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식민지 주의와 기독교 배척 운동
1. 기독교의 부활. 진출과 기독교에 대한 중국 각 계급의 대응 1727년이후 중국에서 기독교는 금교였고 교인들도 사교(邪敎)의 무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기간에도 포르투갈과 프랑스는 종주국으로 많은 천주교 신부가 국내(중국)에 잠입, 포교를 하였고 교인의 수도 2~30만 명을 내려가지 않았다. 전국 교인의 약 25%를 갖고 있는 최대 교구인 사천성 지역에서도 신부는 중국인과 구별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현상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신도들에 대해서는 갖가지 폭행과 핍박과 살해되는 갖가지 형태의 압박이 끊이지 않았다.
그 이후 아편 전쟁이 발발하므로 인해 교회의 선교 사역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으로 개항된 5개항에 한하여 교회를 건설해도 좋다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1884년 7월 청.미 망하조약과 같은해 10월 청.프의 황포조약)
이러한 최혜국 조약을 활용하여 영국도 같은 권리를 얻었다. 요컨대 중국에서의 기독교 부활은 자본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통해 행해졌다. 한편 신교와 구교를 불문하고 선교사들도 각각 모국의 식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중국 반식민지화의 단서를 열었던 청.영의 남경조약의 조문을 기초한 사람은 목사 모리슨이고, 청.미 망하조약 체결 때 미국 전권대사 커싱을 도왔던 사람은 목사 브리지맨과 파커였다. 신부 까레도 또한 프랑스 전권대사 라르네를 도와 황포조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종교적인 일이라기 보다도 오히려 모국의 정치에 봉사하는 것임을 자각하고 또한 이를 과시하기 조차하였다.
청.영 남경 조약 기초자 목사 모리슨은 1843년7월10일자 서한에서 “나의 직명은 중문 비서겸 번역원이고 연봉은 1,300파운드이다. 나는 부영사의 제복을 입고 왕가의 단추를 달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때로부터 교회는 식민주의와 밀접하게 결합했다. 이것은 신교와 구교도 마찮가지였다. 양자의 상호 보조 관계는 천주교와 프랑스 사이가 가장 심했다. 라르네를 도와 천주교 해금을 위해 중국측과 담판을 담당했던 베르나르다르끄는 이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라르네가 천주교 해금에 힘썼던 것은 프랑스가 상업상 영국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천주교 신부의 보호권을 획득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얻어 냄으로써 영국에 대항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자본주의가 뒤떨어진 것을 교회보호권으로 보완하려는 이 원칙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즉, 미.영 양국은 5개 개항장 내의 교회 설치권만을 획득했음에 반하여 프랑스는 황포조약으로신부가 5개항의 구역을 열어 내지에 진출해도 박해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권리 곧, 내지 진출을 예정하는 강한 보장을 획득했다. 그로인해 천주교 선교사들은 서로 내지로 향하여 출발했다.
1856년 광서성의 서림에 진출한 샤쁄들렌 신부가 처형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프랑스는 때마침 남경조약을 감행하여 산업자본에 보다 유리한 특권을 획득하려했던 영국과 결탁하여 제 2차 아편전쟁을 감행하여 당면의 목적을 달성했다. 즉, 프랑스는 우선1858년에 개항장 밖에서의 포교권과 중국인의 신앙 자유권을 얻어 중국 관리에게 신부 보호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에 성공했으며(청.프천진조약 제8조. 제13조), 1860년에는 교회가 중국 전도에서 토지를 차입하거나 구입해서 가옥을 건축해도 좋다는 특권을 획득했다.
1860년의 이 특권은 청.프북경 조약 체결 때 전권 대신 구로를 도왔던 신부 도르마르가 불문의 조문에 없는 1항을 중국문서 조문에 몰래 삽입했던 것인데, 산업자본의 경우 조계(租界) 설정과 마찬가지로, 내지에서 포교 활동의 중심기지 설정을 보장하는 매우 유리한 특권이었다. 말하자면교권의 확대와 교회의 내지 진출이 재차 영국 병력1만2천명, 프랑스병력8천명, 군함300여척을 동원한 식민지주의 전쟁에 의해 획득되었던 것인데, 이 조약 체결 직후 도르마르가 프랑스 국기를 몸에 걸치고 신부 보호의 증명서 27매를 내세우며 멀리 운남. 귀주. 사천을 향해 기세 등등하게 출발한 것은 교회와 열강간의 불가분한 결합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K.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in China, p 307)
개신교 목사들도 이 전쟁에서 커다란 획득물을 기대하고 재차 아편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천진 조약과 북경조약의 체결 때에 각각 모국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예를 들면 제2차 아편 전쟁에 직접 관련이 없었던 미국목사 월리엄과 마틴 등은 미국 전권대사 리드를 도와 1858년의 청.미 천진 조약을 기초했다.
