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브르 형제(Limbourg Brothers, Herman, Jean, Paul: 1370/80년경-1416년)
플랑드르 출신의 필사본 화가. 베리 공작의 미술품 제작에 종사했다. 그들이 공작을 위해 그린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는 크기가 22.5×13.6cm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기도서로써 12달의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 중 5월은 사랑의 축제로 그려졌다. 5월의 색채인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과 호화로운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야외로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앞에는 음악대들이 축제의 흥을 돋우고 있다. 이들은 아마 1400년과 1410년에 결혼한 베리공작의 딸과 아들인 듯하여, 멀리 보이는 성은 그들이 결혼식을 행하였던 파리의 시테궁이라고 짐작된다.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5월(1414-16). 9월 9월은 포도수확이 한창인 과수원과 그들의 주인이 살고 있는 하얀 성(城)으로 그려졌다. 포도를 따고, 그들이 거둬들인 수확물은 모두 성으로 옮겨지고 있다. 성벽으로 굳게 둘러싸인 하얀 성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귀족과 농노계급으로 대변되는 중세 말의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년경-1444)
메로데 제단화(1427년경.메트로 폴리탄 박물관) 세 폭의 제단화 중에서 왼쪽의 무릎꿇고 있는 이들은 이 그림의 주문자 잉겔브레히트부부이다. 당시의 부유한 시민계급들은 귀족들을 모방해서 미술품들을 주문하였는데, 귀족들은 필사본이나, 금속공예품과 같은 값비싼 매체들을 주로 주문한데 반해서 이들은 제단화라는 매체를 선호했다. 제단화는 값이 쌀 뿐 만 아니라 그림의 장면에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넣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림에 자신들의 집이나 생활도구들을 넣을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였다고 한다. 제단화는 신흥 브루주아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매체였으며, 이들의 요구는 마치 현장을 그대로 살린 듯한 사실적인 회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가운데 수태고지 장면이다. 창문은 위 아래를 따로 열 수 있는 방식이며, 나무로 된 천장은 격자로 엮어져 있다. 물을 담는 커다란 포트 옆엔 면 수건이 걸려 있고 마리아 앞의 테이블엔 화병에 꽃이 꽂혀 있다. 마치 이 시대 가정집의 내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마치 집안 살림도구와 같은 이들 소품들은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동제 그릇에 담긴 물과 화병에 꽂힌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오른쪽 패널엔 목수일에 열중하고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그려져 있다. 수태고지에 요셉을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요셉과 함께 있는 여러 공구들은 예수 수난에 많이 등장하는 도구들이어서 오른쪽 패널은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광경 또한 당시의 목공작업실 같다다. 그리고 창 너머엔 꼭대기 층을 삼각형으로 한 북유럽 특유의 집들이 빽빽한, 바쁜 도시의 풍경이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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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아이크 형제(Jan, Van Eyck 1390-1441. 벨기에출신)
궁중화가로 초상화에 정취가 넘치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
롤랭 수상의 성모상(1436년. 루브르박물관) 아예 그림의 안으로 들어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1376-1462)이라는 주문자는 브르고뉴 공국의 3대 공작인 선량공 필립(Philippe de Bon)의 수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 경제, 외교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권력자였지만 그는 부유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아이크의 이 그림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롤랭수상은 돈주머니를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이 돈주머니는 지워졌지만 그러나 그의 부(富)는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다.이탈리아의 제단화에서는 주문자가 아직 작은 크기로 묘사되었던 시대에 플랑드르에서는 이렇게 주문자를 그림의 주역으로 크게 등장시키는 것은 참으로 대담한 개인의 선전이었다.
