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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화문엔 <불티>났고 대전엔 <난리>가 났어요. 자동차 부품 공장에 불이 나서 14명 사망, 5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중동 전쟁 23일째 지상전 투입과 종전 얘기가 솔솔 나오고 있지만 기어이 갈 때까지 갈 것이라고 봅니다. 아침부터(7시) 준비한 부고 참석을 PM 7시 30분에서야 조인트 했습니다. 상주인 영미가 버선 발로 나와 흐느끼는데 나는 미동 없이 긴 시간 영미 등을 쓰다듬었을 것입니다. 졸지에 포토존에 선 느낌입니다. 영미의 서러움이 왜 폭발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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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가깝다. 누구에게나. 그러나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본디 장례란 산 자들의 몫이 아니던가. 어떻게 살까의 물음이고, 어떻게 살다 갈까의 대답 같은 것, 누군가의 죽음 가까이에서 그걸 묻고, 찾고, 얻으며 예를 갖춥니다. . 5살 무렵에 17살 상복을 입은 막내 이모를 면목동 상가(喪家)에서 처음 보았어요. 그늘 한 점 없던 이모는 첫 조카인 5살 소년이 귀여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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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1살 때 선을 보러 간다고 했어요. 흰고무신을 닦아 놓았더니 이모가 감동받고 100원을 주더이다. 당시(1969) 100원이면 5만 원쯤 됐을까요? 일찍 청상이 돼 아들 둘, 딸 한 명을 키우면서 한 점 그늘도 없던 이모가 3년 전 대장암 진단을 받고 보험료 지옥에서 해방됐다며 좋아했어요( 꿈에 석훈이 아빠가 도와준 거라며). 3년 항암이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정옥 이모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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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남매 중에 3명이 떠나셨고 이제 어머니(정애)-정숙-종복 세 분 남았습니다. 왜 인간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익명적 죽음’을 죽는가? 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고 규정합니다. 죽음은 오직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유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죽습니다. 병원에서/시스템 속에서/한 명의 환자로/통계 속 숫자로 "나의 죽음”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죽음(익명적 죽음)”으로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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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이것을 “사람들(das Man)의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죽음조차도 <타인의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Rainer Maria Rilke는 이 문제를 가장 시적으로 파고든 인물입니다. “주여, 각자에게 그의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릴케에게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삶이 응축되어 맺히는 ‘열매’입니다. a. 제대로 산 사람 → 자기만의 죽음을 가짐 b. 남의 방식으로 산 사람 → 익명의 죽음을 맞음 즉, 죽음은 삶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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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 속 주인공 말테는 파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이 문장은 현대 도시 문명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죽음이 개인의 사건이 아님/죽음이 관리되고 처리됨/죽음이 경험되지 않음. 결과적으로 인간은 죽음을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Lou Andreas-Salomé는 죽음을 심리적 차원에서 분석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의식에서 밀어내며/삶의 주변부로 격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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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죽음은 "나의 내면적 사건”이 아니라 “외부에서 닥치는 사고”가 됩니다. 즉, 죽음을 직면하지 않을수록 우리는 더 익명적으로 죽게 됩니다. "죽음은 가장 고유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타인의 방식으로 회피한다(하이데거)"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나만의 열매’여야 한다(릴케)" "죽음을 억압하면, 죽음은 더 낯선 타자의 것이 된다(살로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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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당겨 사는 자만이 진정으로 산다(하이데거)” 이 말은 죽음을 생각하며 우울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죽음을 의식할 때, 사소한 것이 본질이 아님을 알게 되고, 관계가 깊어지고, 선택이 선명해지고, 삶이 “지금 여기”로 집중됩니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이 무색해진다/우선순위는 건강한 몸/아직 가고 싶지 않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의 각성입니다. 익명적 죽음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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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미리 내 삶 안으로 들여오는 것>입니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타인의 것으로 넘기지 않고,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죽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는 삶은 익명으로 죽고, 죽음을 끌어안는 삶은 ‘자기만의 죽음’을 완성한다" 죽음은 가장 ‘개인적인 사건’인데 왜 가장 ‘비개인적’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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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 23회>입니다. 