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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만공 滿空 스님 회상에 어떤 수좌가 찾아와 여쭈었다.
"스님, 불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네 앞에 있다."
"제 앞에 있다고 하시지만 저에겐 보이지 않습니다."
"너에게 그 '나'가 있으면 볼 수 없느니라."
"그럼 스님은 보이십니까?"
"너의, '너'만 있어도 보이지 않는데, '나'까지 있어서 보일 턱이 있겠느냐?"
"'너'도 없고 '나'도 없다면 누가 그것을 봅니까?"
"너도 없고 나도 없거늘, 누가
불법을 보려고 드느냐?"
이 말 끝에 그 수좌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타고르의 아버지는 대부호였다. 드넓은 영지 가운데로는 꿈결인 듯, 한 줄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는 가끔 강에 나룻배를 띄워놓고 홀로 자적自適 하였다.
어느 날 밤, 그는 촛불을 밝혀 놓고 어떤 학자가 미학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난해하고 긴 글을 따라가다 보니 머리가 적잖이 무거웠다.
'아름다움이라……. 아름다움이 과연 뭘까?'
그는 천천히 이마를 짚고 드러누우며 한 손으로 촛불을 껐다.
그 순간 그는 무엇인가에 얻어맞은 듯 압도되고 말았다. 황홀할 만큼 아름답고 고요한 달빛이 배 위에, 온 천하에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불법이란 이미 완전한 채로 원래 이 자리에 이미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진리는 보고 듣고 알기 이전, 존재의 차원에 항상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 납득할 수 없고, 눈앞에 뻔히 있다는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제 슬금슬금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좀 진정해 보자.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않은가? 내가 켜들고 있는 '나'라고 하는 이 작은 촛불 때문에, 말과 글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 드는 이 못된 고질 때문에, 지금 이 광활한 대지 위에 쏟아지고 있는 달빛을 못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여시여시如是如是! 이미 그런 것을, '나'가 공연히 따로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허둥대어 찾느라고, 본래 있는 '그것'을, 나와 한 치도, 털끝만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그것을 여태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그 무량하다는 공덕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겨우 남들에게나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로 진리를 구걸하고 있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내가 과연 있는 것일까?
이런 가정이라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이 '나'가 없다면? 나 없이 이 세상이 있다면, 나 없이 '이것'이 살아간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테고, 애써 따로 할 일도 없고, 세상살이에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을 테니 그것은 그저 영원한 죽음과도 같은 암흑일 뿐이며 극도의 허무나 무력감만 밀려들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어쩌면 '나'를 놓아보는 것,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몸소 해봐야 아는 문제이고, 진정 세상에서 이생에 꼭 한 번 해볼 만한 모험과 도전이 아닐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에게 각자 이 '나'가 있다는 것은.
중생은 제각각 자기 소견이 있고 그 소견에 국집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반야般若의 보검이 아니면 결코 부숴지지 않는 아집我執이 있는데, 그것은 곧 '내가 있다'는 소견이다. 다이아몬드에 비유하는 반야 말고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다. 오로지 금강반야에 의해서만 부술 수 있는 꼴통이다. 아치我痴 즉, 바로 이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무지를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한다. 그 무명을 뒤집어쓰고 보면 우주가 온통 괴로운 칠통 속이다.
내가 있으면 무수한 너가 있고, 나 빼고는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나가 아니다. 나를 둘러싼 우주는 언제나 위협적이다. 거대한 블랙홀처럼 여겨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언젠가는 기필코 이 먼지 같은 나를 무화無化시키고 말 것이다.
'나'가 있으면 우리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다툼이 일어나고, 나의 실존도, 너와 나의 관계도 뒤틀린다. 고초와 불만이 따른다. 나는 끊임없이 타자와 나를 비교하며 빈곤과 자격지심으로 우울해 한다. 더러는, 애써 그것을 숨기거나 부인하기 위해 자기를 치장하고 확대하고 강화하여 마침내 타자와 겨뤄본다. 그러나 원한 성취가 없고, 한때의 만족과 안도는 물이나 공기를 거머쥔 것처럼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얻고자 했던 궁극의 평안과 행복은 더욱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부와 자기만족과 영원을 향한 녹록지 않은 여정은 끊임없는 좌절과 상처를 안긴다. 내면의 갈망은 결코 다 채워지지 않으며 나와 당신의 관계는 풀 수도 없이 뒤틀리며 꼬여 들고 집착과 시기와 미움은 더욱 무서운 불길로 타올라 먼저 나를 태운다.