아르놀피니부처의초상 부유한 상인들은 독립된 초상화도 주문하였다. 주인공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그의 부인 죠반나 체나미(Giovanna Canami)는 모두 이탈리아의 루카(Lucca)출신으로 브루주(Bruges)에 정착한 이후 가장 성공한 은행가였다. 아마 이러한 신흥시민들은 자신들의 고상함이나 신비감, 그리고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초상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단정한 자세의 부부는 갈색톤을 배경으로, 매우 성실하게 그려져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은 세속적인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선 아르놀피니는 값비싼 모피코트를 입고 있으며 창가엔 수입산 오렌지가 놓여있고, 침대 밑엔 터키산 융단이 깔려있다. 이 그림에서도 소품들은 물론 상징의 역할을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강아지는 믿음을 상징하며 하나만 남은 샹들리에의 불빛은 이들의 결혼을, 그리고 침대의 붉은 색은 사랑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배경에 볼록거울을 배치한 반 아이크의 창조성이었습니다. 두 인물이 있는 방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있는데 반 아이크는 배경에 볼록거울을 놓음으로써 천장과 바닥, 창문 밖의 풍경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거울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이 두 부부 앞에 있었을 화가 자신을 넣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울 위 벽면에 "얀 반 아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이라고 서명함으로써 반 아이크는 자신의 존재를 그림 속에 확실히 하였다. 이 거울 속의 화가 이미지와 서명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의 화가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회화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화가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는 해석이다.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던 화가의 자의식의 발달을 염두에 둔다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시대 화가들은 회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겐트의제단화 십자가책형 추기경초상 터어번의사나이 반데르파알레성모 마아가레트반아이크의초상 |
북유럽 미술(16세기 이후)
히에로니무스 보스(Bosch, Hieronymus. 1450-1516년) : 지옥의 화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보쉬는 반 아이크 전통의 리얼리즘과는 매우 다른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다. 그가 그린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하여서 그는 '악마의 화가, 지옥의 화가' 라고 알려졌다. 심지어 초기의 비평가들은 지옥의 광경을 소름 끼치게 묘사한 그를 비밀종파에 가입했을 것이라면서 이단자로 몰아붙였다.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이 종교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악에 이끌려 결국 타락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형제회의 초정통주의 종교단체에 속해 있었고,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신자와 문하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용 그림이었다. 스페인 펠리페2세가 보스 작품의 최대 수집가였다는 점을 들어 그의 작품이 진지한 신앙에 의한 창조물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소묘가로서도 뛰어났던 그는 불가사의한 상상력이 산물이 뛰어난 묘사력으로 재현됨으로써 존재할 리 없는 광경이 보는 이의 마음 밑바닥까지 파고든다. 그야말로 20세기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의 원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수의 십자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힘들게 걸어가고 있으며 화면 왼쪽 아래에는 군중 속에서 성 베로니카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천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렇듯 보스는 현존하는 그림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화가이다. 물론 그의 그림들에서 보는 이런 몽환적이고 강박적인 시각들은 중세후반 고딕의 여명기에 여러 화가들을 통해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전작의 화가들과 달리 광기(狂氣)와 부조리(不條理)와 도착(倒錯)의 지옥도(地獄圖)이며, 합성·변모된 무수한 동물과 식물 비유기적(非有機的) 물체들로 화면을 꽉 메우고 날뛰는, 괴기하고 어두운 해학(諧謔)의 마술세계로 그의 화폭을 가득채운다.
접었을 때의 쾌락의 동산 플랑드르 전통의 세 폭 제단화로 그림은 흑백의 그리자이유로 그린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양쪽 패널을 열면 <쾌락의 동산>이 펼쳐진다. 닫았을 때의 태초의 모습은 안쪽의 왼쪽 날개인 낙원으로 이동하며, 낙원은 인간의 갖가지 탐욕이 그려진 가운데 패널을 지나 오른쪽의 지옥으로 이어진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데 비해 탐욕과 지옥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기괴하다.