선교사들 간에는 마약인 아편의 판매를 합법화했던 폭력적인 이 전쟁으로 교권이 확대되는 것을 반대했던 양식있는 사역자들도 소수 있었지만, 대세에 의해 그 주장은 무시되고 복음을 위해 중국을 해방하는 전쟁으로 열렬히 지지 되었다. 그러나 내지 진출과 내지에서의 교회 재산권 회득에 관해 영.미의 청국과의 조약에는 명확한 규정이 없어, 중국에 있는 개신교 목사들은 겨우 청.영천진조약 제8조의 불명확한 규정 곧, <항과 기타의 장소에 교당을 건축한다>는 권리를 근거로 내지 진출을 시작했지만, 종주국 영국은 이 조문의 규정만으로는 이러한 권리가 없다는 방침을 취하여 그들을 실망시켰다. 교회측이 중국 내지에서 토지와 가옥을 취득한다고 고집하면 영국에 대한 악감정을 자각하며 나아가서는 배외운동이 일어나 통상이 저해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선교활동의 발전과 자본의 이윤을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있는 것에서 정치적 특권을 교회 보호에 의해 확대하려는 프랑스와는 차이가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후반을 통하여 천주교가 내지에 깊이 침투했음에 반하여 개신교는 주로 개항지역과 광동,복건, 절강의 3성에 집중된 하나의 이유는, 종주국의 자본주의 발전 정도의 차이에 있는 것인데, 당시 중국측의 대응과 천주교 문제를 살펴 볼 때도 이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 차이는 어디까지나 정도의 차이일뿐, 신교와 구교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열강의 강력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교회의 내지 진출 과정에서 분명해졌다. 영국정부와 자본가의 이러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목사들은 강력하게 내지 진출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1867년결성된 내지회(The China Inland Mission)는 허드슨 테일러의 지도하에 중국 내지에 십자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호언하면서 1868년 개항장외 11개 지역에서 전도를 개시했다. 영국 정부와 자본가가 우려했던 것처럼 교회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예를 들어 양주에서는 지방관리들이 지도하는 기독교 배척운동이 일어나 테일러와 여러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궁지를 구해준 것은 신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영사.공사의 손으로 4척의 군함이 파견되어 교회의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이다. 통상(자본주의 이윤)과 교권 확대간의 모순도 결국 산업자본의 식민주의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무력 발동에 의해 통일되고, 그 보호하에 개신교의 내지 진출과 그것에 필요한 토지, 가옥을 취득하는 것이 실현되었다. 한편 교회도 또한 그 보호국에 봉사했다. 열강 식민주의 실현의 대전제였던 조약 체결에서 선교사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국의 오랜 쇄국 정책에 의해 열강이 중국 내의 여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역사적 조건하에서는 금교 시대부터 몰래 중국풍의 생활을 내지또는 마카오 등의 항에서 보낸 신부들은 물론, 다른 아시아 식민지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풍부한 경험들을 가진 목사들이 자신의 모국에 유익한 여러 가지의 활동 분야를 가졌던 것이다.
중국의 언어, 풍속, 지리, 관습 등에 밝은 그들중 일부는 통역으로 혹은 중국 사정의 통보자로 일할 수 있었다. 1858년 미국 전권 공사 리드를 도와 청.미 천지조약 조문을 기초한 목사 Marti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선교사는 외국 상인에게 중국의 여러 가지 사정을 가르쳐주고 여러 나라를 중국인에게 알렸다. 또한 외교 담판을 하는데 우리 공사를 도와 주었다> 미국공사 덴비가 그 경험에 대해 <일반 외국인에게 있어 중국인은 전혀 모르는 타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목사들은 중국인의 변함없는 친구로 .... 또한 통상의 선구자이다. ..... 성스러운 열정을 갖고 그들은 백인이 밟아보지 못한 내지에 들어가 ..... 그 나라의 심장부에 발을 디뎠다. 상인이 그 뒤를 이어 외국 무역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의 거주지에서부터 근대 문명의 찬란한 빛이 발하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 처럼 그들은 험난한 중국 시장 개척의 선구자이고 통상(자본)의 개척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열강의 식민지 전쟁에서 부활한 교회는 열강에 외교관 조수로 봉사했고, 열강도 또한 무력 및 외교 교섭에서 교회의 내지 진출을 도와주면 선교사 또한 중국 사정의 통보자 혹은 통상의 선구자로 그 일에 봉사하였다. 열강과 교회와의 관계는 불가분해지고 그 무력의 보호는 중국 각지의 교회로서 열강 그 자체의 힘을 대표시켰던 것이다. 또한 선교사와 열강의 식민주의와의 관계에서도 불가분의 관계였다. 선교 사역은 본래 사명에 따라 전도. 설교. 종교 서적 간행 등 광범위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교회 부속의 육영당. 학교. 도서관. 약국. 진료소. 병원 등을 경영하고, 혹은 재해나 기근시 난민 구제를 하는 광의의 문화. 자선사업을 활발히 행했다. 특히 천주교에서는 육영당(고아원) 경영에 힘써 교회가 진출한 곳마다 고아나 버려진 아이를 돈을 주면서까지 사들여 양육하고 종교, 직업훈련을 실시했다.