세상은 나의 존재감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깜깜하게 느껴지고 아무것도 잘 보이지 않으며 차츰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타자보다 더욱 자신에 의존하고 골몰하는 경향을 띠어간다. 그 처절한 고독과 괴로움에 우리 중 누군가는 미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때로 처참하게 패배하여 쓰러져 눕거나 죽을 막에 다다라 회한 속에서 되뇐다.
"아, 괴롭구나! 악몽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를 버리지 못한 자의 데드 마스크는 모두 일그러져 있고 한없는 공허를 담고 있다. 이것은 탐진치에 뒤덮인 우리 생사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자아는 영원한 평안과 행복, 열반을 구한다. 어떻게 이 고뇌를 벗어나 열반을 얻을 것인가?
중생의 소견으로 이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자아가 바로 생사고의 제일원인第一原因, 무명無明이라면 무명이 어떻게 어둠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답은 하나뿐이다. 어둠이 빛을 만나 스스로 사라지는 것. 빛과 어둠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빛의 존재를 알고 싶어 하던 어둠이 빛을 만나 사라지는 길.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생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생사의 업입니까?"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니라."
다른 제자가 스승에게 와서 말한다.
"스승님, 저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냐?"
"모든 욕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말없이 주장자로 땅을 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한동안, 스승은 그렇게 주장자를 내려쳤을 뿐이었다.
제자는 마침내 스승이 무슨 영문으로 스승이 그러는 것인지 몹시 궁금해지고 말았다.
"스승님,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왜 그렇게 주장자를 치시는 겁니까?"
스승이 물끄러미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냐?"
어떤 제자가 조주스님께 와서 말했다.
"스님,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놓아버려라防下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아버리라는 말씀입니까?"
"놓아버려라!"
베풂을 통해 일체중생과 더불어 이 고해를 벗어나 저 피안으로 나아가는 보시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이다. 내게 딸린 소유물이든 내 육신이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최종의 단계는 바로 아집을, 집착의 덩어리인 '나'를 놓아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큰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정말 쉽지는 않은 일이다. 어리석음 그 자체인 중생으로선 동전 몇 닢이라도 제 것이라 생각하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 포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큰 목적을 위해서라 해도 무주상의 마음으로 희사喜捨하거나 시주하는 것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정말 좋은 일 한번 한다는 마음 가지고도 정작 그렇게 실행하는 데는 많은 생각과 망설임이 따른다. 더구나, 차라리 천하를 버리거나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 자아를 버리는 장부 중의 장부는 어쩌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아닐 것이다. 분명 가능한 일이므로 부처님께서 그것을 증험하여 가르쳐 보이신 것이고 수많은 옛 스승들이 가르침을 따라 그것을 증득한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우선, 무아의 진리는 누가 증득하기 이전에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둠보다는 빛이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심신의 병보다는 사람의 건강이 먼저 있는 것이며, 업이나 원죄보다는 우리 본마음의 청정함이 본원적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괴로움보다 불생불멸의 열반이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둠이 사라지면 곧 빛이 드러나고, 병이 나으면 앓기 전의 그 사람이며, 죄업을 닦고 보면 본래 물든 적 없는 불심이다. 생사는 꿈속 일이고 열반이 겁외劫外의 소식이다.
