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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musta ka? Philippines!
김포 유훈근 집사
Nu'ng isilang ka sa mundong ito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Laking tuwa ng magulang mo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At ang kamay nila, ang iyong ilaw (우린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
학창 시절에 흑백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던 프레디 아귈라(Freddie Aguilar)의 아낙(Anak)은 필리핀에 대한 나의 첫 번째이자 지금까지의 신선한 기억이다. 남자의 긴 머리와 작고 메마른 체구의 통기타를 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기타 줄을 튕기며 부르던 그의 노래는 세계 28개국에서 번안되어 당당히 8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80년대 초 라이오넬 리치와 마이클 잭슨 등 팝의 황제들과 함께 당당히 빌보드 싱글 챠트 5위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아낙(Anak)은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자식이라는 뜻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감정적인 갈등을 그린 노래다.
필리핀의 국민 가수, 이쯤이면 말년에 호사스러운 삶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넉넉함을 누리며 여유로운 삶을 살 것 같은데 그가 지금 살아가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닐라에서도 가장 가난한 빈민가다. 그는 그곳에서 한 칸의 교실에서 이 지역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유일한 공부방 아낙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연필 한 자루까지 공연을 통한 수익금으로 채운다.
그가 가장 큰 성공을 누렸을 당시, 필리핀은 마르코스 독재에 신음했던 가혹한 시절이었다. 그때 프레디 아귈라와 필리핀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니노이"라는 애칭으로 필리핀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베그니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코라손 아키노의 남편)이 마르코스의 독재에 항거하다 쫓겨나 망명 중이던 미국에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국 필리핀으로 돌아오던 중 공항에서 독재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련의 군인들 에게 머리에 총격을 받고 암살되는 불행한일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필리핀 민중은 거리로 나섰고, 독재에 항거했다. 프레디 아귈라는 그들의 중심에 서서 그들의 숨결로 노래를 했다. 그때부터 그는 필리핀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가수가 되었다. 자유를 외치는 곳,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곳에 항상 그가 있었다. 이제 그는 단지 가수가 아니라 사랑과 존경이 담긴 전설이 되었다. 항쟁의 시기는 끝났지만 프레디 아귈라의 노래는 여전히 필리핀 사회를 보듬고 있다. 그는 여전히 술집여자, 해외 이주노동자, 감옥에 갇힌 이들의 아픈 삶을 노래하고 어루만진다. 58살,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업소를 누비며 돈을 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돈과 빵일 뿐이다.
8월 10일, 신종 플루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고 20시 30분 아시아나 항공으로 인천 공항을 출발한지(OZ 715편) 약 3시간 30분 짧은 비행 끝에 필리핀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공항(Ninoy Aqino Airport)에 첫 발을 내렸다. 프레디 아귈라와 아퀴노, 마르코스, 막사이사이, 필리핀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다. 그러다보니 사설이 길어졌다.
비행기를 벗어나자마자 무척이나 습하고 더운 공기가 엄습한다. 필리핀은 일 년 내내 무덥고 습기가 많은 기후를 나타내는데, 전 군도를 거쳐 복합적인 기후를 나타내나 일반적으로 11월부터 5월 초순까지의 건기와 5월 중순부터 10월까지의 우기로 나뉜다. 평균기온은 25℃이며, 5월은 기온이 40℃까지 올라간다. 3월과 5월 사이는 섭씨 22도에서 35도를 오르내리는 덥고 메마른 날씨이며 6월 중순과 10월 사이는 비가 많이 온다. 11월과 2월 사이는 섭씨 22도에서 28도정도로 선선한 날씨이며 연평균 습도는 77%이다. 우리가 방학을 틈타 갔던 시기는 우기다. 그런데도 다행스럽게(?) 비는 옷도 젖지 못할 만큼씩 두어 번 내렸다. 어쩌면 시원하게 식혀줄 비가 내리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픽업 차량을 이용하여 공항에서 라스 삔야스 City에 있는 마닐라 센터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으로 01시 15분이다. 여행이 아니기에 물론 기대한 것은 없었지만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선교센터라는 근사한 명칭 하나만으로도 머리 속에서는 근사한 상상을 했었다. 독립된 몇 개의 방, 에어컨, 욕실, 식당 등등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하고 상상했던 것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난 지금 놀러온 몸이 아니야.’ 자기최면을 계속 했다. 나중에 서로 나눈 이야기지만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왔다고 하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고 위안이 되었다. 우선 함께 간 남자 8명, 여자 8명이 작은 방 3칸과 거실에서 나누어 자기로 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과 환경에서의 하룻밤은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쉴 새 없이 밤을 새우며 도는 선풍기는 오히려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어른이 이런 생각을 하며 밤을 보냈으니 어린 학생들은 어떨지 짐작이 된다. 그야말로 짜증나고 끈적이는 첫 밤은 그렇게 지났다.
