논문을 써 보려고 열심히 준비했다. 실제로 기계를 이용하여 토끼의 빈혈을 개선하는지 실험을 해보았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실험결과는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박사학위 논문에 참고문헌이 너무 없고 중국의 연구결과는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논문은 “가미분심기음이 항 스트레스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기공이 정말 치료에 응용이 가능한지 보기 위해 학위 논문과는 무관하게 실험 비용을 들여 동국대 한의대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는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1) 사람은 관여하지 않고 기공치료기만 사용하여 스트레스해소정도, 2) 공력이 높으신 장선생님이 외기를 발사하여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정도, 3) 공력이 비교적 낮은 생명이 외기를 발사하고 보조기구로 일본제 저출력레이저를 써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를 객관적으로 체열 측정기, 스트레스 호르몬, 피로도 측정기 등을 이용하여 사람과 기계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런 모든 기공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여 진료하는 ‘기공요법’ 장비와 보조 기구를 남부한의원에 셋팅하고 한방진료와 의료보험에 기술료를 인정해 달라고 보건복지부 한방정책과장에게 의료보험 숫가 책정방법 등이 고안된 공문을 보냈다. 실제로 과장을 비롯한 실사단이 도착했다. 어떤 질환에 가장 효과적이냐고 묻고 기타 치료법에 대하여 이것 저것 물어보고 직접 시술을 받아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남부한의원 외에 다른 곳에서는 이런 기공요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 원장만을 위해서는 인정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으로 기공과 관련하여 방송 출연이 시작되었다. KBS1 TV의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KBS 라디오의 ‘언제나 청춘' 스포츠 TV에서는 생명의 기공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인 ’건강30기‘라는 프로그램을 매일 15분짜리로 녹화 방송하여 1주일 내내 보여주었으며 어느 땐 아침방송을 저녁에 재방송을 하여 7개월간 제작 방영하였다.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직접 중국책을 번역하고 박스에 맞게 짜고 출연자들에게 훈련시켜 나가야 하니 일주일 내내 일요일도 쉬지 못하고 준비해야 했다. 시작하고 한 달 후에는 대상포진에 걸려 1주일분은 직접 출연하지 못하고 제자들만 나와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런 내용은 192편 제작하여 3년 동안 재방송, 3방까지 매일 나갔다. 그때 만나는 친구들은 매일 출연하는 모습을 보고 한의원은 안하고 방송인으로 나섰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기공 바람이 불어 기공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시청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여기 저기 불려 다니게 되었다. 또 평화방송에서는 ’그건 이렇습니다‘ 라는 프로에 건강 상담을 매주 1번 씩 1년 반 동안 고정 상담역을 하였다.
그 즈음 선경그룹에서 기업의 생리와는 무관한 기공수련에 깊은 관심이 있어 그룹 내에서 사원교육 중에 기공수련을 채택하여 최종현 회장님께서 직접 지도도 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몇몇 참의도 수련생들과 함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다. 어느 날 회장님께서 기공에 관련된 책을 쓰시겠다고 비서실로 초청을 했다. 최 회장님은 공력이 꽤 높으시지만 이론은 충분치가 않아 책 내용을 검증해 달라고 하신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한국서 미생물을 전공하시고 미국 가셔서 경영학을 전공하시었단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아주 해박하셨다.
그 가운데 김치에 대한 말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김치의 맛이 무엇 때문에 달라지는 줄 아느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손맛이다, 김장독이 중요하다, 젓갈 맛이다 등등 나름 논리를 대가며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회장님께서 실험실에 직접 연구를 시켜보니 실온에서 17시간이 지나면 산도가 가장 높아 제일 맛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섭씨 0도에 김치를 국물에 잠기게 돌로 눌러 보관하면 그 맛이 6개월 가도 그 맛을 유지 한다는 것이란다. 그리고 밥 먹기 바로 직전에 꺼내서 바로 먹어야 그 맛이 난다고 하신다. 조금 지나면 바로 산화가 되어 김치가 시어진다고 하셨다.