쾌락의 동산. (1505-15년경. 프라도미술관) 성욕.식욕.물욕 등 인간의 모든 욕망과 악덕, 그 악몽과 같은 이미지가 뒤얽혀 있는 이 작품은 사실 세 개로 구성된 연작의 일부다. 왼쪽 패녈에는 '낙원' 즉 에덴동산, 오른쪽 패널에는 죄의 결과로서의 '지옥'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패널에 그려진 이 '쾌락의 동산'은 최초의 죄, 즉 원죄를 그린 것이다.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가득 찬 '낙원'이나 '지옥'에 비해, 이 작품에 그려진 것은 오히려 사랑스럽고 순순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세상의 거짓과 위선, 욕정, 경박함 같은 악덕이 가득 차 있다 이 그림은 제단화라는 형식 때문에 교회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성적이고 기괴한 그림이 어떻게 교회에 놓여 있었을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 그림이 1517년에 나사우의 앙리 3세(Henry Ⅲ of Nassau)의 브루셀 궁전에서 발견되었음을 상기해 볼때 1568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기까지 왕의 개인 소장품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 욕망을 절제하라는 교훈을 담은, 개인의 결혼과 관계된 작품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다. 중앙패널의 부분 벌거벗은 인간들은 괴상하게 변형된 파충류나 거대한 식물들에게 갇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쾌락을 즐기는 남녀를 바라보면 거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가운데 패널의 오른쪽 중간과 아래쪽을 보면 사과를 따먹으며 즐기는 남녀가 있으며 사과를 들고 춤추는 두 여자의 머리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로 덮혀있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1 여기에 그려진 수많은 탐욕은 분명 아담과 이브의 유혹이며, 타락한 인간들은 오른쪽 패널에서 벌을 받게 된다. 음악에 지나치게 탐닉한 사람들은 하프에 매달려죽는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2 1어떤 이는 머리가 새인 옥좌의 왕(?)에게 통째로 먹히고 만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3 멀리 유황불이 터지는 지옥 아래엔 커다란 귀에 눌린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꿈틀대고 인간의 영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정상적인 모습은 화면 가운데서 조금 위에 그려진 한 인간의 얼굴뿐이다.
이단의 지옥도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옥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확대된 귀와 나이프는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며, 또 나이프에는 반 기독교를 뜻하는 문자 M이 그려져 있는 등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림 속에 보스의 자화상이 있다는 말도 있다. |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1470/80-1528) : 마귀의 화가
뷔르츠부르크 출생. 1508년 이후 마인츠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나 나중에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가 1528년 할레에서 죽었다. 남아 있는 작품수는 적으나 종교적인 정열에 넘치는 대표작 이젠하임 제단화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의 신비주의를 살펴볼 수 있다.
이젠하임 제단화(1515년경, 콜마르, 운테르린덴박물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분도 이젠하임(Isenheim)의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 예배실에 놓여 있었던 제단화이며 양쪽 날개가 두 쌍인 다소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제일 표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다. 피부병이 돋아있는 몸과, 고통에 뒤틀린 손가락의 표정을 보면 보는 이까지도 아픔을 느낄 듯하다. 그의 왼쪽에는 실신할 듯 슬퍼하는 마리아를 요한이 부축하고 있으며, 그 아래엔 막달라 마리아가 오열하고 있다. 막달라의 붉은 옷과 흩날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그의 제스춰는 우리까지도 전율하게 한다.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오른쪽 세례요한의 붉은 색들은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매우 표현주의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수태고지.예수탄생.부활 반으로 나뉘어 그려진 위 그림을 양쪽으로 열면 제일 왼쪽부터 수태고지, 예수 탄생, 예수 부활로 이어진다. 성 안토니오의 유혹 가운데 패널을 다시 열면 오른쪽 패널에 그려져 있다. 수도하고 있는 안토니오에게 온갖 마귀가 그를 괴롭힌다. 용머리의 괴물은 머리칼을 잡아 당기고, 올빼미 형상의 괴물은 몽둥이를 내려친다. 음산하고 파괴적인 배경에 무너진 건물 위를 날아다니는 기괴한 동물들이 특색이다. |
뒤러 ( Albrecht Durer 1471.5.21~1528.4.6)
이탈리아여행을 하면서 르네상스와 독일고딕성향이 만나 북구양식의 인체표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을 이루게 되었다.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뉘른베르크 화가 뒤러는 근사한 외모에 모피 옷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다. 사치만 부리는 게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 그의 붓놀림을 본 벨리니가 화들짝 놀랐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황제에 버금가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 그 당시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예를 누린 셈이다. 당대의 예술가, 인문학자와 교류했고, 나중에는 황제가 초상화 좀 그려달라고 뉘른베르크까지 찾아와 모델을 설 정도였다. 뒤러가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사다리를 붙들고 시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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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박박사의 예배>
폐허를 무대로 하여 오른쪽에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성모를 좌단에 배치하여 성보자와 세박사의 만남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북방 특유의 섬세한 자연묘사에 이탈리아적 원근감을 가미하여 밀도있는 화면을 형성하고 있다. 북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뒤러는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과학적인 원근법과 완벽한 인체표현을 가증하게 했던 해부학에 근거한 세밀한 인물묘사로 유명하다. 1504년은 뒤러의 목판화 연작 '성모전'이 완결된 해이며, 당시 열중하고 있던 성모화 시리즈의 야심작이 바로 이 그림이다.