아침이 되니 한국에서의 습관처럼 눈이 일찍 떠진다. 아직도 날씨는 밤새 그대로임을 느낀다. 또 움직이자마자 땀이 흐른다. 문제는 물 사정이 좋질 않아서 마음대로 닦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매일 물을 사서 탱크에 채우고 먹는 물은 별도로 사서 쓰지만 넉넉지 않다.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어떠한 삶보다 최대의 인내가 요구된 셈이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며 빠르게 순응하고 처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기 전에 오늘 오후에 나누어줄 간식 봉투를 만들기 시작했다. 목표량은 150명분이다. 빵과 과자, 쥬스, 사탕 몇 개와 삶은 계란이 전부이지만 빈민지역 뿔로 아이들은 밥을 굶고(사실은 못 먹고) 기다린다는 사실에 부지런히 땀을 흘리며 만들었다. 라스 삔야스의 뿔로 지역은 메트로 마닐라의 외곽 빈민촌으로 작은 하천을 건너서 가야기에 ‘악마의 섬’으로 불린다고 한다. 지방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 뿔로, 그곳은 그들이 밀려난 마지막 장소이며 질병(더러운 물로 인한 피부병, 결막염, 폐결핵 등), 모기, 마약 등이 만연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쓰레기 통을 뒤적이고 산다.
필리핀 초등학교 교과서 2009년도 판에 의하면 필리핀은 2009년 2월 현재 인구가 9천 400 만명으로 세계에서 12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라고 한다. 2008년 필리핀 국가 통계 조정 위원회에 따르면 1시간마다 200명의 비율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인구성장률은 2008년 1.95% 정도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인구 증가율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인구 증가율은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의 평균 1.5%보다 높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85,000,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이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2008년 중반에는 9,045만명의 인구로 평방 킬로미터당 266명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인구조사도 중단한 것으로 전해져서 정확 인구 통계를 알 수 없고 인구 증가에 대해 국가 통계 조정위원회는 필리핀에서는 현대적 가족계획이 없고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일가의 일꾼으로 많은 아이가 필요하며 또한 로마 교황청이 정한 카톨릭 교회의 지침을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인구 증가의 3가지 이유라고 밝혔다.