다음으로, 대반야大般若에 의지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가능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중생의 존재란 곧, '자아가 있다'는 소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무명의 어둠이다. 이에 대해, 불조佛祖의 존재는 곧 빛이며 반야의 실상實相이다. 그 살아있는 한 마디는 촌철살인寸鐵殺人하여 무명을 타파한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여래로부터 무아의 가르침을 들으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만큼, 중생들은 무작정 살아있는 것을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한다. 칭찬과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쾌락과 이익 얻는 것을 좋아하며, 비난과 무시당하는 것, 고통받는 것이나 손해 보는 것을 극구 싫어한다. 그런 중생에게 무아의 가르침은 곧 죽음과도 같이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 법계에서 스승의 자비로운 빛과 제자의 옹졸한 무지는 필연적으로 부딪쳐 어둠을 굴복시키고 걷어낸다. 자아의 어둠이 부서지는 것이 그 순간에는 비록 절체절명의 고통으로 여겨질지라도 그 끝은 당연히 무량한 안락과 기쁨이다. 지금껏 부려 놓지 못하고 지고 오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자아의 짐을 한번 부려놓고 영원히 가볍고 쾌활해지는 것이다.
또, 중도의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은 실현된다.
불법의 진리는 유무 사이의 중도에 있다. 그것은 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다. 만유를 여의지 않고 있으되 따로 나타나는 법이 없으며 고로 멸하는 일도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이것'의 존재는 그렇다면 어떻게 확인되는가? 바로 부처님과 스승의 현현을 통해서다. 자아의 무지로 인하여 기나긴 생사의 유전문流戰門에 든 중생의 소견과 업습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렇게 모조리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량한 중생들 속에서 무수한 대립과 다툼 속에서 좌절하고 지쳐가던 중생이 무아無我의 구현자인 불조를 만나는 일이 중생으로 하여금 돌연 자기 안의 무아를 보게 한다.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여래를 보고, 여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하셨다. '나'없이 살아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이것은 삶의 길에서 일어나는 가장 희유하고 숭고한 기적이다. 참 스승을 만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를 본다. '나', 혹은 '나가 있다'는 소견을 버린 자를 본다. 나 또한 무아로 돌아갈 수 있음을 확신하고 마침내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죽음의 초극이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임을 증거하셨고, 무아를 깨달아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다. 중생의 생사고는 이 '내가 있다'는 잘못된 소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고해로부터 중생을 건지는 일은 이 삿된 소견으로부터 중생을 헤어나게 하는 일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라는 소견을 부숴서 본래 나 없는 그 자리에 있는 진리에 들게 하는 것이다.
서두의 일화에서 만공스님도, '나'가 있어 불법을 보지 못한다. '나'가 있으면 남도 있고, 수많은 타자와 바깥세상이 있고, '도'라는 것도 어딘가 있는 자리가 있다고 여겨 그것을 따로 찾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 치달아서는 본래 있는 도를 보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 제자가 마침내 '나'를 놓아버리고 바로 도에 계합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집착을 당장 놓아버릴 수 있다면 본래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있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이다. '나'라고 하는 놈이 공연히 생겨나 온갖 부질없는 업을 지으며 부단히 좋은 것을 찾고 행복을 구한다며 허둥지둥해온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자 사자 버둥댄 끝에 누가 진실로 행복을 얻었는가? 한시라도 정말 편안하게 안도한 적 있었던가?
이제 정각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시선을 자기 안으로 돌려 무아를 꿰뚫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공성을 꿰뚫는 일이 곧 도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대개는 그 닦음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게 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한 생 두 생도 아니며, 무량겁을 지나온 길이기에, 그 묵은 습관이 쉽사리 녹아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법 안에서 신행을 해나가는 일은 항상 자기를 닦는 일이고, 나를 버리는 일이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냄새나 때와 같이 본래 청정했던 것을 더럽히는 오점들을 지워내는 일이다. 마치 때에 절은 거울을 닦고, 닦고 또 닦아서, 아주 맑고 깨끗한, 티 하나 없는 것으로 만들듯이.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조금씩 '나'라고 하는 묵고 묵은 때를 벗겨나가다 보면 본래 우리 마음의 빈 바탕이 여실하게 드러나서, 그 일심에서 펼쳐지는 법계가 마치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난 것과 같고, 그 향기로움과 고운 모습은 가히 지금 우리있는 자리가 극락세계이자 불국토가 되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절에 다니고 법회에 모이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지 못하던 지극한 평화나,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움을 비롯한 모든 궁극의 가치들이 그대로 만족스럽게 갖추어져 빛나 보일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이루고자 한다면 끝없이 나를 비워 하심下心하고, 다른 사람을 모두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되면 결코 바르게 되지 않을 일이 없다.