인하는 한 판 할 분위기로 쳐들어와 대수에게 정애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말한 후 유유히 자리를 떠나갑니다. 잠깐 동안 긴장한 대수는 안심하고 다시 결혼식을 진행했고 신혼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대수가 신혼여행을 떠나는데 사건이 발생합니다. 차량 한 대가 대수의 차 앞을 막아섰고 갑자기 몰려든 건달들이 대수를 내리게 하고 대수에게 칼을 꼽습니다. <친구> 엔딩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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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대가리 대수는 <비열한 거리>에서 비열하게 살아야 하는데 건달이 너무 폼 나게 결혼식을 하니까 안 죽고 베깁니까? 건달이 가정을 가지면 끝이라고, 사랑은 무슨 놈의 사랑, 웨딩 카를 타고 가면서 대수가 정애에게 이제 인하하고의 악연을 끝낸다고 말했는데 칼 맞아 죽었으니 이 불쌍한 인생들을 어쩝니까? 그러게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았어야지요. 이것은 익명의 죽음이요 비개인적 사건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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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가 총상 통증으로 사무실에서 쓰러졌고, 119에 실려 나가는데 수연이 투자 유치를 위한 Arrange 차원에서 왔다가 우연히 목격합니다. 필자도 119차를 두 번 타보았어요. 한 번은 아파서 탄 것이 아니라 내가 불러서 자가 용으로 타고 갔고, 또 한 번은 정말 죽을 만큼 아팠을 때, 수호천사가 나를 싣고 응급실로 데려다준 일이 있습니다. 수연아 고마워! 인하의 소식을 듣고 지인들이 발 빠르게 대처를 하는데 수연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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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의 자금 출처를 알아 본 결과 정원 밑에서 일하는 놈들이 이상 없다고 정원에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승국을 통해 인하의 혼수상태 소식을 들은 정원도 갈등합니다. 수연이 진희에게 찾아왔습니다. 수녀원에 돌아온 수연이 웁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안젤라 수녀에게 말합니다. “왜 그랬는데? “ ”몰라요. 저도 모르겠어요. “ 수연이 드러누웠습니다. 수연의 소식을 듣고 정원과 미쳐서 수녀원을 찾아간 사이 수연이 창백한 몸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아, 사랑하면 다들 정신이 나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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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사랑을 알아? 병원에 나타난 수연이 의식 없는 인하의 손을 잡고 슬프고 슬프게 웁니다. "인하 씨, 눈 좀 떠봐요. 제발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대로 가면 어떡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인하 씨 잊겠다고 한 건 사랑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너무 아파서, 나 속이고 인하 씨 포기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줘요(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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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 어찌하오리까?" “괜찮아요. 난 절대 울지 않아요. 난 오늘까지라도 행복해/ 그대는 나를 또 나는 그대를 이 순간에도 사랑하고 있잖아/고마워요./ 이젠 잘 가요./ 난 항상 고마웠어요./날 사랑해 줘서/ 그대를 한 번 더 꼭 안고 싶지만/나는 참을 수 있어/ 난 안을 수 있어/편하게 보내야만 해/ 난 알고 있어요./ 그대가 나를 보내려 혼자 아파했을 시간을/우우우우/ 미안해요./그대여 울지 말아요./지금부터 나를 버려요/ 그대는 나를/ 또 나는 그대를/이 순간에도 아프게 하잖아/오오오오/이제 더 아파지겠죠./혼자서만 울게 될 테니/괜찮아요. 난/꼭 참아줄게요./제발 편하게/ 오늘날 버려요./사랑해요. 이젠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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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놈도 밤새 술을 마시며 울다가 아침에 수연을 호출합니다. “인하 어때요? 만났어요?(수연)" "어제 수녀원에 갔어요. 인하가 아픈 만큼 수연 씨도 밤새 앓다가 서 있을 기력도 없는 사람이 애써 병원에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난 안 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젠 포기할게요(정원)“ 그래라. 잘 생각했다. 수연이 사표를 선언하고 돌아갑니다. 정애. 수연, 정원, 님을 잃은 피-풀 들이 가슴 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들 사랑 앓이를 하는 동안 인하가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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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갓, 하느님이 보우하사 인하 만세입니다. 자나 깨나 수연 생각인 인하가 녹색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종구가 인하에게 수연이 병원 왔다가 네 손 붙잡고 서럽게 울고 간 얘기를 들려줍니다. 인하의 목젖이 연달아 움직입니다. 병헌 이는 목젖으로 연기를 하나 봅니다. 병헌이가 멋진 흰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섭 지 코지를 찾아왔습니다. 근데 수연이 없으니 유감입니다. 호텔 로비에서 난데없이 승국이 수연에게 김 인하 씨, 아냐고 묻는 물음에 수연은 뭔가 불안한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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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도 뭔 촉이 오는지 수연에게 전화를 겁니다. 근데 이 가시나는 왜 전화를 안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테마공원 부지 입찰이 환경 평가까지 끝났는데 박 의원의 로비로 정원 쪽으로 입찰되면서 도환은 정원을 박 의원의 딸과 정략결혼을 결심합니다. 승국이 인하에게 전화를 해서 둘이 만났어요. 그동안의 악연을 이실직고하면서 이번 일에서 손 떼고 조용히 물러나지 않으면 수연을 손보겠다고 협박합니다. 이제 보니 승국도 양아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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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수연이 위험합니다. 인하가 적토마를 급히 몰고 미쳐서 수연을 찾아갑니다. 다행입니다. 아직 수연이 무사합니다. 직원들과 함께 나오는 수연을 낚아 채 나가는데, 꼴에 정원이 나서다가 한방 맞습니다. 누구든 지금 인하를 건드리면 다 죽습니다. 이젠 수연은 내가 지킨다고.