아담과이브 1494년과 1505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미술을 통하여 인문주의적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린 그림으로 더 이상 원죄를 지은 성경의 인물이 아니다. 등신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조화로운 비례와 경쾌함을 지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다.
1498자화상 1500 자화상 그는 베네치아 체류 중 독일의 인문학자 친구인 피르크이머(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에서 나는 신사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뉴렘베르그에서의 화가는 아직도 목수나 양복쟁이와 다름없는 장인이지만 베네치아에서의 화가는 대우받는 신사라는 뜻이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다. 그의 나이 26살 때 그린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잘 차려입은 신사로 나타내더니 2년 후 28살 때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을 예수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왕이나 예수의 상에 주로 사용하는 정면 자세에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원근법 연구(1525년, 목판화) 그가 남긴 수많은 드로잉과 판화 중에는 인체 비례와 원근법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를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쪽을 움직일 수 있는 화폭이 놓여있고,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
4인의시도 그의 생애 말년에 그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결산 같다. 좁고 긴 두 폭의 화면은 두 사도의 긴 옷이 가득 차지하고, 나머지 두 사도는 거의 얼굴만 그려졌다. 단색의 옷은 거대하고 단순하며, 명암처리에 의해 입체감이 풍부하다. 옷은 이렇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전통의 화법으로 그려졌으나 얼굴의 사실적인 묘사는 미화시키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북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왼쪽부터 붉은 옷의 요한과 열쇠를 들고있는 베드로, 복음사가 마르코,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이다. 그러니까 그림은 요한과 바오로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네 명의 구성은 종래의 종교화에서는 거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이 그림은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주문 없이 스스로 제작하여 뉴렘베르그의 시청 위원회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독일지역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휩싸였고, 뉴렘베르그시는 막 루터주의를 인정하였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위기와 관계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뒤러는 루터를 '참으로 큰 고뇌에서 자신을 구해 준 크리스챤'이라고 존경해 왔으며 프로테스탄트가 거론한 성상 숭배의 금지에 대해서도 마음속 검토하고 있었다. 요한은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사도이며, 용감한 바오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적인 아버지임을 고려하면 루터주의적인 주제의 선택이며, 이를 시청에 선물하였음은 시와 루터교의 평화로운 해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일수도 있겠다.
-노성두의 미술이야기에서-.
<멜렌콜리아> 뭣하나 부러울 것 없던 뒤러는 마흔 셋에 아주 골치 아픈 그림을 한 점 그린다. 훗날 `미술사학의 우울한 저주'로 일컬어질 손바닥만한 동판화였다. 제목부터 우울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멜랑콜리의 우의일까? 그러나 중세 이후 알려진 멜랑콜리의 여러 유형 가운데 달콤한 우울, 나태한 우울, 꿈꾸는 우울 어느 것하고도 안 어울린다. 그냥 머리 총명한 학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림 해석은 여러 갈래가 나왔다.
'I'는 숫자일까? 준말일까?