그래서 생명이 신혼 때 워커힐 호텔에 간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1985년 피자가 우리나라 처음 들어 왔을 때 워커힐 호텔에 가족과 피자를 먹으러 갔었다. 그런데 피자를 먹다 보니 너무 느끼해서 김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하나 달라고 하여 먹었다. 또 두 조각을 더 먹으니 김치가 떨어져 한 그릇 더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올 때 카운터에 계산을 하려고 보니 피자는 6,500원인데 12,500원을 내라고 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 김치 한 접시에 3,000원 이란다. 정말 배가 아팠다. 그렇게 비싼 줄 알았으면 안 먹었을 텐데! 라고 했는데 최회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 비싸게 주고 먹을 만도 하네요! 라고 말씀드렸다. 그 후 최회장님은 폐암으로 점점 건강이 나빠지셨고 얼마 후 매일 기공 치료를 받을수 있느냐고 비서실에서 문의가 와서 다시 찾아 갔더니 어떤 돌팔이가 튀어 나와 자기가 치료해드린다며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담스러웠는데... 결국 최 회장님은 현대적인 치료를 거부한 채 기공만 고집하시다 회복하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으니 건강부터 챙기셔야 했는데 아무리 재벌이시라고 해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명이 39살 되던 해 그리고 관악구에서 한의사회장에 당선되어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방송 저 방송의 방송국에서 자주 출연하는 것을 보던 그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의원이 자신과 함께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시의원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지방 교육대학 영어교수 재직하시던 장인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약관 37살에 야망을 품고 교육자치선거에 출마하여 군교육감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부에서 군사정권을 모두 인정하면 그 자리에 두고 인정할 수 없다면 교육감 직에서 물러나라고 하였다. 젊은 혈기에 반대한 장인은 실직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10여 년간 백수로 지내시어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바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힘들게 다닌 부인 강 씨이었다. 생명이 부인에게 정치를 해보겠다고 제안하니 “가정 파괴범이 따로 있느냐?”며 단칼에 잘라 버렸다. 일찍이 ‘한방 의료보험 전국 확대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일한 생명은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활동의 중요성을 너무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그 후 생명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흔히 남자든 여자든 대략 42-3살이 되면 그간 부모님들이 원하던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결혼을 하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 성취된다. 경제적 능력이며 사회적 역량이 마음대로 자신의 길을 좌우할 수 있게 되는 나이가 되면 부모들의 기대와는 어긋나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에 갑자기 변신을 해 본다, 그 것이 바로 ‘성공우울증’이다.
어느 여름 강원도의 어느 산골에 무료 진료를 갔다. 그곳에선 감자를 많이 심었다. “이 많은 감자가 다 팔리나요?“ ” 그럼요 다 서울의 모 백화점과 계약 재배가 되어 전량 수매해갑니다“ ”그럼 가져 간 감자가 1년 보관 하려면 다 썩지 않나요?“ ”그래서 캐기 전 날 뿌리라고 물약을 가져 옵니다“, ”그럼 당신들도 그 감자를 먹나요?“ ” 아뇨 우리 먹을 것은 따로 심어 먹지요“ ”네 ?....“ 너무 기가 막혔다. 돌아오자마자 ”나도 시장의 농산물을 믿을 수 없으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리라“
그래서 부인에게 사실을 말하고 땅을 보러 다녔다. 용인의 외곽에 양지 바른 곳에 네모로 반듯한 500평짜리 밭이 나왔단다. 그래서 그 땅에 일부 전용하여 농가주택을 짓기로 했다. ”절대로 농약, 제초제, 비료를 절대 안 쓰고 남부한의원에서 버려지는 한약찌꺼기만 주기로 하고 이듬 해 봄에 15가지 야채 과일의 씨앗을 뿌렸다. 집을 짓기로 전용한 땅에 가을에 흙과 짚으로 벽돌을 찍어 겨울을 넘기고 봄에 집을 지을 생각이었다. 생명은 어려서 그림을 잘 그려 건축학과에 가서 건축 디자인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기가 설계한 황토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24평정도 되는 집을 설계하였다. 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1/100의 미니어처를 종이 상자로 만들었다. 지붕은 슁글로 마치 스텔스기의 날개처럼 멋지게 만들었다. 이것을 본 가족들은 모두 너무 멋지다고 흥분하였다. 상상만 해도 모두 즐거워했다.
다음 해 봄에 전원주택 전시회가 학동 전시장에서 열렸다. 그래도 어떻게 지을까 정보를 얻기 위해 가 보았다. 들어가는 입구에 미니 2층집인데 확 눈에 띠었다. 직접 들어가서 보니 공장에서 원룸형식으로 제작하여 조립한 골조에 목재를 입힌 슁글싸이딩 공법의 집이었다. 1층 7평 정도에 간단한 부엌, 화장실, 샤워 룸, 보일러가 설치되고 2층은 4평정도의 작은 다락방이었다. 크진 않지만 ‘하얀 인형의집’처럼 너무 예쁜 집이었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전시를 위해 원형대로 분리해서 수입했단다. 그래서 그 회사 사장님을 만났다. “이거 얼마요?”, “2,500만원입니다”, “그럼 2,000만원에 주세요!” “네, 그러시죠” 그래서 그 집을 가져다 용인 땅에 세우기로 하였다. 밭에 땅을 돋우어 집터를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고 6곳에 기초말뚝을 콘크리트 친 것이 굳었다. 약속한 날 그 위에 컨테이너로 싫고 와 지게차로 얹어 놓고 그 위에 2층을 들어 올려 조립해 놓았다. 이튿날 동네 분들이 찾아와 아침에도 없던 집이 저녁에 와 보니 한 한 채가 서 있더란다. 그래서 그 집을 ‘도깨비 집’이라고 불렀다.