2.
이 글은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나 드라마 리뷰를 넘어, 죽음·애도·사랑이라는 세 가지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고드는 철학적 에세이다. 특히 장례식장의 체험, 가족사의 기억, 그리고 드라마 <올인>의 서사를 병치시키며, 하이데거적 존재론과 릴케적 시학을 삶의 구체 속으로 끌어내린 점이 인상적이다.
1) 울음은 왜 터지는가 — 영미의 오열에 대한 해석
영미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무너진 이유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지연된 시간의 붕괴>다.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지만, 슬픔은 과거 전체를 현재로 끌어당긴다. 함께 살았던 시간-말하지 못했던 감정-미루어 둔 사랑,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 인간은 더 이상 “지금의 나”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 순간, ‘현재’가 아니라 ‘전 생애’를 울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등을 쓰다듬으며 “미동 없이 서 있었던” 장면은 어쩌면 더 깊은 차원의 응답이다. (a. 울음 = 감정의 폭발 b. 침묵 = 존재의 동행) 당신은 그 순간, 말이 아니라 존재로 위로한 것이다.
2) 막내 이모의 죽음 — 고유한 죽음의 가능성
이 글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막내 이모에 대한 회상이다. 청상으로 아이 셋을 키운 삶/100원을 건네던 따뜻한 손/항암 속에서도 “보험료에서 해방됐다”며 웃던 태도, 이 죽음은 결코 ‘익명적’이지 않다. 이모는 자신의 방식으로 살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는 단순히 죽음을 향해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는 뜻이다. 릴케의 말처럼, 이모의 죽음은 하나의 “열매”다.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은 삶/타인을 향해 열려 있던 존재/마지막까지 자기 서사를 유지한 인간 이 죽음은 나의 죽음”에 가까운 죽음이다.
3) 드라마 <올인> — 익명적 죽음의 전형
반면, 대수의 죽음은 전혀 다르다. 건달로 살다가 시스템 속 폭력에 의해 길 위에서 칼에 찔려 사라진 이 죽음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저 사건으로 소비될 뿐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das Man의 죽음” (사람들의 죽음)이다. 누구나 그렇게 죽는다. 그렇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시스템이 처리한다. 결국, 그는 자기 죽음”이 아니라 “역할의 죽음”을 죽는다.
4) 사랑과 죽음 — 수연과 인하의 장면
수연의 고백은 이 글의 정점이다. “사랑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포기했어요.”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사랑과 죽음의 구조적 유사성이다. 사랑은 나를 잃게 한다/죽음은 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둘 다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만이 죽음을 고유하게 맞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존재를 각성시키고 각성된 존재만이 죽음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익명적으로 죽는가?
1. 죽음을 타인의 사건으로 미루기 때문
2.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지 않기 때문
3. 관계를 깊이 맺지 않기 때문
4. 시스템 속 역할로만 존재하기 때문
5)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하나의 선언이다. “죽음을 끌어안는 삶만이 자기만의 죽음을 완성한다.” 이것을 풀어 쓰면 이렇다. 매일을 마지막처럼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나의 것”으로 사는 것, 즉, 관계를 깊게 맺고, 선택을 회피하지 않고, 감정을 미루지 않고, 삶을 타인의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는 것. 그렇게 살 때, 죽음은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라 내 삶이 맺은 열매”가 된다. 이 글은 장례식장에서 시작해 가족의 기억을 통과하고, 드라마의 서사로 확장되며,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나는 나의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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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의 울음, 이모의 삶, 대수의 죽음, 수연의 사랑—이 모든 장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나를 말한다. 삶을 타인의 방식으로 살면 죽음도 타인의 것이 된다. 그리고 당신의 이 문장은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진술이다. “죽음은 가장 개인적인 사건인데 왜 가장 비개인적이 되는가?” 이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사람만이, 비로소 “자기 죽음”을 가질 것이다.왜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사건인 죽음을, 가장 비개인적인 방식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가?
2026.3.23.mon.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