개신교에서는 의료. 전도에 힘썼는데 빈민들의 무료 진료와 병원의 경영은 아주 효과가 있었다. 그러한 환자 진료 활동을 통해 그들의 진정한 입장을 알고 그의 고통을 들어주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기독교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독자적 활동 중에서 얻은 모든 경험은 여러 차례 외교관과 자본가에게 통보되어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그들 독자의 문화. 자선활동은 당시 침략자에게서 보여 질 수 밖에 없는 외국인과 열강에 대한 중국인의 증오심을 완화시켜 친구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아편을 파는 전쟁을 통해 부활하고 그 후에도 아편 매입국의 보호를 받았던 선교사들이 아편 판매을 속죄하기 위해 중국인 아편 환자 치료에 전념했던 것 등이 이러한 의의를 단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열강과 중국과의 민족적 모순을 완화하려한 그들의 역할에 가장 우선적인 방침은 중국인을 개종시켜 기독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을 통해 교민의 태반은 빈민층 민중으로 구성되었다.
교회가 부활하여 내지 진출을 준비했던 시기(1842~58)는 국내적으로는 태평천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 농민 반란이 발발, 발전했던 시기이고 교회가 본격적으로 내지에 진출하여 전국적인 세력을폈던 시기는 태평천국 말기에서 청조와 싸우며 토벌되어 갔던 시기였다. 교회 세력이 부활하고 전국적으로 발전하였던 시기는 민족 모순뿐만아니라, 봉건 말기 중국의 계급 모순이 깊어지고 중국 봉건 사회가 반 봉건적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 계급 모순의 격화를 누르고 강력한 열강 세력의 진출에 대응하기 위해 지배 계급 중 한인(漢人)의 일부 관료.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양무파(洋務派)가 생겼다. 그들은 거의 열강의 보호를 받으며 그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초기에는 군수 산업부문에, 다음에는 방직과 기타 민수 산업 부문에 도입하여 봉건적 지배 체제의 붕괴를 막으려 했다. 열강에는 굴복과 타협을, 반식민주의 투쟁과 반봉건 투쟁에 대해서는 무력 토벌이라는 원칙에서 그들의 정책은 일관되었다.
열강이 그들에게는 모든 반란의 탄압을 도와준 큰 은인이고 군사 기술과 근대적 기계도입 및 기본 정책 채용을 도와준 훌륭한 교사였다. 이 때문에 열강 세력의 침투는 국내 지배 계급 내에서는 양무파 세력의 증대를 초래하고, 또한 그들 세력 증대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부르좌 대 프로레타리아라는 근대적 계급 대항 관계를 발생, 발전시킨 과정인 것이며, 한편으로는 모순이 깊어진 국내 봉건적 지배 체제를 반동적으로 재편성하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열강이 중국에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진출하는데 지주의 역할을 하였고, 따라서 또한 당연히 교회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당시에 포교권을 비약적으로 확대한 천진. 북경 양 조약을 체결하였던 중국측의 주역은 그들이었으며, 19세기 후반을 통해 국내에서 교회배척 운동의 진압을 행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교회 진출의 중심적인 외적 요인이 열강의 보호였다면 그 중요한 내적 요인은 매판적 양무파의 보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반봉건적 지배 계급의 유력한 일원이었지 결코 근대적인 사회 경제 체제 건설의 전면적 담당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민중의 반식민지, 반 봉건적 투쟁에 직면하여 그 점을 억압하고 반동적 지배를 재편성하려 했던 계급이었다. 말하자면 유교의 머리위에 근대적 기계와 기술이라는 빌려온 모자를 쓰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기독교는 그들에게서도 이단 종교였고, 적극적인 교리를 받아들여 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기독교인이 되지는 않았다.