세상의 평화가 모든 생명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듯이, 승가에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화합이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 생사고에서 벗어나 자기의 내면,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나, 역설적이게도 이 길이야말로 혼자 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 중생들의 세상으로 몸을 나투셔서 몸소 시연해 보임으로써 우리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고, 더 나아가 승가를 이뤄서 함께 자비로 격려하며 이끌고 믿으며 따라가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만 깨달으면 부처와 같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 마음을 혼자 닦아보려고 하면 좀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느끼게 된다. 수행을 시작할 때 초심자는 대개 '나 홀로 고고하게', '남보다 먼저'하는 마음으로 덤비지만, 처음에는 철썩 같이 마음을 먹고 잠을 몇 시간 자고, 좌선을 몇 시간 하고 음식은 어떻게 절제하고 밖에 나가지 않으며 수행에만 몰두해야겠다고 다짐해본들, 곧 그것은 다짐일 뿐이고 정말이지 실행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옛 어른들은 토굴에서 혼자 수행인답게 수행하려면 대중 속에서 깨닫고 나서 시작해야지. 그 전에 토굴에 들어가는 것은 마굴에 들어가는 일이라고도 하셨다. 다 자기 마음을 이미 점거하고 지배하고 있는 업이나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는 길은 함께 가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 물론 쉽지는 않다. 같이 일어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정진하고.
뭐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보려고 하면 서로 호흡을 맞춰야 하고 상대방 마음을 잘 읽어야 하고 늘 배려하는 마음을 견지해야 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적고 몹시 부자유스럽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다른 일에 팔리느라 수행은 더 안 되는 것 같고, 가끔 이런저런 분란이나 의견 다툼이라도 일어나면 이런 때는 차라리 나 혼자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 가는 오솔길은 결코 멀리까지 나를 안내하지 못한다. 내가 설령 뛰어나고 더 잘 안다고 할지라도, 저 사람들을 자비롭게 가르치고 저 사람 안에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서로 독려하면서 나아가야 쉬 지치지 않고, 길을 잘못 들지 않고, 큰 싸움에서 적에게 무너지지 않는다. 자고로, 보리심이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어떤 일이든 같이 할 수 있고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수행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 수행이 잘 나아가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눈 밝은 선지식에게 점검을 맡기고 대중에 들어 해나가는 것 아닌가?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싫은 사람들과도 함께, 나와 잘 안 맞는 사람과도 함께, 번번이 내 뜻을 거스려는 사람들과도 함께 하려고 하고, 그 속에서도 마음을 바르게, 따뜻하게 쓰려고 하다보면 내 욕심도 녹고 업도 녹는다. 결국에는 내 자아가 온전히 다스려져 도를 깨닫게 된다. 서두에서도 일렀듯이, 자아가 없어야 바로 도에 계합할 수 있지, 자아가 있어 도를 깨달으려고 하고 구하는 마음을 따로 낸다면, 그런 도는 얻어지지 않는다. 그건 단지 망상일 뿐이다.
나보다는 대중을 앞세워야 한다. 비록 어떤 일을 나보다 못한다거나, 내가 싫어하는, 나쁜 사람처럼 여겨지는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먼저 성불하기를 바라고, 그 사람의 수행을 돕는 마음으로 살 때, 내가 구하려는 도 또한 정말 쉽게 닦아질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 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내가 남들보다 행복해져야지.'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달려본들, 혹은 모든 외부적인 조건들이 뜻대로 갖추어진들, 결코 행복은 마음속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중생들이 그런 착각 속에서 잘못된 방법으로 행복을 구하고 있다. 그것이 이 중생계의 어떤 중생도 과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나를 내려놓고 한 번 제대로 살아보자는 뜻에서, 여기 와서 그 행복의 길을 함께 찾아보자고 절에 찾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그동안 이 도량과 법화림에 와서도 똑같은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다시 돌아보자.