참으로 골목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아이들이 넘쳐난다. 조혼의 영향으로 20세가 되기 전의 여자인데도 보통 자녀를 한 명이상 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빈민들이 마약에 손댄다는 것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가? 그러나 마약 커넥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가, 경찰, 동네 철부지 어린 꼬마들까지 연결되어 있는 거대 조직이다. 빈민가에 가면 수 많은 사람들이 마리화나나 작은 돌멩이 같은 고체 덩어리의 필리핀 마약 샤부-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에 찌들어 있다. 대낮에도 길거리에서 어른 아이 함께 모여 마약에 심취해 있는 장면들이 목격되곤 한다. 실제로 필리핀에 있는 동안에 본 장면이다. 문제는 동네 어린 아이들조차 너무도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저변화 되어 있고 어린 아이들도 마약의 유혹에 많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가정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손을 대니 아이들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마약에 손을 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의 가난과 배고픔 등 어려움과 고통으로 부터의 도피이다. 가난하고 배고픈데 마약이라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마약은 우리나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정도의 적은 돈만 있어도 가능하다니 이해가 된다. 더구나 심각한 것은 경찰이 있어도 단속은 없다. 누군가는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적인 국가의 시스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아이들이 이 밤도 마약에 취해 거리에서 잠들거나 비틀거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
아침 식사를 늦게 마치고 오전에는 뿔로 지역으로 모기장 설치를 나갔다. 뿔로에 도착하니 악취와 주택이라고 볼 수 없는 그들만의 열악한 거처가 우리를 먼저 맞는다. 마을 아이들과 아기 엄마들 여럿이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우리를 기다렸는지 애처롭게 보인다. 도착하자마자 보여주는 아이의 눈이 심각하게 결막염으로 붓고 충혈되어 있다. 우선 응급 조치 후 온몸에 모기약을 뿌리고 모기밴드까지 손목에 걸고 네 팀으로 나누어서 모기장을 들고 나서는데 아이들이 신이 나서 따라나선다. 모기장 박스를 스스로 나누어 들고 좁은 골목길을 앞장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해진다. 가정마다 돌며 모기장을 설치하였다. 마을 사람들에 따라서는 왜 자기 집은 설치해 주지 않는지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는 함께 간 현지 안내인이 모기장을 잘못 알고 두고 오는 바람에 다시 가서 찾아오는 웃지 못할 일을 저질러서 골목을 돌아 나오면서 얼마나 미안했던지 모른다. 모기장 설치하는 과정은 더위와 어둠(집안이 전기 사정으로 캄캄한 경우가 많음), 그리고 열악한 환경과의 싸움이다. 모기장 하나 묶을 못 하나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며 있다 하더라도 못하나 박을 벽도 마땅치 않다. 벽은 낡은 함석 조각을 덧대거나 나무 조각, 박스 조각 등등 별별 재료를 다 갖다 붙여서 만들어졌다. 그러니 못을 박지도 못할뿐더러 잘못하면 벽이 부서질 지경이다.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목표했던 가정 모두 기쁨을 주었다. 사람 몸 하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컴컴하고 좁은 통로와 악취가 나는 낡은 집, 그나마도 마지막에 들렀던 집은 지붕만 간단하게 있는 대나무로 만든 평상 위에 모기장을 설치하였다. 할아버지까지 고맙다고 손을 잡으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리고 그 집의 여자 어린이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모기장을 설치한 후 마을 입구에서 모여서 내내 기다리던 아픈 사람들에 대해 피부병 및 눈병 약품을 투약한 후 센터로 돌아왔다.
점심 식사를 늦게 마치고 -사실 모든 식사는 제 시간에 해본 기억이 없다 -다시 간식 봉투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조급해 졌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지체할 수가 없었다. 150개를 만들어 박스에 넣고 먼저 현지 교회에 도착하니 뿔로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눈앞을 막았다. 참 많았다. 제한적으로 모이도록 했지만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낮에 보았던 녀석들은 제법 아는 척을 해댔다. 현지 교회(교회라고 해도 일반 주택과 마당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와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마당에 유치원부터 아이들을 정렬 시켰다. 제법 말을 잘 듣고 줄을 선다. 사실 엄포를 놓았다. 내 말을 듣지 않거나 줄을 서지 않으면 간식을 주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런대로 잠잠해졌다. 순식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간식을 나누어주니 2개가 남는다. 148개를 나누어 준 셈이다. 그러나 삶지 못해서 날계란으로 나누어주기로 한 계란은 아이들이 떠난 후 우리들의 박스 옆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주기로 하고 남은 봉투 2개는 마을 아주머니에게 나누어 주니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한다. 아이들은 받자마자 봉투에 손을 넣고 길에 쭈그리고 앉아서 빵이나 과자를 먹어댄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 것일까! 주스를 마시면서 비로소 숨을 편하게 내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문제는 잠시 후에 벌어졌다. 어두어지는 무렵 허겁지겁 두 녀석이 손잡고 뒤늦게 달려온 것이다. 순간 밀려오는 어둠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할 수 없이 계란 6개를 주어 보내니 신이 나서 뛰어간다. 그들은 오늘 저녁 가족들과 모여서 웃음꽃을 피우며 저 계란 몇 개의 행복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어쩌면 그렇게 150개를 꼭 예비하게 한 것일까. 하나님은 역시 빈틈을 주지 않는다. 오늘은 상쾌하게 처음으로 샤워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 한다. 이제는 적응이 된다.
