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칼의 선녀와 나무꾼, 호리도리와 백조공주 혼슈부운의 사랑이야기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매서운 바람은 북에서 남으로 거칠게 몰아치며 나무가지들을 땅위로 바싹 눕게 했다. 바이칼을 뒤덮은 두터운 얼음이 녹고, 갈색의 땅위에 초라하게 흩어져있는 나무들에 연록의 새싹이 돋기 시작하면 마치 이를 시샘하듯 알혼섬의 날씨는 예측불허가 된다. 소나무 숲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던 호리도리는 걱정스럽게 북쪽 하늘을 응시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물에 있는 얼음이 녹기 시작했으니, 나뭇가지가 푸르름으로 가득하기까지는 변덕스러운 날씨 덕에 집에 가기도 어렵겠군...’
호수가에 설치해놓은 낚시 도구가 파도에 쓸려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가슴을 조릴 뿐이었다. 일단 물결이 사나워지기 시작하면 물가에 가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애써 잡은 오물과 청어가 다시 바다로 헤엄쳐 가는 것을 보면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를 찾은 물고기들은 변덕이 심한 바이칼의 여신인 바이겔 하탄에게 감사하며 용왕님인 우한 한의 세계로 미끌어지듯 헤엄쳐갔다. 활을 잡고 있던 왼손에 힘을 주며 해가 지기 전에 비바람이 잦아들면 오리와 백조라도 몇 마리 사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언제 비가 왔던가 싶게 하늘이 맑아지며 호수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미친 듯이 날뛰던 파도도 잠잠해졌고 세찬 바람도 등등하던 기세가 꺽였다. 하지만 호수에 가득하던 새들이 폭풍우가 한차례 지나고 난 뒤에는 단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요술이라도 걸린 듯 잔잔해진 물결 위로 튀어 오르듯 빛나는 노을만이 서쪽하늘 위로 쭉 뻗어있었다. 조밀하게 빛을 내면서 하늘 위로 황금물고기의 비늘 같이 솟아오르는 물결 위로 발을 내 딛으면 호수 위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넋을 잃고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싸움박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수의 남쪽 물가에서 흰색 개구리와 검은 개구리가 서로 맞붙어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마치 영웅호걸의 결투를 연상시켰다.
순간적으로 하늘로 뛰어올라 상대의 머리를 내려치는가 하면 물을 박차고 뭍으로 나와서 몇 차례 몸을 굴린 뒤 상대의 허점을 찾아 날카롭게 주먹을 내어놓는 품이 범상치 않았다. 개구리들은 호리도리가 자신들을 살펴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끝없는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호리도리가 채찍을 땅위에 내리치며 개구리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같은 족속들인 듯한데 어찌 죽음과 삶을 오가는 결투를 하는 거냐?”
낯 선 침입자를 발견한 검은 개구리는 앞발을 들고 위협을 하는 듯한 자세로 소리를 질렀다.
“그-바-아! 냉큼 사라지거라.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흰색 개구리는 호리도리를 보고서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떨구며 애원하듯 말했다.
“무사님! 제발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검은 개구리는 동쪽의 하늘에서 내려온 괴물입니다. 호수에 있는 흰색 개구리족을 모두 다 내쳐버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빼앗았습니다.”
호리도리는 채찍을 하늘 높이 들어 검은 색 개구리의 잔등이에 내리쳤다. 검은 개구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흰 색 개구리는 허리를 연신 굽히며 감사를 드린 뒤 호리도리에게 소원을 물었다.
“용감하신 무사님! 소원을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이든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하찮은 미물인 개구리의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말해보겠다. 알혼섬에는 처녀가 거의 없다. 나는 수염이 희게 변하고 머리카락이 성성해지는 초로에 들어섰지만 아직 결혼을 못했다. 이제 처녀를 만난다고 해도 결혼하기에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그래도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고 싶다. 황량한 알혼섬과 드넓은 바이칼 주변에 나의 자식들을 풍성하게 남기고 싶다.”
“오늘 밤 보름달이 훤하게 호수를 비추고 은색 물결이 하늘 위에서 호수 위로 이어지면 그 빛을 타고 삼천에 계신 쿠르부스탄의 혼슈부운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내려올 것입니다. 공주님이 목욕을 하는 동안 날개옷을 감추시면 두 분이 함께 사실 수 있습니다. 날개옷은 꼭 불태워 없애야 합니다.”
