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르네상스 시기 전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동영상 하나가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도 그 동영상을 보면서 감탄했었는데, 동영상 첫 부분의 짧은 자막을 통해 이게 로크루아 전투를 다루고 있구나 하는 점 정도만 확인했지, 이게 원전이 무엇인진 알 수 없었죠.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동영상은 영화 '알라트리스테'의 마지막 장면을 잘라 편집한 것이며, 그 영화는 영화명과 동명인 주인공이 나오는 연작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책을 찾아읽을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었는데, 한 1년쯤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소설들을 접하게 되었죠.
참고로 이 시리즈는 현재 스페인에선 6권까지 출판되었다지만, 우리나라에선 3권까지만 출판되었습니다.(그리고 4권 이후가 번역 출판될 가능성은 거의 0 일 것 같네요 ㄱ-) 배경은 17세기 초 스페인으로서 이 연작의 통칭이기도 한 알라트리스테란 이름의 중년 퇴역 장교가 주인공인데, 소설 자체는 그의 전우의 아들이기도 한 종자 이니고 발보아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1권은 마드리드에서 알라트리스테가 권력자들의 암투에 휘말리는 내용이고, 2권은 유태인과 종교재판소의 문제가 배경이며, 3권은 브레다 포위전이 무대가 됩니다. 음.. 소설의 내용을 서술하면 글 자체도 지루해질테고, 일종의 반전이 작중에 담겨있기도 하니 그런 부분은 넘어가고 간단히 장점과 단점이나 적어보죠.
이 소설 최고의 장점이라면 역시 실제 역사에 기반한 탄탄한 서사 구조입니다. 소설에는 허구적인 인물들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상의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당대 스페인의 실권자였던 올리바레스 백작이나 최고의 장군이었던 스피놀라가 나오고, 로페 데 바가나 케베도 데 비예가스, 벨라스케스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도 나옵니다. 이중에서도 올리바레스 백작이나 케베도는 단순히 까메오로 깜짝 등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옵니다. 다만 제가 이 소설에서 맘에 든 것은 그런 점보다는 16세기 초 스페인 그 자체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는 겁니다. 작중의 한 부분을 인용하죠.
"가련한 스페인은 이러한 부정부패와 광기 속에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며 사나운 맹수라도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을 듯해 보였지만 사실은 악성 종양이 심장을 서서히 갉아먹듯이 안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는 냉혹한 패망을 언도받은 셈이었다."
소설 내내 시종일관 이런 모순적인 스페인의 사회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작가의 설명 혹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수차 반복됩니다. 그런 직접적인 언급이라도 소설의 주무대부터가 종교재판관들이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지만, 한편으론 범죄자들과 술꾼들이 가득한 마드리드의 뒷골목이며 주인공인 알라트리스테는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해결사지만 한편으론 고결한 용기와 명예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죠. 소설 내에선 시종일관 영광과 비참함, 명예와 비열함이 나뉘지 않고 서로 혼란스럽게 뒤섞여 공존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이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중간중간 심심찮게 나오는 시구들의 인용도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고요. 그 중 마음에 들었던 것 하나를 옮겨적어보겠습니다.
"성군을 만났더라면 그대, 얼마나 충직한 국민이 되었으랴!"
스페인의 국민들은 정말로 용기있고 역동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권력층의 부패와 무능력 때문에 비극을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짤막하게 인용되는 문장인데, 참으로 적절하지 않습니까.
3권의 배경인 브레다 요새 함락을 그린 벨라스케스의 그림
칭찬을 했으니, 이젠 아쉬웠던 부분도 지적해야겠군요. 앞서 이야기한 훌륭한 역사소설이란 장점이 오히려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흥미를 느끼기 어렵겠죠. 또한 당대 스페인, 종교전쟁 시기란 배경 자체에 비중을 두고 인물들을 그리다보니 개개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질 않더군요. 주인공인 알라트리스테조차도 워낙에 그가 과묵한 인물로 묘사되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세 권의 책을 다 읽고도 그에 대한 어떤 명확한 상이 아니라 흐릿한 실루엣만 떠오르는 정도이니. 그리고 이니고 발보아의 1인칭 시점과 알라트리스테의 시점이 번갈아 사용되며, 간혹가다 지나치게 늘어지는 문장들이 나오기 때문인지 내용 전개는 굉장히 스피디한데도 불구하고 간혹가다 읽기가 힘들거나, 위화감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서 지적을 해야겠는데, 현재까지 출판된 세 권의 책의 번역자가 다 다릅니다 -_-;; 각 책들로 따로 떼어보자면 번역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번역자에 따라 책의 세세한 내용에 차이가 있는건 어쩔 수 없고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간단한 교정만 거쳤으면 해결됐을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뭐, 불평을 길게 늘어놓긴 했지만 이 소설이 재미있는 역사 소설이란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축에 속하죠. 당시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강력히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애초에 그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 그 중에서도 스페인을 무대로 하고 있는 소설은 거의 없기도 하고요. 졸문을 마무리지으면서 처음에 언급했던 로크루아 전투 동영상을 첨부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저작권 문제 때문에 죄다 잘린 모양이군요. 화질이 나쁜 유튜브 동영상이나마 아래 올립니다.(영화를 보신 분들이 있으면, 영화 '알라트리스테'에 대한 짤막한 평이라도 적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볼까 합니다.)
첫댓글 음... 이야기의 완결까지 따라가고 싶으면 서반아어나 최소한 영어라도 통달해야 된다는 것인데... 아, 지적 호기심이 능력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이런 느낌이 괴롭군요. ;;;;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근간은 2006년에야 나왔고, 아직도 3권 이상이 더 쓰여질 예정이랍니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인공 남성분이 비고 모르텐센(반지에서 아라고른)이라더라군요. 영화는 약간 지루한 부분도 있지만 전투나 결투는 꽤 볼만했지요.
음.. 그렇군요. 한번 봐야겠습니다.
서반어는 무리 ㅠ
올리신 영상 유투브 화질 때문에 꽤나 옛날 영화 같은 느낌이 나는데 최근에 나온 영화입니다 ^^;
영화로 재미있게 봤는데(대략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 역을 한사람이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