벌써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김밥을 준비하느라 모두가 바쁘다. 한 쪽에서는 또 간식봉투를 만들고 두 박스에 나누어 가지고간 학용품을 옮겨 담는다. 오늘은 잊지 않고 계란을 삶아 준비한다. 마닐라만을 끼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아이따족을 찾아서 원주민촌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가는 길에 보이는 모습은 외국의 생소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곳곳에 뿔로 지역과 같은 빈민가가 그야말로 즐비하게 있었다. 필리핀 전체에서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저런 모습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마닐라 중심을 통과하였다. 고층 건물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이면의 판자촌이 함께 보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맨 발로 초췌하게 공원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운전 기사 아델(Adel)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약을 하고 나오는 아이들이란다. 밤새 마약에 취해 쓰러져 있다가 아침에 나오는 것이리라. 사람도 많지만 시내 중심부는 너무 막힌다. 지프니, 트라이시클, 승용차, 버스, 택시가 뒤엉킨다. 지프니는 언제 생긴 것일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필리핀에서 미군이 떠날 때, 수백 대의 잔여 지프가 팔리거나 필리핀 사람들에게 양도 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지프의 도색을 벗겨 내고 여러 사람이 쓸 수 있게 개조하였으며, 지붕을 덮고, 화려한 색으로 장식을 하고, 밝은 크롬후드 장식을 달았다. 지프니는 빠르게 대중적이고 창의적이며, 저렴하고, 실질적인 운송수단이 되어 2차 세계대전 중 대부분 파괴된 필리핀의 운송수단을 대체 하였다. 지프니가 널리 퍼지자 필리핀 정부는 지프니의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현재 지프니 운전사는 특별 면허가 있어야만 하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 합리적이고 고정된 요금을 받아야 한다. 최근 마닐라의 유가상승 때문에 지프니의 요금도 7페소로 올랐다고 한다. 우리나라 요금으로 약 210원 정도인 셈이다. 트라이시클은 필리핀 사람들이 지프니 다음으로 많이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인 것 같다. 보통 오토바이 옆에 사이드카를 단 것인데 이곳의 트라이시클은 사이드카에 두 명이 겨우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다. 그러나 탑승 정원은 탈 수 있을 때 까지가 정답인 것 같다. 트라이시클은 지프니와 같이 정해진 노선은 없지만 다닐 수 있 는 구역은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마을 안에서만 다니는 대중교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개인택시와 같다고나 할까? 지프니가 다니지 않는 골목 골목을 트라이시클이 누비고 다닌다. 수많은 차량에서 내뿜는 매연을 마시며 운전을 해야 하는 트라이시클 운전자들이 조금이라도 매연 마시는 걸 줄여 보려고 수건으로 코를 막고 운전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필리핀 시내를 통과하면서 코라손 아키노 사망 애도의 깃발과 검은 리본이 눈에 띠었다. 필리핀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화 및 정치 개혁에 앞장섰던,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여성 정치가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이 결장암 투병 끝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지난 8월 1일 서거했다. 아키노 전 대통령은 필리핀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나 유망한 정치인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과 결혼, 슬하에 1남 4녀를 둔 평범한 주부였다. 그러나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이 의문의 암살을 당하자 정치에 투신, 남편의 암살 배후가 당시 필리핀의 권력을 쥐고 있던 마르코스 독재 정권(1965~1986)에 있다며 독재 타도를 위한 민중의 지지를 호소, 100만여 명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비폭력 평화 시위에 앞장섰다. 결국 1986년 2월 25일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가족을 데리고 망명하며 필리핀의 독재 체제는 막을 내렸고, 이로 인해 아키노 전 대통령은 '현대의 잔 다르크'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피플 파워만으로 독재 정권을 밀어낸 필리핀의 이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하나의 '기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역시 세계 어느 나라나 권력과 독재는 영원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다.