법화림을 만들 때 나는 '임주 林住'라는 이름을 써볼까 생각했었다. 그때 어떤 분들이 주인 주主 자가 들어간 호칭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보통 큰절에는 주지 住持스님이나 방장 方丈 스님과 같은 어른스님들이 계시지만, 요즘에는 문도회와 같은 보다 큰 승가 조직 안에서 어른들을 '회주 會主'라는 이름으로 많이 호칭하곤 한다.
'주지스님' 할 때의 주는 주인 主가 아니라 살 주住 자다. 그 절에 머물러 살면서, 도량의 전체적인 운영과 흐름을 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실 그런 마음으로 옛 주지스님들은 절 안의 일을 살피시곤 했다. 자신의 절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잘살도록, 자신은 될 수 있으면 도량을 비우는 일 없이 늘 도량을 가꾸고 백사 百事를 챙기면서 대중의 수행을 외호하는 소임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몇몇 주지스님들은 마치 자신이 그 절의 주인인 것처럼, 주지가 되면 마치 그 절이 자기 것이 된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회주라고 하는 직책도 그럴만한 자질이 있는 어른들께 우리를 잘 지도하고 이끌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그런 이름으로 추대하여 드리는 것이지만, 사실 그런 자리에 있으려면 '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처작주 隨處作主, 이르는 곳마다 거기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선문 禪門의 종지 宗旨라 해도, 그러자면 먼저 '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이 세상 모든 인연을 밝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틀과 역량을 제대로 파악해서 적절하게 역할을 정하고 제각각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이끌 수 있는 분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게 임주 林住라는 이름은 적당치 않은 것 같아, 궁색하지만 임중 林中이라고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을 얘기하자면, 큰 교통사고를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상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면서 사람들 속에 살게 되었는데, 그 사고의 충격으로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바로 한 시간 전의 일조차 기억나지 않곤 했었다. 끝없이 쌓여가는 일 속에 묻혀 있다가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어오면 대체로 질문한 당사자에게 일을 맡기면서 "보살님이 주도적으로 하세요."하곤 했더니,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은 질문을 하는데, 앞의 일을 까맣게 잊고 그 자리에서 또 "보살님이 주도적으로 하세요."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이 서로 일을 도맡아 주도적으로 하려다 보니 어찌 다툼이 없었겠는가? 물론 여기 법화림에 와서도 종종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니, 앞으로 혹시 내가 무슨 일을 '주도적 主導的으로' 해보라고 하면, 앞장서서, 알아서 하라는 말이 아니라 꼭 '중도적 中道的으로' 해나가라는 의미로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주도적으로'에다 제발 ㅇ 받침만 하나 더 붙여주기를.
중도라는 것은, 우선 어떤 것이 '있다 없다' 하는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는 일이다. '나'가 있다, 없다 하는 소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소견에만 붙들려 있으면 언제나 다들 마음이 무겁고 불안하며 세상은 곳곳이 싸움판,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반대로 '없다'는 소견에만 갇혀 있으면 사람들은 매사에 무기력하고 나태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어떤 것에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 세상은 무주공산 無主空山이나 황무지같이 되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중생이 무엇이든 '있다'는 소견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강하므로 부처님과 스승들이 무 無나 공 空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없다'는 것 또한 깨달음을 통해 철저히 통찰된 것이 아니라 한 극단의 견해일 뿐이면 유견 有見에 사로잡힌 것 이상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 부처님께서 무아 無我를 설하시고 무아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도 중도적인 것이지, 치우친 견해에 국집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그런 연유로, 부처님께선 내내 무아를 설하시다가도, 어떤 외도가 무아를 주장할 때는 다시 나가 있다고 하시기도 하고, 또 다른 외도가 단지 논쟁 삼아 나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을 때는 그저 침묵하시기도 했던 것이다.