먼저 멜랑콜리를 아리스토텔레스 기질론과 연결해서 흑담즙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박쥐 날개에 새긴 멜렌콜리아 I에서 `I'이 숫자 1인지 라틴어 IRE의 줄임말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1이면 동판화 연작 첫 그림일 테고, 줄임말이면 `멜랑콜리, 꺼져라'다.
멜렌콜리아는 멜랑콜리?
뒤러의 동판화가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쓴 <비밀 철학>에 나오는 세 단계 멜랑콜리를 설명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울부짖는 박쥐가 표상하는 공포, 절망, 슬픔, 고독 따위 부정적인 우울로부터 날개 달린 우아한 알레고리의 여성이 신성의 비밀을 투시하는 상위 단계까지 차례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그리파가 흘려 쓴 수기원고를 미리 돌려읽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작 책으로 나온 건 동판화보다 19년이나 늦고, 그림 중앙 사다리 디딤목이 아그리파가 내세우는 천체 구성처럼 여섯 개가 아니라서 주장의 설득력이 바랬다.
혹시 연금술 비밀이 감춰져?
돌을 깎은 다면체 뒤쪽에 곤로와 집게가 연금술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박쥐 꽁무니에 뱀 꼬리가 달렸고, 밤에 뜨는 무지개에다 마방진의 숫자 배열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가 연금술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는 기록이 없고, 비교할 만한 작품도 남기지 않아서 아직 가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벽에 걸린 천칭, 모래 시계, 마방진, 그리고 컴퍼스, 막대자 같은 도구를 두고 우주의 생성 비밀을 측량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으로 보기도 했다. 솔로몬의 지혜서 11장 끝줄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는 인용이 따라붙었다. 그럴 경우 뒤러는 갑자기 플라톤을 성서의 눈으로 읽는 피치노 류의 신플라톤주의자로 둔갑한다.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 예시?
또 멜랑콜리의 알레고리 여성을 뒤러의 정신적 초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술가의 정령이 돌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길짐승과 날짐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박쥐가 빛을 등지고 무지와 맹목 속에 빠져드는 것을 필멸의 예술가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약점으로 보고, 제 몸을 부수며 밤하늘을 떠도는 혜성은 궤도 없이 헤매는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을 예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화상을 그토록 좋아하는 뒤러가 왜 여기엔 제 얼굴을 안 그렸을까?
중구난방 해석이 그럴싸
요컨대 문제는, 미리 결론을 정해두고 끼워 맞추는데도 신통하게 논리의 구슬이 술술 꿰어진다는 데 있었다. 사방 팔방 어디를 꿰어도 수의 합이 일치하는 마방진처럼. 결국 지난 백 년 동안 논의와 반론이 빗발치고 무수한 학문적 굴착과 시추가 거듭되는 동안 뒤러의 동판화는 끝없는 의문부호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 노력들이 전혀 무상한 건 아니었다. 그 사이 미술사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지레 성숙하고, 부수 성과들도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으니까. |
비탄에잠긴예수 마리아의일곱비애 예수의애도 산토끼 카나리아날개 히에로니무스초상 기사, 죽음과 악마 |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Hans Holbein d.
.의 아들이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처음 아버지와 목판화가인 브루크마이어에게 그림을 배우고 바젤·북이탈리아·런던 등지에서 명성을 얻은 뒤 영국 헨리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523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그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그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우산 예찬』(1509)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도 여러 점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등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다.
헨리8세(1540년)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된다. 1526년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간 그는 그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등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년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왕은 1539년 앤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가 택한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적에 적합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서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외교관들(1533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쟝 드 딩테빌(Jean de Dinteville)과 죠르쥬 드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제일 위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데 반해 그 아래 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있고, 그 아래 바닥의 중앙엔 알 수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떠 있다. 여러분의 눈을 오른쪽 인물의 아래 손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이 형상을 한 번 보면 인간의 해골임을 알 것 이다.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이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이 모든 것 무상함을 말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브뤼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브뤼겔이라 하며 부가 모두 화가.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서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 처음에는 인기를 끌었던 판화를 모티브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유화로 표현. 설화집이나 우화집에서 제재를 얻음.