많은 생각을 하며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서자 갑자기 이상한 소음이 차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아델! 타이어!” 순간적으로 위험에 직면한 우리는 다행히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뛰어 내려가 보니 타이어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고 이미 세 군데 정도 찢어져 있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에 타이어 정비소로 들려 타이어를 새로 구입하여 장착하고 길 위에서 주먹밥을 먹은 후 바타안의 아이따 원주민 마을로 서둘러 향했다. 산속으로 돌고 돌아 올라서니 몇 명의 아이들이 먼저 반긴다. 아
이따 아이들은 생김새가 제법 달랐다. 곱슬머리와 작은 키가 그들의 특징인 것 같다. 역시 이 곳도 아이들의 천국이다. 우리는 환영의 찬양과 원주민 춤을 보고 우리가 준비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뿔로 사람들보다 잘 웃고 더 행복해 보였다. 없지만 행복한 모습이다. 학교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전달하였다. 그들에게 보내준 우리의 학용품은 사용할 때마다 고맙고 친절한 한국인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지우개 하나, 연필 한 자루도 그들에게는 없어서 사용하지 못한다니 교실 청소할 때마다 주워서 입씨름을 하며 주인을 찾아주워도 가져가지 않고 주인 잃은 학용품을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치민다. 공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마을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의 모습은 우리네 산골 마을과 비슷하나 사람이 사는 집은 역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이며 망고와 바나나, 코코넛, 파인애플 등으로 근근하게 살아가는 모양이다. 날씨가 무척이나 무덥고 습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며 마을을 돌아보고 올라오니 음료라고 한 컵씩 권한다. 따뜻하고 달착지근한 물에 삶은 고구마 같은 덩어리가 작은 스푼과 함께 있었다. 스푼으로 떠먹으니 맛이 괜찮았다.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물으니 말로만 듣던 열대작물 카사바란다. 다 먹고 나니 더 먹겠냐고 물어보는 호의도 잊지 않았다. 현지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나더러 꼭 다시 오란다. 그러겠다고 공수표를 날렸으니 어찌하여야 된단 말인가! 역시 마을에는 카톨릭 성당이 깨끗하게 지어져 있었다. 전통적인 카톨릭 마을, 개신교가 그곳에 들어가기에는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 배타적인 그들의 마음을 열어준 것은 바로 하나님이리라.
아이따를 나서서 바타안주의 발랑가로 내려왔다. 멀리 마닐라만을 넘어 날씨가 좋으면 마닐라가 보이는 해안도시 발랑가에서 시장에 들려 매운탕용 생선과 게, 과일을 사갖고 바타안 센터로 왔다. 이젠 센터가 어떤 곳인지는 그냥 이해가 된다. 이곳의 좋은 점은 물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있는 재료를 모두 이용하여 매운탕을 끓였다. 모두들 맛있다고 먹으니 나도 솜씨는 있나보다. 모두들 잠자리에 든 저녁 어른들만 모여서 현관 앞으로 나와서 먹은 게 맛은 일품이었다. 다만 손에서 나는 비릿힌 게 냄새가 한동안 괴롭혔다는 것이 옥의 티다.