모든 일을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게 보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지혜롭게 이끌어가라는 뜻으로 중도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유와 무의 견해를 떠나, 자아에 대해서든 이 세계에 대해서든 중관 中觀하는 것을 깨달아 자재로운 사람의 통찰이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법화림을 시작했지만, 모두들 세상일은 뜻 같지 않고 다른 사람 마음은 내 맘 같지 않다고 느끼며 살아온 것 같다. 지나오면서 보니 여전히 우리 불자들은 걸핏하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고 절에 나오지 않거나 이 수행 못 하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갈등이 끝이 없고, 사실 중요한 자리에서 주도적으로 법화림을 꾸려간다고 생각하던 분들이 지금은 거의 절에 나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공연히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내세워 팽팽히 맞서다가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감을 가지고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들을 가만히 들춰보고 있자니 어느 것 하나 남 탓할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여러분들의 허물이 아니라 모두 내 부덕의 소치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임중이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법화림은 이제 어떤 한 사람이 '없애자'한다 해도 원점으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인연 따라 가도록 두되, 그 중심은 비워두면 좋겠다는 판단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법화림과 연관해서 누군가 나를 지칭하고 싶다면 임중 林中이 아니라 차라리 임변 林邊 스님이나 임외 林外스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러분도 이 기회에 제발 제발 제발, 혹시 마음속에 '내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겠다, 조직 안의 중심으로 진출해야지.'하는 야심은 없었는지 겸허히 돌아보고, 나를 버리기 위해, 나를 닦기 위해 이 법화림의 일원이 되어 함께하고 살아갔으면 한다. 이것이 불도佛道요 진정한 행복의 길이 아닌가? 처음에 그렇게 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부디 모두 '나'의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나를 바치는 마음으로 절에 와서 어떤 일이든 하고 도량을 가꾸며 시주도 하고 대중을 위해 보라. 그렇게 실행해보라. 잠깐이라도,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몸소 그렇게 해보면 그런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고 깊은 행복을 불러오는지 여러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갈 때 우리가 불도에 입문하고 절에 온 보람이 그 신행 속에 내재해 있음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이 이렇게 닦여져 나가는 쾌활함을 직접 느낄 수 있으며, 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던 행복이 서서히 싹을 틔워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오늘부터 반성하고 곧 방향을 달리할 줄 알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절에 와서 '우리'가 되어 살아가며 함께 법화림을, 이 세상을 일궈간다면, 얼마든지 법화림과 우리 모두의 미래는 밝아질 수 있다. 정녕코, 우리가 처음에 기약했던 대로 법화림은 우리만의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이 세상이 온통 법화와 같이 피어날 것이고, 우리 모두가 법화림의 일원이 되어서 정말 우리가 꿈꾸던 세상, 꿈꾸던 미래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수련회가 끝나는 날이기도 한데, 이 수련회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곳이 처음인 분들이다. 2차, 3차 수련회는 고작 예닐곱 명씩 지원했을 뿐이다. 몹시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사실 이전부터 절에 다니던 분들은 물론이고 곳곳의 불자들이 많이 동참하리라 기대했었다. 그동안 법회때마다 법화림은 수행공동체라고, 모두 수행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말해왔으니까. 우리가 절에 온 목적은 수행을 위한 것이고, 함께 절에 모여 한솥밥 먹고 살면서 도량을 정비하는 일들도 모두 수행의 일환이라고.