어려서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으니 어떻게 짓나 잘 알고 있는 생명은 매주 목요일은 진료가 끝나면 인형의 집에 가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밭일을 하고 오후에 한의원에 나가 진료를 하였다. 그리고 주말에도 갔다. 비가 오면 화구를 펼쳐 놓고 그림도 그렸다. 식구 들이나 친한 친구들을 데리고 가면 가다가 소고기만 사면 그 집에서 밥을 짓고 고기를 굽고 김치와 그곳에서 나는 상추 풋고추 쑥갓 등 싱싱한 야채를 쌈장과 먹으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생명의 딸이 고3 때 수능을 치고 나서 크리스마스 전야제날 친구 5명을 별장에 초대했다. 주차공간으로 지은 헛간에 비닐로 포장마차처럼 바람을 막고 그 곳에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을 설치하고 캐롤을 틀어주며 고기를 구어 주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너무 너무 좋아라한다. 그리고 수다를 떨다가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온 사방에 하얀 눈이 쌓였다. 별장은 다소 높아 그 앞에는 논과 밭이 쫙 펼쳐 있어 바라만 보고 있어도 가슴이 시원하였다. 그런 들판에 덥힌 눈을 바라보던 소녀들은 튀어 나가 강아지처럼 하루 종일 눈싸움을 하고 사진을 찍고 뛰어 다닌다. 아마 그날은 딸의 친구 모두가 평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이었을 듯하다.
생명이 고3때 대학을 떨어져 20살에 재수하러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 올 땐 한남동을 지나 시내로 고속버스가 진입할 때는 답답하여 서울서 못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 생활이 군대 생활 빼고도 서울 생활이 더 많아지니 이젠 시골이 무료해서 고향에 가서도 차례를 지내면 바로 올라와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부리나케 상경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회귀본능이 발동하나 주말엔 시골에서 한적하게 밭농사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다음 해 여름휴가 때 날을 잡아 3일 동안 열심히 풀을 뽑고 이랑을 치고 비닐을 깔고 점점이 구멍을 내고 배추씨를 심었다. 그런데 1달 후에 가 보니 배추가 하나도 싹을 안 틔운 것처럼 아무 것도 안보였다. 아차차 씨를 잘못 구해왔나? 이랑에 들어가 자세히 보니 싹이 튼 배추 잎을 다 갉아 먹고 잎맥만 앙상하게 남은 것이다. 그래서 그 잎맥들을 뽑아내고 있자니 지나가는 농부가 “농약을 딱 한번 준 것이 있는데 심어 보시겠어요?” “그럼 괜찮을까요?”, “150포기 만 주세요!” 그래서 그 어린 배추모를 다시 심었다. 그 후 그냥 두고 지냈는데 정말 한포기도 죽지 않고 알 밴 배추를 수확했다. 그때 느낀 것은 유기농 농사라는 것이 농가에 살면서 수시로 배추벌레를 잡아야 하는데 결국 자기 식구들이 먹을 수 있는 정도뿐만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기농이 중요한 점은 면역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기농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암환자는 화학성분에 –nol자가 들어가는 농약, 제초제, 비료, 아말감, 플라스틱 용기 등을 쓰면 낫지 않는 다고 한다. 이런 성분이 있으면 면역을 떨어뜨리고 암이 이런 성분을 좋아 한다. 농사를 지을 때 농약 제초제 비료와 같은 화학성분을 땅에 주면 이것이 물과 결합하여 땅속으로 배출될 때 반드시 땅에 있는 철분 칼슘 등의 미네랄과 결함하여 빠져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화학제품을 준 야채들은 매년 농사를 지을 때마다 점점 미네랄 성분이 기준치에서 부족해지는 현상이 생기고 심지어는 야채의 껍데기 섬유질만 먹게 된다는 결론이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상추를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것과 태양광으로 키운 것의 비타민C 함유량이 1/3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 이런 사실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암환자의 면역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텃밭을 가지고 유기농으로 키워 먹을 때만 면역이 증진되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물론 주위에 농토가 없는 산속에서 홀로 농사를 짓거나 농토 주변 이웃도 동참해야 한다는 전제이긴 하다. 주위사람이 함께 유기농을 안하면 벌레나 해충이 옮겨 오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