다음 날, 아이들이 곤한 잠자리에 빠진 시간 아침잠이 없는 어른들은 마을로 산책을 나섰다. 사실은 쥬디스 공원으로 산책을 나선 길인데 반대로 가서 마을 산책이 된 것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래도 돌아본 이곳 사람들은 생활이 비
교적 살만해 보였다. 우리는 쥬디스 공원(마닐라만 해안 공원이라지만 아무 것도 없다)을 돌아보고 바각 해안으로 가서 입양후원 가정 벤지를 만나 후원품을 전달하고 사맛산(Mt. Samat)으로 향하였다. 사맛산 십자가 밑에는 일본군으로부터 코레히도 섬 함락을 상기하기 위한 기념관이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 십자가는 세계 2차 대전 중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필리핀 군인들을 애도하는 위령탑이다. 해발 450여미터의 사맛산 정상에 높이 93미터의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다. 바타안(Bataan)은 루손으로 침투한 일본군에 밀린 미국군과 필리핀군이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던 전쟁 격전지다. 하지만 전쟁은 얼마가지 못해 일본군에게 항복하게 되어 1942년 4월 9일 바타안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이 날은 '바탄데이'라고 불리우는 "Araw ng Kagitingan"이며, 수용시설에 비해 포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포로들을 타 지역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소위 "죽음의 행군"이라고 불리우는 "The Bataan Death March"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타안의 십자가 탑은 당시의 전사자들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십자가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전망대는 십자가의 좌우로 구성되어져 있다.
전쟁기념관을 돌아보며 우리나라도 필리핀 전투에 참여하여 침략군의 일원으로 잔혹하게 살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물론 일제의 징병이 만든 비극적인 역사이지만 말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산의 정상에 세운 십자가에 올랐다. 시계도 좋질 않고 별다른 감흥이 없다. 더구나 올라갈 때 차량의 기름이 부족하여 불안해하던 아델을 안심시키느라 신경을 써서인지 별다른 감흥은 없다. 결국은 다른 차량의 기름을 옮겨 넣고 다시 출발하였다. 후원 가정 몇 가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 43세의 줄리엣이 가장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논두렁(필리핀에는 농사용 움막이 논두렁 곳곳에 있다.)에서 속이 다 드러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살고 있던 줄리엣을 Limay 교회(바타안) Phat 목사님과 현지교회 Rafty 목사님, 김성제 선교사님 셋이 소문을 듣고 찾아간다. 태풍으로 부서진 라디오 기독방송(우리나라의 기독방송과 같은 것)을 듣지 못하게 되자 8개월간 움막에서 라디오를 달라고 기도하였다는 줄리엣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줄리엣은 우리나라 송명희 자매처럼 온몸이 뒤틀리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21년간 교회는 단 3번 밖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어둠 속에서 그의 웃음소리만 들려나왔고 서서히 어둠에 적응이 될 무렵부터 그의 뒤틀리는 몸과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단전이 된지 이미 몇 개월이다. 필리핀은 전력 사업이 민영화되어 있고 1주일만 전기요금을 연체하면 즉시 단전이 되기에 가난한 사람은 늘 단전에 시달리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안타까운 사정은 이 집이 형부의 집으로 퇴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 불의의 감전 사고로 언니가 세상을 뜨자 벌어진 일이다. 그래도 놀라운 일은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나는 다 필요없습니다. 주님 한 분만이 있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현지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줄리엣은 우리의 영적인 위대한 스승이며 멘토다.’ 줄리엣은 현재 매주 토요일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친다. 그리고 지원받은 휠체어를 이용해 교회에도 나간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마닐라 센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닐라 센터를 떠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게 짐을 정리한다. 오늘은 가까운 팍상한 폭포를 가기로 했다. 팍상한은 세계 7대 절경의 하나에 속하며 필리핀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진짜 이름은 막다피오(Magdapio) 폭포. 마닐라 동남쪽 105km지점에 있는 폭포로 최고 낙차가 100m에 이른다. '방카'라는 통나무 배에 올라 사람의 순수한 힘으로 밀고 끌며 열대림을 대략 한 시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쏟아지는 폭포수를 만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폭포가 팍상한(Pagsanjan) 폭포이며, 폭포를 보고 폭포 속으로 들어가 엄청난 낙차의 힘을 느끼고 난 후에 급류를 쏜살같이 내려오는 스릴 만점의 급류타기가 유명하다. 이곳은 또한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등 영화의 촬영지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며, 마닐라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필리핀에서는 딸을 살림 밑천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여아 선호사상 경향이 있다. 따라서, 팍상한 폭포수를 맞으면 딸을 낳는다는 미신 때문에 수많은 필리핀 여성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가는 내내 아델의 수다 때문에 심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자기는 오늘까지만 운전하고 내일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오는 친구 때문에 회사차로 10일간 운전을 할 예정이라 이별을 해야 한다고 한다. 지나는 곳마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던 친구였는데 아쉬운 맘이 앞