말을 마친 흰색 개구리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아무도 흰색 개구리에 대해 들은 적도 없고 흰색 개구리를 본 사람도 없었다.
호리도리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보름달이 호수 위에 은색의 길을 길게 드리울 때까지 기다렸다. 어두운 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고 호수 위에는 비늘처럼 반짝이는 은색 다리가 하늘에서 땅위로 길게 드리웠다. 갑자기 어두운 하늘이 갈라지며 하늘로부터 한 마리 백조가 우아하게 날개 짓을 하며 바이칼의 수면으로 내려왔다.
‘그럼, 그렇치. 흰색 개구리가 거짓을 말한 것에 틀림없어. 내가 이 나이에 결혼을 생각한 것이 잘못이지. 저 백조를 쏘아 버려야겠다. 하지만 물 위에 앉은 짐승에는 활을 당기지 않는다. 자, 백조야 날아올라라. 나의 화살 맛을 보거라.’ - 호리도리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백조는 날개 짓을 하며 하늘로 어른의 키만큼 날아올라 제자리에서 세 번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자 백조의 허물이 벗어지면서 그 자리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가 서있었다. 백조의 허물은 파도를 타고 호숫가로 밀려왔고 아름다운 처녀는 물고기처럼 날렵하게 헤엄을 쳤다. 호리도리는 얼른 물가로 가서 백조의 허물을 주어다 소나무 등걸 아래 땅을 파고 묻었다.
숨막히는 시간이 흘러 이윽고 서쪽 하늘에 밝은 별이 나타나고 동쪽하늘이 뿌옇게 밝아오려 하자 처녀는 물가로 걸어나왔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벗어놓은 백조 날개옷이 없자 처녀는 눈물을 지으며 슬퍼하였다. 호리도리가 다가가서 손을 내밀자 처녀는 눈물을 거두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지금부터 영원까지 모닥불을 같이 쓰도록 합시다.”-호리도리의 느닷없는 청혼에 처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땅위에 가득하게 아이들을 낳아요...”
호리도리와 백조공주 혼슈부운의 슬하에는 열한 명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큰아들의 키가 아비 보다 머리 하나가 더할 만큼 자라고, 막내아이가 또렷하게 말을 하게 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호리도리는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수족을 놀리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해졌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도 백조공주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백조공주는 오래 전 목욕을 하러 달빛을 밟고 지상에 내려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막내아이가 물가에서 뛰어다니며 재롱을 피우는 것을 보면서도 백조공주는 언제나 시름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호리도리가 백조공주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수심에 가득 차 있는 거요?”
“저는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님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답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길이지만 날개옷이라도 한번 볼 수 있으면 행복해질 것 만 같답니다.”
호리도리는 날개옷을 묻어둔 소나무 등걸로 가서 조심스럽게 흙을 파냈다. 신기하게도 아직 날개옷이 전혀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백조공주를 기쁘게 해 줄 마음에 한달음에 집으로 온 호리도리는 백조공주에게 옷을 내밀며 흰색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이 날개옷을 감추게 되었던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백조공주는 날개옷을 입고서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깜짝 놀란 호리도리가 아이들을 불러모았지만 백조공주는 하늘 위로 멀리 날아가면서 아이들과 호리도리에게 슬픈 표정으로 손짓만 할 뿐이었다. 하늘 위로 흰색 말 젖을 뿌리며 두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백조공주는 하늘 위로 날아 사라져갔다.
호리도리는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열 명의 자식들은 알혼섬을 떠나 육지로 갔다. 그리고 불리가트, 에히리트, 혼고로트 등의 부리야트 인들이 지상에 흩어져 살게되었다. 막내 아들인 호리 메르겐은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알혼섬에 남았다.
호리 메르겐은 어머니가 하늘로 올라가고 아버지가 숨을 거둔 날이 되면 해마다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 호수에 떠있는 백조인 혼슈부운들에게 먹이를 주며 아무도 그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후손들에게 엄한 명령을 내렸다.
대를 이어 알혼섬에 사는 코리(혹은 호리) 부리야트인들은 아직도 혼슈부운을 조상으로 여기며 제사를 지낸다.
출처:
http://cafe.daum.net/trans-siberian/UdB4/4?q=%BE%CB%C8%A5%BC%B6%20%BC%B1%B3%E0%BF%CD%20%B3%AA%B9%AB%B2%DB%C0%CC%BE%DF%B1%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