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행복을 나누는 울타리 친구
2007년 7월 최영수 소장
아이들을 키울 때 배운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부모는 아이들이 편히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 주고 부모가 그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고. 하나 더 욕심을 낸다면, 그 울타리는 자녀가 돌진해올수록 잘 물러나서 마음껏 공을 차게 해주고, 반대의 경우엔 신속히 들어가서 아늑한 분위기 조성으로 자녀가 순간적으로 휑한 외로움과 자신의 초라함에 잠길까 두려워하기보다는 자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공간을 만들어 줄 수도 있어야 하겠다.
나는 아버지의 부단한 제한으로 엄격한 귀가시간과 집안일에서 초긴장이 습관처럼 평생을 지니게 되어, 나만의 유난스러움에 가끔 당혹스럽고 불편하지만 그렇게 지독한 제한 덕분에 때때로 그 분과 마주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분으로 인한 한계라는 핑계에 걸려 넘어지면 내 삶이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인내의 씁쓰름함도 넘길 수 있었고, 한계에 걸려 넘어질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적극 대처할 수도 있었다. 더 쫀쫀하게 짜여 진 시간이란 그물망도 잘 요리할 수 있게 되면서 결국 나는 슈퍼우먼 콤플렉스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치우쳐진 내 삶이 무한궤도 속으로 무작정 기우뚱거리며 질주하는 일은 다행히 막을 수 있었다. 나를 가까이서 지켜주는 나와 또래면서 함께하는 몇 사람의 눈 맞춤, 마음맞춤덕분에.
이 친구는 지금도 여전히 맑으면서 따뜻하고 앳된 목소리를 가졌다. 몸가짐은 언제나 단정하고 예의바르다. 웃어른 공경을 비롯하여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항상 앞서며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표준적인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 탁월한 CEO다. 이 친구는 오랫동안 변함없이 언제나 내가 그 친구를 떠올리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늘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 눈만 보면 나를 알 수 있었다. 그 친구가 내게 한 최고의 일은 내가 항상 사람들 속에서 좋은 마음으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치우친 나를) 균형점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 이제쯤 보니 이 친구가 내겐 우주였다. 여전히 보다 더 훌륭하고 조금 더 완벽한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머무르고 싶어 열심인 자녀들을 보면서 그 친구를 생각한다. 나도 자녀들의 본이자 울이겠지만 그들에게도 나처럼 친구로, 엄마로, 자식으로, 어른으로, 사회인으로서 본이자 울인 또래나 선배가 있으면 더 많이 행복할 텐데….
이제는 울을 내 마음 안에 거두어들인다. 기대와 설렘으로 기다림을 익히련다. 도와달라고 요구할 때만 나서고 싶어서. 어느 새 우리 자녀들이 세상의 주연 자리를 맡을 나이가 되었고, 자연 그들이 우리의 울이 되는 연습으로 또래끼리 서로 울타리 되어주며 적극적인 삶을 펼칠 것을 믿기에.
‘돌-고 도-는 물레방아 세-상~’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어릴 때는 부모가 나를 가둔다는 생각에 매달려 높아만 보이는 부모에게 인정받으려 눈치 보는데 열심이었고, 청년기에는 그런 부모 벽을 넘으려 키 가늠자로 늘 재고 넘보려 부단히 설쳤는데, 어느 덧 그렇게 내게 쳐진 부모라는 굴레가 울타리 되고, 부모 벽 넘으려다 만난 또래 친구가 내 울 되어, 나를 지금의 울로 존재하게 하다니…감사하고 행복하다.
세상은 공짜가 없나 보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처럼 자녀가 부모 되어, 또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자리바꿈을 하나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도, 내 자녀들도, 내 주위 사람들도 모두가 자녀에게, 또래에게 본이 되는 울타리 친구가 되어 이렇게 행복한 마음, 감사한 마음 다 나누도록 잘 살면 좋겠다. 이런 마음, 이런 힘이 있는 한 세상살이는 더욱 더 많이 감사하고 행복하리라 믿는다. <행가래로 63호>