선다. 팍상한 폭포를 올라갔다. 힘들다고 우리 말로 소리치는 보트맨과 어김없이 요구하는 팁, 미리 지불했어도 ‘팁 많이’를 외치는 모습이 얄밉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이 길들여 놓은 결과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한 편 씁쓸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늘 볼 수 있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폭포수의 위력이 대단했다. 도저히 눈은 뜰 수가 없었다. 폭포를 내려와 라구나 지역의 온천 수영장에 몸을 담그었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시원함을 느끼다니 나이가 먹은 것일까? 그동안의 피로가 한 순간에 사라진듯하였다. 마닐라 파빌론 호텔로 가는 길은 짜증나게 막히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만난 공동묘지의 모습이 생경하다. 필리핀 마닐라의 공동 묘지에는 죽은 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살아가는 10,000여명의 빈민 가족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리핀 당국이 철거명령으로 이러한 묘지 생활마저도 계속할 수 없는 위기의 사람들이다. 마닐라의 공동묘지에는 부자들의 무덤에는 집처럼 지어져 있어 살기에는 좋은 조건이다. 거주하는 주민들은 공동묘지가 무척 안전하고 조용한 데다 돌로 된 관 위에서 누워 지내니 시원하다며 이곳에서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단지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dead)'이라기보다는 '먼저 떠난(departed)'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필리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는 데에도 이 묘지 생활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필리핀 정부는 마닐라 인구의 50%에 육박하는 빈민들을 오는 2010년까지 모두 지방으로 내려 보내겠다는 것이다. 교육, 일자리, 삶의 터전 등 그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 그곳으로 내려 보내려는 사람들과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들. 그야말로 추방과 무엇이 다르랴. 마닐라에 올라와 호텔로 향하니 폭발물 탐지견이 보안요원과 함께 우리를 맞는다. 필리핀의 불안한 정국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것 같다.
광복절 아침, 모처럼 호사스러운(?)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자고 식사 후 호세 리잘 공원을 다녀왔다. 필리핀의 영웅 호세 리잘은 스페인 치하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주장한 필리핀의 독립 지사이다. 식민지 출신의 젊은 유학생이 발표한 한 권의 소설 ‘마지막 인사’는 당시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마드리드의 지식층 사이에서 급속도로 읽혀지게 되었다. 스페인 정부의 추방령에 따라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잘은 조국 필리핀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실천에 옮기고자, 필리핀 민족동맹을 결성하여 반체제 운동의 기수가 된다. 하지만 그의 활동을 주목한 스페인 당국에 체포되어 민다나오 섬으로 유배당한다. 그리고 1896년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현재의 리잘 공원에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인들의 가슴 깊숙이 감동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리잘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다. 공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 새벽에 내린 비가 시원하게 해주기는커녕 습도만 올려놓았는지 금방 또 땀이 줄줄 흐른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산 아구스틴성당(San Agustin Church)으로 향했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석조양식의 교회로서 1586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06년에 완공된 가장 오래된 석조건물이자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필리핀의 바로크식 교회 4곳 중 하나이다. 5차의 대지진과 2차 대전 중에도 파괴되지 않은 기적의 교회로 불리어지며 1973년에 수도원에서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산 아구스틴 교회는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지진과 태풍, 중국과 네덜란드의 공격, 영국 점령군과 필리핀-스페인 전쟁, 듀이의 폭격, 피와 파괴로 얼룩진 일본의 점령 그리고 무수한 피로 점철된 맥아더 장군의 탈환까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닥친 온갖 풍상과 시련을 이겨내었다. 