지난해까지, 서울에 수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수행한다고 수행모임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30~50명 모였었다. 그때만 해도 남의 공간을 빌어 궁색하게 흉내만 내다보니 여러 가지 미흡함과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선원을 마련하고 제대로 수행해보자는 뜻에서 어렵게 건물 한 층을 임대하고 공들여 꾸며서 우리 힘으로 선방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요즘 금강선방을 찾는 분들은 하루에 고작 서너 명, 심지어 어떤 때는 한 명도 없을 때도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선방 만드느라고 고생한 시간과 노력, 시주의 돈이 아까울 뿐이다. 나는 지난 겨울 안거 도중에 좌선시간 여기가에 틈틈이 언 손으로 나무를 깎고 다듬어 금강선방의 불단을 만들었다. 구도의 일념으로 먼 데서 온 외국인 수행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어 벽화를 그리게 했다. 낡고 부실한 건물을 정비하고 치장하게 하느라 업자를 달래고 가르치기도 힘들었다. 드는 돈을 아끼려고 애쓴 이런 과정도 여러분들의 시주와 동참이 없었더라면 애초부터 어떤 것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여러분들이 처음에 그렇게 시작해보자고 제안했던 일이 아닌가? 안거나 수련회라도 한 번씩 치르자면 그 준비과정에 얼마나 많은 막일이 따르는지 와서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이번 음성 법화수련원에서도 수련회 시작 몇 분 전까지 나는 정신없이 수각을 만들고 식기 건조대를 만들어 붙여야 했다. 어디서 놀다 와서 해질녘에 그렇게 급해진 게 아니다. 봉화에서 미친 듯이 일하다가 접어두고 와서 빠듯한 시간을 낸 것이다. 삭발하고 근사하게 차려입을 시간도 없다. 때 맞추어 예불 모시고 좌선하고, 다치고 지쳐 늙어가는 스님이 온갖 막일에 매달리고…….
절에 찾아온 사람을 만나서, 혹은 화면에 내보내기 위해 법상에서 뭐라 지껄이고 있다 보면 나는 문득 자신이 두 얼굴의 사나이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두 얼굴이라기보다는 천의 얼굴이겠지. 행자에서 엉터리 조실까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선과 울력을 하나로 보는 옛 선문의 가풍만은 아니다. 정말 나는 누구 말대로 일중독에 걸린 미친 환자일까? 아마 그렇겠지. 휴식보다는 치료가 필요한 환자.
이제 나는 내가 왜 그렇게 해왔는지 진짜 모르겠다! 스님이 그렇게 솔선수범하고 막일을 하고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절에 와서 시주도 하고 수행도 하고 모든일을 같이할 줄 알았을까? 백장스님처럼 진실되고 고고한 가풍이라고 누가 감동하고 칭찬하고 떠받들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것도 다 아닐 테고, 이젠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머나먼 미래에 꽃 피고 열매 맺힐 시절이 올지도 모르지. 그러나 최소한 아직까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당신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이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웃긴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한 번 더 봐 주는 것인가? 당신들 하자는 대로 해 주는 것인가? 주는 돈 아껴가며 뼛골이 휘도록 일해 절 짓는 것인가?
서로 싸울 때 당신 편 들어주는 것인가?
나는 이제 정신이 늙는 사람들과는 못살겠다. 정신이 노화한다는 것은 굳어진다는 것이다. 생각도 감정도 입장도 안목도 굳어져 누가 조금이라도 구부리려들면 그대로 부러지고 만다. 그 무엇도 같이하기 힘들다. 아무것도 같이할 수 없으면 어찌 하겠는가? 눈 감을때까지 구경이나 하셔야지…….
아니면, 회춘하라. 몸은 나이 들어도 마음은 아니 늙는다고, 심회춘心回春이라도 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당신의 결정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마음이 말랑말랑하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사람들과 나는 여생을 같이할 것이다.
늙은 말이 햇콩을 더 좋아한다는 말 그저 재미로만 들었더니, 늙은 나는 이제 묵은 콩을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다. 누구의 허물이뇨? 물론 과인의 허물이다.
이제는 법화림을 위해 그 어떤 뜻을 펼치는 것은 물론, 거의 생각하는 것조차 접고 있다. 흘러가는 대로 두면 물결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얼마 전엔 선화제도를 없앴다.
현대의 삶에 지쳤다 구도심으로 다시 일어난 사람들이 심출가心出家하여 도량에 모여 수행 본위로 살아가며 주체적으로 공동체의 살림을 꾸려나가도록 하고 그 이름을 선화라고 했었다. 작년엔 10여 명까지 된 적도 있고 최근까지도 6~7명이 그렇게 함께 지내왔는데,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지냈고 수행도 많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금은 함께 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 도량에 오기 전보다는 훨씬 마음이 열리고 그나마 편안해졌을 거라고 믿는다. 때로는 이런저런 부분에 취약한 이들도 대중에 포함되곤 했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누구 하나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서로 다독이고 보듬으며 모자란 부분은 함께 함으로써 채워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의욕이 앞서고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 늘어나는 대중의 수만큼 서로 간에 긴장도 들고 갈등도 잦아졌다. 그리고 그 갈등은 절 안에서만 불거지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이미 이름의 뜻이 무색해진 마당에 거추장스러워진 이름은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더 이상의 선화는 없다. 우리는 모두가 흘러가는 나그네들이다.