양무파와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의 구성원이면서 기술적인 것이든 아니든 지배 체제 내에 자본주의적인 것을 거부하고 구태의연하게 통치를 유지하려 했던 수구관료파였고, 반 기독교 주의자였다. 그들은 명말이나 청초기의 제왕과 일부 고위 관료같이 기독교의 보호자로 임하는 관용성은 조금도 없었다. 그들이 19세기 후반기를 통해 열렬한 기독교 배척 운동자가 되었던 것이며, 특히 1870년 천진의 교회당과 영사관이 파괴되고 무력 지압되는 사태에까지 기독교 배척 운동의 지도 세력이었던 하나의 원인은 이러한 그들의 역사적인 계급성에 근거하고 있다.
2. 중국내의 교회 성장과 민족 모순의 격화 양무파 및 수구파 관료와 다르게 민중측은 교회에 흡수되어 가기 좋은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고 교회측도(특히 천주교)적극적으로 이것을 흡수했다. 봉건말기 해체되어 가는 사회, 경제, 체제와 그것을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던 태평천국 및 기타 모든 반란을 위로부터 억압하면서 강행되었던 지배 계급내의 재편성, 특히 양무파의 형성과 등장의 과정과 그것을 국내적 지주로 하여 더욱 강화된 구미 자본주의 진출은 농민과 기타 민중에게 심한 사태를 초래했다.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농민 생산력은 두드러지게 저하되고 농민 경제는 황폐화되었다. 외국 자본주의 상품(아편포함)의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확한 침투가 가해지고, 양무파의 헤게모니에 의한 매판 부르좌적 새로운 반동정책과 각종 증세는 농민의 부담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할거적인 반동 재편성으로 태평천국 만큼 대규모로 직접 관권력과 대항하는 투쟁은 곤란하였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새로운 해방의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던 민중 대다수는 교회속에서 구원을 구했다. 원래 계급적으로 비유교적이었던 것이 그들의 입교를 부드럽게 해준 사상적인 한 요인이었지만, 가난한 농민들은 종교적, 사상적 요청과 함께 세속적인 욕구를 얻기위해, 또한 현세적인 해방을 얻기위해 교회에 접근했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가혹한 가부장제도에 반항한 사람들과 처음에는 입교자가 적었던 부인들도 차차 늘어 가고 계속하여 신교의 반수 이상을 점하였다.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값싼 치료비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뿐만아니라 남존여비 제도에서부터 해방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종교적 집회는 남녀가 평등하게 모이는 장이었고, 결혼. 가정 문제에 교회가 자주 개입하였다. 낙오된 가족제에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교회가 개인주의와 부녀해방 사상을 고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농민의 심한 가난 또한 입교의 원인이었다. 봉건말기의 필연적 현상인 흉작, 만성적인 수해, 그리고 어떤 선교사가 <혼을 찢는 것 같은>이라 형용했던 기근 때 빈민은 먹을 것을 구해 교회에 모여들었다. 1876년부터 1878년에 걸쳐 산동.하북.호북.호남.동북 등 각성에서 <혼을 찢는 것 같은> 기근이 엄습하여 아사자가 1,500만명에 이르렀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체까지도 먹었다. 이러한 생지옥중에서 선교사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구제의 선도에 섬으로써 교인들을 획득했던 것이다. 실제로 기근후 산서성에서는 1880년과 81년에 다수의 비기독교인이 입교하기 위해 모여들어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고 전했다.(K.S Lataurette)
개신교의 경우도 같았다. 예를 들면 크리스티는 “이 기근 구제의 일은 많은 지방에서 외국인에 대한 질시와 편견을 없애는데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라고 말했다. 천주교의 경우 교민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구제되거나, 전답을 저당잡혀야 비로소 구제받아 그후에 교회의 소작인으로 되었다. 평소부터 부단히 파산 위기에 직면한 농민의 가계 상태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아주 값싼 가격으로 토지. 가옥을 손에 넣는 신부도 적지 않았다. 천주교회가 일급 지주가 되어 유럽에서의 보조금 없이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신부들이 이렇게 민첩한 실업가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농민이 빈곤하게 된 근원은 토지 문제와 지주제였다. 토지를 잃거나 혹은 적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은 무엇보다도 토지를 열망하였고 교회가 그것에 응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토지를 집적한 천주교는 경지를 직접 임대하여 교민에게 경작시켰다. 또한 교민은 지주의 소작료를 둘러싼 투쟁에 교회가 개입하여 농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지주.관료들에게는 아주 불쾌한 것이지만 농민에게는 큰 성과인 것이므로 관리들의 압박을 떨치고 교민이 증가하였다.