1층에는 입구에 3.4톤 상당의 무게의 범종이 있고 각 방에는 18세기,19세기 당시의 스페인과 중국, 필리핀 문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 복도에는 멕시코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 있고 68석의 성가대와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그 옆방에는 지금까지 신부님이나 수도승들이 입었던 의복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은 최고의 예식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금방 예식을 마치고 나온 한 쌍의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으니 대부분의 필리핀인처럼 흔쾌히 응한다. 결혼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이국땅의 결혼 예식을 마친 부부의 모습을 귀하게 담는다. 필리핀은 천주교 83%, 기독교 9%, 회교 5%, 기타 3%의 분포로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이며, 어느 곳에서나 성당을 찾을 수 있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가장 큰 명절에 속한다. 다른 건물들은 시내를 제외하고는 낡은 경우가 많지만 성당만은 어느 나라보다 뒤지지 않게 호화롭고 단정하게 꾸며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루투칼 탐험가)은 챨스 5세 황제의 명령으로 지구의 정반대로 항해하여 유럽인들 일행과 함께 1521년 필리핀 막탄선(Mactan)에 도착하였으며 약 한달 후인 5월에 라푸라 루라는 추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 포르투칼인의 경계선 확장을 필리핀에 두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섬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542년에 빌라로보스(Villalo-bos)의 원정이 실패했으나 1565년에 레가스피(Lopez de Legaspi)의 영도 아래 섬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정복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의 확장이었다. 그 때 스페인의 국교였던 카톨릭이 들어와서 300년이 넘는 세월을 필리핀을 지배하며 카톨릭 국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필리핀의 카톨릭은 주일날 미사를 드린다. 그런데 그 미사는 거의 한 시간 마다 한 번씩 하루 종일 드려지고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종교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예배생활이라기 보다는 한 시간 성전에 나와서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된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집집마다, 거리마다, 자동차들 마다 어김없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마리아상과 아기 예수상(산토니뇨)이다. 마치 불교에서 쓰이는 부적과도 같은 용도다. 그 '상'이 자신들을 어떤 악귀로부터 지켜 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왜 죽으셨는지에 대한 이야기, 복음을 잘 알지 못한다. 스스로가 죄인이란 사실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로지 아는 것은 매 주 한 번씩 미사에만 참석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성당 안에 들어가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초를 태우는 모습이. 그 초를 태우면 자신에게서 잡귀가 물러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부자는 많은 돈을 내고 큰 초를 태우고 가난한 자들은 성당 안에서 파는 작은 초를 태운다. 그래서 어느 성당이든 가보면 초를 파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필리핀의 카톨릭은 우상화되어 정령신앙과 혼합된 형태로 구원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종교이다. 의식과 미신으로 타락하여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83%의 천주교 점유율은 허상일 뿐이다. 카톨릭의 맹점과 허상을 보며 마닐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아시아 최대의 몰인 SM몰로 향한다. 점심을 먹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유 시간을 누려 본
다. 짧은 자유를 마치고 마닐라 센터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고 마지막 나눔을 갖는 것을 마지막으로 귀국 길에 오르기 위해 공항으로 들어선다. 이제는 비행기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밤 11시 20분에 비행기에 오르기로 했는데 갑자기 시간이 늦춰진다. 영문을 모르는 가운데 또 한 번의 시간이 미루어졌다. 늦어진 탑승이지만 정시에 출발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필리핀의 연예스타 산드라 박(한국의 2NE1)이 현지 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 금의환향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항 사정이 잠시 복잡했었던 듯하다. 정상고도를 비행하면서 기내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곤에 지친 몸은 먹는 것조차도 힘겨워 했다. 그냥 인천 공항에 내리는 꿈만 꿀 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싸주었던 뿔로(Pulo)빈민지역의 주민들과 아이따의 원주민들, 선교를 무사히 마치도록 기도와 물질로 도움을 주신 김포시 초중고 신우회,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기장을 후원해 주신 이창길 회장님, 정기진, 이희열 부회장님, 우리 아내 윤선화 회계, 광명시의 광산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김성제 선교사님, 그리고 우리 교회 모임 집사님들, 많이 걱정해 주신 주변 분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첫댓글 선교 일정중에서 주님의 큰 은혜를 체험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