사실 알고 보면 승가라고 하는 것도 흘러가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이 세상에 절이 있고, 승가가 있어 그곳을 세우는 성원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성원들은 모두 현전승가를 거쳐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승가가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그 사람들 낱낱이 다 왔다가 가는 사람들이므로, 정해진 구성원이 이룬 단체로서 언제까지나 한 가지로 고정된 조직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강을 보라. 한 가지 모습으로 있는 강이 어디 있는가? 인연 따라 물길 찾아 흘러가다 보니 강이 된 것 아닌가, 땅이 스스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강이라고 정한 것이 아니라, 물이 정한 어느 모습이 없어 흐르고 흐르다보니 지금 잠시 강을 이룬 것이다. 그것이 한때 어느 시점에서 보면 한 줄기 강으로 보이듯이, 승가도 어느 한 때 흘러가던 사람들이 시절인연 따라 모여들어 잠시 이룬 하나의 무리와도 같다.
우리 저마다 승가라고 하는 강을 지나는 강물과 같은 나그네임을 알고 절에 다니면 그뿐인 것이다. 그래야 오는 분들도'아, 나도 여길 지나가는 사람이로구나.'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고,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나 역시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 이곳의 오랜 주인은 아니지.'하는 마음으로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임중이라는 이름을 지운 지금, 나 역시 지나가는 나그네로 이렇게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뭐라 떠들기도 하면서 한동안은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언제 떠나가게 될지, 앞으로 법화림이나 우리 인연이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만, 우리 각자 좋은 마음으로 서로 나를 닦는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와, 항상 겸손한 자세로 우리 모두 행복해지길 바라는 보리심으로 살아가면, 하루를 살아도 그대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얻고, 여기 아름답게, 향기롭게 보기 드문 한 송이 꽃이 피어날지도 모른다.
선화제도를 없앤다고 하니 대부분의 선화들은 대환영이었다. 그간 선화라는 이름을 띠고 있긴 했지만 이름값을 몰라 그저 그 이름이 무겁기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같은 모습으로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도 이름을 지고 살아가는 것과 이름에 매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이름에 걸리지 않으면 마치 바람처럼, 자연스레 가는 곳이 곧 길이 되련만. 이름은 우리를 땅에 묶을 뿐, 그 어떤 이름도 우리에게 영원을 기약해주지 못하거늘. 무게를 가진 물은 물길이 난 곳으로만 흘러가나, 자유롭고 우아하다 바람의 길은. 그때그때 순간의 춤을 추는 것이 남은 한 가지 일이다.
우리 모두가 '나'의 무게를 내려놓고, 거기 더께처럼 들러붙은 온갖 이름을 벗어놓고 가벼워진 바람 되어 저 만 길 허공을 노닐기를. 바람 같은 우리들, 잠시 함께 한 춤사위에 어울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우기를. 이렇게라도 만나게 된 인연에 서로에게 미소 짓고, 그 끝에서 참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2014년 7월 27일 참선법회 법문 中
첫댓글 온갖 이름을 벗어놓고 가벼워진 바람 되어...
사진을 정성스레 골라 예쁘게 편집하셨네요...
맑음님, 고맙습니다 _()_ ^^
바람같은 우리들, 잠시 함께 한 춤사위에 어울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우기를..
이렇게 만나게 된 인연에 서로에게 미소 짓고. 그 끝에서 참으로 감사할 수 있기를...
_()_
살아서 지금 숨을 쉬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 기적같습니다 ^^
그러니 그 기적을 함께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환한 미소로 이웃에게 따뜻함을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