이상 개관한 것처럼 교회, 특히 천주교가 빈민. 농민과 기타 대중의 절실한 요구를 받아들여 정신적, 행동적으로 그들 관료 지배에 대한 투쟁을 고취하고 원조한 것을 통해 교인들이 형성되고 증대되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 기독교 문제의 한 특색은 교인의 주된 구성원이 빈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데 이것은 당연한 과정이기도 했다. 후에 보이는 것처럼 당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관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배척운동에 의해 여러번 생명을 잃고 생활권을 탈취당하게 됨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계속 증대했던 사실은 어떻게 빈민들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교회에서 구하고, 교회가 그것에 응해 관료(정부)와의 투쟁을 조직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여하튼 계속된 반기독교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인을 형성.증대시켰던 것은 그만큼 교회가 민중간에 외국인, 외국에 우호적인 친구들을 만들어 그 수를 더했던 것이고, 그러한 열강의 자본가와 외교관들이 하지 못한 일 곧, 민족적 모순을 완화시키는 일을 맡은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주로 교회만이 할 수 있었던 공헌이었다.
* 개신교인의지역은 주로 복건성.광동성.절강성 지역이 압도적이었다.
< 결 언 > 교회의 부활과 진출에 직면한 중국인은 19세기 후반을 통하여 둘로 나뉘어졌다. 곧 위로 황제, 고급 관료로부터 아래로 빈민,농민,도시 민중에 이르는 모든 계급, 계층을 둘로 나누는 커다란분열이었다. 지배 계급 내부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파와 배척하는 파로 나주어 지고 인민은 기독인과 반기독인으로 대립했다. 즉, 4개 세력의 피로 피를 씻는 투쟁이 사상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행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본래 자기에게 순종적인 중국인을 만들어 내고 열강과 중국과의 민주적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확실히 일부 그 목적을 달성하고, 그들의 지반을 쌓을 수 있었다. 주로 빈민 계층 민중이 절실한 여러 가지 요구를 이루기 위해 기독교인이 되고 교회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심한 박해도 교민의 형성과 증대를 막지 못했다. 기독교인의 여러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민중의 반정부 투쟁의 하나의 길을 표현한 것이었다. 적어도 일부 중국인 사학자처럼 가난한 교민 집단을 선교사들과 일괄하여 침략 집단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관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활동은 중국의 관료 권력보다 강한 열강 권력에 의존하면서 행해진 것이므로 자율적인 반봉건 투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신자인가 비신자인가 그들의 적과 이군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열강 자본주의의 진출과 그것에 적과 반한 국내 여러 계급의 대응이 만들어 낸 복잡한 역관계 중에서 진정한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구파 관료와 민중의 통일 전선에 의한 기독교 배척운동은 일어났지만,초기에는 수구파 관료들이 주도권을 잡고 선두에 서서 싸웠다. 그들에게 교회 세력과의 싸움은 동시에 청조 정권의 유지와 유교 체제의 유지를 위한 투쟁이었고, 그들에게 향해야 할 민중의 예봉을 교회에 집중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싸움은 격렬했지만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점차 후퇴하고 교회와 열강을 두려워하여 결정적 순간에 그것과 타협했다.
19세기 어떤 문인은 그들의 약체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공자는 마굿간이 불타면 사람의 안부만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외국과의 분쟁이 있을 때마다 당당한 관료들은 우선 외국인의 안부만 걱정하고 인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한편 제국주의화한 열강의 힘은 강해지고 수구파 관료 또한 의지하기에 부족하였다. 이리하여 민중의 기독교 배척운동은 무참히 무너졌다. 그러나 수구파 관료들이 신해혁명의 적으로 서게되었을 때 가로회는 혁명적 부르좌적 세력의 지도하에 혁명의 유력한 부문을 차지하면서 부활하였다. 19세기말 그들만으로는 결집할 수 없었던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청의 권력을 타도하기 위한 방향으로 결집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의 기독교 배척 운동을 단순한 맹목적 배외 운동만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그러한 운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애국자라고 보거나 혹은 그 모든 행동을 동등하게 반 민족해방투쟁이라고 부르는 방식에도 동의할 수 없다. 수구파 관리들은 중국 근대사를 후퇴시킨 것이고, 민중은 그런 배척 운동만으로도 결집되지 않았지만 반제국주의, 반봉건 투쟁을 통일하려는 민족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이후에 역사적 과제를 던지는 투쟁이었던 것이다.
------------------------------------------------------------------------ 저자소개 : 1917년생으로 동경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도립대 인문학부 교수로재직하였다. 저서로는 <근대중국과 민중운동과 사상>과 <19세기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의 측면> 등의 논문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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