환상적인 풍결 속에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그리다. : 기괴한 형태에 집착하거나 불안정한 구도를 고안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사악한 욕망을 표현
바벨탑(1563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세우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해 신이 언어가 통하지 않게 함으로써 혼란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다. 경사로이 세원진 거대한 건축물로서 바벨탑을 그린 것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드문 예인데, 인물들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브뤼겔은 그 주제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킴.
사냥꾼들의 귀환 눈 덮인 겨울, 사냥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온 세상은 눈으로 덮인 스산한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불을 지피고, 멀리 언 밭에서는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브뤼겔이 조감도의 방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 같다. 이 방법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기 보다 무수한 자연물 속의 피조물로 객관화시키고 있다.
장님의 우화(1568년 나폴리국립박물과) 브뤼겔이 만년에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정치적으로 광적인 믿음이 팽배해 있던 사회를 향한 분노와 조소가 담겨진 그림이다 .마태복음 15장 1절에서 9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예를 든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게 되면 구렁에 빠진다"란 구절이 있다. 이것을 소재로 역동적이면서도 강렬한 표현의 깊이가 이 그림의 주제를 깊이 인식시킨다. 그림을 보면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인간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장님이 장님을 어설프게 인도하면서, 뒤로 넘어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좌충우돌하는 혼란만이 화면에 가득할 뿐이다. 장님들이 장대로 서로를 의존하며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맨 앞의 장님이 개울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 다음 사람은 함께 넘어지려 하고, 그 다음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맨 뒤의 사람은 넋 놓고 쫓아오기만 한다. 브뤼겔은 아마 아무 판단을 못한 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쫓아만 가는 우매한 인간사를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웃음의 화살은 우리에게 되돌아와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변하게 된다. 그의 유머는 오히려 교훈적이다.
거지들 16세기 북유럽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한 사회로 치닫고 있을 때, 플랑드르 지역은 이러한 혼란을 비껴가면서 더욱 풍속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브뤼겔은 이런 사회가 보여주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빗댄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작품 <거지들> 또한 그러한 전형 중의 하나이다. 그림 오른 편에 부랑자들을 외면하며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목발을 집고 한데 모여 있는 부랑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행색과 흐리게 처리된 표정이며 남루한 의복들을 보면 묘한 슬픔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확한 원근법이 후면에서 앞으로 접근하게끔 배치되어 시선이 가운데로 고정되게끔 구도를 설정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대 플랑드르 화파들이 보여주지 못한 알레고리들이 숨어 있다. 아주 작은 크기이지만 이 작품은 작가 브뤼겔이 인간 사회를 향한 조소와 고뇌를 그리면서, 한편으로 그것들을 감싸안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이 단순히 나병 구제소에 수용되어 있던 문둥이들이 마을 축제를 구경가기 위해 막 출발하려는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심오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인간 육신의 고통과 부랑자들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 브뤼겔은 강력한 메시지로 혹은 은유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농부결혼축하(1568년 빈미술사박물관) 농민의결혼식 종교화의 주문이 끊기고 등장한 새로운 장르는 풍속화와 풍경화였다. 이 그림은 아마 농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은 미술의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싶다. 벽에 검은 천을 걸고 그 앞에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여자가 신부인 것 같다. 그녀로부터 왼쪽 두 번째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가 신랑같다. 우리의 시선은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을 따라 한 가운데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지나 왼쪽 구석의 문으로 향하게 됩니다. 작은 문에서는 하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왼쪽 아래에서 술 따르는 이, 빈대떡을 받아들고 손가락까지 빠는 어린아이, 그리고 문짝을 떼어 받침으로 사용하여 음식을 나르는 이, 식탁에 옮기는 이들을 지나 다시 신부에게 닫는다. 브뤼겔이 농부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들에 대한 진솔하고, 깊은 애정이 담겨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묘사한 농부들의 표정과 다소 퉁퉁하게 부풀린 옷은 그들을 어리석게 보이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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